【안경식 安景植 (1887 ~ 1946)】 " 27결사대 대원으로 친일매국노 처단 거사 계획"
1887년 8월 27일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풍산면(豊山面) 운흥리(雲興里)에서 태어났다. 만주로 건너 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주한 이후에는 1919년 초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거주하였다.
류허현과 그 인접의 퉁화현(通化縣)은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적극 활용된 지역이었다. 이상룡(李相龍)을 비롯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장차 독립전쟁을 실천할 목적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이주 한인의 생계를 도모할 자치기관을 만들고 민족학교 및 무관학교를 설립해 애국 인재를 양성해 냈다. 특히 삼원보는 독립운동기지 중 핵심 지역에 속하였다.
1919년 1월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출신 이탁(李鐸)이 서간도 지역의 한인 청년 26명을 모아 결사대를 결성하였다. 대부호였던 이탁은 가산을 모두 정리해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투입하였다. 이주한인의 생계를 위한 농장을 만들고, 민족학교를 세워 광복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기반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 같은 그의 면모 때문에 주변에 많은 청년들이 따랐고, 그들과 의기투합해 결사대를 만든 것이었다. 이탁까지 모두 27명이었기에 27결사대라 했고, 주 활동 목표는 친일매국노 처단이었다.
27결사대가 첫 목표로 한 것은 1919년 3월 3일 고종의 인산일 국장 행렬을 따르는 친일 무리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3개조로 나뉘어 1919년 2월 24일부터 시차를 두고 서간도 본부를 출발하였다. 이틀 후인 2월 26일 국내진입조 모두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결사대는 같은 해 3월 3일을 기다리며 인산행렬이 지날 길들을 면밀히 답사하고 친일 무리들이 위치할 자리를 측정해 보는 등 사전 답사를 하였다. 그런데 그 해 3월 3일 거사일이 되었는데 무기가 도착하지 않았다. 서울로 출발한 대원들 이외 다른 한조가 봉천으로 가 무기를 받아오기로 했는데, 차질이 생긴 것이다. 거사 일을 맞추지 못하고 3월 15일이 돼서야 6정의 권총과 단도, 그리고 수백발의 탄환이 도착하였다.
목표로 한 고종의 인산일은 넘겼지만, 무기까지 도착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본부로 철수할 수는 없었다. 동지들과 협의해 계속 서울에 머무르며 친일파들을 처단할 기회를 잡고, 그 동안 다른 일을 찾아 수행하기로 하였다. 대원들이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는 활동자금이 필요했으므로 차병제(車秉濟)·손창준(孫昌俊) 등 5명의 대원은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국내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일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동지들과 제일 먼저 색깔이 바래 잘 보이지 않는 독립문의 태극기를 선명하게 다시 칠하고, 침략자 일제의 수괴와 친일파들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그들을 처단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성토문·격문·경고문 등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부착하였다. 군자금 모집조는 3월 말부터 4월 하순까지 서울 효자동·무교동·인사동·돈의동 등에 있는 부호들의 집을 기습해 상당한 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서울 한복판에서 27결사대의 이 같은 활동은 일제 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되고 말았다. 1919년 5월 5일 손창준·이우영(李宇榮)·박진태(朴鎭台)·이기원(李基原)·박기한(朴基寒)·차병제 등 동지들과 붙잡혔다. 붙잡히지 않은 대장 이탁과 나머지 대원들은 일제 경찰의 추격을 어렵게 따돌리고 서간도 본부로 귀대하였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일제의 요시찰인 감시대상으로 식민지시기를 힘들게 살다가 광복을 맞았고, 그 후 1년을 조금 넘긴 1946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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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결사대 예심 결정 보도(『동아일보』 1920. 9. 3)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