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특집 │ 전예숙
낡은 것은 생생하다 외 2편
전예숙
오래된 사진기를
들고 남편이 문을 나선다
50년대 동유럽 국가에서 만든 필름 사진기
그 사진기의
첫 경험이
전쟁 속 엉킨
비명이었을지라도
흑백필름을 되감을
때마다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열망을 포기할 수 없다
지우개로 문지르고
싶은 기억도 가진 사진기를
남편은 오롯이도
지켜왔다
사진기는 기억을
저버리지 못한다
가난과 더불어
경지정리가 되어가는 평야
자본주의를 선택한
고속도로
승승장구 빼곡히
전투적으로 일어서는 건물들과
올림픽·월드컵·야구경기·승마장에서
죽기 살기 날뛰는 말들과
무너지는 다리를, 빌딩을, 화재를, 자살까지
이제 사진기는
남루해 가는 의식을 붙잡는 지푸라기가 되어간다
자신만큼이나
바래가는 기억의 빛깔
움키기라도 하듯
사진기는
앞니 빠진 아이들의
웃음을,
한강둔치를 빠르게
걸어가는 젊은 부부를,
늦가을 하늘
아래 매달린 홍시처럼
떨어져가는 노을을
담아오기도 한다
홍재천에 사는
청둥오리의 입에 물린 물고기를 담기 위해
누구보다 이르게
셔터 소리를 내고
누구보다 늦게
삼각대를 접는다
누추한 것과
닮아가는 남편의 등이 알맞게 굽어간다.
그 굽은 등
위로 빛나던 햇빛이
물방울처럼 튕겨나간다
낡은 사진기는
생동감 넘치게 찰나를 잡아채도
낡은 것이 왜
그렇게 낡은 몸으로 생생하게 엉겨오는지
오늘밤, 남편의 걸음은 느리기만 하다.
묘지에서 파묘를
보다
언제부터 유택에
머물렀던가
별과 달과 바람의
옷을 입고
흙과 물로 목을
축이며
기억과 망각, 만남과 별리를
무상과 무념으로
흘려보내왔던가
붉은 영산홍
지고 피는 시간을
속절없이 견디어냈던
것일까
봉분이 열리고
관이 시간의
더께를 털며 기지개를 편다
마른 뼈 추리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쁨
따윈 선물할 생각 애초 없던 모양이다
오래된 황토가
숨죽인 양 일어설 뿐
어느 5월 한낮이 시작될 무렵
희고 밝은 빛
받으며 걸어나오는 연약한 뼈들
깊은 침묵만이
팽팽하다
이제 재가 되고
먼지로 흩어질
원시의 아무
것도 아닌 존재
별과 달과 바람
앞에 물과 먼지로 놓여질 시간에
새로운 소풍처럼
설레던 시간도 잠시
죽은 자를 부르고
들쥐들 뛰놀던
대지 위로 때늦은 벚꽃 날리기 기다려
뒤돌아보지 않을
여행을 시작하네
먼저 떠나는
자를 위한 장송행진곡
눈으로 보내며
멀리서 막걸리
한 사발 건넨다.
한하운 시인
유택遊宅에서
김포시 승가로 58번 길
오른쪽으로 200미터쯤 가면
한하운 시인
유택이 있다는 것을
벚꽃 화려하게
피던 날 알아버렸다
이 책 저 책
주섬주섬 읽어대고 써대던 시절
서가에 서른다섯
번째로 꽂혔던
문둥병 환자, 보리피리 시인 한하운 시집
맑은 영혼으로
문전걸식, 구타에도 놓지 못했던
영롱한 시, 천형으로 퍼렇게 피멍 들었을
당신의 가슴, 시(詩)가 당신의 설움과
슬픔을 고독과 절망을
초극하게 만들었습니까, 한겨울 당신을 지켜주던
쓰레기통 옆
가마니 한 장
굴욕의 깡통도
꺾지 못했던 당신의 간절한 세계
어찌 닮을 수
있겠습니까
한 줄기의 꽃
한 마리의 새
한 가람의 물
한줌의 흙1)
당신은 파랑새가
되고 싶었지요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울고 싶었겠지요2)
유택에서 나는
평생을 당신의 쾌유만을 갈망했던 연인 R을 그려본다
누군가 두고
간 마른 꽃처럼 시간이 저 만치 흘렀을지라도
시만큼이나 포기
못한 사랑, R
시의 우물을
퍼내기 위해
없던 희망을
찾아나선 그의 질긴 생명력에
나는 눈을 감는다
시인이여, 당신은 이미 파랑새였습니다.
1)
한하운, 「나의 시작수업」,『보리피리』, 세계출판사, 1988, 141쪽
2) 한하운의 시 「파랑새」
숨고자 할수록
나서고 싶은 욕망
오르한 파묵은
『파리 인터뷰』에서 ‘시인이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후 시 쓰기를 중단하고 소설쓰기에 전념하였다. 이 말을 나는 시인이란 시에 홀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시인들에게는
시를 쓰는 나름의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 시 작업은 특별한 목적의식도 없는 당연한 일상과도
같은 것이라 말하고 싶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이 필요하고 산소가 필요하듯 문학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 호흡과도 같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년 동안 문학과는 멀어져 있었다. 세상에 대한 과한 나의 욕심이 부른 결과였다. 한국을 떠나있기도 했고, 불필요한 공부에 욕심을 내기도 했으며, 재산을 탕진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나를 돌아보니 사람들은 만나는 것을 무척 꺼리고 있었다. 자격지심이
일기도 했고 대인기피증을 넘어 관계에 대한 무섬증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문학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없이 몸을 숨기려 하는지…. 이 증상이 하루빨리 치유되기를 기대해 본다.
지난 봄, 김포로 이사를 했다. 창문을 열면 금정산이 보이는 누구말대로 산꼭대기
오래된 아파트다. 아파트에서 내려오면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의 유택이 있고, 언제든 맘만 먹으면 산으로, 들로 산책을 할 수 있는 환경이어서
내게는 분에 넘치는 곳이다. 또한 무엇보다 감사한 일은 내게 숙제와도 같은 문학을 다시 시작하게 한
원동력이 되어 준 일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내 일상을 기록해 주기도 하고 문학적 선배들의 심오한 세계로
끌려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요즈음은 공격적으로 책을 읽어대는 기쁨에 충만해 있다.
이번에 세상
밖으로 내미는 「낡은 것은 생생하다」 외 2편은 단절되었던 나와 시 작업을 연결해 주는 끈이다. 지나치게 사적(私的)이고
움츠려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했다. 첫 만남처럼 어색하고 설레면서도 호기심이 이는 그런 마음도
가진다.
「묘지에서 파묘를
보다」는 화창한 날에 파묘를 하는 장면을 보고 쓴 시다. 앞서 언급 했듯이 내가 사는 곳에는 묘지들이
많다. 곳곳에 파묘한 현장이 있고 새로 지은 유택도 있다. 사는
것과 죽은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까닭은 이사 와서 묘지와 익숙해진 탓이기도 하다.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이 무섭냐는 속담처럼 묘지를 무념(無念)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삶의 일부 속에 죽음이라는 요소도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매일
죽음에 더 가까이 가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가까이에 한하운 시인의 유택이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동네 속을 걸을 때 가끔 들러보기도 한다. 그의 시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가 과연 한센병으로 고통을 받고, 무전걸식과 인간들로부터의 폭력과 학대를 견디고, 가마니 한 장으로 이불 삼아 겨울을 났던 시인인가 하는 생각에 절로 숙연해 진다. 그가 선택한 시어는 너무도 아름답고 그의 문장은 미려하고 영롱하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시인. 그가 보여준 시 세계는
내게 또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자신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시로 승화시키면서 그는 자신의 글 어디에도
아프다고 떠들지 않는다. 그런 초극을 과연 내가 닮아갈 수 있을까. 아득함이
밀려온다.
마지막으로 「낡은
것은 생생하다」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제목이다. 낡은 것이 생생할 수 있는가. 물론 생생할 수는 있지만 낡은 것과 생생함이 동치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기억을 지닌다면 상황을 달라진다. 그 낡은 것에도 생생한 기억을 담아둘 수 있고 변질되지 않는다면, 중년들의 고뇌가 조금은 치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로써 단절된
세계에 발을 디딘 나의 어설픈 변을 풀어봤다. 이를 계기로 세상 속으로 한 발 내디딘 기분이 들지만
한편으로 숨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내가 숨고자할 수록 간절하게 나서고 싶은 욕망이 깊어간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일이다.
전예숙 /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자유문학』에 소설, 1996년 시로 등단했다. 시집 『비보호좌회전』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