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를 만나는 길 [퇴고 시]
정군수
대마도는 폭우 전야였다
대한제국 종말의 비극을 낙화처럼 새겨놓은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잎
반려견을 앞세우고 가는 일본인의 고음이 들렸다
길 비껴, 길 비껴,
이곳은 일본땅, 나는 관광객인데
반려견에게 길을 내주고도 억울하지 않았다
침묵에 쌓인 섬은 사람의 온기를 거부했다
사진 속에서 본 덕혜옹주의 슬픈 눈을 생각하며
관광버스를 타고 빗방울 지는 구불길을 돌 때마다
그녀가 언뜻언뜻 차를 가로막았다
이국 객창 어둠에 묻혀 살았던 그녀에게
어찌 조국의 사랑을 전하리요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대한해협을 건널 때도
덕해옹주가 나를 움켜쥐고 괴롭힐 줄은 몰랐다
기어이 폭우가 쏟아졌다
일정을 취소하고 현해탄 건너오는 배 안에서
멀미앓는 나에게 환청이 들려왔다
길 비껴, 길 비껴,
이곳은 남의 땅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비틀거리며 비껴갔을
덕혜옹주의 작은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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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를 만나러 갔다가
정군수
대마도에 도착한 날은 폭우 전야였다
침묵에 쌓인 섬은 사람의 온기를 거부했다
사진 속에서 본 덕혜옹주의 슬픈 눈을 생각하며
관광버스를 타고 빗방울 지는 구불길을 돌 때마다
삼나무숲 모퉁이에서 그녀가 언뜻언뜻 차를 가로막았다
어두운 이국 객창에서 죽음을 앓았던 그녀에게
어찌 조국의 사랑을 전하리요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대한해협을 건널 때도
망국의 역사를 몸으로 찍어놓은 그녀가
나를 움켜쥐고 이렇게 괴롭힐 줄은 몰랐다
대한제국의 종말의 비극을 새겨놓은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잎에서
눈감고 묵념하는 우리 관광객들의 귀에
길 비껴, 길 비껴,
반려견을 끌고가고 일본인의 큰 소리가 들렸다
기어이 폭우가 쏟아졌다
일정을 취소하고 현해탄 건너오는 내 눈속에
길 비껴, 길 비껴,
사무라이의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다
* 주제 접근 : 역사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