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무엇이며, 도덕법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구성 : 도덕 형이상학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할 만한 것은 ‘도덕 법칙에 맞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도덕 법칙을 위해서’ 생겨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덕 법칙에 ‘맞는다는 것’은 아주 우연적일 뿐이고 의심스러운데, 때로는 도 덕적이지 않은 근거에서 도덕 법칙에 맞는 행위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렇듯 도덕 적이지 않은 근거에서는 도덕 법칙에 어긋나는 행위가 더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고 참된 도덕 법칙은 오직 순수한 철학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순수한 철학인 형이상학이 먼저 와야 하고, 그것 없이는 어떠한 도덕 철학 도 있을 수 없다.
『의견』칸트는 세상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밖에서조차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 뿐이라고 주장한다. 선한 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거나 성취한 것 때문에 또는 그것이 제시된 어떤 목적들을 제대로 달성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려고 한다’는 것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하다. 그리고 선한 의지를 (성취나 목적과 상관없이)그 자체로 볼때, 어떤 한 경향성을 만족 시키기 위해서, 더 나아가 모든 경향성을 합한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행복해지기 위해)그 선한 의지가 실행하는 어떤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존경 받아야 한다.
칸트가 말한 선의지는 어떤 목적이나 결과에 상관 없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예전 윤리학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 결과와 상관 없이 어떻게 선할 수 있나요?라고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때 교수님께서 “아프신 어머니를 위해 미역국을 끓어들였다. 그러나 미역국이 어머니의 병에 안좋았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라고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칸트에 말대로라면 어머니를 위한 딸의 순수한 의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결과와 상관 없이 선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결과까지도 선해야만 비로서 그 의지가 선의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기나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한 의지에 의해 행위한 행동의 결과는 비교적 좋지만 위와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나쁜 의지에서 시작한 행위가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좋게 나올 수도 있다. 또 나쁜 의지나 선한 의지 없이 한 행위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이렇듯 모든 행위는 동기나 결과 모두를 보고나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칸트는 선한 의지라는 개념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의무라는 개념을 다루었다. 칸트가 말하는 의무라는 것은 행위자 자신이 갖는 어떤 장애와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말한다. 어떤 행위가 ‘의무에 맞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 안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게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다른 이익이나 자기의 타고난 성품 때문에 어떤 일을 했는데, 그것이 우연히 ‘의무에 맞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상인은 장기적인 이익을 생각해서 손님을 정직하게 대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가 우연히든 필연이든 의무에 맞는 것이고 상인이란 것이 원래 이익을 남기자고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상인은 이익을 남기고 고객은 정직한 상인과 정직한 상품에 만족한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경우는 할 수 있는 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의무인데, 그에 더해서 동정심을 잘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허영심이나 자신의 익이라는 다른 동기 없이도 주위에 기쁨이 퍼져나가는 것을 내심 즐거워하며, 자기가 한 일로 다른 사람이 만족하는 것에 흥겨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칸트는 그와 같은 행위의 경우 그 행위가 아무리 ‘의무에 맞고’ 또 아무리 사랑스럽다 해도 참된 도덕적 가치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다른 경향성, 예를 들어 명예에 대한 경향성 같은 것과 짝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런 경향성은 다행이도 실제로 모두에게 이익을 주며 ‘의무에 맞고’ 따라서 명예스러운 것을 만난다면 칭찬과 격려를 받을 만하지만, 높이 평가를 받을만 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준칙에는 도덕적인 내용, 즉 경향성 때문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고 그저 동정심이나 자기가 남을 도움으로서 느끼는 만족감이라 해도 그것은 선행이고 도덕적인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서 하는 일도 비록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남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이므로 도덕적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어떤 박애주의자가 자신의 처지가 어려워져 다른 사람의 운명에 대한 동정심이나 경향성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 행위를 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 행위는 참된 도덕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나는 오히려 돕고 싶어하는 마음없이 그저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동은 도덕적인 가치가 없다고 본다. 어려운 사람들은 그저 의무이기 때문에 마음이 없는 적선보다는 동정심이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주는 사랑을 더 바랄 것이다.
「첫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의 일화를 보면, 그는 공원을 산책하던 중 한 거지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거지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돈을 하나도 안 가지도 나왔다. 그는 거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거지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면서 “구걸하면서 평생을 지냈지만 이런 기쁜 경험은 처음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일화에서처럼 기계처럼 의무이기 때문에 감정없이 거지에게 적선하는 것보다 돈을 줄 수는 없지만 마음을 적선한 투르게네프처럼 따뜻한 마음이 더욱 도덕적 가치기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자연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오직 이성적인 존재만이 법칙에 대한 표상에 따라, 즉 원칙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을 갖는데 이것이 의지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경향성을 떠나 필연적으로 실천적이라고 인식하는, 즉 선하다고 인식하는 바로 그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고, 따라서 욕구, 공포, 나약함 때문에 이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행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행위할 때 따르는 주관적 원칙, 즉 준칙과 실천 이성의 객관적 법칙, 즉 도덕 법칙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듯 욕구나 공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우리에게는 실천 이성의 객관적 법칙이 ‘명령법’의 형식으로 나타나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명령한다.
칸트가 말하는 명령법에는 가언적(조건적)이거나 아니면 정언적(무조건적)인 명령법이 있다. 가언적 명령법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유가 달성하려고 하는 다른 어떤 행위를 이루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언적 명령법은 행위를 그 자체로서 다른 목적에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명령법일 것이다.
가언적 명령법은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어떤 다른 것을 해야만 한다’고 명령한다. 예를 들면, ‘건강하려면 운동을 해야만 한다.’ ‘성공하려면 공부를 해야만 한다.’ 등등이다.
이와는 달리 정언적 명령법은 ‘무엇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이라는 조건이 없는, 즉 무조건적인 명령법으로서 가언적 명령법처럼 조건절을 분석해서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를 이끌어 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정언적 명령법은 분석적일 수 없고, 따라서 종합적이다. 아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준칙이 따라야만 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언적 명령법은 단 하나뿐인데, “그 준칙을 통해서 네가 그것을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 삼으려고 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가언 명령법이나 정언 명령법이나 인간에게 모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언 명령법의 예를 보면,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아무런 목적 없이 사는 것보다 어떠한 목적을 세워서 꾸준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아무리 가언적인 명령법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칸트가 제시한 예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거짓 약속으로 돈을 빌려 위기를 모면하려는 가언적 명령법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가언적 명령법이 난무하게 되면, 이세상에서 신뢰는 사라지고 거짓말만이 가득해져서 인간은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언적 명령법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가언적 명령법과 정언적 명령법이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사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brav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