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횡단
1938년생 프랑스 정년퇴직 기자인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3권짜리 여행기 ‘나는 걷는다’의 1권 소제목이다. 그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동진 중국의 시안까지 1,099일에 걸쳐 걷어 간 모양이다. 우선 1권부터 읽어 보자. 1999년 61세의 저자는 부인을 잃고 홀아비가 되자 ‘마르코 폴로’처럼 이스탄불에서 시안에 이르는 실크로드 1만 2천 킬로의 횡단을 구상한다. ‘마르코 폴로’는 말을 타고 갔지만 그는 ‘안타키아’만을 따라 배로 아시아 들어갔기에 소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의 상당 부분을 거치지 않았다.
프랑스 ‘바스토 르망 디 쥬 망슈’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학업을 중단하고 막노동을 했던 그는 서른이 되어 대학에 들어간다. 그리고 기자가 되었다. 은퇴 후 쉬게 될 나이에 찾아온 고독을 이기기 위해 걷기 시작한다. 2년 전에 발동을 거는 차원으로 ‘샌디에이고 대 콤포스텔라’까지 2,325킬로의 76일의 배낭여행을 했다.
여기서 얻은 지혜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가볍게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준 교훈은 모두에게는 떠남이 운명이란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1999년 5월 6일 아들과 파리 기차역에서 배웅받고 ‘베네치아’로 출발한다. 베네치아에서 배로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이란의 테헤란까지 가는 계획이다. 베네치아 부흥의 젖줄은 실크로드 덕이었다. ‘니콜로 폴로’ 형제와 아들 마르코 폴로가 1271년 출항한다. 열여섯 소년은 25년 후 돌아온다. 친척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그들의 재산을 나눠 가진 상태였다. 원 ‘쿠빌라이’ 황제가 수백만 금화를 하사했다는 얘기를 사람들은 믿지 않고 그에게 ‘밀레 오’(백만이란 뜻)라는 별명을 붙이며 놀려댔다.
‘베네치아’와 ‘이즈미르’를 왕복하는 대형 페리는 ’삼순‘호였다. 3등 객실을 도난차량 밀수업자 ’아르메니아‘인 2명과 같은 선실을 쓰고 출항했다. ’코소보‘ 전쟁 중이라 나토의 미사일이 ’세르비아‘에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항해한다. 이 삼순 페리호는 자동차와 요트가 실려 있고 고향에 가서 자랑하려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만남의 장소였다. 저자는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이 모습인 나는 어떻게 해서 이뤄졌나? 내가 바라던 모습인가? 길을 가는 동안 어떤 타협을 했으며, 어떤 의무를 포기했나?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 하면서 여행을 시작한다.
’이즈미르‘ 항에 하선하여 버스로 이스탄불의 경제구역 ’탁심‘ 광장에서 내려 여행을 위한 터키 은행에 들른다. 걸어서 이스탄불에서 실크로드를 횡단한다는 정신이 나간 놈이 누구인가 여행원들이 알고나 있는 듯이 반긴다. 터키 리라 인출 카드를 받고 프랑스 영사관에 그가 여행할 곳을 신고 한다. 영사관은 주의사항으로 터키의 운전자들, 도둑들, 무시무시한 목양견 ’캉갈‘ 등의 위험 요소를 설명한다. 관광객을 놀이는 친절한 젊은이들은 목표로 찍은 사람에게 약을 탄 음료나 과자를 건넨다. 이것을 먹으면 바로 취침이고 깨어나면 모든 것을 털린 상태다. 실크로드에서는 독거미의 독을 타서 희생자들이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단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다리는 자살을 방지한다는 핑계로 걸어 건너는 것을 막지만, 사실은 테러를 방지할 안전상의 문제로 차단을 한단다. 터키에선 식후에 나오는 차는 절대 돈을 받지 않는다. 배낭의 무게는 12킬로에 맞춰 최소화하고 출발한다. 여기 저기 짓다 만 집들이 많았다. 그리고 1층에는 주인이 살고 위층은 공사 자재와 철근이 녹슬어 있다. 일부러 그런단다. 취득세는 집이 완성돼야 내는 것을 악용하여 건축 중인 상태로 놔두기 위함이다. 이제 숙박업소는 자동차 여행자를 위한 것만 남았다. 터키 리라는 백만 단위 이상이라 커피 한 잔에 40만 리라다.
여행자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이슬람교도의 의무였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에게 ’환대‘란 ’손님‘인 여행자에게 모든 권리를 갖게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터키 민간인 집에 신세를 지고 돈을 500만 리라를 놓고 감사의 글을 남기고 나왔으니 주인은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여행자에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도 율법에 어긋나는 죄였다. 터키는 프랑스인을 친구의 나라라 칭한단다. (우리나라는 형제의 나라라 칭한다는 것은 최상의 대우인 셈이다.)
지난 13일의 강행군에 몸의 근육들이 적응한 것 같았다. 짐도 덜 무겁게 느꼈다. 분당 맥박수도 쉴 때는 60까지 내려가고 걸을 때도 85까지만 올라갔다. 훈련받는 육상선수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즉시 피로가 회복되고, 그래서 이젠 휴식을 많이 취하지 않아도 줄기차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단다. 몽골식 연락체제는 기수가 하루에 일곱 번까지 말을 갈아탄다. 다음 탈 말이 보이면 기수는 종을 흔든단다. 그러면 안장이 얹어지고 달릴 채비를 갖춘다. 지친 말에서 씩씩한 말로 올라탄 기수는 다음 전속력으로 다시 떠난다. 이 덕분에 몽골은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을 수시로 보고 받은 것이다. 이름만으로도 서양의 전사가 떨던 ’타타르‘족을 만났다. 하지만 타타르의 이름의 명성은 역사에 묻히고 마르코 폴로의 이름만 남아있다.
평탄한 평원에 양 떼가 있다, 안장이 놓인 나귀 한 마리도 풀을 뜯고 있다. 그는 배낭을 내려놓고 카메라를 꺼내 나귀에 다가간다. 양 떼 가운데 털 색깔이 밝은 개 두 마리가 뛰어나오더니 달려든다. 엄청나게 큰 놈들인 캉칼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개들은 터키인의 자랑이다. 외국인에 파는 것도 금지됐다. 힘 좋고 공격적인 캉갈의 임무는 늑대와 곰 같은 야생동물을 공격하도록 훈련받고, 맹수에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목에는 송곳 모양의 강철이 박힌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이 개는 시속 70킬로 자동차도 따라가며 공격한단다. 저자는 정신이 없이 주위를 살피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대답이 없다. 그는 오른손에 카메라를 쥐고 왼손에 지팡이로 방어를 하면서, 정면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입술이 마르고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단다. 다행히 두 놈이 같은 방향에 있었기에 적은 희망을 품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두려고 찍으니 역광이라서 플래시가 터졌단다. 깜짝 놀란 개들이 주춤했다. 사나운 기세는 줄어들었단다. 그러자 버섯을 따라간 주인이 나타나 위기에서 벗어난다.
덥수룩한 얼굴에 턱수염을 기른 양털 모자를 쓴 남자가 자기가 탄 나귀에 말을 하고 있다. 나귀는 이미 굵은 나무를 싣고 있었다. 주인의 작대기가 이끄는 대로 야윈 나귀는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커다란 귀를 흔들어가며 종종걸음으로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마을 여기저기는 봄 햇살을 받아 쇠똥이 마르고 있었다. 쇠똥은 네모반듯하게 잘려서 다음 겨울을 위해 저장돼 이 황량한 지방에서 땔감으로 쓰일 것이다. 걸어서 터키를 가로지르는 데 최소 8주에서 9주가 소요되므로, 파리에 있는 이란 영사관은 두 달짜리 비자를 발급하지만, 그는 두 달 반까지를 받았단다. 남은 1,200~1,300킬로를 한 달 반에 주파해야 하니 그는 평균 33~36 키로를 걷고 있었다. 옛 대상들은 낙타의 느린 걸음으로 아홉 시간에서 열 시간 걸었던 곳에 숙소가 있었는데 인적이 끊기고 쓸모가 없어진 대상 숙소는 폐허가 되었다.
16세기에 지어진 사원에 신기한 물건이 있었다. 창문 옆 작은 기둥인데, 바닥에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또 아무 장치가 없음에도 사람들이 건드리면 빙글빙글 돌았다. 전설에 따르면, 이 기둥이 도는 한 이 사원은 보호받을 것이란다. 다른 하나는 호두나무로 그 내부를 바꾸어 놓은 시계인데, 메카의 방향을 알려주는 벽감 옆에 똑딱거리고 있었다. 시게는 ’콘스탄티노플에서‘란 문구가 프랑스어로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이 시계는 15세기 초에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플이던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단다. 터키의 목욕은 순서에 따라 이뤄진다. 작은 방에서 옷을 벗은 다음 발목까지 오는 수건을 몸에 두르고 처음에 온탕, 다음에 증기탕에 든다. 벽과 의자는 흰 대리석이고 욕조에 물을 퍼 몸에 뿌린다. 삼십 분쯤 후에 안마사가 때밀이 장갑을 끼고 들어오더니 비눗물 속에 저자를 담갔다. 탈의실에서 종업원이 머리에서 발 끝까지 감싸주고, 저자는 나무 침대에 누워 ’아이란‘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단다. 이것이 전통 터키 목욕탕 ’하맘‘이다.
2022’05.26
아나톨리아 횡단-1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효형출판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