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풀코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며칠을 앓았다. 교인의 경우 보통은 유족의 요청에 의해 기독교식으로 약식 장례를 치르는데, 이번엔 조문예배에서부터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로 이어지는 풀코스 장례를 치렀다. 그것도 화장장이 아니라 고향 선산에 매장하는 장례이다보니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문중 산에 올라야 했다. 그 바람이 내 허파에 바람구멍을 낸 것 같다. 기침과 고열이 며칠 계속되다 오늘에야 소강상태에 접어든 듯하다.
풀코스 장례를 집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노동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 과정이 참으로 새로웠다. 망자의 생에 대한 이해가 없었는데도 난 그의 죽음 가운데 생명에 대하여,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망자나 그의 유족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장례 과정에서 느끼게 된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각성 때문이리라. 유해를 매장하는 장례를 너무 오랜만에 치르다보니 그 의미가 남달랐던 것 같다.
나는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예식을 할 때는 기존의 예문을 따르지 않고 내가 만든 예식 프로그램을 가지고 한다. 혼주나 상주의 가족이나 상황에 따라 예문을 그때그때 새롭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내 예식문은 항상 변한다. 이번 장례식 하관 예식문에 특별히 삽입한 하나의 선언문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에 대한 성경적 선포였다. 하관식 설교를 마치고 유해 위에 흙을 뿌리며 성공회의 진혼시 전반부를 축약해서 낭송했다.
“이제 우리 형제의 영혼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오며
그 육신을 대지에 안장하니,
흙은 흙으로,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리라.“
이 선언을 하는데 마음이 웅장하게 열리는 걸 느꼈다. 대지와 인간과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고 거대한 바다처럼 넘실댔다. 우주에 울려 퍼지는 하나의 소리처럼 파장을 냈다. 맑은 햇볕 가운데 눈발이 간간이 날리고 있었다. 그것마저 하나였다. 눈송이 하나 하나와 햇살 한 올 한 올이 한 몸이었다.
죽음은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 대지는 존재를 얼마나 풍성케 하는가. 어둠은 밤하늘의 별들을 얼마나 빛나게 하는가. 심장이 맥박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웅덩이가 생명의 심연에서 눈을 말갛게 뜨고 있지 않은가. 죽음이 맥박치는 생명의 고동, 그게 ‘살아있음’이다. 그러므로 ‘살아있음’은 ‘죽음’과 동의어이며 죽음은 삶의 배경이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구나. 인간에게 죽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관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박목월 <하관下棺>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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