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25일 월요일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교부 시대부터 쓰였는데,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헌장’을 반포하며 마리아께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마리아께서는 성령 강림 이후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셨고,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6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해마다 ‘청소년 주일’(5월 마지막 주일)을 포함하여 그 전 주간을 ‘교육 주간’으로 정하였다.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이기에 가톨릭 교육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이다.
말씀의 초대
사람은 자기 아내 이름을 하와라 하였는데,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15.20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에 전념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2-14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12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
13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14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5-34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 계신 성모님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19,27). 나자렛의 소박한 여인이셨던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을까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비슷한 예로 전태일 열사의 경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1960년대 청계천 봉제 공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다 스물두 살의 나이로 분신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아들이 죽은 뒤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핍박받는 노동자들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녀가 어디에 있든 함께합니다. 자녀가 고통받을 때 함께 고통받고, 자녀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제자들과도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초대 교회부터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놓이든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우리 자신을 맡깁시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걱정하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직 한참이나 엄마의 따뜻한 품이 필요한 어린 자녀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철부지 자녀를 남겨두고 떠나가는 젊은 부모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엄마는 그저 아이들 생각뿐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뭐라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금요일 오후 골고타 언덕 위에서 벌어진 참혹했던 십자가 죽음 사건, 그 처절함 속에서도 우리를 걱정하시고 배려하셨던 예수님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잔혹한 십자가형으로 인해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남겨질 교회와 양떼인 우리를 걱정하십니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 감당하기도 힘겨우실텐데, 자신에게 휘몰아쳐 오는 광풍과도 같은 괴로움에 대해서는 일말의 표현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신이 떠나신 후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을 염려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6-27))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임종 직전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를 새로운 모자 관계로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그 결과 남겨질 신앙 공동체를 위해 앞으로 성모님은 중개자 역할, 즉 교회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지속해나가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인해 그분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존재로 인해 모두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 안에서 새로운 영적 가족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성모님의 신앙 여정은 약간의 힌트라든지, 사업계획서라든지, 로드맵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습니다. 언제, 무엇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것도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 속을 걸어가는 불확실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엄청난 도전 앞에 뒷걸음질 치지 않았습니다. 불확실한 초대였지만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회피하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기도하면서, 희망하면서 당당히 직면했습니다.
“그래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지만, 주님께서 언젠가 내 눈을 밝혀주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그렇게 성모님은 오로지 주님께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하루하루 살얼음판 같은 여행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생에 걸친 철저한 순명으로 당신의 뜻을 너그럽게 수용하시며,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에 충실하게 협조한 마리아를 천주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높이 들어 올리셨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과 성체에 대한 사랑은 비례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9,26-27)
찬미 예수님! 성령 강림 대축일 바로 다음 날, 우리 교회는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지냅니다. 저는 오늘 ‘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으면 성체성사도 인정하지 못하게 될까?’라는 주제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 수십 년 전통을 자랑하는 곰탕집이 있었습니다. 그 식당의 곰탕 국물은 일흔이 넘으신 늙은 어머니가 매일 새벽 3시부터 가마솥 앞에서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뼈를 고아 끓여낸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장성한 아들은 홀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국밥을 날랐습니다. 어느 날, 자칭 유명한 미식가라는 교만하고 돈 많은 남자가 식당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들이 내온 곰탕을 한 숟갈 맛보더니 그 깊고 진한 맛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야, 진국이군! 최고야!"
그런데 마침 주방에서 땀에 전 앞치마를 두르고 굽은 허리를 한 노모가 홀로 나왔습니다. 미식가는 노모를 위아래로 불쾌하게 훑어보더니 아들에게 삿대질하며 아주 무례하게 소리쳤습니다. "이봐요 사장! 국물 맛은 좋은데, 식당에 당신같이 냄새나고 볼품없는 늙은 할머니가 떡하니 돌아다니니까 밥맛이 확 떨어지잖아! 깨끗한 주방장을 쓰지 그래?" 사장은 말했습니다. "저분이 제 어머니이십니다. 당신은 어머니의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가주세요.”
세상에는 아주 명확하고도 상식적인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요리하는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면, 그 요리를 먹을 자격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리는 단순히 식재료의 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요리를 만든 사람의 시간, 정성, 희생, 곧 그의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톨릭 신자로서 매일 미사 때 제대 앞으로 나아가 입을 벌려 받아먹는 '성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살과 피, 즉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살리기 위해 먹이시는 천상의 곰탕 국물과도 같은 '절대적인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살과 피라는 양식은 2천 년 전 골고타 언덕에서 도대체 누구의 몸에서 유래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상의 인간 아버지가 없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육신을 구성하는 세포, 염색체, DNA의 100퍼센트는 오직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를 빌려 형성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열 달 동안 마리아가 섭취한 양식과 피를 통해 길러진 육신이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곧,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이는 내 몸이다"라고 내어주신 그 살과 피는, 본질적으로 어머니 마리아가 당신의 살과 뼈를 깎아 고아낸 처절한 모성의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개신교 형제들이나 일부 교만한 신앙인들은 방금 전 곰탕집의 미식가와 똑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예배당에 앉아 십자가의 은총과 구원의 빵은 달라고 열렬히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살과 피를 세상에 내어주기 위해 평생을 십자가의 칼날에 심장이 찔리며 피눈물을 흘리신 성모 마리아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만 있으면 되니, 마리아 당신은 저 뒤로 빠져 있으시오. 평범한 여자일 뿐인데 공경할 필요 없소! 나는 구원의 국물만 들이켜면 되오!"
어머니의 태중과 그 생물학적 희생을 부정하고 무시하면서, 어떻게 그분의 살과 피로 사시며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이 곧이곧대로 들리겠습니까? 어머니의 살이 보통 죄인의 살이라면, 그리스도의 살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할 때, “아니야, 그건 진짜 살과 피가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의미하는 거야!”라고 성경을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이 끊어지는 그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굳이 요한을 향해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7)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신이 피 흘려 세우실 성체성사의 만찬에 우리가 초대받았을 때, 그 양식이 우리 영혼 안에서 독이 되지 않고 참된 생명으로 피어나도록, 손수 먹여주실 완벽한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증인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지날 때, 하느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곧 신약의 '성체'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귀한 만나와 율법판을 금으로 만든 '계약의 궤(법궤)' 안에 소중히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히브 9,4 참조).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계약의 궤'를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봅니다. 하늘의 살아있는 빵이신 예수님을 당신의 순결한 태중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성모 호칭 기도에서 마리아를 '계약의 궤이신 마리아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현존 그 자체였습니다.
너무나 거룩하여, 함부로 만지거나 불경하게 대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2사무 6장 우짜의 죽음 참조). 위대한 다윗 왕조차 그 궤 앞에서 두려워 떨며 춤을 추며 공경했습니다.
만나가 거룩하다면, 그 만나를 품었던 궤 역시 하느님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지극히 존귀한 성물입니다. 계약의 궤를 천대하고 멸시하는 사람이, 그 안에 담긴 만나나 하느님이 직접 새겨주신 율법판을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상자를 쓰레기 취급하는 자는 결국 그 안의 보석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7).
집은 인간의 자아와 내면, 영혼의 공간을 뜻합니다. 요한은 자기 영혼의 안방에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은 이렇게 단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은 곧 마리아의 살이다 (Caro Jesu, caro Mariae est)."
하느님의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을 참되게 사랑할 방법은 이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리를 먹을 자격은 요리사를 존중할 때 비로소 주어집니다. 계약의 궤를 존중할 때만 그 안의 만나가 생명이 됩니다. 성모님을 내 어머니로 받아들임은, 내가 미사 때 먹는 성체가 결코 죽은 빵이나 상징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참 생명의 피와 살임을 보증받는 가장 확실한 도장을 찍는 행위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이번에 메주고리예, 파티마, 루르드, 그리고 바르셀로나를 다녀오는 성지순례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메주고리예를 처음 찾았던 것이 2006년이니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파티마와 루르드,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성가정 성당을 처음 찾았던 것은 1996년이니 어느덧 3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입니다. 장소는 달라도, 시대는 달라도,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같은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를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셨고,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말씀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과달루페에서, 루르드에서, 파티마에서, 그리고 메주고리예에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늘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고백성사를 자주 보고, 미사에 정성껏 참례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단식하며,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가장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성지순례를 떠날 때마다 순례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시고,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순례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건강을 잘 챙기고, 시간도 잘 지키고, 서로 배려하라고 당부합니다. 때로는 농담처럼 늦으면 다음 식사 때 와인을 사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의 중심에는 하나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순례자가 되십시오.”라는 것입니다. 버스 안에서도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고, 사제의 강복을 받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본당 공동체를 위해, 가정의 성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은 인간의 계산이나 지혜에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요셉 성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교회 역시 그래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또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시며,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교회가 선택해야 할 우선적인 길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성모님은 무엇이 필요한지 아셨고,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과 제도, 건물과 전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도적 교회를 고백합니다. 사도들의 믿음을 이어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길을 잃을 때마다, 다시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순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성모님의 말씀처럼,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회개하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한 신앙인이 아니라, 부활의 증인이며,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입니다. 성모님의 손을 잡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저희의 어머니로 주신 하느님, 성모님의 전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의 성인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y VII)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1022/1025-1085년
같은이름 :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소바나(Sovana)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힐데브란트(Hildebrand)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 로마(Roma)로 가서 삼촌이 아빠스로 있던 아벤티노(Aventino)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라테라노(Laterano) 학교에서 지오반니 그라시아노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였는데, 그의 스승이 후일 그레고리우스 6세 교황(1045-1046년 재임)이 되었을 때 교황 비서로 임명되었다.
그 후 1047년에 그레고리우스 6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는 성 오딜로(Odilo, 1월 1일)가 지도하던 클뤼니(Cluny) 수도원에 머물렀다는 말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1049년 툴(Toul)의 주교인 브루노(Bruno)가 성 레오 9세(Leo IX, 4월 19일) 교황으로 등극하자 그는 교황의 불림을 받고 로마로 가서 차부제품을 받고 교회의 재정과 성 바오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수도회 개혁을 담당하게 되었다.
1054년에 그는 상스(Sens) 교회회의를 주재하여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를 단죄하였고, 니콜라우스 2세(Nicolaus II) 교황 때에는 교황 칙서 발간 책임자로 일하였다.
그는 1073년 4월 21일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교황이 선종하자 대중의 환호 속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성직매매의 죄를 들어서 밀라노(Milano)의 대주교를 면직하면서부터 교회 규율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했으며, 1075년 이전 해에 열린 로마 교회회의의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임명을 금지하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복잡한 사건들도 많았으나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개혁 운동을 통해 교회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교황권을 크게 확립한 교황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 간의 일치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황제와의 대립으로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Salerno)까지 피신했던 성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606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베다(Bede)
신분 : 신부, 교회학자, 역사가
활동연도 : 672/673-735년
같은이름 : 비드
영국 타인(Tyne) 강 남쪽 지역의 노섬브리아(Northumbria) 왕국에서 태어난 성 베다(Beda)는 7세 때 친척들에 의해 캔터베리(Canterbury) 위어머스(Wearmouth)의 성 베드로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수도원 원장인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Benedictus Biscop, 1월 12일)의 지도하에 교육을 받았다. 685년부터는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가 새로 지은 재로우(Jarrow)의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의 원장인 성 체올프리두스(Ceolfridus, 9월 25일)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성장한 뒤에 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고, 19세에 부제품 그리고 30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제외하고는 늘 수도원 안에서 생활하면서 주로 성경 연구에 전념했으며, 수도원 내의 교육과 저술 활동에 몸을 바쳤다.
그는 당대의 가장 박학한 사람으로 존경받았고, 영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경에 관한 그의 주해서들은 당대에 가장 권위가 있었고 중요시되었으나, 그는 역사가로서 더 유명하다.
그의 “영국 교회사”는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그는 또한 영문법과 연대기 작업을 하였고 찬미가와 시를 썼다.
이외에도 그는 서한집과 강론집 그리고 순교록을 썼는데, 이들 책들이 모두 라틴어로 저술되었지만 그는 영어로 집필한 저술가로도 이름이 나 있다. 만년에 그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성 요한 복음서”를 번역하였고, 세비야(Sevilla)의 성 이시도루스(Isidorus, 4월 4일)의 저서들을 추출하였다.
그는 735년 5월 26일 재로우의 수도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재로우에 묻혔다가 더럼(Durham)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더럼 성당의 갈릴리 경당에 묻혀 있다.
성 베다는 일생 동안 기도하고 노동하며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한 수도자였으나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자’(Venerable)라는 칭호를 덧붙였고, 이 칭호는 853년 아헨(Aachen)의 교회회의에서 공식화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면서도 겸손하였으며, ‘영국 역사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가 교회학자로 선언하였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는 성 베다를 일컬어 ‘성령의 빛이자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고 하였다.
그는 단테(Dante)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천국 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인이기도 하다. 비드(Bede)로도 불리는 그는 1100년 이전까지 영국 전례력에서 5월 26일에 기념되다가 1969년부터 5월 25일로 확정되어 기념되고 있다.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Madeleine Sophie Barat)
활동년도 : 1779-1865년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지역
같은 이름 : 마들렌, 막딸레나, 소피바라, 마들렌 소피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Magdalena Sophia Barat, 또는 마들렌 소피 바라)는 술통 제조업자인 아버지 자크 바라(Jacques Barat)와 어머니 마들렌 푸페(Madeleine Foute)의 막내딸로서 1779년 12월 12일에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즈와니(Joigny)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열한 살 위의 큰 오빠 루이(Louis)로부터 라틴어와 고전문학, 신학과 철학 등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루이는 나중에 예수회 사제가 되었고 동생에게 항상 엄격한 규율과 벌을 주었다고 한다. 루이는 동생의 교육을 위해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6세 된 성녀 막달레나를 파리(Paris)로 데리고 가서 여러 젊은 여성들과의 만남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대혁명의 여파로 전통적인 가치와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부르심의 징표로 감지한 성녀 막달레나는 21세 되던 때에 오빠의 소개로 예수회의 조제프 바랭(Joseph Varin) 신부를 만나 장차 성심 수녀회(Society of the Sacred Heart)를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바랭 신부는 성녀 막달레나를 ‘예수 성심’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녀회의 초석이 될 적임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1800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에 성녀 막달레나와 세 명의 동료들이 예수 성심께 서원함으로써 성심 수녀회의 설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심 수녀회는 예수 성심의 무한한 사랑에 보답하고 그 사랑을 널리 알리는 것을 근본정신으로 하며, 특히 청소년 교육을 통하여 설립 목적을 구현해가고자 했다. 그래서 설립 이듬해인 1801년 파리 북쪽의 아미앵(Amiens)에 그들의 첫 수녀원과 성심학교를 세웠고, 1802년에 성녀 막달레나는 비록 회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당시 23세) 장상으로 선출되었다. 1806년 성심 수녀회 1차 총회에서 초대 총원장으로 선출된 성녀 막달레나는 일생 동안 수녀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성심 수녀회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804년에는 그르노블(Grenoble)의 성모 방문 수녀회 공동체를 흡수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1818년 미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성심 수녀회의 교육 사업을 활발히 전개한 성녀 로사 필리피나 뒤센(Rosa-Philippine Duchesne, 11월 17일)도 끼어 있었다. 이 수녀회는 1826년에 교황 레오 12세(Leo XII)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성심 수녀회는 발전을 거듭하였고 유럽 각국 주교들의 요청에 의해 여러 나라에 성심학교를 설립되었다.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으로 인해 푸아티에(Poitiers)의 수련소가 폐쇄를 당하자 성녀 막달레나는 스위스에 새로운 수련소를 세우기도 했다. 1865년 5월 25일 주님 승천 대축일에 그녀가 파리(Paris)에서 선종할 즈음에 성심 수녀회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중남미 등 16개 나라에 122개의 수녀원과 많은 학교가 있었다. 그녀는 1908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녀 막달레나의 특성은 예수 성심에 대한 돈독한 신심과 사랑과 겸손의 실천이었다.
성 우르바노 1세(Urban I)
활동년도 : +230년
신분 : 교황,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어번, 우르바누스, 우르반
성 우르바누스(Urbanus, 또는 우르바노)의 출생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폰티아누스(Pontianus)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따르면 222년 성 칼리스투스 1세(Callistus I, 10월 14일) 교황이 세상을 떠난 뒤 교황으로 선출되어 8년 동안 재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우호적인 황제가 지배하는 동안 교황직에 있었기 때문에 전혀 탄압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3세기 전반기의 평화로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이집트, 시리아,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증가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로마(Roma)의 지하 묘지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수가 많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크게 기여한 것이 교황 우르바누스 1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그는 로마의 노멘타나가(Via Nomentana)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박해로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 많은 고통을 겪었고 결국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이에 근거해서 교회는 교황 우르바누스 1세를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교황 우르바누스 1세가 포도 농사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교황의 축일인 5월 25일경에 포도 꽃이 처음 피기 때문이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
신분 : 수녀
활동지역 : 팟지(Pazzi)
활동연도 : 1566-1607년
같은이름 :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리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최고 명문가인 팟지 집안에서 태어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는 태어난 다음날 카타리나(Catharina)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선행과 신심생활에 큰 관심을 보여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기도와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성당에서 자주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무엇보다도 성체께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성체를 간절히 원하여 특별 관면을 받고 10세 때에 첫영성체를 하고, 12세 때 동정 서원을 하였다. 그 후 피렌체에 있는 산 조반니노(San Giovannino) 수녀원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더욱 열렬한 신앙인이 되었고 수도 성소의 뜻을 굳혀 나갔다. 부친은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극렬히 반대하여 1582년 12월 1일 피렌체에 있는 천사의 성 마리아(Santa Maria degli Angeli)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1583년 1월 3일 그녀는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584년 3월 초 병을 얻은 후 놀라운 탈혼이 반복되었는데, 거의 매일 성무일도를 바친 뒤 2-3시간 동안은 탈혼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녀의 병은 아주 위중했다. 동료 수도자가 아프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고, 나의 구원을 바라보면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그녀의 뛰어난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였다. 1585년 5월 17일 금요일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긴 탈혼에 빠졌는데, 거의 40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후 6월 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이후 5년 동안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와 시련을 겪기도 했다. 1586년 10월 수련기를 마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극도의 고통을 맛보던 중 1590년 부활절에 50일 동안 금욕생활을 하라는 주님의 뜻에 따라 오로지 빵과 물로만 지냈고, 이러한 고행의 보답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예언하는 은혜를 받은 것 외에도 먼 곳에 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고, 탈혼 상태에 있을 때 어떤 경우에는 무기력해지는 때도 가끔 있었다. 1604년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얼마 후 병을 얻어 이전에 느껴 본 적이 없는 심신의 고통으로 3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오랜 고통 뒤에 그녀는 1607년 5월 25일 41세의 나이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1669년 4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