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운곡예찬(雲谷禮讚)
김천종친회 총무 위광욱
김천은 영남제일문이다. 충북 추풍령을 지나 김천의 첫 門이 바로 영남의 첫 관문이다. 황악산 기슭 직지사를 두고 KTX, 경부고속도로, 4번국도가 남북으로 나란히 뻗어있다. 남쪽은 구미, 왜관, 대구로, 동서는 거창과 상주로 이어져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이다. 옛날에도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 때 김천을 통해 추풍령, 조령, 죽령을 거쳐 서울로 갔고, 부산, 대구로 남하할 때도 김천을 거쳐야했다
운곡의 지리로 동쪽은 금오산을 기준으로 구미, 칠곡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평야지이며 남쪽은 비백산과 백마산, 선대봉(465m)과 사모실산(260m)으로 성주와 경계를 이룬다. 중앙은 운남산(376m)과 절골산(380m)이 있다. 오리하천이 북쪽으로 흘러 농수를 적절히 공급하고 저수지를 만들어 땅을 기름지게 하고 있다. 또한 송곡천과 율곡천이 있어 그나마 남면에 속한 운곡은 평야지대를 이룬다.
금오산(金烏山)은 김천과 구미, 칠곡에 걸쳐 있고 암석과 계곡의 풍광이 뛰어나 197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명칭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지었고 황금빛 까마귀에서 유래했다. 대혜폭포, 약사암, 마애보살입상, 해운사, 의상(義湘)이 수도하였다는 도선굴이 있고, 금오서원으로 불리는 채미정(採薇亭)은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768년에 건립되었다.
김천에는 농지가 거의 없다. 토지의 70~80프로가 험악한 산으로 이루어져 천석꾼은 고사하고 백석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김천의 농부들은 탈출구를 찾고자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로 비닐하우스와 과수농이 그 해답이었다. 여기에다 그나마 작은 논을 중심으로 경지정리를 국가차원에서 1960년대 최초로 시행해 기계화 영농의 첫 단추로 지게를 추방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경지정리, 과수농, 비닐하우스라는 농업의 삼위일체는 부장공파 운곡종중원들의 소득을 부쩍 늘게 했다. 미맥(米麥)생산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포도, 자두, 복숭아 등 과수농으로 탈바꿈한지 50~60년이 다 되어간다. 특히 과일도 모두 비닐하우스를 활용하여 재배하기 때문에 풍수해의 영향이 적어 고른 작황을 보이고 있다. 기계를 활용한 과수농에다 편리한 교통이 농산물의 원활한 유통을 돕고 있다.
운곡동은 4번 국도를 기준하여 1, 2동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우리 씨족의 대부분은 1동에 거주하고 있다. 운곡천을 기준으로 음지편과 양지편으로 구분되며 전체는 한반도 모양과 흡사한 편이다. 양지편의 중앙에 위치한 장흥위씨 부장공파 김천종중 재각 관산재(冠山齋)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진 동산을 뒤로하고 운곡천과 금오산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관산재는 1935년 면장공 휘 성량 할아버지가 건립하여 21세 부장공과 配 현풍채씨, 22세 통덕랑과과 配 김해김씨, 23세 휘 사징공과 配 일선김씨, 24세 휘 춘환공과 配 광산김씨, 25세 휘 명방공과 配 창녕조씨, 26세 휘 경숙공과 配 김해김씨, 26세 휘 경휘공과 配 김해김씨 14位를 배향하고 있다. 면장공께서 심으신 사장나무는 1982년 10월 29일 보호수 11-26-2-1로 지정되었다.
▲김천 운곡 항공사진
장흥위씨종보 제23호(2017년)에서 위상복 씨족문화연구위원은 소중한 자료를 게재했었다. 바로 선대묘소를 탐방해 후세들에게 사진과 글로 남겼다. 21세 배 현풍채씨의 묘는 운남산 자락 운양 시지매에, 22세 합묘 및 23세 합묘는 솔방 가장골 뒷산에, 24세 합묘는 운양 원골에, 25세 합묘는 운양 짝밭골에, 26세(휘 경숙)는 운양 큰중산골과 박중내미에, 26세(휘 경휘)는 운양 짝밭골에 소재한다고 기록했다.
김천종중 어르신들은 후진양성에 진력했다. 교육으로 문중을 세운다는 교육입문(敎育入門)은 해방 후 베이비부머세대들이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시중은행장을 비롯해 대기업의 대표, 시장을 비롯한 선출직 시의원 등 고위직 공무원을 많이 배출하게 되었다. 부장공파 김천종중은 목숨을 담보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부장공을 기리며 종중중흥에 진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