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윤봉구가 쓴 묘지명(갑 제6호증 2)에서는 위덕의(魏德毅)가 왕의 서천(西遷) 소식을 듣고 걸어서 의주로 찾아가서 피란 가 있는 왕을 접견하여 크게 칭찬을 받고, 그 공로로 주부(主簿), 형조좌랑(刑曹佐郞)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592. 4. 13. 에 부산포에 쳐들어 온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4. 29. 충주까지 함락되자 선조는 겁을 먹고 4. 30. 급히 서천 길에 오르는데, 이 소식이 군사용 파발마로 전투 중이던 이순신 장군에게 전달되는 것이 5. 8.이니, 민간인 신분이던 위덕의가 왕의 피란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 빨라야 5월 중순 이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수도 한성이 적의 수중에 함락된 이후이고, 한강 이남은 적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이러한 때 평소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내와 자식 사랑이 극진하였던 섬세한 심성을 지닌 한 선비 노인(이는 〈續傷往賦〉의 내용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음.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위덕의(魏德毅)의 나이는 53세로, 손자 위동명(魏東蓂)까지 가진, 당시의 기준으로는 분명히 노인이었다)이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을 걸어서 90일 만에 장흥에서 의주까지 간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창 젊은 나이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설령 5월 중순에 장흥을 출발하여 90일 만에 의주에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그 때는 8월 중순일 터인데, 왕을 만나보고 나서 곧바로 되돌아서서 장흥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다시 90일 이상 걸렸을 것이니, 합해서 6개월 이상을 집을 떠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나 유성룡이 쓴 〈辰巳錄〉의 기록에 의하면(을 제3호증), 그는 1593년 1월 5일까지 분명히 평양 부근에서 명나라 군대를 위한 말먹이 조달의 일을 하고 있다가 근무태만으로 당시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에게 곤장을 맞고 더 이상의 처벌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설령 그가 곧바로 무죄 방면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고 가정하더라도, 당시에는 명나라와 왜군 사이의 평양성 탈환 작전으로 그 일대가 통행이 전혀 불가능하였다는 점을 무시하더라도, 다시 90일 이상 걸렸다면, 고향으로 돌아온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1593년 4월 중순 이후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렇다면 그가 집을 떠나 있었던 기간은 1년 가까이 됩니다.
그러나 위덕의는 그의 〈續傷往賦〉에서 五個月 동안 밖에 있어 參星과 商星처럼 떨어져있었다고 하였는바, 이 〈속상왕부〉는 다분히 〈난중일기〉1597년 8. 19. 일자 기록에 나오는 〈불명예스러운 사건〉에 대한 본인의 해명 또는 변명의 성격이 다분하므로, 이 〈속상왕부〉에의 〈五個月〉은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는 애초에 의주에 피난 가 있는 왕을 찾아간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가 그 공로로 받았다는 주부, 형조좌랑의 관직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의 것에 불과합니다.
(답변서는 △위덕의가 54세의 늙은 나이로 90일 간 장흥에서 걸어서 의주에 가기는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유성룡의 진사록에는 1593년 1월 5일까지 평양 부근 명나라 말먹이 일을 했다면서 그곳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왕복 90일을 합산, 출타 기간을 최소 6개월 내지 1년쯤으로 추정했다가 〈속상왕부〉5개월 설을 신뢰한다고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위덕의의 의주행은 왕의 서천(西遷)과 선조를 호종한 둘째 동생(魏德和)의 안후를 걱정하는 어머니(광주 이씨)를 위해 결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왕의 서천에 따른 문안을 위해 결단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유성룡의 진사록에 평양 부근 명나라 군대 말먹이 일의 기록이 나온 것이다. 또한 〈속상왕부〉를 쓴 이유에 대해 이순신의 난중일기 1597년 8월 19일를 의식해서 변명하려 썼다고 했으나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위덕의가 이순신이 그 사실을 자신의 일기(난중일기)에 남길 것을 알고 사후를 위해 그런 글을 남겼다니 좀 지나친 억측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좌랑(佐郞)〉은 현재 중앙부처의 국장급(局長級)에 해당하는 조선 시대 때의 매우 중요한 관직으로서, 조선왕조가 전시 중에 아무리 엉망인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중요한 관직을 시골에서 왕을 위해 90일 간 걸어서 올라왔다는 사실만 가지고 54세의 노인에게 제수할 정도로 국가 운명이 엉망이지는 않았으며,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모든 〈좌랑〉의 인사를 빠짐없이 기록해 놓고 있으며, 〈선조〉때에만 해도 인터넷에서 542건이 검색될 정도로 그 인사 발령과 이동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중요한 관직이었습니다.(을 제4호증의 1-2)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어디에도 〈위덕의(魏德毅)〉란 인물에 관한 기록은 검색되지 않으며, 따라서 의주에 찾아간 공로로 그가 〈형조좌랑〉,〈주부〉를 제수 받았다는 것 역시 역사적 진실이기 어렵습니다. 이 점은 위덕의 본인이 〈續傷往賦〉를 쓰면서도 국왕의 서천(西遷)에 관한 일, 자신이 90일 간 걸어서 의주를 찾아간 일, 그 공로로 관직을 제수 받은 일 등에 관한 언급이 한 마디 없는 것으로써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시 한 무명의 노선비가 생명을 걸고 적진 속을 90일 간 걸어가서 국왕을 알현하고, 그 일로 칭찬을 받고, 그 공으로 높은 관직을 제수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왕조 시대의 한 개인의 일생에서는 그 무엇보다 중대한 성취이자 영광일 뿐만 아니라 온 가문의 영광이므로, 개인의 문집이나 글에서 그런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지 않는다는 것은 조선 시대의 가치관으로서든 관습으로서든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상왕부란 당나라 중엽 유명한 시인 유우석(劉禹錫․772~842) 자 몽득(夢得)이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것을 빌어 〈續傷往賦並序〉로 썼기에 아내의 죽음을 슬퍼한 심정만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 글을 자신의 설합 속에 넣어두고 타계했는데 후손들이 나중에 정리하다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니 피고 측에서 상상하는 내용의 사연은 처음부터 이런 제목의 글속에 포함하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된다)
〈좌랑〉뿐만 아니라 〈주부〉, 〈현감〉등의 관직 또한 위덕의씨는 제수 받은 사실이 전혀 없었음을 마찬가지 방법으로 추정할 수 있는바, 원고는 그가 관직을 제수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사실에 대한 증거로는 윤봉구의 모지명 밖에 없는 실정인데,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그것은 증거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조선왕조실록〉이 인터넷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다는 것은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므로, 관직에 대한 허영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족보에서 조상들의 관직을 꾸며대는 일은 다반사로 있었던 일입이다. 그리고 작은 관직의 제수 또는 이동까지 〈조선왕조실록〉에 다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사람들은 몰랐고, 그것이 후대에 와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처럼 쉽게 검색될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여러 성씨의 족보에 기록된 관직에 허위사실이 적힌 것은 일반적이다. 그러나 위덕의의 경우 좌랑, 주부 등의 관직의 교지는 없지만 호성원종 이등훈록과 사후에 형조참의에 추증한 교지 등이 엄연히 남아 있다. 인터넷에 나온 호성공신은 정공신만 86명만 나오지 호종원종공신 2475명은 단 한 명도 검색할 수 없다)
임란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덕분에 역사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