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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는 긍정적 신념이 필요하지 않으며, 다만 군대가 필요할 뿐이다. 그에 반해 내전은 명분, 가치, 일종의 공약을 내세워야 한다. 쿠데타를 모의하는 동안 공모에 가담한 장군들은 쿠데타로 세울 정확한 정부 형태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절박하다 보니 음모자들은 쿠데타 이후 수립할 정체(政體)를 논의할 시간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국가를 수중에 넣은 뒤에야 더 정교한 사항을 논의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공론화를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 형태는 불분명했는데, 팔랑헤주의, 카를로스주의, 알폰소 왕정으로 복귀, 공화제 독재 등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국민 진영 스페인의 명목상 지도부로 활동할 기구가 7월 24일 부르고스에서 국방위원회(Junta de Defensa Nacional) 형태로 구성되었다. 당시 사라고사의 사단장이었던 카바네야스 장군이 장군 9명과 대령 2명의 추대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명목상의 지도부를 실제로 조직한 당사자는 당시 북부군을 지휘하던 몰라 장군이었다. 몰라 장군이 이 기구를 만든 것은 당시 국민군 안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조직을 이끌던 프랑코 장군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화 정부에 충성을 바쳤고 공화국 공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이달고 데 시스네로스 장군은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고데드 장군은 영리하다. 몰라 장군은 그보다 더 나은 군인이다. 그러나 프랑코는 가장 야심만만한 장군이다.”라고 말했다. 후에 몰라 장군에 대한 그의 판단은 매우 부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위원회의 중심 인물들. 좌로부터 카바네야스, 프랑코, 케이포 데 야노
몰라 장군은 교회와 국가가 분리된 공화주의적 독재를 지지했다. 그는 팜플로나에서 왕정을 상징하는 깃발을 끌어내리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카를로스파는 몰라의 이런 태도에 대경실색하여 반란이 시작되기 지건 며칠 동안 그들의 레케테(카를로스파 의용군)들을 반란에 참여시킬 것인지를 두고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케이포 데 야노가 세비야를 점령하면서 급속하게 부상한 것 역시 그들의 우려를 심화시켰음이 분명했다. 그는 라디오 방송을 ‘공화국 만세!’라는 외침이나 자유주의적 성가(聖歌)인 ‘리에고 찬가(Himno de Riego)’를 들려주는 것으로 끝냈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프리메이슨 회원이기도 했다. 공화국을 상징하는 삼색기 아래에서 싸운다는 생각은 모든 전통주의자들에게는 하나같이 악몽이었다. 오직 쿠데타에 참여한 장군들만이 삼색기에 충성을 서약했을 뿐이다.
카를로스파는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산후르호 장군에게 큰 기대를 품었으나 7월 20일 장군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왕당파 공군 소속의 안살도(Ansaldo) 대위가 산후르호 장군을 비행기에 태워 부르고스에 데려가기 위해 포르투갈에 도착해서 “스페인 국가 수장의 명을 받고 왔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장군 측근 사이에서 매우 고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들이 탄 경비행기가 이륙 직후에 폭발하여 산후르호는 화염 속에서 타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프랑코 지지자의 사보타주 때문이었다느니 혹은 군복 가방을 너무 많이 싣고 가려고 했던 산후르호의 허영심 때문이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안살도 대위는 전자라고 주장했지만 후자가 더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보인다.
후안 안살도 대위
새로운 국가 형태를 두고 불확실한 탐색이 진행되는 동안 가톨릭교회는 국민 진영 연합 세력에게 전통이라는 공통의 상징과 연합 세력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뛰어넘는 대의명분을 제공해주었다.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성향과, 재산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팔랑헤 좌파를 제외하고는 우파의 모든 파당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교회 지도부는 우파의 가치 아래 집결했고, 저명한 교회 인사들이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추기경 고마(Goma)는 “유대인과 프리메인슨이 터무니없는 이론으로 국가의 영혼을 오염시켰다.”라고 말했다. 교회 측이 국민 진영이 일으킨 반란을 지지한다고 밝힌 가장 충격적인 문건이 9월 30일 살라망카의 주교 플라 이 다니엘(Pla y Daniel)이 공표한 교서 ‘두 도시’에서 나왔다. 이 교서는 좌파의 가톨릭교회 공격을 맹렬히 비난하고 국민 진영의 운동을 ‘하느님의 아들들이 건설한 천국의 도시’라고 반겼다. 플라 이 다니엘은 또한 공화 정부가 취했던 모든 반(反)교권적 제약과 개혁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의 요구는 후에 대부분 그대로 수용된다.
이시드로 고마 추기경
소수의 용감한 사제들이 목숨을 걸고 국민 진영의 악행을 비판하기도 했으나 국민 진영이 장악한 지역에 머물던 사제들은 대부분 새로 지니게 된 힘과 늘어난 신자 수에 기뻐하고 환호했다. 미사에 성실하게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불온사상’에 빠진 사람으로 의심받았다. 기업가들은 종교 상징물을 판매하여 큰 돈을 벌었는데, 사람들은 악령이 아니라 세간의 의심을 물리치기 위해 그 상징물을 앞 다투어 사서 요란스럽게 치장하는데 썼다. 그것은 종교 재판소가 유대인과 무어인을 박해하면서 스페인의 식탁에서 돼지고기가 환영받도록 만드는 데 기여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국민 운동에 참여한 여러 분파들은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 매우 위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전체 스페인 영토와 인구 중에서 자신들이 통제하고 있는 영역이 채 반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코는 뒤이은 몇 달 동안 이 불확실한 상황과 더 강력한 지도력을 바라는 우파 성원들의 바람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는 가장 냉소적인 정치가이자 보통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로 얘기되던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절대적 찬미자이자 부족함 없는 계승자였다. 8월이 지나기 전에 프랑코가 국민 진영의 카우디요(Caudillo), 즉 지도자가 될 것임은 거의 분명한 사실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 프랑코의 부드럽고 무관심한 듯한 표정 뒤에 어떤 신념이 숨어 있는지, 국민 진영의 국가가 장차 어떤 모습으로 가야 하는지를 두고 견해 차가 컸던 여러 분파들 간의 갈등을 얼마나 잘 조정해낼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팔랑헤당은 자신들이 군부에 종속된 보조 세력으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몹시 걱정스러웠다. 왕당파는 알폰소 13세의 귀환을 바라고 있었다. 카를로스파는 포퓰리즘적 요소를 띤 가톨릭 국왕 독재 체제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추대하려고 하는 당시 여든 살의 돈 알폰소 카를로스를 동맹 내 다른 분파들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그해 9월에 교통사고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의 남편으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탐험을 지원하였고, 기만과 배신으로 외교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유명한 '프랑스의 왕은 내가 그를 두 차례나 속였다고 불평을 한다. 그는 어리석은 자에다가 거짓말을 한다. 나는 그를 10 차례 이상이나 속였다.' 라는 말이 있다.
프랑코가 국민 진영을 통합하기 위해 택한 방식은 그것이 해결하지 못하고 놔둔 것에서도,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것에서도 절묘한 것이었다. 프랑코가 택한 방법의 기반은 국왕 없는 왕정이었다. 알폰소는 국민 진영 다수가 받아들일 만한 인물이 아니었을 뿐더러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도 못했다. 그런데 프랑코가 내놓은 해결 방식은 팔랑헤당은 물론 케이포 데 야노나 몰라 같은 공화주의자를 자극하지 않고도 전통주의자를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무솔리니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에게 느꼈던 좌절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세비야에서 성대한 의식이 준비되었다. 의식은 옛 왕실 깃발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것을 ‘새로운 재정복 운동’의 깃발로 채택하는 것이었다. 그 의식은 또한 프랑코가 국민 진영 지도자 자리를 놓고 다투는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추진하던 계획의 일부이기도 했다. 케이포 장군은 “나를 보려면 프랑코더러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해!”라고 말하면서 식장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코는 외인군단을 창설한 미얀 아스트라이(Millan Astray) 장군을 비롯한 대규모 수행원을 이끌고 식장에 나타났다. 그는 추기경 일룬다인(Illundain)을 비롯하여 지역 유지 전원의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케이포 장군은 식이 시작될 때까지도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산페르난도 광장에 있는 시 청사까지 걸어갔다.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꾸어 식장에 나타난 케이포는 두서없는 긴 연설을 늘어놓아서 프랑코의 측근들을 당황시켰다. 이어 공화 정부를 상징하는 삼색기가 내려지고 빨강색-금색-빨강색으로 된 왕실기가 국왕 행진곡에 맞추어 게양되었다. 프랑코는 짤막한 연설에서, “우리의 깃발, 우리의 진정한 깃발, 우리 모두 충성을 맹세했고,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바쳤고, 수백 번 영광으로 점철된 깃발”을 찬양했다. 그러고 나서 프랑코는 깃발을 품에 안았으며, 이어 추기경 일룬다인도 뒤따라서 그렇게 했다.
미얀 아스트라이
일룬다인 추기경
케이포 데 야노는 그 전에 이미 발빠르게 세비야를 개인적 봉토로 삼았고, 프랑코는 케이포의 거만한 행동에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 시내 곳곳에 케이포의 초상화가 걸렸으며, 그의 얼굴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꽃병, 재떨이 거울 등에도 케이포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가족 중에 피살된 ‘적색분자’가 있는 집안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먼저 그의 사진을 창문에 걸어놓아야 했다. 프랑코의 참모들은 이런 선전물의 홍수 속에서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프랑코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마침내 그들은 영화관에서 프랑코의 사진이 국왕 행진곡에 맞추어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관객들은 의식이 진행되는 5분 동안 파시스트식 경례를 해야 했다. 그 후로 국민 진영의 공공 시설물은 프랑코의 사진을 걸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국왕 행진곡이 연주될 때마다 자신의 충성심이 의심받기를 원치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서 파시스트식 경례를 해야만 했다.
국민 진영 내 다른 집단들의 선전 문구는 귀에 거슬릴 뿐이었다. 곳곳에 포스터가 내걸렸다. 카를로스파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만일 그대가 선량한 스페인 국민이라면, 조국과 조국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사랑한다면 레케테에 가입하라.” 팔랑헤의 슬로건은 더 간단명료하고 위협적이었다. “팔랑헤가 그대를 부르고 있다. 지금 당장,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다.” 세비야에서 단 하루 동안 2천 명 이상이 새로 팔랑헤당에 입당했다. 케이포 데 야노는 청색 팔랑헤당원들이 입고 다닌 셔츠를 ‘구명복’이라고 말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냉소적이면서 정곡을 찌르고 있다. 살인 기계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많은 좌익이나 중도 인사들이 팔랑헤당에 입당하러 달려갔고, 이들은 자주 진짜 파시스트보다 더 파시스트인 척했다. 이는 공화군 지역에서 나타난 것과 정반대되는 현상이었다.
이 기회주의자들이 아직 살아 있는 ‘오래된 셔츠들(팔랑헤당의 초창기 멤버들)’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떼로 몰려다니면서,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전쟁 전에 우려했던 공포가 사실로 드러났다. 전쟁 전 베테랑 가운데 거의 절반이 반란의 와중에 죽임을 당했다. 한편 호세 안토니오는 의용군의 감시를 받으며 알리칸테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고 팔랑헤 지도자 오네시모 레돈도(Onesimo Redondo)는 이미 살해당한 상태였으며, 혼스의 창설자 레데시마 라모스 또한 적의 수중에 있었다. 그래서 팔랑헤당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는데, 당원 수는 크게 늘어난 반면에 지도자들이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0월에 팔랑헤당은 당원이 3만 5천명이었다. 그것은 국민 진영 의용군의 54%, 전체 국민 진영 세력의 19%에 해당했으며, 이 수치는 카를로스파 레케테들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그 결과 팔랑헤당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네시모 레돈도
일부 팔랑헤 소속 의용군 부대들은 전선으로 달려갔으나 대부분은 후방에 남아 즉흥적으로 구성된 관료제나 아마추어 정치경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팔랑헤 순찰대원들은 청색 셔츠를 입고 미심쩍은 인물들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행인들에게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도록 강요하고 “스페인 만세!”를 외치라고 다그쳤다. 소녀 팔랑헤당원들은 카페 같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남자들에게 왜 청색 유니폼을 입지 않느냐고 따져 묻곤 했다. 그러면서 소녀들은 남자 호위대 동료들이 문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유니폼을 입지 않은 남자들에게 경멸의 표시로 인형 옷 세트를 선물하기도 했다. 한 독일인 방문객은 빌헬름 슈트라세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곳 사람들은 팔랑헤당 의용군들을 뚜렷한 목적이나 이념도 없이 설치고 다니는 아이들, 혹은 총기를 갖고 다니며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을 때려잡는 일을 하면서 그것을 일종의 재미있는 스포츠로 생각하는 젊은이들로 여긴다.”
스페인 내전 당시의 프랑코 지지파 반란군 세력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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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팔랑헤당 의용군들의 패악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