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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6월22일 (백)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청주] 먹힘으로써 살리시는 주님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빈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신명 8,2-3.14ㄴ-16ㄱ
† 제2독서 1코린 10,16-17
† 복음 요한 6,51-58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와 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기념 없음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과,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념하고 묵상한다.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로 지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목적 배려로 주일로
옮겼다.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과 성혈 축일이 따로 있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함께 지내 오고 있다.
오늘 전례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깨닫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몸을 모시는 이 미사에
기쁘게 참여하며 우리도 주님 안에 깊이 머무르는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상기시킨다. 마음이 교만해져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구해 내신
하느님을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성찬례의 의미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과 친교를 이루기
때문에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시며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이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주님 만찬 성목요일의 마지막
만찬을 다시 한 번 성대히 기념합니다. 교회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에는
일체의 화려함을 피하고, 성령 강림 대축일이 지난 뒤에 거행하는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예수님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생명에 대하여 감사하고 마음껏 기뻐합니다.
이러한 기쁨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신심 행위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 뒤에 이어지는 성대한 성체 거동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쉽게도 여러 이유로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으나,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많은 교회에서는 이날의 성체 거동을 공동체의 중요한 신심 행사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성체 거동의 화려한 행렬을 하는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체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온 이유를
생각해 보았을까?’ 비록 외적인 성체 거동을 하지 않더라도 성체 성혈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게 하는 오늘 우리도 이러한 질문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리로 나가(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장
시절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성체 거동에 앞서 행한 강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강론에 따르면,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간직하고 그 안에 머물기 위하여 거리로 나간다고 합니다. 곧,
길이신 주님 안에 머물려면 단지 제자리에, 제 보금자리에 ‘머물러서’ 안
되므로 거리로 나선다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근본정신을 ‘머물고 기억하며
걷는 것’이라고 요약하시며 다음과 같이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하여 걸으면서 그분의 행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유념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기억 속에서 걸어야 하고, 기억하면서 걸어야
합니다.” 이 기억은 사랑의 기억일 것입니다. 그 사랑은 안락한 곳에
머무르는 사랑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투신과 아픔을 아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로 나서는 것은, 벗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봉헌하는 미사’를 두고 여러 말이 있었음을 압니다.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과 함께 ‘거리’로 나서게 하며,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길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먹힘으로써 살리시는 주님|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6월22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요한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 6,51-58
먹힘으로써 살리시는 주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마침이
없으십니다. 이 시간 영원히 지속되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28,20).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최상의 방식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사랑자체이며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성체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있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써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아무것도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성 베드로 알칸다라). 따라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지 않으면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빵과 포도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으시고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지체입니다 (1코린12,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말에 ‘아멘’(예, 그렇습니다)
이라고 대답하고 그 동의가 진실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보고서라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은 1814년 성체성혈대축일에 지방에서는 최초로
성체거동(성체현양대회)을 하였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서 성체께 흠숭을
드리고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며 영성체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많이 생기기를 바랐습니다.
올해가 시작한지 100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00년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4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미사를 마치면서 성체현시를 하고
오후4시까지 기도를 이어가며 성체강복으로 마치게 되는데 2013년
5월30일을 시작으로 2014년 6월19일 현재까지 제가 확인한 것만 21차례나
당신의 현존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직 교회의 공식인준을 받지
않았으나 함께 기도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때마다 목격하였고 은혜로움을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당신이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성체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주기 위해 보여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성체를
흠숭하고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이 더 커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원하시는 것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황송하게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영양을 취해야 합니까? 육적인 건강은 음식을 통해
보충하지만 영적인 양식은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 채워집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6,56-57).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 안에서 성체를 영함으로써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1장1절에서는 “한처음에 말씀이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장
14절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렇다면 성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천인 말씀에로
가야하고 말씀을 듣다보면 성체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체와
말씀은 함께 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9개월의 감옥살이 동안 “가장 큰 고통은 미사를 드릴 수
없고, 성체를 모실 수 없는 것이었다.” 고 회상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동료들에게 “ ‘내가 더 이상 미사를 거행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거든,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시오.”하고 미사의 중요성을
말하였습니다.
더더욱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접목할 때 두 나무가 비슷할수록 접목이 더 잘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고해성사는 영혼과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해 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공산정권에 의해 1975년 투옥되어 1988년 석방되신 구엔반 투안
주교님께서는 감옥살이 중에서도 남몰래 손바닥에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하셨습니다. 그는 그 미사에
대해 “이것이 불사불멸의 약이었고 죽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해독제였다...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 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
잔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축성말씀을 암송하며 제 피에 섞인 그분의 피를
통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과 저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미사는 삶의 모두였고 주님과의 하나 됨을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오늘 부속가를 보면 선인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 달라 삶과 죽음
갈라진다.(17) 악인 죽고 선인 사니, 함께 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18)천상의 빵 길손음식, 자녀들의 참된 음식, 개에게는 주지
마라.(21) 하며 합당한 준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디 성체성사를 통하여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영혼을 풍요롭게 하시고 위로와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스스로 먹힘으로써 영양이
되어 주십니다. 밥이 되어 오십니다. 우리는 상대를 밥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이십니다. 우리도 상대를 위한 영양밥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인들은 말합니다. “성체를 단순한 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그분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으로 확신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맛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사랑의 신비’를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성 치릴로).
그리고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잠시 동안 당신이 받아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따라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깊은 믿음을 가지고 모셔야
하겠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영세한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반모임
미사참례를 하셨는데 영성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혹 잘못한 것이 있으시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잔칫집에 오셨으면 기쁘게 음식을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성체를 단순히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설사 큰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손길로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을 의미하며,
사랑을 생산한다.” 고 토마스 데 아퀴노는 말합니다.
사랑에로 이끄는 구체적 성체의 기적은 이탈리아 란치아노에서 일어난
기적을 많이 얘기합니다.
약 1,200년 전 성 바실리오회 소속의 한 수사신부가 미사를 드리면서
성체성사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시는가 의심을 품게 되었는데 그
신부가 막 빵과 포도주의 성 변화를 위한 축성을 마친 순간 빵이 살아있는
살로, 포도주가 살아있는 피로 변하게 된 사건입니다. 12세기가 지난
지금도 살 모양으로 변한 성체는 불그스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된 수정 성작 안에 담겨 있는 성혈은 다섯 개의 핏덩이로 되어
있습니다. 1970년과 71년에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조사를 시행하였는데 그 결론은 이 기적의 피는 ‘진짜 피와 진짜 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은 심장 근육이며 그 살과 피를 보존하기 위하여 화학적인 방부처리를 한
흔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절대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1973년에 세계보건 기구에
검사결과를 제출하여 다시금 핵 의학등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어 연구했지만
결국은 성체의 기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성체와 대면할 때 믿는 이뿐 아니라
깊은 편견을 갖고 있던 사람도 경외심과 존경을 갖게 되는 것은 그분이
살아계심을 말해 준다고 할 것입니다. 성체기적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보이는 표징입니다. 우리 믿음의 상태를 돌아보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체께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란치아노 성지 방명록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추기경 시절에 기록한
기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더욱 더 당신을 믿고, 당신
안에서 희망하고,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부속가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지전능 주 예수님, 이 세상에 죽을 인생, 저 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 하고, 주님 밥상 함께 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24)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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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체는 나의 보약입니다(성 필립보 네리)
* 성체는 보통 음식이 아니고 강생하신 성자 그리스도님의 살과 피입 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잠시 동안 당신이 받아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 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 가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신심을 가지고 모시도록 하십시오(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 곤란을 타개하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기도입니다. 해결책이 없을 때
감실로 가십시오. 곤란을 당하고 있어서 감당해낼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은 감실로 가서 쉬십시오(가경자 알베리오네)
*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이기 때문
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 별로 할 일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우 할 일이 많은
사 람들도 영성체를 자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많이 영성체를
필 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 토마스 모어는 총리를 하면서 매일 미사참례를 하여 영성체를 하였다.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 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 회들을 멀리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스승이십니다”(성 토마스 모어).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죄인의 모습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2014년 가해 6월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 6,51-58
여러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사제연수와 신학생연수, 모두 잘
마쳤습니다.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오늘, 더 열심히 지금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일주일 동안 새벽
카페를 지켜주신 새벽님들께 감사를 드리면서,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결혼식장보다 장례식장을 즐겨 찾는다고 합니다.
장례식장이 더 즐겁거나 좋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함께 웃어주는
것보다 함께 울어주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성인성녀들은 상실의 아픔 앞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진정한
위로를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이러한 위로를
던질 수 있는 사랑을 간직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생전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나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정말로 이 말씀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무관심을 통해 생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런 작은 사랑보다는 나의 작은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주님의 뜻에 맞춰 살아가는
이 세상이 아닌, 자기 뜻만을 서로들 내세우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어떤 때였습니까? 바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었을 때, 제자들의 배신을 알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간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장 많이 간직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가장 큰
선물인 성체와 성혈을 우리 모두에게 내어주신 것이지요.
밀알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맺은 밀의
줄기는 추수를 위해 잘려야 하고, 추수한 이 밀을 가지고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빻아져야 합니다. 빻아져 반죽을 한 뒤에는 뜨거운 불에 구워야
맛있는 빵이 될 수 있지요. 빵이 되기 위한 이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이
안에 자기 포기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희생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희생을 본받아 변화되길
원하십니다. 우리도 맛있는 빵이 되기 위해 자기 포기의 사랑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과 피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래야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인 오늘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합니다. 특히 죄인의 모습에서도 무한대의 주님 사랑을 계속해서 받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나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닮은
우리의 작은 사랑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끈기는 보통 사람을 특출하게 만들고 무관심과 무기력은 비범한
이를 보통 사람으로 만든다(와드).
주님을 중심에 모십시오.
어떤 사람이 13년 동안 더러운 악령으로부터 무섭게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견디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한 번도 시련이 그치기를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오 하느님, 제게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는 승리해서 더러운 악령을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그를 괴롭힌
더러운 영이 이렇게 선포하더랍니다.
“네가 나를 이겼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내가 아니라 나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너를 이기신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가 주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유혹하는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닌 주님이 중심이 될 때, 어떤 유혹이
찾아와도 거뜬이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실 수 있는 오늘이 되십시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체와 성혈, 왕의 광대
2014년 가해 6월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복음 : 요한 6,51-58
< 성체와 성혈, 왕의 광대 >
2005년 말에 개봉해 천만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영화, ‘왕의
남자’를 기억할 것입니다.
광대로 살아가던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공길은 여인보다 더 예쁜 남자 광대입니다. 어느 날 공연 중에 양반이
공길을 원합니다. 이에 장생은 공길을 데리고 도망쳐 한양으로 올라옵니다.
장생은 자신들이 만난 패거리들과 왕을 가지고 놀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이었던 연산군(정진영)은 기생출신 뱀 같은 애첩 녹수(강성연)의
치맛자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것을 풍자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공연이 기대보다 훨씬 히트를
치자 결국 궁궐에서 이 광대들을 잡으러 나왔습니다.
그들이 왕을 풍자하고 비하하였기에 죽음의 위기를 처하게 된 것입니다.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잖소! 우리가 왕을 웃겨보겠소!”
그러나 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왕 앞으로 나갑니다. 물론 왕이 보고 웃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는 말을 들은 상태입니다. 왕은 자신의 이야기인데도
결국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궁궐 안에 살게 해서 왕의 광대로
삼습니다.
이젠 왕을 대놓고 풍자할 수 없게 되자 썩어있던 궁궐 중신들을 풍자합니다.
뇌물을 받고 부정한 정치를 한 이들을 풍자할 때 왕은 좋아하지만 중신들은
당장 광대들을 쫓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 풍자에 따라
탐관오리들을 무참하게 제거해 버립니다.
풍자를 하는 족족 칼바람이 불기 때문에 이젠 경극을 해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 경극을 보고도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었던 것을 상기해 내며 선왕의 여자들을 칼로 베어 죽입니다.
왕 또한 예쁜 남자 광대 공길을 좋아해 그에게 쏙 빠져 버립니다. 왕의
눈물을 본 공길도 왕에 대한 연민이 생겨 궁에서 도망을 치지 못하고 남게
됩니다. 신하들 속에서 아무 힘도 없이 휘둘리고 기생과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왕, 이 왕에 대한 연민이 그의 발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에 장생이 줄을 타며 왕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풍자합니다. 그런 장생을
왕은 달궈진 인두로 눈을 짖어 장님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는데 눈이 먼 장생과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공길은 다음 생을 약속하며 임금과 녹수를 향해 몰려오는 반란
세력들 위로 줄을 힘차게 튕겨 날아오르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떨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왕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광대는 다시 태어나도 광대를 할 것이라며 하늘
높이 치솟았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시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생명을 주는 빵이 당신의 ‘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살’이란 단어는
“말씀이 살이 되셨다.”라고 할 때 쓰인 같은 단어인데 ‘몸’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말씀이 그저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이 되셨음을 말하기 위해 쓰인 육체를 의미하는 구체적인
단어인 것입니다.
가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당신의 살이 ‘말씀’이나 ‘은총’을
의미하는 식으로 해석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살’이
되셨듯이, 그 구체적인 ‘살’을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살을 어떻게 먹느냐고 많은 이들이 그분을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게
되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을 바꾸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을
말할 때 그 몸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자신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지니고 사셨던 살과 피, 즉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체와 성혈을 영할 때마다 약간은 거북함을 느낍니다.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안에 들어오시는 그분이 바로 궁궐을 풍자하기 위해 들어오는 광대와 같기
때문입니다. 광대가 왕도, 애첩도, 중신들도 모두 풍자를 하여 심기를
괴롭히듯이 예수님도 당신 사랑의 성체로써 그렇게 내어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불편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불편합니다.
겸손한 이가 있으면 교만한 사람은 힘이 듭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그 빛
때문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눈을 짖어버리는 것입니다. 내어 쫓고 죽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랑의 완전한 표현인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만 우리가 그 풍자를 이겨낼, 그래서 우리 자신이
변화될 의지가 없다면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올바른 왕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광대, 세상에서
광대보다도 더 낮아진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왕으로써 살던 내가
광대보다 못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아니 참 임금을 몰라보고 내가
왕 노릇한 것을 뉘우쳐야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아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깊이 고백해야 합니다.
그 때에야 그 땅에 피가 스며들어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을 보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던 나의 죄인인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화낼 때 살인죄를 위해 그분이 대신 죽으셨고,
내가 음탕한 눈으로 쳐다볼 때 그분의 눈이 대신 뽑히셨고 내가 오른 뺨을
맞을 때 왼 뺨을 대지 못해서 그분이 대신 맞으신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카인은 아벨이 너무나 싫습니다. 눈에 가시입니다. 카인은 악이고 아벨은
선입니다. 카인이 왕이고 아벨은 광대입니다. 왕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광대가 싫어서 그를 죽입니다. 마찬가지로 카인도 아벨을
죽입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 적셔집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양심으로써 왜 죄 없는 아벨을 죽였느냐고 카인을
나무랍니다. 카인은 자신이 한 짓이 들통이 났습니다. 그 때서야 땅을
포기하고 멀리 떠나갑니다.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한
짓이 들통이 나야합니다. 마치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그렇게 만인 앞에
죄인임이 들통 났을 때 그분은 나에게만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광대가 풍자로 사람들의 간악한 마음이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성체와 성혈도 우리 부당함을 세상에 폭로하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카인을 그리워한다면 다시 그 곳을 돌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카인을 죽이지 않게 표를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내 안의 자아도 뱀도 절대 완전히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면 그 왕이
물러가고 내 안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 그 피를 통해 그분께서 나의
왕으로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와 성혈의 신비입니다.
성체성혈을 받아들이면서도 내 죄가 폭로되지 않는다면 그냥 비타민처럼
영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체와 성혈이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고 믿는 이들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1985년 11월 14일, 전재용 선장이 이끄는 참치 원양 어선 ‘광명 87호’는
1년 동안의 조업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남중국해를
지날 무렵 SOS를 외치는 조그만 난파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난파선 위에는
96명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서로 엉겨있었습니다. 어선 회사로
전화해 보니 상관하지 말고 그냥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선장은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표류하던 베트남인들이었습니다. 전 선장은 회사의
방침을 어기고 그들을 끌어올립니다. 선원 25명이 도착할 때까지 먹을
10일치 식량밖에 없었지만 그것들을 96명과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떨어지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참치 잡은 것이 많이 있으니
그것을 먹으며 버티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성과 아이들에게 먼저
선원들의 침실을 배정하고 노환자와 병자들은 선장실에서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부산에 도착하여 난민소에서 1년 반을
수용되어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된 피터누엔이 19년 만에
전재용 선장을 찾으면서부터였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 선장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전 선장은 그 일로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서 퇴사 통지를 받았고 그 이후에도 어떤 해운
회사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양식업자로 통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한 생동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일이 없다고 적었습니다.
전 선장은 2004년 8월, 자신이 구조해 준 많은 베트남 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미국 공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당시 25척의 배로부터 외면당하며 죽기만을
기다리던 바로 그 성체와 성혈들, 그 가장 보잘 것 없게 된, 우리 양심을
괴롭히던 바로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우리에게 외면당한 채 죽어가는
이들이 곧 광대로써 우리의 죄를 낫낫이 드러나게 만드는 성체와 성혈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와 성혈을 보면서 우리 마음은 풍자를 당할 때의 마음처럼
쓰라려야 합니다. 갈등이 일어야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 두어 계속
우리를 풍자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무관심과 이기심, 세상에 대한 집착,
권력과 돈이나 사람에 대한 애착 등이 만인 앞에 적나라하게 폭로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은 아니라는 양 그냥 지나친 25척의 배가
아닌, 광명 87호처럼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세상에 존재하는 작은
그리스도인들을 내 안에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업무량이 갑자기 폭주하였고 또 개인적으로 준비 중인 것이
있어서 묵상을 매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또 앞으로 몇 주간도 그럴 것
같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럽습니다. 더 낫고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주일 강론은 계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수도회]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 -미사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6월22일 주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신명8,2-3.14ㄴ-16ㄱ 1코린10,16-17 요한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 6,51-58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 -미사예찬-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한 마디로 성체성사, 미사 대축일입니다.
강론 제목 역시 미사가 얼마나 좋은가 하는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
-미사예찬-'이 되겠습니다. 매일 미사의 힘으로 사는 수도자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분명 주님도 오늘 복음에서 이 점을 지적하십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결국 오늘 대축일은 하느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날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주님 승천대축일, 주님 성령강림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 그리고 오늘 주님 성체성혈 대축일, 모두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이시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밥인 생명의 빵으로 오시는 사랑의 하느님, 바로 이게 오늘 대축일의
의미입니다. 오늘 강론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장
시절,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의 성체거동에 앞서 행한 강론에서
착안했습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오늘 대축일의 근본정신을 '머물고
기억하며 걷는 것'이라 요약하셨고(매일미사 책, 오늘의 묵상 149쪽)
저 역시 교황님의 통찰에 그대로 공감했습니다.
오늘 저는 미사가 얼마나 좋은지 이 세 측면에 따라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주님 안에 머무십시오.
주님 안에 머무는 미사시간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관상이 우선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말씀도,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餘)와 휴(休)를 잃어가는 세상입니다.
멈출줄 모르는 것도 큰 병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여와 휴를, 영육의 건강을 회복하는데 미사보다 더 좋은
쉼터는 없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의 사랑의 성체성혈을 모셔야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안에 머뭄으로 완전히 내외적 일치를 이루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바로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주님과 상호내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요 미래에 대한 영원한
보장이 되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미사 아닌 어디서 이런 영원한
생명, 영원한 희망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 선물이 미사입니다.
미사예찬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미사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이요,
미사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기억하는 미사시간입니다.
기억보다 더 영성생활에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요즘 치매환자들이 날로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미사보다 치매예방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정말 깨어 절실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한다면 기억상실의
치매는 없을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본질은 '사랑의 기억'(아남네시스anamnesis)'입니다.
'사랑의 기억' 참 고마운 말마디입니다.
사랑의 기억들로 가득할 때 영적 풍요의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의 기억들로 충만케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사랑의 기억인 아남네시스 미사가 과거를 현재화하고 미래를
현재화하여 지금 여기서 영원한 현재를, 영원한 오늘을, 영원한 생명을,
영원한 행복을 살게 합니다. 영적인 '치매현상(dementia)'을, '기억상실
(amnesia)'예방합니다.
영성생활은 순전히 주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여 현재화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1독서 신명기의 모세 역시 광야여정을 마쳐가는 당신 백성에게
하느님을 기억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광야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일을
기억하여라. 너희를 종살이 하던 집에서 이끌어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타성화된 안주와 나태의 삶에서 매일 엑스도스, '탈출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영성생활에 망각보다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하여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들이요, 매일 미사때 마다 축복의 잔을 마시며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축복의 빵을 떼며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에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한 자녀들 공동체로, 주님 안에서 한 형제들 공동체로 살게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셋째, 주님과 함께 걸으십시오.
사실 걷는 것은 육신의 건강은 물론 영혼의 건강에도 좋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과 하나되었으면 주님과 함께 삶의
여정에 올라야 합니다. 성체거동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렉시오디비나가 들음-묵상-기도-관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의
실행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렉시오디비나의 완성이듯이, 미사 역시 파견에
이어 일상에서의 사랑의 수행을 통한 미사의 완성입니다.
걸으십시오.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머물고 기억한 것이 사랑의 열매를 맺게하는 걸음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향한 우리 삶의 순례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광야여정입니다. 머물고 기억하면서 계속 주님과 함께해야 하는
여정입니다. 제가 성경 표현 중 주목하는 대목이 걷는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서품상본의 성구가 좋습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창세6,24).
에녹의 승천을 말하는 대목인데, 여기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하느님과 함께 걷다(walk with God)'가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광야여정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역시 마태복음 마지막 대목에서 분명한 약속을 주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얼마 전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한 게 있습니다. 그분은 삶을
파도타기에 비유했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순리에 따라 파도타듯해야 삶의
항해여정에서 익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한 마디 덧붙혔습니다.
"삶 자체는 고해도, 축제도 아니다. 파도타기를 잘할 때 삶은 축제이지만
파도에 휩싸일 때 삶은 고해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파도타기를 잘하여
축제인생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로 삶의 파도타기를 잘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어제 만난, 파도타기 대가의 경지에 오른 선배 원로 신부님의 평범한 말씀도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주교님이 용도폐기한 것을 아빠스님이 재활용하셨습니다. 이렇게 불러주어
강의할 수 있음도 감사한 일입니다. 삶을 의무로 알아 억지로 살게 아니라
삶을 즐기며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머뭄-기억-걸음'의 영적 삶의
리듬에 충실함으로 파도타기의 명인이 되어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온 마음을 다해서 성체를 모셔야만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2014년 가해 6월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복음묵상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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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기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기도는 두 말 할 것 없이 미사입니다.
왜 미사가 그토록 강력하고 아름다운 기도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가 매일
변함없이 저질러지는 인간의 죄를 보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시어
봉헌되는 성체성사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끔 피정 지도를 가는 곳이면 강론
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 성체를 모실 자격이 있으신 분은 손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물론 성체를 모실 외적인 자격은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내 질문의 의도는 영성적인 차원에서 그 답을 찾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꼭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이 세상에 성체를 모실 자격이 있어 모시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체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께서 거저 주신
선물임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선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두 가지만 허락됩니다. 하나는 “죄송합니다.
애를 썼지만 또 죄 속에서 당신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는 마음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오신 주님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기억에 있는 상처나 죄가 있다면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모시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니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무 생각 없이, 너무 뻔뻔하게 성체를 모시는 이들이 많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성체를 모셔야만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14년 가해 6월22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 6,51-58
오늘은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 속에 당신의 몸을 담아
주신 성체성사의 본질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제가 있던 본당에는 빈첸시오회가 있었습니다. 빈첸시오의 정신은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웃들과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빈첸시오 회원들은 본당과 지역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김장 김치를 담가서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설날에는
불고기를 양념해서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이발 봉사도
시작하였고,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위해서 차량 봉사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도움뿐만이 아니라, 쓸쓸하고 외로운 분들을 위한
말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신축하는 것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지만, 지역 사회에 있는 소외된 이웃들과 가난한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혼율이 증가하고, 출산율이 감소하며, 자살률이 증가하고 성범죄가
증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족 간에 대화가 사라지고, 주변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물질을 먼저 생각하고,
경제적인 부의 창출을 생각하고, 나만의 행복과 성공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민기 씨가 불렀던‘작은 연못’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깊은 산속 작은
연못에 살던 물고기가 서로 싸웠고, 한 마리가 죽어 한 마리만 남아서
연못을 독차지 하고 잘 살 것 같았는데 결국 물도 따라 썩어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연못이 되었다는 노래입니다. 우리 사회도 성공과 행복,
돈과 명예를 찾아 서로에게 독을 품었기 때문에 세상이 썩어가고 썩어가는
세상에서는 모두가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고 그것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이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배고픈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마리아의 노래의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우리는 2000년 동안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의
그 약속이, 주님의 그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우리는 모두
한 몸을 이룬 다는 것을 믿는다면 지치고, 외롭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늘에서도 살 거라면
2014년 가해 6월22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 6,51-58
하늘에서도 살 거라면
누에는 뽕잎만 먹고도 비단실을 만들고 몸은 번데기 먹거리로 줍니다.
뽕나무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고 한약 민방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뽕차, 뽕밥, 뽕칼국수 그리고 오디술도 담그며 건강해지려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김치 된장 고추장 한글 한국말을 하며 살아야 편히 삽니다.
아무리 나라들이 많아도 둘로 나눠보면 결국 하늘사람과 땅사람이라 봅니다.
땅에서만 살 게 아니고 하늘에서도 살 거라면 먹는 것도 달라야 되지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생명의춤/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2014년 6월 22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요한 6,51-58
생명의 춤
어제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한 기도음악회’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겨울
바다처럼 차디찬 우리 마음속에 잠겨있던 영혼들이 기도 음악 소리에
흥겨워 수도원 성당 내부를 훨훨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피맺힌 절규는 연도와 레퀴엠 기도 음악에 실려 큰
울림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성체와 성혈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얀 밀떡과 붉은 포도주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모시는 우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들이 모인 곳에는 더
충만한 생명의 힘이 춤을 춥니다. 죽음과 거짓의 힘은 생명의 춤 앞에
무너집니다. 일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쌍용 자동차 해직 노동자들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수없이 목숨을 끊었는데, 대한문 앞에서 사제와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거행한 후에는 단 한 사람의 노동자도 목숨을 끊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몸의 기적, 생명의 기적입니다.
생명의 빵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지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립니다. 미사에
와서 성체를 모실 때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기적을 느낍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그러면
제가 곧 나으리이다”는 겸손한 기도로 주님을 모십시다.
부당한 죄인이지만 주님의 선택으로 우리는 생명의 몸이 됩니다.
생명의 춤으로 살아갑시다.
생명의 기운으로 죽음을 넘어 나아갑시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신부님의 복음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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