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이달의 명상
사성제四聖諦 성찰하기
글 무상법현(無相法顯) 스님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평택 보국사 주지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부처님의 가르침 곧 불교는 무엇을 가르치는 종교일까? 부처님의 일생을 통해서 보면 성도 후 첫 설법인 법바퀴 굴림 가르침<(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sutta)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곳에서 행복을 가르쳤다. 어떤 것이 행복인지, 어떻게 해서 행복하지 않은 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되는 지를 가르치셨다. 그 가르침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사성제라고 한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는 네 가지 성스런 진리다. 즉 사성제(四聖諦)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가르침이 바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곧 사성제다. 그래서 이 번 명상의 주제는 사성제 성찰하기로 하였다. 사성제는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문제해결의 키노트(keynote)라고도 할 수 있다. 행복하지 않은 까닭이 문제이고, 그 문제를 해결해서 영원히 행복해지는 가르침이 네 가지라서 사성제이다. 사성제 곧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하나하나 곱씹고 톱아보는 것이 불교를 바르게 하는 것이요, 그것이 실천이요, 명상이며 참선이다. 사성제는 고(苦)성제, 고집(集)성제, 고멸(滅)성제,고멸도(道)성제를 모아서 말하는 것이다. 성(聖)은 성스럽다는 말이다. 고(苦)는 괴롭다는 말이다. 집(集)은 모였다는 말이다. 멸(滅)은 없어졌다는 말이다. 도(道)는 길, 방법이라는 말이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모임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이다. 이 넷을 정확하게 아는 것, 실천하는 것, 깨닫는 것이 불교의 전부다.쉽게 풀이하자면 행복하지 않게 하는 괴로움과 행복하게 하는 괴로움을 없애는 길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왜 괴로운지 알고 어떻게 괴로움을 벗어나거나 만나지 않게 되는지를 알게하는 가르침이다.
괴로움에 관해서 제대로 알고, 괴로움의 모임에 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 괴로움은 문제다.
괴로움의 모임은 문제의 원인과 과정이다. 괴로움이 없어진 상태는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괴로움을 없애는 길은 문제해결의 방법이다. 물론, 이렇게 안다고 해서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해결하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성제의 첫 번째 지분은 괴로움이다. 고성제이다. 괴로움을 규정짓고, 정의하는 것이다. 개념파악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사이에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과의 헤어짐,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과의 만남,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함 이렇게 일곱 가지를 겪는다. 한꺼번에 말하자면 오온(五蘊)이 뭉치는 것이다.’라고 경전들에서 말한다. 오온(五蘊)이 뭉치는 것(五趣蘊)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우리)가 커지려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말이다. 오취온고(五趣蘊苦), 오성음고(五盛陰苦)라고 한자어 또는 중국어로 말한다. 우리말로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온, 오음은 하나로 나타내면 나 또는 나의 모음인 우리다. 둘로 나타내면 몸과 마음 또는 육체와 정신이다. 또는 육체작용(色)과 정신작용이다. 정신작용은 느낌(受),연상(想),의도 또는 마음의 움직임(行), 앎아 냄(識別作用)이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지분은 괴로움의 모임이다. 집성제이다. 경전에서도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진리를 집성제(苦集聖諦)라고 한다. 한자로는 집(集)성제다. 경전에 집착 또는 갈애라고 바로 설명한다. 모음이라는 설명이 없다. 제대로 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모음 또는 모임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 본 뜻이다. 모음, 모임의 원인은 잡음(執) 즉 집착, 갈애이다. 잡음(執)에 의해 모임(集)이 생기고 모임에 의해 괴로움(苦)이 생긴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괴로운 느낌(苦受)이 생기는 것이다. 나쁜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뭉치려면 끄는 힘(引力)이 있어야 한다. 끄는 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는 힘(斥力)도 있다. 성질이 비슷한 것끼리는 일반적으로 서로 좋아서 잡아당긴다. 하지만 밀어낼 때도 있다. 자석의 엔(N)극과 에스(S)극의 경우다. 같은 것끼리 잡아당기는 힘은 응집력(凝集力)이라 한다. 다른 것끼리 잡아당기는 힘은 부착력(附着力)이라 한다.
인도어 집성제는 사무다야삿짜(samudayasacca)라고 한다. 삼(sam)은 ‘잘, 좋게’라는 뜻과 함께 ‘모여, 붙어’의 뜻을 가졌다. 우다야(udaya)는 ‘생기다, 일어나다,벌어지다’ 등의 뜻이다. 삿짜(sacca)는 ‘진리, 좋은 말씀, 법칙’ 등의 뜻이다. 합쳐서 풀이하면 ‘함께 일어나는 법칙, 잘 일어나는 법칙’ 등의 뜻이다. 경전이나, 해설하는 이들이나 제목의 뜻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잘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모음, 모임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 바른 이해, 설명이다.
모음의 원인인 잡음은 느낌(受, vedana)에 관한 것이다. 느낌이 좋은 데로 좇아가는 것을 감각쾌락 즉 갈애라고 한다. 인도어 딴하(tanhaa)이다. 이성, 성에 관한 잡음이 가장 큰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느낌이 좋으면 그 느낌을 계속 이어가려는 욕구가 생긴다. 그것을 존재에 관한 욕구(有愛, bhavatanhaa)라고 한다. 느낌이 싫으면 이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아니 당장 끊으려고 한다. 그것을 무유애(無有愛, vibhavatanhaa)라고 한다. 사람들이 비존재의 욕구라고 풀이해 무슨 말인지 모르게 한다. 한 마디로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살욕구인 것이다. 부존재욕구다. 존재욕구는 이어지게 하려는 욕구이니 계속 살고 싶다는 것, 장수하려는 욕구다. 부존재욕구는 끊어지게 하려는 욕구이니 당장이라도 죽고 싶다는 것, 자살하려는 욕구다. 빠알리어 bhava와 vibhava는 vi의 있고 없음이 차이다.
위빳사나(vipassana)가 ‘나눠서, 쪼개서, 자세히, 잘 본다’는 뜻이 되는 것처럼 vibhava가 잘~의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누고, 쪼갠다’는 뜻이다. 존재, 삶이 쪼개지면 죽는다는 뜻이 된다.
요사이 우리나라의 가장 절실한 화두가 바로 부존재욕구 즉 자살욕구를 줄여주는 것이다. 불교도가 각성해야 한다. 오이시디국가 가운데 자살율 첫째의 불명예가 언제 벗겨질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불명예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죽음을 택해야 하는 현실을 그냥 놓아두는 것은 바로 사회적 타살이다.
사성제의 세 번째 지분은 멸성제이다. 멸(滅)은 말 그대로 없어짐, 스러짐, 사라짐이다. 괴로움의 시작이요 끝인 마음과 몸이 함께 하는 생명이 없어짐 또는 태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음 특히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사라짐을 뜻한다. 괴로움의 반대가 행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개념이다. 괴로움이 없어져서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즐거움,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영원히 지속한다면 진짜, 참 행복이다. 그것을 멸, 인도어로 열반(nibbana, nirvana)이라고 한다. 미래형으로 진행시키는 것이 대승의 정토사상이다. 정토 가운데 서방정토인 극락세계의 교주가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은 음역인데 ‘없다, 아니다’라는 뜻인 아(阿,)와 수명, 광명의 뜻인 미타(彌陀)가 합쳐져서 ‘수명, 광명이 없는 그래서 수명, 광명이 한 없는(endless)’이라는 뜻을 가진 부처님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게 있게 마련이어서 무량수불, 무량광불이라고 부르지만 무생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성제의 네 번째 지분은 도성제이다. 도(道)는 말 그대로 길, 방법이다. ‘멸, 열반에 이르는 길, 방법’이다. 길 가운데 바른 길(正道)이다. 여덟 가지 길이다.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이다.
바르게 보기(正見), 바르게 사유하기(正思), 바르게 말하기(正語), 바르게 행동하기(正業), 바르게 살기(正命), 바르게 노력하기(正進), 바르게 집중하기(正念), 바르게 안정(正定)하기의 여덟이다. 바르게 보고,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고, 노력하고, 집중하고, 안정한다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다. 열반한다는 말이다. 해탈한다는 말이다. 깨끗해진다는 말이다. 걸림 없다는 말이다. 태어날 다음 생이 없다는 말이다. 태어나지 않으니 곧 윤회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당연하게 죽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붓다들이 테어날 때 꼭 같이 읊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팔정도는 실천하는 방법임으로 명사형이 아닌 동사형을 써서 옮겼다. 괴로움은 없애고, 행복 그득한 열반, 해탈이라는 과녁 곧 목표에 적중, 명중하는 길을 걷는 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중도는 첫 설법에서부터 이르셨듯이 바른 길(正道)다. 몸의 눈과도 같고 머리와도 같으며 심장과도 같은 바르게 보기(正見)를 따르기만 하면 바로 과녁에 들어가는 화살처럼 분명하게 열매를 맺는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