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259]권단(權㫜)선생 7絶 書懷
[ 書懷 ]서회-회포를 쓰다
權㫜
宦途猶似厄黃楊 誰記疎狂訪草堂
洞密烟深車馬少 枕書閑臥睡偏長.
환도유사액황양 수기소광방초당
동밀연심거마소 침서한와수편장
벼슬길은 마치 윤년이면 줄어드는 회양목의 재액과 같아,
누가 상도(常道)에서 벗어난 나를 기억해 초당을 찾아오리.
골짜기는 깊고 이내는 짙어 거마가 적은데,
책을 베고 한가하게 누우면 잠이 아주 길더라.
어구(語句)
厄黃楊 : 黃楊厄. 회양목[도장나무]의 재액.
이 나무는 해마다 한 치씩 자라다가
윤년이 되면 세 치가 줄어든다는 속설이 있음.
疎狂 : 너무 수수하고 황당하여 常道 常規(상도 상규)에서 벗어남.
草堂 : 집 본 채 밖 따로 떨어진 곳에 지은 조그만 집채.
車馬少 : 수레나 말이 적음 곧 찾아오는 손님이 적음.
枕書 : 책을 베개 삼음. 책을 벰.
감상(鑑賞)
벼슬길이란 무상한 것이라,
벼슬을 그만두고 한적한 곳에 은거하니 찾아오는 사람이 적다.
편벽된 곳이라 할 일도 별로 없어 책을 보다가 그 책을 베고 잠드니
그 잠 길기도 하다. 지은이의 청백리 행적에 걸맞는 작품이다.
중국 당의 정승 李適之(이적지)도 ‘罷相(파상)’ 시에서
‘爲問門前客 今朝幾箇來
(집사람에게 묻노니 오늘 아침에는 문앞에 손님 몇 녀석이나 오셨던고?)
라 읊어 평소 친하던 벼슬아치들이 찾아오지 않음을 섭섭하게 여겼다.
원문=동문선 제20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서회(書懷)
권단(權㫜) 㫜 = 밝을 단
고려후기 밀직제학, 지첨의부사, 찬성사 등을 역임한 문신.
宦途猶似厄黃楊。誰記踈狂訪草堂。
洞密烟深車馬少。枕書閑卧睡偏長。
벼슬길은 흡사 액년 맞는 황양 같거니 / 宦途猶似厄黃楊
누가 이 소광한 나를 기억해 초당을 찾아오랴 / 誰記疏狂訪草堂
골은 깊숙하고 연기는 깊어 수레와 말이 적은데 / 洞密煙深車馬少
책을 베고 한가로이 누웠으면 잠이 특히 길도다 / 枕書閑臥睡偏長
[주-D001] 황양(黃楊) : 황양목(黃楊木)은 빨리 자라지 않는 나무인데
윤달이 드는 해에는 다시 작아진다 한다.
그러므로 “황양은 윤달 드는 해에 액(厄)을 당한다[黃楊厄閏年].”라는
고시(古詩)가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작가=권단權㫜
회지(晦之), 몽암거사(夢巖居士), 문청(文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지(晦之). 스스로 몽암거사(夢巖居士)라 하였다.
아버지는 한림학사 권위(權韙)이다.
어머니는 잡직서령(雜織署令) 이영(李榮)의 딸이다.
일찍이 숨어 살 뜻을 가졌으나,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장단현위(長湍縣尉)로 벼슬을 시작하여, 1254년(고종 41) 문하녹사(門下錄事)로
나갔다가 재상 유경(柳璥)의 권유로 과거시험을 보아 급제하였다.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예산(禮山)·승주(昇州)·맹산(孟山)·개천(价川) 등의
부사를 역임한 이래 중외에 기용되었다.
뒤에 동경(東京)을 유수(留守)하면서 중앙에 바치는 능라(綾羅)를 지나치게 거두어
저장하였던 갑방(甲坊)을 철폐해 지방민의 부담을 경감하였다.
또한 백성의 조세를 훔치는 사호(司戶)가 있자
아문에서 격살해 다시는 범법하지 못하게 하였다.
3도의 안찰사를 역임했는데, 경상도안찰사 때에는 진주부사 백현석(白玄錫)과 보주부사(甫州副使) 장전(張悛)의 부정을 탄핵하였다. 국자좨주(國子祭酒)·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겼을 때에, 진주지방관 최참(崔旵)이 바친 능라가 조잡해 왕이 읍리(邑吏)를 고문하게 하였더니, “권단이 안렴사가 되어 실값을 감한 까닭”이라 대답해 최참과 함께 파직되었으나, 백성의 폐단을 제거했다는 공으로 복직되었다.
1272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원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279년(충렬왕 5)에는 충청도도지휘사(忠淸道都指揮使)가 되어 전란 중의 산적한 문제를 처리하였고, 당시 미결 중이던 농민의 송사를 맡은 7인 중의 하나였다. 1284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로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김주정(金周鼎)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권한공(權漢功)·김원상(金元祥)·최성지(崔誠之)·채홍철(蔡洪哲)·백이정(白頤正) 등 명사를 배출하였다. 1287년 밀직학사(密直學士)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남에게 영합하지 않아 3품에 제수된 지 10년이 넘어서야 승지에 제수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해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서 치사(致仕)하고, 뒤에 다시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하였다.
권단은 성품이 청렴, 겸손하고 불교를 독신하여 만년에는 선흥사(禪興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