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편집: 묵은지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국가 정책이나 인식의 변화에 따라 여성들의 지위와 이에 상응하는 발언권이 과거에 비해 많이 높아진 것은 비록 감각이 무뎌진 묵은지였어도 피부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워낙 500년을 넘게 뿌리를 내린 유교적 봉건주의 사상에 젖어왔던 터라 아직도 여성들에 대한 권위적인 차별 의식으로 직장이나 가정 등 생활 주변에 일상적으로 간간이 불거져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조선의 이념으로 삼았던 유교 사상을 중요시 했다면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려는 노력이 따라야 하거늘 역사와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만 앞세웠을 뿐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은 커녕 시대에 동떨어진 의식을 고집하여 도리어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문제들을 만들어 내며 때때로 이해관계에 따라 크고 작은 사회적 충돌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최근에 일고있는 여성들의 미투운동은 그동안 일방적으로 당하고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숨기기에 급급했던 개인의 성문제를 세상에 표출시킴으로써 여성들 스스로 발벗고 나서서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사회 차별을 걷어내고 뿌리깊게 박혀있는 잘못된 편견과 인식을 바로 잡아가려는 노력으로 여겨져 마치 우리 사회의 변화된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 생활에 토착화된 유교적 생활 태도와 관습은 대개의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불평등한 삶을 살도록 알게 모르게 강요하다시피 했는데 오늘날 시대가 아무리 성 평등에 대한 의식화 시대로 바뀌었다지만 워낙 뿌리깊게 되새김질 해 온 악습의 풍조는 유교 사상을 빙자한 가부장 위주의 이기적이고 차별적인 관념으로 아직까지도 수많은 여성들에게 가혹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불교 문화가 국가와 사회적 배경이었던 고려의 몰락은 단순히 조선이란 왕조 교체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유교의 도입으로 사회적 이념과 관습까지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동안 고려의 지도층과 상류 사회에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여겼었던 불교와 도교 등 전통적인 토속 신앙을 밀어내고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들여와 명맥을 이어왔던 성리학의 유교를 조선의 사회적인 이념으로 삼으며 배불숭유의 정책에 힘을 쏟았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자 정도전, 권 근 등으로 하여금 유교의 정착에 힘썼는데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등 유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하면서까지 노력을 기울였으나 연이어 일어난 쿠데타로 유교가 일시적으로 시련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권좌를 사이에 두고 오락가락하는 훈구파의 살육전에 지친 유학 학자들의 사림파가 이를 비난하며 정계 전면에 나서게 되고 또다시 사화를 여러번 거치는 과정에서 서서히 유교가 조선의 틀에 맞춰지며 국가와 사회적 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유교의 핵심 윤리이기도한 충(忠), 효(孝), 열(烈)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백성과 신하를 다스리는데 매우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바람직하고 안정된 덕목이었기에 이러한 유교 이념을 근간으로한 조선 왕조는 유교 국가로의 재편을 위해 정책적으로 충신과 효자, 그리고 열녀를 권장하고 이들을 선별하여 후한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열녀라는 말의 본래 순수한 뜻이라면 부모에 효를 다하고 부부간에 최선을 다하는 여자라는 말로 그야말로 더이상 바랄 것 없는 최상의 의미겠지만 조선 사회의 열녀는 남존여비(男尊女卑)가 그대로 배어있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사뭇 여성의 희생만을 강요당한 불행한 역할이었으며 이는 조선 사회에서 열녀라는 칭호를 얻어야 가문이 특혜를 받아 융성해진다는 것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조장을 하면서까지 여성들을 그 악습의 굴레 안으로 끌어들여 아까운 목숨을 잃게 하거나 평생 수절이라는 틀에 갇혀 고통을 인내하며 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어른을 공경하고 집안의 화목, 남편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정절을 지켰던 열녀를 칭송하는 일은 조선 시대 훨씬 이전에도 있었는데 특히 고려 시대에도 사대부들에 의해 이러한 열녀에게 상을 내렸던 기록이 세종 때 만든 삼강행실도나 조선 초기에 기록한 고려사 등에 남아있어 이전에도 남존여비 사상이 사회적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국가에서 권장하고 상을 내린 것은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조선시대부터라 할 수 있는데 조선은 개국 당시 조선 사회의 통합 차원에서 중국의 유학을 선택함으로써 기본적으로는 나라의 정사를 원활하게 펼칠수 있는 원천으로 삼고 그 이념을 바탕으로 가부장권을 옹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대부분이 가부장의 권위와 남성 편의 주의로 일관된 것들이 양반들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양심에 걸렸는지 여성들을 배려하여 처음에는 남편도 정절과 신의를 지키라는 뜻으로 의부(義夫), 아내는 정절을 지키라는 뜻으로 절부(節婦)라 하면서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출발한다라는 중용의 논리를 내세워 부부의 지켜야할 도리와 의무를 남편과 아내에게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강조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부의 도리라는 상호 의무 개념의 기조는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양반들의 자기 논리에 차츰 변질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일방적으로 아내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남정네들의 자의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인 억지 열녀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물론 양반들이라고 다들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권세를 누리는 대개의 남정네들은 자신들은 지키기도 힘든 유교의 도리를 아내에게 열녀라는 올가미로 씌워 모두 떠넘기고 자기들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갖은 첩질에 기방 출입을 일삼았으니 사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들의 뻔뻔하고 표리부동한 처사는 후세에 지탄을 받아 입이 열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조선의 양반가 사내들은 출세가 마치 이런 호사(?)를 당연하게 누리기 위한 것이기라도 하듯이 벼슬길에 오른 양반들은 거의가 첩질에 풍류로 세월을 보낸 반면 여자로 태어난 것이 무슨 큰 죄인양 여인들은 규범으로 옭아 만든 현모양처의 덫에 걸려 하루도 맘 편한 날 없이 살아야 했으며 행여 자신의 경거망동으로 집안의 흠이라도 잡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올곧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여자가 젊은 나이에 청상 과부 신세가 되어도 청춘의 육신을 억누루며 조신하게 인내하며 참고 살아야 하고 행여 재가를 한다는 것은 자식들에게 누가되어 출세길을 막게되니 어쩔수없이 기나긴 밤을 허벅지 꼬집어가며 눈물로 평생을 살 수 밖에 없었기에 조선 여인들은 저마다 가슴에 한(恨)이 맺혀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조선 사회는 열녀상으로 일부종사에 수절을 요구했으며 시집 조상의 제사나 시부모에 봉양 잘하고 자식들을 잘 키우고 건사하는 것은 물론, 살아있는 남편일지라도 병들거나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에는 절지한 손가락의 피를 마시게 한다거나 자기 살을 도려내어 먹이기까지 해야 했으며 심지어는 앞서 죽은 남편을 따라 애꿋게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남편을 먼저 보낸 여인이 결국 이런 무모한(?) 일을 저지르고 나서야 나라에서는 가상하게 여겨 큰 상을 내리고 마을입구에 여봐란듯이 비석이나 홍살문을 세워 많은 여인들에게 본(本)을 보이며 이를 따르도록 하는 묵시적 강요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열녀로 나라에서 상이 내려졌던 경우를 살펴보면 시기적 상황에 따라 사뭇 다양하게 그 유형이 변화한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전쟁 중에는 적으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거나 끔찍한 얘기지만 심한 기근이 오거나 먹을 것이 없었을 때에는 병이 든 남편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여 피를 먹이거나 살을 베어내 먹여 살려냈다던지 하는 것을 열녀라 했습니다. 또한 남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자신도 자결로 운명을 같이 했다거나 도적이나 맹수로부터 목숨걸고 남편을 구했다는 등 이같은 살신성인 같은 열녀가 나타나면 나라에서는 그런 열녀들의 행적을 포상하며 남편 섬기기에 좋은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이같이 무모한 행위를 비판하는 학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호암 문일평(사학자)은 남편잃은 부인의 죽음을 절부라 하며 나라가 포상하고 장려하는 것은 억울한 죽음을 조장하는 옳지않은 짓이라 하였으며 다산 정약용(실학자)은 제명대로 죽은 남편을 따라 멀쩡한 아내가 따라 죽는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며 무지한 정절의 허위성을 나무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열녀는 끊임없이 강요되어 온 유교적 여성관의 학습 결과로 열녀상의 모습이 때를 거듭 할수록 그 양상이 과해졌는데 조선 초기에 양반가인 상층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던 열녀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차츰 사회전반적으로 열녀 이데올로기가 하층부에까지 침투되어 조선 사회에 널리 일반화 되어 갔습니다. 이는 권력층에서도 유교적 가부장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정책적으로 삼강행실도 책자 등을 발행하며 끊임없이 권장을 해왔었고 조선 사회가 유교적 윤리관으로 이에 동조되며 열녀 정신을 모범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부계혈통주의가 부른 과도하게 조장된 사회적 인식은 과열화 현상까지 일으켜 19세기까지 열녀의 모습은 끊이지 않고 나타났습니다. 더군다나 열녀를 열망한 나머지 굳이 나설 처지도 아닌 상민이나 천민계급에서까지 열녀가 나옴으로해서 그 수도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이상 현상까지 벌어져 어지간해서는 열녀축에도 들지 못하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할 정도의 강도높은 열녀상이 만들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열녀라 하면 당연히 죽은 남편의 뒤따라 자결을 택해야 했으며 나라에서조차 이를 열녀로 포상하는 것은 남성본위의 성리학적 이상이 빚어낸 강요된 희생이며 묵은지가 생각해봐도 그저 안타깝고 어리석은 행위였습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잘못 책정된 정책이나 사회적 관습의 오착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나타나게 되는데 문제는 그 부작용 또한 사회적으로 여파가 커 예측하기 힘든 결과를 불러 오기도 합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세상이 문명화되고 첨단 과학시대로 들어서면서 과거의 열녀상과 같은 극단적인 일은 잠잠하게 침묵하게 되었고 열녀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인식 또한 생각보다 그리 큰 거부감을 갖지는 않아 다행이지만 간혹 비아냥 거리는 소리로 '열녀 났네 열녀 났어'라며 비꼬는 말투로 사용되고 있기는 합니다. 요즘은 도리어 부부관계가 너무 현실적이다보니 각박함 마저 느낀 나머지 때로는 과거의 열녀와 같은 여인을 그리워 하는 일부 정신나간 남정네들의 볼멘 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그들도 그 옛날 조선의 어머니들이 한이 맺혀 절규하는 원망의 소리를 떠올린다면 금방 마음이 숙연해 질 것입니다. 같은 여인들에게도 우러러 보였던 열녀를 나라에서 조차 여성 최고의 미덕이라며 장려를 하였지만 일방적인 법의 편견과 불평등한 사회적 핍박까지 감수하며 죽어간 열녀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역사의 또다른 오류가 되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슬프고 가슴아픈 과거의 모습으로 기억될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