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하느님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벗 부부와 대화를 나누던 중 신앙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그중 하나는 ‘법 규정과 상식’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정확한 말 마디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벗이 말하고자 한 핵심은 대략 이랬다. ‘조카가 숙모 생신이어서 고기를 해 가지고 왔는데, 금요일이니 금육을 지켜야 한다며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미역국만 들이키는 숙모. 나는 그런 법을 강요하는 신앙이라면 상식이나 정도와 거리가 멀다고 본다.’
‘2017년 대한민국의 정의와 화해를 위한 종교의 역할’을 주제로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가 지난 1일 연 제17회 가톨릭 포럼에서 한 청중이 이런 요지의 질문을 했다. ‘교회의 사회 참여(또는 현실 참여)가 너무 지나친 것 아닙니까?’ 그러자 다른 청중이 반대로 이렇게 물었다. ‘오히려 교회의 현실 참여가 너무 소극적이라고 보는데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혀 다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이 두 이야기에는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 나의 신앙관(구원관) 또는 나의 하느님관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최근에 읽은 한 책의 내용이 떠오른다. 그 책에서는 사람들이 믿는 하느님의 유형을 몇 가지로 분석하고 있는데 대략 이러했다.
자판기 하느님 : 자판기에 돈을 넣고 단추를 누르면 원하는 물건이 나오듯이 하느님은 내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청(헌금, 기도, 희생)을 드리면, 그에 맞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기도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면 고장 난 자판기를 두드리듯이 하느님을 불평한다.
시계공 하느님 : 하느님은 시계를 만드는 시계공과 같은 분이다. 시계가 완성돼 돌아가면 시계공으로서는 할 일을 다한 것처럼 하느님도 세상을 그렇게 만드신 후에는 관여하지 않으신다. 나머지는 세상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뷔페 하느님 : 하느님은 잘 차려진 뷔페와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취향에 맞게 음식을 고르듯이 그렇게 하느님을 대한다. 물론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경찰 하느님 : 하느님은 과속, 신호위반, 주정차위반 등을 단속하는 경찰과 같다. 법규를 어기면 어김없이 벌금을 매긴다.
생명보험 하느님 : 하느님은 지금 필요한 분이 아니다.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 보험 처리를 위해 필요한 분이다.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미리 하느님 보험을 들어놓는 것이 낫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이 다섯 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할까. 혹시 이 가운데 하나가 내가 믿는 하느님과 일치한다면, 그 하느님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하느님은 어느 무신론자가 지은 책 제목처럼 ‘만들어진 신’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교회는 하느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하느님, 곧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라고 가르친다. 교회 전례력으로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오늘은 우리에게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이신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우리 신앙과 삶을 쇄신하도록 권고하는 주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기도하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실상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