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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묵상글 ( 성주간 수요일. - 철면피 되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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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철면피 되기
오늘 독서는 야훼의 종의 세 번째 노래입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강인해지는 종의 노래입니다.
그까짓 것들로는 내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는 종의 노래입니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야훼의 종이라면 모욕과 수치를 줘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야훼의 종이 아니면 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인간적으로도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철면피가 되거나 모욕을 줘도 아예 받지 않거나
모욕을 줘도 모욕으로 받지 않으면 됩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준다고 다 받느냐입니다.
우리는 줘도 싫으면 받지 않고,
좋아할지라도 해가 되면 받지 않지요.
제가 몇 년 전 막노동을 할 때 저희들이 규정에 어긋나게 일을 하였는데
그것을 현장 소장이 모니터로 보고 우리 직속 상급자를 질타하고
우리는 그에게 아주 심한 욕을 먹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모두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 잡부 중에서도 말단인 제가 욕을 해도 욕을 먹지 않으면 된다고,
'그까짓것' 하면 된다고 하니 모두들 얼굴빛이 환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나이 많아 힘도 없고 일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저를 무시하던 사람들이 저를 다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욕을 해도 듣지 않은 것으로 하거나
욕을 해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단련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오늘 야훼의 종의 경우는 이런 인간적 모욕 대처를 훨씬 넘어서는 거지요.
제자의 귀를 가지고 듣습니다.
"주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제자의 귀는 스승의 말을 듣는 귀이고,
스승의 말만 듣는 귀 곧 다른 말은 듣지 않는 귀입니다.
스승의 말 외에는 다 쓸데없는 말이기에 듣지 않는 귀입니다.
스승의 말 외에는 칭찬의 말도 쓸데없는 말인데
모욕과 수치를 주는 말은 더더욱 쓸데없는 말이지요.
이는 남의 말을 교만하게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의 말이 너무 소중하기에 그 말을 따르다 보니 다른 말은 쓸데없어진 겁니다.
그런데 스승의 말은 딱 하나, 사랑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슬픔과 괴로움도 사랑하는 것이 더 높은 사랑입니다.
고통을 능가해버리는 사랑,
고통 때문에 더 불타는 사랑을 깨우쳐주시니 수치당하지 않고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고 오늘 야훼의 종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앞에서 모욕당하지 않는 방법 중 하나가 철면피가 되는 것
곧 얼굴의 피부를 쇠처럼 만드는 것인데
이것이 영적 철면피 아니 영적 차돌피를 만드는 법입니다.
쉽지 않지만
피할 수 없도록 주시는 고통을 피하지 않고 사랑함으로써
조금씩 그리고 나날이 우리의 영적 피부가 두꺼워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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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4월 13일 성주간 수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하십니다.’ 하여라.”(마태 26,17-19)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첫날, 곧 파스카 축제가 바로 코앞에 다가온 날 저녁에 주님께 와서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올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말만 보아도 그분께는 집도 없고 살 곳도 없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추측하건대 제자들에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집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분을 그리로 청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속세의 재산을 모두 포기한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왜 파스카 축제를 지내셨을까요? 당신께서 율법을 적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모든 면에서 마지막 날까지 보여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모르는 사람에게 제자들을 보내신 것얼까요? 당신께서 고통을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이 일로 보여 주려 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그 사실이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기꺼이 고통을 당하시려 한다는 것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대성당을 위한 돌 하나
이런 일은 그대에게 놀랍고도 너무 과감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감한 일을 감히 말할 필요가 있다. 택스트의 의미는 만일 그대가 공헌을 기피하면, 만일 그대의 내밀하고도 개인적인 주석학으로서 보편적인 주석학의 충만함에 기여하지 않으면. 그 총체적인 충만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주석학에 신비체의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공헌을 보탤 것이기 때문이다.(109)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4월 성령 열매성월 2주간 인내 / 친절 /성실✝️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7-10장
✝️ 1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부 고대 그리스도교
제 2기 : 312-60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그레고리오 대교황까지
제4절: 고대교회에서의 수덕과 수도생활
위대한 창시자들:
파코미오(287-347)
파코미오는 더 일보 전지하였다. 그 역시 은수자로서 시작하였다(308년경). 그러나 320년경에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다. 이때 그는 근접하여 있는 작은 독방들을 합쳐서, 그곳의 거주자들에게 공동생활을 하며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 최초의 수도원은 나일 강변의 타벤니시(Tabennisi)에서 탄생하였다. 그것은 작은 독방들이 많고 담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집이었다. 파코미오는 아홉 개의 남자 수도원과 두 개의 여자 수도원을 창셜하였고, 마침내는 9천 명의 수도자들을 자신의 수도원 연합에 통합하였다. 그는 이 공동체에 기도와 일상생활을 위한 규칙을 만들어 주었고, 능숙한 조직화를 통해서 공동채의 생계까지도 배려하였다. “수도자”(Monachus : 혼자 사는 사람)라는 명칭은, 본래 이러한 생활양식에 적합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독방에서 침묵과 묵상을 통하여 단독생활을 하였으므로, 이 명청은 그러한 뜻으로 변해 갔다. 파코미오는 공주생활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 두 종류의 수도생활은 이집트에서 동방의 전 지역으로 신속히 전파되었다. 대 바실려오(+379)는 공주 수도생활에 규칙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은 후에 동방의 수도생활 전체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은수생활도 동방에서 유지되었고. 여러 가지 특이한 극단적 형식으로 - 기둥 꼭대기에서의 고행자 또는 담으로 둘러싸인 곳에서의 고행자 등 - 존속되었다.
서방 사람들은 아타나시오룰 통해 수도생활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가 트리어로 추방되었을 때(335), 두 명의 수도자가 그를 동행하였다. 후에 그가 쓴 「성 안토니오의 전기」가 알려진 것이 그 이념의 보급에 기여하였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주교,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투르의 마르티노는 수도생활을 열심히 장려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타가스테 또는 히포에 지신이 세운 성직자 공동체를 위하여 서방 최초의 수도회 규칙을 썼다(388/389와 391/393). 그것은 중세 전성기 때 베네딕토가 집필한 규칙에 잠시 밀려났으나, 그후 다시 큰 의의를 얻었고 현재 아우구스티노회의 규칙으로 존속되고 있다. 그후 이집트를 방문한 적이 있고 또 415년경에 마르세유 근처에 성 빅토리오 수도원을 세운 수도자 요한 카시아노는 두 개의 귀중한 묵상서를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규칙서로도 간주될 수 있었다. 그러나 참된 형식의 규칙서는 누르시아의 베네딕토가 서방의 수도생활을 위하여 처음으로 작성하였다.(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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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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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3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해왔던 부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둘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각방을 쓴 지 오래되었고, 결혼생활이 최악이었다고 서로 말합니다. 진작 이혼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에 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때 깨끗하게 갈라지자고 약속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다시 생기게 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남편이 치명적인 암에 걸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서로에 대한 분노는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까지 잘해 주지 못한 미안함,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완고함이 비로소 보인 것입니다. 이제 연애할 때의 감정으로 서로를 위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절대 사랑할 수 없다고 했던 그들에게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암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통해 상대방을 새롭게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바뀌어야 사랑이 생기는 것이라, 내가 바뀌어야 사랑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변화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내 주변의 변화가 비로소 찾아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변화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찾는 변화를 말이지요. 그 안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면서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질문을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넘긴 유다도 똑같이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25)라고 대답하십니다.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유다와 같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팔아서 자기 세속적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적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가 필요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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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부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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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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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은전 30냥에 팔려 배신당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배신자에게 마지막까지 인정을 베푸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유다야, 네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묻지만, 그는 “주님”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가 올리브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하고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하고 맙니다. 그는 뒤늦게 후회는 했지만, 결국 자책과 죄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다가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채워주지 않자, 자신의 그릇된 신념과 이상을 고집한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라는 우상을 섬긴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녕, 진정한 혁명가는 자신이 먼저 혁명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혁명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을 쫒는 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24)
이 말씀은 비단 유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유다처럼,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을 배신하는 줄을 알면서도 악에 조정당하고 있고, 오늘도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건져주십시오.”라고 자비를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주님!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게 하소서.
생각을 움켜잡기보다, 생각에 붙잡히기보다, 생각을 바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조정 당하게 하소서.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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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아니겠지요?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행려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였는데 분명, 아침미사 참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 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파스타를 먹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본인을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구석에는 이제 사제관에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 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약속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혼인계약으로 새 가정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약속들, 부모와 자녀, 이웃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유다를 쉽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고 고백한 한상봉씨의 말씀이 크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입니다.
"혀로 예수님을 팔지 마십시오." 유다는 은돈 서른 닢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짓을 합니다. 서로 험담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험담할 때 그 사람은 하나의 물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유다가 한 짓입니다. 험담할 때, 다른 사람의 껍질을 벗길 때에 바로 유다가 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맙시다."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유다는 마음이 닫혀있었습니다. 이해심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우정이 없었어요. 우리도 역시 남들에 대해 슬데 없는 말을 할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으며 모든 것이 시장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친구와 친지를 팔아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청합시다. 친구에게 용서를 청하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껍질을 벗기지 말고, 아무도 험담하지 않는 은총을 청합시다. 어떤 사람에게 결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 입으로 정의를 이루려고 하지 말고, 그를 위해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그를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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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내부의 배신과 갈등이 주는 영적인 효과에 관하여
오늘 독서는 고난받는 종의 세 번째 노래입니다. 이사야가 전해준 메시아 예언 가운데에서 메시아의 수난을 가장 실감나게 내다본 대목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배신할 것임을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공표하신 대목으로서, 메시아가 겪는 수난이 비단 바깥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안에서도 얼마든지 올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박해자들이 주는 모욕과 이로 인해 군중 앞에서 당하는 수모가 외적인 수난이라면, 믿었던 제자의 배신과 이를 눈치채지도 못하는 나머지 동료 제자들의 무관심은 내부의 수난입니다.
독서의 메시지를 복음의 상황에 적용하면, 모욕과 수모 같은 외부의 박해도 고통스러운 아픔이기는 하지만, 내부의 배신과 무관심도 마음 아프게 하는 고난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사야는 외부나 내부에서 메시아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난을 마치 옆에서 보는 것처럼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가하는 박해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 고난을 받아들이는 메시아 예수님의 자세를 더욱 실감나게 전해 주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메시아의 자세를 자신을 낮추고 비우시는 자기비허(自己脾虛)의 영성으로 고백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당신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자기비허의 영성으로 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허물과 탓을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일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이 고통을 참고 기다려주자면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비우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실 때, 아마 당신의 말씀을 듣던 군중 가운데 열성과 신앙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셨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밤새워 기도하시며 고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고르고 골라서 열두 명만 뽑으셨을 텐데도, 이 중에서 배신자가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눈치채시고도 발설하지 않으시다가 오늘 복음에서 처음으로 발설하신 것인데, 정작 당사자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카리옷 유다는 스승을 배신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나머지 제자들마저,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고 있습니다. 황당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지목해서 배신을 시킬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추론해 보자면, 나머지 제자들도 설령 자신이 배신자로 지목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양심이 찔릴 건수가 한 가지씩은 다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죄다 허물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들을 부르시고 함께 지내시며 참아 받아주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드셨을른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저는 아닙니다!” 하고 자신있게 대답한 사람이 없었다는 상황 자체가 예수님을 짓누르는 십자가였을 것입니다.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3년 동안이나 사도로 양성받으면서 종종 엇박자를 내곤 했었습니다.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서 깨달음이 굼뜨다거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보다 못하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고, 그 중에서도 세 번에 걸쳐서 그 중요한 수난과 부활 예고를 하시는 자리에서조차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서열 다툼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몰이해와 무관심, 그리고 얄팍한 믿음은 예수님께 또 다른 십자가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기다려주셨습니다. 심지어 배신할 눈치가 뻔히 보였던 유다에 대해서도 먼저 내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어코 배신의 길을 가려 하자,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하고 놓아 주셨습니다. 그의 배신으로 인해 당신이 당해야 할 고초가 뻔히 내다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겪으셔야 했던 또 다른 고난이요 짊어지셔야 했던 또 다른 십자가였습니다. 그랬기에 나중에 부활하신 스승을 만난 제자들이 대오각성(大悟覺醒)을 하고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지닌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도들 상호 간에 빚어지는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에 대한 살아있는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내부의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어려움이 크기는 비록 작아 보여도, 느끼는 어려움의 정도는 더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내면을 관상해 보면, 내부에서 주어지는 십자가는 마찰력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그 어떠한 어려움도 없이 평탄하고 수월하다면 마치 미끄러운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걷기가 어려울 수도 있는데, 내부의 어려움이 우리의 영적 행보에 마찰을 빚게 만들어서 자기비허의 영성으로 우리 스스로를 내적으로 알차게 영글도록 만들어주는 영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부든 내부든 당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사다리 삼아서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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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맹자는 우리에게는 4가지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입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하곤 하였습니다. 맹자가 이야기한 4가지의 마음이 없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욕망에 눈이 어두워서 충실한 장군 우리야를 죽게 한 것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시비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한 것은 겸손해야 하는 사양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늘 풍족하였고, 좋은 옷을 입었지만 죽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불쌍한 라자로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는 불쌍한 사람을 돌보려는 측은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수렁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끌을 빼주려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의 위선과 허영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마음인 수오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 성유축성미사, 주님 만찬 미사, 현양제대 묵상, 십자가 경배, 부활성야미사를 성주간에 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유다는 부끄러운 마음인 수오지심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릴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고난을 가슴아파하고, 마음에 새길 것입니다. 2022년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을까요? 예수님 수난의 길에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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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 영원한 도반, 주님과의 관계 -
내 평생 삶의 우선 순위는 매일 강론입니다. 내 삶의 마지막 보루요 하루하루 삶의 의미입니다. 허무하게 사라가는 날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새하늘, 새땅의 하루를 살기위한 노력입니다. 내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늘 새로운 시작의 하루를 뜻하는 강론입니다.
강론중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강론 제목입니다. 쓰다보면 반복되는 제목도 많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제목은 강론의 “눈(眼)”과 같고 강론 속을 드려다 보는 “창문(窓門)”과 같습니다. 요즘 삼일째 복음에 등장하는 배신자 유다요, 오늘 복음은 유다의 배신이 노골적으로 시작됩니다. 여기 유다의 삶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삶의 중심-영원한 도반,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유다는 제자공동체의 돈과 직결된 살림꾼으로 수도공동체로 말하면 당가(재무)와 같습니다. 참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소임으로 믿음 좋고 유능하며 신뢰를 받는 정직한 사람이 당가(재무)를 맡습니다. 참으로 내적으로 메말라지기 쉬운 소임이라 누구보다도 기도도 많이 해야 되고 하느님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수도공동체에서 33년 당가(재무)를 맡고 있는 안마르코 수사가 전형적인 재무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당가 소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면 그 삶의 진정성은 저절로 검증된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제31장 수도원의 당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항목을 보면 당가의 자질과 위상은 공동체의 지도자 아빠스의 역할에 필적합니다. 몇절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수도원의 당가로 선정될 사람은 공동체에서 지혜롭고, 성품이 완숙하고, 절제있고, 많이 먹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부산떨지 않으며, 욕을 하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낭비벽이 없고, 오히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전체 공동체를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
형제들을 슬프게 하지 말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무엇을 부당하게 청하더라도, 무시함으로써 그를 슬프게 하지 말고, 부당하게 청하는 사람에게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 거절할 것이다.
사도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여 자기 영혼을 보살필 것이다. 온갖 염려를 다하여 병자들과 어린이들과 손님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것이니,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심판의 날에 헴바치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어지는 전 장도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1500년전 이런 규칙이 나왔다는 자체가 불가사의의 신비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깊은 사랑과 지혜를, 영성을 배울 수 있는 장입니다. 이런면에서 유다는 이런 당가직에 많이 못 미쳤던 듯합니다. 마침내 결정적 유혹에 빠져 잠시 탐욕의 무지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26,15-16)
유다의 소행을 알아챈 주님의 말씀이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갈 것이지만 유다 역시 결코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얼마나 유다가 딱했으면 이런 불행선언일까요! 유다야 말로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유다의 불행에 결정적 원인은 무엇일까요? 삶의 중심,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 관계가 대단히 빈약했다는 것입니다. 스승을 보고 배우는 것이 제자입니다. 예수님께 보고 배우는 것에 정말 소홀했던 유다같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은 그대로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바로 이런 '주님의 종' 예수님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고 배워야 했을 유다입니다. 무엇보다 유다는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을 모범으로 삼아 사랑과 신뢰의 우정 관계를 날로 깊이했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종처럼 하느님께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며 늘 하느님과 깊은 사랑과 신뢰중에 살아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다의 결정적 실패인생의 원인이었습니다. 공동체 형제들 누구보다도 당가인 유다는 더 많이 기도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야 했습니다. 바로 삶의 중심인 우리의 평생 도반이자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데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큰 도움이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2년전 6월달 예수성심성월 주님과의 깊은 우정을 소망하며 신록 짙었던 수도원 하늘길 가로수곁에서 써놨던 “당신 곁에 서면” 이란 시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늘 푸른 가로수는 영원한 도반인 주님을 상징합니다.
“당신곁에 서면
하늘 높은 줄 알겠다
하늘 향내가 난다
하늘 향해 우뚝선 아름드리 침묵의 나무가 된다
늘 설렌다
늘 새로워진다
늘 푸르른 정신이 된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고 싶어진다
혼자가 아닌 둘이 된다
늘 푸른 가로수같은 당신 곁에 서면!
어제도 오늘도 날마다 당신과 함께 걷는 하늘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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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슬픈 배반의 메아리 ♣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가장 친밀했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분을 배반했다는 슬픈 사실이 부각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갖가지 표징과 행적을 목격하면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배웠다. 그러나 유다는 겨우 종 한 명 값인(탈출 21,32 참조) 은전 서른 닢에 그분을 팔아넘겼다. 예수 수난사의 열쇠가 되는 “넘겨주다”라는 말이 다시 한 번 되풀이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형에 개입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장 친밀하게 함께 지내던 제자의 손에 의해 ‘철저한 무력함’에 내맡겨지게 된다.
과월절 전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축제를 준비하고, 그분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르심에 따라 그곳에 모이게 된다. 누가 방을 제공해줄지 모르나 예수님의 지시는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탈것을 준비하실 때처럼 분명하고 위엄이 있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의 때가 임박했음을 뜻하는 “나의 때가 가까웠다”(26,18)는 말에서 아주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식사는 단지 열두 제자와 낯선 사람의 집에 가족들도 없이 차려진다. “나의 때”는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에야 다가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때가 다가왔음을 아시고 자신을 내맡기신다. 이제 제자들을 교육하는 일이 끝나가고, 그분은 그들이 순종하는 주인이요 주님으로 남으신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6,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회상하며 감사하는 유월절 잔치에(탈출 13,13 이하)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고대에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것은 우정과 평화의 표시이며 확고한 동지애의 상징이었다. 그 식탁에 앉았던 배반자의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 유다는 예수님은 물론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도 끊어버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6,24)라고 하신다. 그분은 ‘남을 죄짓게 하는 불행한’(18,7) 유다에게는 걸림돌이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유다의 죄악을 폭로하셨다. 그의 근본적인 죄는 예수님을 자기 경험과 돈으로 저울질하고 자기 생각에 따라 예수님을 변화시키려 한 점이다.
오늘도 유다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지는 않는가? 유다는 예수님과의 관계 단절을 통하여 제멋대로 행동하고 판단하는 것을 참 자유로 여기는 교만에 빠졌다. 유다처럼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외면하며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삶만을 추구하기에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유다는 제멋대로 생각하고 자기만의 사고방식과 기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였다. 결국 그는 마음대로 판단하여 하느님이 주신 목숨을 끊어버렸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사고의 중심이요 원천은 역시 하느님이시다. 신앙은 겉으로 보면 끝까지 손해 보는 길이나 그 길은 보이지 않는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길이요 하느님 친히 책임져주시는 길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데 도구로 쓰려하였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한 처사이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도구요 심부름꾼으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길이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모든 이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를 섬기는 데 있다. 오늘도 제자들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6,25)라는 말이 울려퍼진다. 이 시대에 자기다운 신앙의 고백,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줏대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 드물다.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면서도 결국 자신만은 의인인 듯 처신하려는 바리사이들의 태도가 배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혹시 나의 속마음과 언행이 그분을 팔아넘기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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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3. 성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극도로 고통스런 수난의 여정 가운데서도 그저 우리 걱정으로 노심초사하시던 예수님!
예수님에게 다가올 참혹하고도 슬픈 운명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묘사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가 참으로 예언자 중의 대 예언자였음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야서 50장 5~7절)
역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던 공생활 기간이 저물고 수난의 시기가 다가오자 예수님은 갑자기 당신의 태도를 바꾸십니다. 더 이상 적극적이지도 않고, 자기 주도적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도 수동적이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십니다.
당신에게 덮쳐온 피해 가고 싶은 끔찍한 사건들을 거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셨던 수제자 베드로와 유다의 배신 앞에서도 억지로 막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체포하러 온 군사들 앞에서 유유히 빠져나가지 않으시고, 순순히 체포당하셨습니다.
세상 무죄한 당신에게 가해진 끔찍한 채찍질, 열 번 스무 번이 아닌, 수천 번에 달한 채찍질, 과다출혈로 생명조차 위태로울 정도의 채찍질 앞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군사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해 수시로 뺨을 맞으시면서도 얼굴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창조주,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갖은 모욕과 수모를 있는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그토록 혹독한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믿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스스로를 다그치며 외치셨습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야서 50장 7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이 세상, 살아남고 견뎌내기가 얼마나 혹독한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돈 벌기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좌절과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절망과 슬픔을 맞닥뜨려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수난 당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몰지각하고 미성숙한 제자들을 끝까지 존중해주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토록 큰 고통과 수모를 당하시면서도 죄인인 우리를 걱정하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수난당하시던 예수님, 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 모두 극도로 힘겨운 수난의 여정에서도 그저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던 예수님의 슬픈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는 우리의 성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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