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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순례 - 구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삼손 이야기 2(판관기 16장)
삼손이 만난 두 번째의 여인은 가자의 창녀입니다. 삼손이 그 창녀의 집에 있을 때 가자 사람들은 성문을 지키고 있다가 그가 아침에 성문 밖을 나갈 때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삼손은 한밤중에 일어나 굳게 잠긴 가자의 성문 두 문짝과 양쪽 문설주를 빗장째 뽑아 어깨에 메고 헤브론 맞은쪽 산꼭대기로 갔습니다. 그 무거운 것을 지고 약 60Km의 거리를 간 것입니다.
삼손이 만난 세 번째 운명의 여인은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입니다. 필리스티아는 다섯 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연합국입니다. 이 나라의 다섯 제후들이 각각 천백 세켈의 은을 걸고 들릴라에게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게 합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가진 힘의 비결을 알아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러나 들릴라에게 날마다 들볶인 삼손은 마침내 그의 힘이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것임을 밝힙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의 힘은 그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머리카락을 깎으면 나지르인 서약을 어긴 것이므로 그도 역시 여느 사람처럼 약해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필리스티아의 제후들에게 알린 들릴라는 삼손을 무릎에 뉘어 잠들게 한 다음 사람을 시켜 그의 머리털을 깎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삼손에게서 힘이 빠져나갔고, 주님께서도 그를 떠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 삼손은 이번에도 힘을 쓸 수 있으려니 생각하였지만 무력하게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 붙잡혀 두 눈을 잃고 청동사슬에 묶인 채로 감옥에서 연자매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필리스티아 제후들은 다곤 신전에서 제사를 바치며 삼손을 체포한 것에 대한 축하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삼손을 여흥 거리로 삼고자 감옥에서 불러내었습니다. 이때 삼손은 두 번째로 기도합니다. 그에게 힘을 주셔서 자기 두 눈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신전의 중앙 기둥을 밀어 신전을 무너뜨립니다. 그가 죽으면서 죽인 필리스티아인들의 수(남녀가 삼천여 명)가 살아있는 동안 죽인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의 형제들과 집안사람들은 삼손의 시신을 거두어 아버지 마노아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과연 삼손은 어떤 인물인가요? 그는 자신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된 나지르인임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원에 대해 결코 진지하게 의식하며 살지 않았고, 나지르인 서원 전부를 어겼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이었지만, 민족의 위기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고 필리스티아인들 삼천 명을 죽인 생애 마지막 사건마저도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삼손은 살아있는 동안 주님을 알아보았을까요? 그가 두 차례 기도하였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주님을 의식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삼손이 주님께 응답하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주님께서 원하지도 않는 이 인물을 이용하셔서라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하느님께 부르짖지 않았을 때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인물을 통해서라도 구원을 베푸시는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성경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참된 판관은 주님이심을 강력하게 천명합니다.
단 지파는 계속되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압박 때문에 본래 상속받은 땅에서 살지 못하고 결국에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단 지파의 이주 이야기가 판관기 18장에 언급됩니다. 다음 순례에는 이주하는 단 지파를 따라가 볼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이야기 (21) 예수님과 제자들(1,16-8,30)
마르코 복음서의 첫 번째 부분(1,16-8,30)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네 명의 어부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 제자로 뽑으신 에피소드(1,16-20)로 시작하여 제자들(특별히 베드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일화(8,27-30)로 마무리됩니다.
이 첫 번째 부분의 설화적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드로의 고백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7) 그리고 또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9). 이에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바로 물으실 수도 있었지만 여느 사람들의 의견을 먼저 물음으로써 제자들의 생각과 일반인들의 의견을 구분 짓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은 내용을 표현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두 가지 핵심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원(“누구”)과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너희에게 나”)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첫 번째 부분은 이 두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먼저 복음서 속에 예수님을 만난 여러 등장인물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1,24), “하느님의 아드님”(3,11; 5,7), “스승님”(1,40),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6,14), “예언자”(6,14), “주님”(7,28) 등으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며”(2,7),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활동하는 이(3,22)라는 부정적인 견해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고백 속에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8,29).
또 하나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입니다.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는 순간부터 예수님 곁에 머물며 그분을 알아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적이며 친밀한 시간을 함께 보내며(1,29-31), 자신의 사명을 함께 수행합니다(1,35-39), 어려운 비유 말씀을 따로 풀이해 주며(4,13-20),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기도 합니다(6,45-52). 이러한 이야기 흐름 가운데 예수님은 당신이 ‘그들에게’ 누구인지 물어보셨습니다.
앞으로 마르코 복음서를 읽어가며 이 두 가지 테마를 염두에 두었으면 합니다. 성경 속 여러 등장인물(특별히 제자들)은 각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이해하며 그분을 다양한 방법으로 따릅니다. 이야기를 접하는 수신자는 각 인물들에 공감(Sympathy), 반감(Antipathy), 또는 감정이입(Empathy)을 하며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방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도들의 기쁨과 삶을 담은 사도행전 읽기 18] 스테파노의 설교와 순교(사도 7,1-60)
인간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무(無)’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관문이며,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복음 선포의 장입니다. 스테파노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았지만, 그는 두려움에 휩싸이기보다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성경 말씀과 함께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증언은 고발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즉 자신을 고발한 유다인들이야말로 하느님에게 대적하는 대적자이며 가해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낸 예언자들에게 순종하지 않고 이들을 박해했으며, 참된 할례와 성전 대신 사람 손으로 만든 것들을 숭배함으로써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설교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모세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죄를 드러냅니다. 그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안에서 구원 역사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율법을 거역하고 우상숭배를 한 죄입니다. 이러한 스테파노의 질책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자가 진정 누구인지 드러나도록 만듭니다. 그들은 이 죄로 하느님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테파노가 제시하고 있는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가 생각하는 심판과 다릅니다. 스테파노가 전하는 하느님의 심판은 ‘그들이 하늘의 군대를 섬기게 내버려’(7,42) 두시는 것입니다. 즉 단죄 형식의 심판이 아닌 스스로 파멸로 이르게 하는 심판입니다. 철부지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통해 파멸의 길로 가듯, 진리이신 하느님을 거부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또한 스테파노는 성전에 대한 설교(7,44-50)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은 지은 것들 안에는 사시지’(7,48) 않는 것을 강조하는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을 너무 신격화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이와 같은 설교는 유다 지도자들을 자극하게 되었고, 그들은 ‘스테파노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고 분개하면서 율법에 나온 가르침대로(레위 24,11-16)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런데 순교하는 스테파노의 모습은 십자가 위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영을 주님께 맡기는 모습이라든지,(사도 7,59; 루카 23,46)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 바치는 용서의 기도(사도 7,60; 루카 23,34)가 특히 그렇습니다. 스테파노의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착한 일을 얼마나 했나.’라는 업적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신 그분과 나는 얼마나 닮았나.’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담긴 복음서를 먼저 읽어야 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말입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24) 마타티아스와 마카베오
박해에 격렬히 저항, 자유 쟁취한 유다인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길에 오릅니다. 그는 기원전 334년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기원전 332년 이집트를 정복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메소포타미아로 돌아와 지금의 모술 북동쪽으로 30㎞ 떨어진 가우가멜라에서 다리우스 임금을 꺾고 페르시아를 멸망시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이 정복한 모든 지역에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했습니다. 헬라어는 정복지의 공용어가 됐고, 그리스풍의 도시가 건설됐습니다. 하지만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적의를 품고 예루살렘으로 갔으나 꿈에서 경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야두아 대사제에게 환대받은 후 율법과 성전 제사에 관한 유다인들의 특권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빌론에서 숨을 거둔 후 그의 제국은 ‘디아도코이’(후계자들)라 불리는 부하 장군들에 의해 쪼개집니다. 안티고노스가 마케도니아를,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를, 셀레우코스가 시리아와 지금의 튀르키예를 차지해 왕조를 수립했습니다. 이 시기 유다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199년부터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습니다.
유다인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와 셀레우코스 4세 임금의 치하에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며 몇몇 종교적 특권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다 안티오코스 4세가 임금이 되면서 혹독한 박해를 받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가 유다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민족에 동화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율법과 성전 제사를 고집해 특권을 요구했습니다. 둘째, 재물의 유혹입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에 진 빚을 갚고 로마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민족의 신전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셋째, 정치ㆍ군사 요인입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와 접경지대에 자신에게 충실한 민족을 둬 정치ㆍ사회ㆍ군사적으로 안정을 구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안티오코스 4세는 유다인들을 종교적으로 박해했습니다. 그는 유다인의 할례를 금지했습니다. 또 돼지고기와 율법이 정한 부정한 음식들을 먹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율법 준수를 금하고 예루살렘 성전 번제단 위에 제우스의 제단을 세워 올림푸스 신들에게 제사를 바치게 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를 따르지 않는 유다인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는 기원전 167년께 시작했습니다.
많은 유다인이 죽음을 두려워해 배교했습니다. 동시에 적지 않은 유다인들이 안티오코스 4세에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순교로 저항했고, 어떤 이들은 무장봉기를 했습니다. 무장 항쟁의 대표 인물이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아들들입니다.
항쟁은 리따에서 동쪽으로 12㎞ 떨어진 모데인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지역 사제인 마타티아스는 이교 의식을 거행하려던 유다인들과 관리를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아들들인 요하난, 시몬, 유다, 엘아자르, 요나탄과 동지들을 데리고 유다 광야로 몸을 숨겼습니다. 율법에 충실했던 그들은 안식일에 셀레우코스 군대가 쳐들어오자 저항하지 않고 학살당했습니다.
마타티아스가 죽자 셋째 아들 유다가 항쟁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그의 별명은 ‘마카베오’였습니다. 우리말로 ‘쇠망치’라는 뜻입니다. 이 마카베오는 마타티아스 가문의 이름이 됩니다. 유다 마카베오는 미시아의 수령 아폴로니우스와의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벳 호론 근처에서 매복해 적을 물리쳤습니다.
유다인의 무장항쟁이 거세지자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5년에 유다 마카베오의 반란을 진압할 임무를 리시아스 총독에게 맡깁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엠마오에 진을 쳤습니다. 유다는 이들을 기습해 물리쳤고, 유다인들의 고유한 법과 종교 관습을 인정한다는 휴전 협약을 맺습니다.
유다 마카베오는 기원전 164년 12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탈환합니다. 그는 그해 12월 25일 예루살렘 성전 정화 의식을 거행하고 새 제단을 축성 봉헌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날을 기념해 성전 봉헌 축제 곧 ‘하누카’를 제정했습니다. 이 하누카 축제는 요한 복음 10장 22절에도 나오며, 유다인들은 지금까지도 이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마카베오는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다음 정치 독립을 위해 계속 투쟁을 했습니다. 유다의 형 시몬이 갈릴래아 원정을 떠나 적들을 프톨레마이스까지 쫓아내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켰습니다. 또 유다는 동생 요나탄과 함께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출정해 티모테오스 군대를 물리치고, 귀환 도중 에프론 주민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합니다. 이에 대한 구약 성경 사료는 마카베오기 상ㆍ하권(1마카 1,16-28; 2마카 4-5장)과 다니엘서(다니 11,20-28)에 나옵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엘리야의 승천
이스라엘의 남쪽 지방에 펼쳐진 광야에서는 싸리나무를 드문드문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생각나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는 카르멜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참된 주님이심을 온 백성에게 증명하였습니다(1열왕 18장). 하지만 이 사건 때문에 바알의 추종자였던 북왕국의 왕비 이제벨에게 살해 위협을 받아 도망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남왕국 영토인 브에르 세바에서도 남쪽으로 하룻길을 더 걸어간 광야에 이르러 싸리나무 밑에 겨우 몸을 누입니다(19,2-5). 싸리나무는 일명 빗자루 나무입니다. 작고 메마른 관목이라 큰 그늘을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왕실과의 대립을 이겨내지 못한 엘리야는 자신을 내리누르듯 작열하는 광야의 태양을 피해 그렇게 작은 그늘이라도 찾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죽고 싶다고 하느님께 탄원합니다(4절).
사실 이제벨의 손에 죽으나 하느님께서 목숨을 거두어 가시나 죽는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자신의 운명을 절대자에게 맡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싸리나무 아래서 깊은 잠에 든 그를 누군가 깨워 음식을 먹게 합니다. 바로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였는데, 그를 반드시 천상의 천사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먹이시려고 광야를 지나던 한 과객에게 그를 발견하도록 이끄신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음식을 먹고 다시 사십 일을 걸어 호렙산으로 갑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처음 만났고(탈출 3,1-6)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과 계약을 맺은 산입니다(신명 5,2). 엘리야는 그 산을 찾아가 예언직을 내려놓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찾아온 엘리야에게 당신의 존재를 다시 확인해 주십니다. 처음에는 바람 그리고 지진과 불이 차례로 일었지만, 거기에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는데, 바로 그곳에 주님께서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호렙산에서 엘리야의 푸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독이신 뒤 다시 예언자로 파견하며 후계자로 엘리사를 점지해 주셨습니다(16절). 또한 님시의 손자 예후를 북왕국의 임금으로 세우는 임무도 맡기셨습니다. 이는 잘못된 신앙을 퍼뜨린 북왕국의 왕실이 예후를 통해 응징 당하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엘리사를 후계자로 세우고(19-21절), 자신은 불 마차와 함께 승천하여(2열왕 2,1-18) 에녹(창세 5,24)과 성모님과 함께 죽음을 넘어 하느님 곁에 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들려주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는 아주 세밀해서 거의 침묵에 가까운 음(音)을 가리킵니다. 이는 우리에게 묵상의 힘을 가르쳐줍니다. 침묵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에 삶의 무게를 이겨내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과거 엘리야가 들었고 지금 우리가 묵상 가운데 듣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님 음성의 의미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이야기 (20) 프롤로그(1,1-15) 정리
지난 5주간 함께 살펴본 마르코 복음서의 프롤로그(1,1-15)는 예수님의 행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수신자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핵심,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1,1)을 밝혔습니다. 수신자들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예수님에 관한 것이며, 그분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임을 확신하며 복음서를 접하게 됩니다.
설화자는 예수님의 신원을 확충하기 위해 먼저 성경말씀을 인용하고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소개합니다(1,2-8). 수신자는 구약성경의 예언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실현되고 있으며, 그 예언의 대상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는 내용(“더 큰 능력 지니신 분”, “성령으로 세례 주실 것”)을 직접 들음으로써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은 일화(1,9-11)도 설화자의 핵심 메시지에 확신을 더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로써 수신자는 구약성경과 요한의 증언뿐 아니라 하느님의 음성도 들음으로써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해 획기적인 일을 시작하실 것이라 기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들짐승, 천사들과 함께 지내셨다는 보도(1,12-13) 또한 그분이 구약성경에서 묘사되고 있는 메시아 시대의 평화를 가져오는 분으로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머물러 있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수신자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선포하신 말씀을 생생하게 들음으로써(1,14-15) 예수님이 하느님의 다스림을 이 세상에 실현시키기 위해 활동하신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서를 읽거나 듣는 수신자들은 성경 말씀, 세례자 요한의 증언, 하느님의 음성, 예수님 복음선포 말씀을 직접 접함으로써 설화자가 먼저 제시한 핵심 메시지가 틀리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자연스레 수신자는 설화자(가 제시하는 정보)에게 신뢰를 갖게 됩니다. 더 나아가 수신자들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가령, 예수님의 첫 네 제자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보다 예수님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러 등장인물들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되며 동시에 자신도 그러한 여정에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들의 기쁨과 삶을 담은 사도행전 읽기 17]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의 체포(사도 6,8-15)
그리스도 교회는 하느님 말씀만으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피로 설립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의 이야기를 통해 순교자의 헌신으로 구축된 그리스도 교회를 보여줍니다.
스테파노라는 인물은 식탁의 일곱 봉사자 중 한 명으로, 그 이름에는 ‘승리의 화관’, ‘월계관’, ‘영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식탁의 봉사자로 뽑혔지만, 사도행전 8장에 나올 필리포스와 마찬가지로 ‘말씀의 봉사’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체포된 후에, 여러 이방인 출신의 유다인들과 논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6,9 참조) 논쟁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던 스테파노는 세 가지 죄목으로 잡혀갑니다. 첫 번째는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스르는 말을 했으며, 세 번째는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고 모세가 물려준 관습들을 고치시리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반대자들이 예수님께 뒤집어씌운 죄목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거슬렀다는 죄목으로 최고의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결국 또 다시 반대자들이 택한 방식은 중상모략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십니다. 이와 반대로 악마는 진리를 왜곡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뱀은 하와에게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3,1)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분명히 하느님은 하와에게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생명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전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습니다.”(로마 5,12) 결국 진리를 거부하는 악마와 죄는 생명이 아닌 죽음을 가져왔고, 이와 반대로 진리는 생명을 줍니다. 이는 진리이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드러났으며, 최고의회에 잡혀간 스테파노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람들에게 잡혀 최고의회에 선 스테파노의 모습이 “천사의 얼굴처럼”(6,15) 보였다고 전해줍니다. 루카는 복음서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을 받는 이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루카 20,35-36)고 전합니다. 결국 천사의 얼굴을 한 스테파노는 바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또한 스테파노의 모습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복음 선포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복음 선포란 단순한 외침이 아닙니다. 진리는 생명을 주고 거짓은 죽음을 가져온다는 믿음 안에서, 진리를 수호하고자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