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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만남 오마니!
출 18: 1-26
이산가족 상봉! 50년만에 혈육의 만남! 기구한 사연들! 한 남편에게 두 아내. 한 아내에게 두 남편. 태어나지도 않았던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 부모와 처자를 두고 다시 만날 기약 없이 떠나는 사람들. 서울도 울었고 평양도 울었다. 상봉하는 가족들도 울고, 1천만 이산가족들도 울고, 온 국민이 같이 울었던 날들.
"오마니! 춘모야 이놈아! 이불효자식이" "오마니! 불효자식 용서해 주십시오! 아들아 미안하다" "네가 정말 내 아들이냐!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인이에요!" "내 아들 종필아! 못난 아들이 속을 썩여 어머니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딸아! 그동안 얼마나 날 원망했니! 원망이라니요 얼마나 보고싶었는데" "여보. 미안하오! 미안해요! 잘했어, 내가 미안하지" "여보! 우린 이제 어찌합니까?
미안하오" "형님! 누님! 네가 내 동생이구나" "살아 있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내가 잘못했다."
저도 이산가족 중 한 사람으로 "빨리 북에 계신 형님 및 작은 아버지. 고모를 만나야 할텐데" 하는 마음으로 지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그리도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만남으로 살아갑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의 손길을 만남으로 한 인생의 생명이 시작됩니다.
부모라는 끈끈한 사랑의 관계를 만남으로 온갖 보호와 관심과 사랑을 받아 누립니다.
자라면서 가족들과 친척들을 만나며 이웃과 친구들을 만납니다.
선배와 스승을 만나며 후배와 제자를 만납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만남이 있고 우리를 파멸로 인도하는 만남이 있습니다. 성도와의 만남이 있고 불신자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주안에서의 만남이 있고 주밖에서의 만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집니다. 여기에는 의미 있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무의미한 만남과 무표정한 헤어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진실로 아름다운 만남을 보게됩니다.
그 만남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와 그의 장인 이드로의 만남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름답다고 한 것은 단순히 절하고 입맞추고 문안하는 예의바름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이들의 만남이 왜 아름다운 만남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 우리의 만남에 있어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1.복음이 전파되는 만남이기에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8절)
모세의 장인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모세의 처자를 데리고 모세를 방문하게 됩니다. 모세가 언제, 어디서,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미디안으로 되돌려 보냈는지는 성경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추측으로는 출 4:19절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그의 처와 두 아들과 함께 애굽으로 귀환하던 중 아들의 할례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에 의해 죽을 뻔한 위험을 겪은 이후에 가족을 다시 장인에게 보낸 것으로 생각합니다.(출4:24) 이 같은 결정은 앞으로 모세가 애굽에서 직면하게 될 여러 난관을 예상하고 가족들을 보다 안전한 곳, 즉 장인 집으로 다시 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때 우리는 모세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뒤로하고 죽을 수도 있는 애굽으로 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도 아파집니다.
그러나, 모세가 가족과 이별하는 이러한 결단이 곧 가족과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별거는 잠시동안 이었으며 사역을 마쳤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달성한 후 하나님의 인도로 가족들과 다시 합하였던 것입니다. 가족과의 재회는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었습니다. 헤어진 가족과의 상봉은 인간의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러한 가족상봉에 대해 극히 간략하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살아온 남편, 그동안 건강하게 자라난 자식, 그리고 수고한 아내, 이들의 만남은 본문 7절로 그 표현을 다합니다. "모세가 나가서 그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그리고 모세는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주관 하셨던 하나님을 증거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출18:8>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
특히, 이방인이며 미디안 이방종교의 사제인 장인 이드로에게 당대 최대 강국이었던 애굽을 굴복시킨 여호와의 능력과 구원을 간증하며, 전했습니다. 출애굽직전에 애굽에 내려졌던 여호와 하나님의 ①열 가지(피,개구리,이,파리,악질,독종,우박,메뚜기,흑암,장자의 죽음)재앙의 대 역사와(7:14-12:30), 홍해를 육지같이 당당히 걸어서 건넜을 때 추격해온 바로의 정예부대 병거 600승과 그 외 많은 바로의 군대가 홍해의 물 속 깊이 수장되고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감격적인 ②홍해도하 사건(14장), 마라에서는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는 ③마라 사건(14장), 하늘에서 메추라기와 만나가 내려먹게 된 ④만나와 메추라기 공급사건(15:22-26),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만든 ⑤르비딤 사건(17:1-7),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아론과 훌이 모세 양편에 서서 종일 해가 저물도록 손을 붙들고 기도하므로 ⑥이스라엘이 승리한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17:8-16)를 모세는 침이 마르도록 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인류역사의 주인 되시며, 인간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참 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방 우상의 사제였지만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시는 엄연한 현실을 보고 들으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와 이드로의 만남은 하늘의 비밀과 복음이 전파되는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전파되는 만남은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이번에 이산 가족들은 만나서 무슨 말을 했을 까요? 믿음의 가족들은 복음은 전했는지요? 복음은 구원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구원의 선물보다 더 큰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이산 가족들의 만남을 보면서 북쪽 사람들의 체제 선전은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창12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만남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축복의 근원이 되는 아름다운 만남이 됩니다.
(행10:42-)에는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남으로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며 구원을 받게되는 놀라운 축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수많은 이방인들을 만남으로 주님의 복음과 구원이 전파되어 졌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 만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여러 사람들과 만납니다. 이 같은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대부분이 세상화제로만 일관한다면 그 만남들은 궁극적으로 우리와 우리 이웃들을 유익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대화가 우리들사이에 오고감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문제 투성이며, 사람들은 여전히 영적 기갈로 고통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적으로 우리들의 대화속에 복음이 빠져있음을 보여줍니다. 복되고 아름다운 만남은 모세와 이드로의 만남처럼 복음이 전파되는 만남입니다.
2.모세와 이드로의 만남은 찬양이 있는 만남이기에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10절)
이드로는 모세의 간증과 이야기를 듣고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역사를 소문으로만 들었던 것을 이제 생생한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드로는 이방종교의 제사장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단지 평범한 이방 신과 다를 바 없는 신으로 이해했으나 모세의 간증을 듣고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참 신임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단지, 소문으로 들어 아는 단계를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벅찬 기쁨을 경험하게된 것입니다.
본문 10절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는 말씀에서 찬송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바라크]로서 '무릎을 꿇다, 송축하다'는 뜻으로서 겸손한 마음으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방 제사장이었던 이드로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며 찬양한 것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지존자 이심을 깨달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모세와 이드로의 만남은 참 하나님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게 하므로 기쁨이 충만하여 놀라운 새로운 발견과 구원을 찬양했습니다.
여러가지 만남이 있지만 그 만남들 중에서 아름다운 만남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와 찬양이 드려지는 만남입니다.
(창14:19-20)의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만남처럼,
(눅2:20)의 아기 예수와 시므온의 만남처럼 그 만남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찬양이 드려지는 만남은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찬양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만 하늘나라에 가서는 오직 찬양으로 섬기게 됩니다. 찬양하는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 찬양으로 모든 어두운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예>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부부간에 재미있게 살아야 하겠는데, 부인이 잔소리가 많아 바가지를 긁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이 또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자꾸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견디다 못한 남편은 대꾸했다가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의 잔소리가 멈췄습니다. 그리고 잔소리를 할 때마다 그 찬송을 불렀는데 결국 아내의 잔소리 병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찬송은 바로 291장입니다.
(몇 칠 후 몇 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이 찬송에 악처는 313장을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웃과 만나서 남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마음에 상처를 주는 내용을 주된 대화로 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결코 아름다운 만남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헛된 자랑과 거드름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말을 은연중에 자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론> 성도여러분! 우리는 사랑과 인정이 메마른 거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건조하고 딱딱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우리들의 만남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솔한 만남, 아름다운 만남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의 대인 관계에서 복음과 찬양과 신뢰와 사랑이 넘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사는 주변이 복되고 아름답게 바뀌어 질 것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출 18: 1-26
모로코인들은 자리에 까는 융단을 만들 때 일부로 조금의 흠이 있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은 교만한 것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믿기로는 오직 완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인간들 스스로가 완벽하여 지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그 잘못된 부분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 분에 대한 기대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일부러 실수를 만들어 놓지 않아도 우리는 늘 완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완전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는 지도자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그리고 앞으로 우리 모두는 어디에서든지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로서 삶을 살면서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들은 무엇보다 자신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최선이며 완벽하게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며 다음은 특별히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서 있는 내가 열심히 해서 내 힘을 묵혀서 없애느니 써서 다 소비하여 버리겠다, 다 태워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물론 권투 경기를 보면 경기할 때에 이리저리 힘을 쓰지 않는 것 같다가 경기가 마치고 난 후에 힘이 남아 있는 것 같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지만 일회전 시작부터 모든 힘을 다 써서 2회전도 못 뛸 정도로 힘을 낭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경우가 바로 이러한 경우였습니다.
이제 18장의 본문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일단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로부터 12절까지는 모세의 가족의 재회에 대한 글이고
13절부터 27절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지적과 충고에 대한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시내 산에 장막을 치고 있는 곳에 오게 됩니다.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는 출애굽기 22장에서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난 후에 자기 민족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광야로 도망해, 그곳에서 만난 십보라와 결혼을 하고 거기서 약 40여 년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목동으로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드로는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것을 들었고 이 소식을 듣게 된 이드로는 이제 모세의 가족들을 모세에게 데리고 옵니다.
아마 모세는 처음에 애굽으로 갈 때에는 모든 가족이 같이 갔었지만 중간에 처가 집으로 자녀들과 아내를 보낸 것 같습니다. 그 가족들이 다시 이스라엘의 진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이 자녀들의 이름을 이곳에서 다시 언급을 합니다.
첫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게르솜입니다.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 이 이름은 모세의 고난을 기억나게 합니다. 애굽에서 그 화려한 생활을 잃고 이제 이방에서 객이 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의 이름은 다릅니다. 엘리에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의 도움이시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그 고난과 어려움에 하나님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 고난에 함몰되어져 버리면 객이 됩니다.
모세의 광야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많은 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광야에 있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처지가 단지 이방의 객으로의 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심의 결과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마 모세는 이 시점에서 자신이 과거에 경험하였던 그 엘리에셀의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늘 고난을 넘길 때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인도하심을 고백하지만 또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잊고 삽니다. 그러나 다시 그 고난을 지나고 나면 기억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 주전에 바사와 므리바와 여호와 닛시에 대해서 같이 생각을 하여 보았습니다.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환경을 생각하면 바사나 므리바가 됩니다. 게르솜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면 여호와 닛시가 엘리에셀이 됩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와 이드로는 아주 깊은 관계인 것 같습니다. 절하고 입맞추고 그리고 장막에 들어가서 그 동안 지내온 일들을 나눕니다.
모세가 이드로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 그리고 그들이 당한 고난과 . .
고난 당한 것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큰 문제 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고난에 압도당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세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당장의 형편으로 인하여, 지금의 어려움이 인생의 모든 것의 마지막같이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구해주시는 것을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바로 모세의 간증을 이드로가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바로 간증거리가 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자 이드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9절에서 12절 이드로의 찬양과 경배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무엇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그가 행하신 일들, 애굽에서 은혜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날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어렵다고 하나님이 선하지 않으신 분은 아닙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어렵더라도 언제가 그 어려움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날들이 있데 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단락으로 가 봅시다.
이튼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13절을 봅시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을 하여봅시다. 약 200만의 백성들이 법도 없고 율례도 없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재판관은 한 명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는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드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14-18절
14절 / 이 백성을 위하여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왜 너 혼자서 이 많은 사람들을 재판하고 있느냐? 두 질문을 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모세 자네 정말 아주 한심하구만, 도대체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하려고 하나 하는 질책에 가까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하여 보면 200만 중에 그 문제에 대해서 과연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이 없고 대안을 제시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놀랍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머물러 안에 갇혀 살게 되면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이 도움이 필요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혼자서 열심히 고민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한번 들어보는 것이 문제를 아주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일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잘 모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상담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주고 인도하여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제 도착한 이드로는 바로 문제가 보였고 그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대가 먼저 기력이 쇠 할 것이다.
백성들도 기력이 쇠할 것이다.
너무 그대에게 가중하여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너무 많은 일은 쉴 수도 없는 만큼의 일은 분명히 그 사람에게 가중한 것입니다.
크라이슬러의 회장인 아이오코크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이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와서 나는 일년에 한 번도 쉴 시간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고 말하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말들을 하곤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아이오코크는 말하기를 "자네는 참으로 멍청한 사람인 것 같네, 자네가 일년에 8천만불의 프로잭트를 구상하고 일을 처리하면서 그래 겨우 일년에 가족과 보낼 2주의 시간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인가?"
몸을 무리하게 사용하여 burn out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합니다.
20절 / 하나님의 율례를 가르치라.
21절 / 사람을 세우라.
율례를 가르치고 보이라.
오늘 이렇게 설교의 스타일을 조금 바꾼 것도 성경을 혼자 볼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자 그것이 저의 기본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성경은 자체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배우고 알게 되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수 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리 공부는 그 성경 공부의 일부입니다.
교리 공부는 성경의 전체 맥을 이어주는 것이기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리를 공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말씀을 읽고 나면 하나님은 그냥 진노하시는 분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 와 평화의 그러한 하나님이심을 알게되면 그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을 의미하고 왜 그렇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다음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세울 수는 없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그 사람을 세우는 기준을 말합니다.
재덕이 겸전한 자 / 지혜와 덕이 있는 사람 - 넓은 마음 그리고 지혜가 있는 사람.
하나님의 두려워하여 진실 무망하며 - 진실한자.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 이권 앞에서 바른 자.
좋은 지도자는 어느 누가 할 수 있는 일을 내일까지 미루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모세의 행동을 봅시다.
모세는 그 장인의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중요한 두 가지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잘 말하는 것, 잘 듣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들을 수 없는 귀를 가진 자는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훌륭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함께 하는 훈련들이 필요합니다. 나누는 훈련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함께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자 들이 바르게 살수 있고 좋은 지도다 그리고 하나님의 좋은 백성들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