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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논란에 대해
이영훈 교수
임시정부의 법통이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심하게 이야기해서 역사의 날조라고도 할 수 있다. 광복절은 이 나라가 가장 중요하게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그런데 해마다 광복절에 행해지는 대통령이나 광복회장의 경축사는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나 유력 인사들이 이 나라의 성립, 곧 건국의 역사와 관련하여 얼마나 혼란스러운, 잘못된 인식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어 왔다. 며칠 전에 거행된 광복절 경축식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광복회장 이종찬의 기념사가 그러했다.
당일 이종찬이 행한 기념사와 근간의 신문 기고문을 살필 때, 그는 광복을 독립운동 또는 해방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당일의 경축사에서 그는 “광복이란 일제의 군홧발로 더렵혀진 나라에서 주권을 다시 찾아 새롭게 빛을 밝히는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광복절과 관련해서는 “우리 선열들의 피나는 독립운동이 대한민국의 오늘과 같은 발전에 기여한 대목을 함께 생각해보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광복을 해방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기념사에서 “광복이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혹자의 말을 비판하였다. 같은 취지의 글은 신문 기고문에서도 찾아지는데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혹자의 말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종합하면 이종찬은 광복을 독립운동의 과정, 그리고 그 결실로서 해방을 가리키는 뜻으로 규정하고 있다. 나는 우선 이 같은 이종찬의 광복 이해가 틀렸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가 광복절을 통해 경축하는 광복은 1948년 8월 15일 세계를 향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포한 사건, 곧 건국 사건을 가리킨다.
그 사건을 기리는 것이 광복절의 본래 취지다. 당시의 제반 기록을 검토하면 그 점은 더없이 명확하다. 예컨대 1949년 8월 15일은 제1회 독립기념일로 경축되었다. 그런데 그해 9월 국회가 4대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독립기념일'을 같은 뜻의 '광복절'로 명칭 변경하였다. 광복이란 말은 원래 '광복독립' 또는 '광복조국'의 줄인 말이다. 이종찬이 이야기하듯이 무슨 빛을 찾거나 밝히는 뜻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광복절의 광복은 독립 또는 건국과 같은 말이며, 그것을 경축하는 뜻이다.
1948년 8월 15일 이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광복을 하나, 언제 독립을 이루나를 고대하였다. 아직 광복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48년의 3·1절을 맞이하여 백범 김구 선생은 찾아온 손님에게 '광복독립'이란 네 글자를 휘호하여 선물하였다. 아직도 이루지 못한 광복을 이루자는 뜻이었다. 그날 김구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소를 찾아 아직도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슬픈 현실을 고하였다. 1948년 3·1절을 맞이하여 서울중앙방송국은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란 노래를 지어 어린이 합창곡으로 방송하였다.
그것이 이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로 바뀌어 지금까지 우리 한국인이 애송하는 노래가 되었다.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하고 있듯이 1948년 3월 당시 한국인들은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에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란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다름 아닌 그해 8월 15일 그날의 정부수립, 곧 건국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광복절은 이날의 독립과 건국을 기리는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그래서 정부 기록에 의하면 1950년, 1951, 1952년의 광복절은 제2회, 제3회, 제4회 광복절이었다.
1953년 이후 혼란이 발생하는데, 그에 대해선 저를 포함하여 몇 분의 자세한 연구가 있으므로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 광복회는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의 단체다. 그런데 이 단체가 주장하는 광복의 뜻은 이와 같지 않다. 그들은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언제부터 그러했는지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좀 더 살펴야 할 연구과제다. 그 점을 전제하면서 지난 15년간을 거론하겠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건국 60주년 행사를 벌일 때 그들은 그것을 보이콧하였다.
당시 정부가 건국 6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발간한 어느 책자에서 “임시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획정하고 국민을 확보한 가운데 국제적 승인에 바탕을 둔 독립국가를 대표한 것은 아니었다”는 대목이 있었다. 광복회는 그에 반발하면서 정부의 건국 60주년 행사를 거부하였다. 광복절 날 그들은 정부의 경축식과 별도의 장소에서 경축식을 거행하였다. 광복회 회원들은 정부가 수여한 건국훈장을 반납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반발에 부딪힌 정부는 광복회를 무마하기 위해 이미 배포한 책자를 회수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역사 문제에 관하여 너무나 취약한 정부였다. 그렇게 정부가 쉽게 양보하자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임시정부 건국설을 받드는 광복회의 입장은 더욱 굳어졌다. 그들은 이후 박근혜 정부가 국정 교과서에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고 기술하려 하자 그에 대해서도 맹렬히 시비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건국대통령 이승만도 부정하였다. KBS가 이승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그에 반발하였다. 나아가 광복회는 이 나라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마저 부정하였다.
지난 광복회장 김원웅이 그 대표적인 예다. 가정 이력이 지극히 불투명하고 의심스러운 이 사람은 2020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친일이 우리 민족의 발목을 잡고 기생한다”고 한 뒤에 “초대부터 21대까지의 참모총장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들”로서 “민족 반역자들이 국가 요직을 맡아 한평생 떵떵거리고 살았다,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고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여 큰 논란을 빚었다. 이러한 광복회가 정부와 함께 광복절 경축식을 공동 집전하는 것은 더 없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제 기억으론 노태우 정부가 4대 국경일 경축식에 관한 프로토콜을 만들면서부터 그렇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광복절을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정의한 다음, 광복회를 경축식의 공동집전자로 초대하였다. 광복절의 정의부터가 엉터리인 가운데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지 않은, 일종의 사단법인에 불과한 단체에 정부와 동일한 권위를 부여한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해마다 광복절을 맞아 역대 광복회장의 졸렬한 연설을 듣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국경일 경축식에 관한 정부의 프로토콜은 올바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이종찬의 기념사와 기고문을 비판하겠다. 그는 해방 또는 같은 뜻의 광복이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혹자의 언설을 비판하였다.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것은 1945년 8월 당시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공통된 인식이나 표현이었다. 함석헌 선생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조선공산당의 영수 박헌영은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을 받듯이 해방을 맞았다고 했다. 이태준도 그의 소설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다른 누구보다 중국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일제가 무조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애써 추진한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공로를 세우지 못하여 장차 하등의 발언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이나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해 10월 돌아온 이승만 박사가 그러하였다.
그해 12월 중국에서 돌아온 임시정부의 요인들도 그러하였다. 당시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방은 연합군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임시정부나 우리의 독립 운동가들은 그 과정에 인정받을 만한 공로를 끼치지 못했다. 저는 1945년 8월 우리의 해방이 우리 독립운동의 결실로 쟁취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어떠한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를 알지 못한다. 이종찬은 당시 9세의 소년에 불과했지만, 이러한 역사를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처지였다. 왜냐하면 그의 종조부가 임시정부의 각료인 이시영 선생이기 때문이다.
종조부 이시영 이 임시정부의 각료 지위를 유지하면서 그해 12월에 환국했을까. 아무리 단체의 이해관계가 소중하기로서니 역사를 함부로 조작하거나 과장해서는 곤란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해방과 독립은 일본제국을 해체한 연합국의 힘으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을 두고 당대의 한국인들은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다고 한 것이다. 그 엄연한 역사를 부정하거나 매도해서는 곤란하다.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선 별도의 기회로 미루겠다. 또 이종찬은 기념사에서 1919년 고종의 죽음이 우리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성립시킨 주요 계기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저는 마찬가지로 이 같은 주장을 한 어느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를 알지 못한다. 이종찬은 신학설을 주장할 요량인가. 잘 알려져 있듯이 3·1운동은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일제의 억압 하에 있던 우리 한국인이 인류 공영의 자유정신에 입각하여 궐기한 일대 민족적 거사였다. 그 역사적 뿌리는 1890년대 후반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활동이 실패한 뒤 1910년 조선왕조, 곧 대한제국은 망하였다. 이 나라 역사에서 왕정이 폐지되는 것은 바로 그때의 일이다.
1919년 고종이 죽자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한국인이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공화정을 세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언급하기에도 유치한 망발이다. 또한 이종찬은 정부는 없어졌지만 나라는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는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1948년에 마치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는 듯이 건국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비록 정부가 없어졌지만 나라가 존속한 증거로서 우리말, 태극기, 국호 등을 거론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는 일제하에서 없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졌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나. 저는 오히려 강화되기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문화적 수준의 요소를 가리켜 나라라고, 곧 국가라고 하고 있다. 반복되지만 저는 그를 신설을 내세울 만한 자격의 학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무슨 자격으로 이 같은 황당설을 국가적 경축식에서 함부로 내뱉는지 모르겠다. 일제하에서도 우리의 나라는 면면히 존재했다고. 누가 그런 주장을 했나. 그 근거를 제시하길 바란다. 그는 기념사에서 어릴 적 중국 상해에 살 때에 중국인으로부터 망국노라는 욕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망국노는 나라를 잃은 백성을 가리키는 뜻이다.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면서 망국노라는 욕을 먹고 자란 집안의 아이가 어찌 그 시대에도 우리의 나라는 존속했다고 이야기하는 건가. 마지막으로 광복회가 존숭해 마지않은 '임시정부의 법통'에 대해 간단히 살피겠다. 나라가 망한 뒤 대한민국이 건립되기까지의 역사에 대해 우리의 초대 헌법의 전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저는 이 전문을 우리의 원래의 건국 역사로서 정사라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 국민은 기미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헌법 전문에 이러한 역사적 서술을 삽입한 분은 다름 아닌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이다. 그는 국회의장으로서 제헌 국회의 개회를 맞아 그날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독립 민주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여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불행히 세계 대세에 연유하여 우리 혁명이 그때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우리 애국 남녀가 해내 해외에서 그 정부를 지지하며 많은 생명을 바치고 혈전고투하여 이 정신만을 지켜 온 것이니, 오늘 여기서 열리는 국회는 즉 대한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 만의 민국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은 연합국에 의한 해방과 유엔의 승인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나라가 마땅히 계승해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가 있었다. 그런 것 없이는 독립국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역사를 이승만은 이같이 정의하였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13도 대표가 국내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결성하였다. 그렇지만 당시는 세계정세에 제약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애국 남녀는 그 정신만을 계승하여 지난 29년간 혈전 고투했으며 드디어 오늘 그 민국의 부활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13도 대표와 국민대회는 한성임시정부를 말한다. 이승만은 그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로서, 곧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후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이같이 그에게 주어진 명분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19년 그때 우리의 독립이 성공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는 불행히도 실패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정신만큼은, 곧 3·1운동이 표방한 인류 공영의 자유정신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혈전 고투를 벌여왔다고 했다.
이후 동년 8월 15일 정부수립의 경축사에서도 그는 동일한 취지의 연설을 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언급을 생략하겠다. 1960년대 이후 몇 차례 헌법이 개정되는 과정에서 위의 헌법 전문은 다소 개정이 되어 유구한 역사의 우리 민족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했다. 그 기본 취지는 제헌 헌법의 전문과 같다고 하겠다. 이러한 건국의 역사가 크게 왜곡되고 변질되는 것은 1987년 제9차 헌법 개정 당시의 일이었다. 전 고려대 총장 김준엽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당시 민정당의 총재 노태우, 민정당의 헌법개정위원 이종찬,
야당의 헌법개정위원 이중재 등과 긴밀하게 협의하여 헌법의 전문을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다. 곧 오늘날의 헌법 전문 그대로다. 즉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했다. 이전까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으로 둔갑한 것이다. 김준엽은 임시정부에 일시 종사했다는 그의 개인적 이력으로 인해 임시정부의 법통에 유난한 애착을 품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와 동일한 이력을 지닌 가문 출신의 이종찬과 협력하여 헌법 전문을 위와 같이 고쳤다.
몇 사람의 로비로,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여, 헌법 전문이 함부로 고쳐진 사실은 당시까지 이 나라 정치인, 지식인, 나아가 일반 국민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초라한 수준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후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1948년의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는 사이비 역사의식이 활개를 치고 유사 권력으로 국민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당초 이승만 대통령이 헌법 전문에 삽입한 임시정부는 13도 국민대회로 성립한 한성임시정부를 말하였다. 1945년 중경에 있다가 환국한 그 임시정부가 아니었다.
1919년 9월 상해에서 성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이 선포한 독립선언을 임시헌법의 전문으로 채택하였다. 1925년 반이승만 세력이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류의 위원회제도로 개편하면서 그들은 이 같은 헌법 전문을 삭제하였다. 3·1운동의 자유정신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의 이념과 노선이 어떠한 모양으로 전개되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1945년 12월에 환국한 임시정부가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으로 그 법통을 잇지는 않았다는 사실만 거론하겠다.
국내로 돌아온 임시정부는 전 국민이 주시하는 가운데 국무위원회를 열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1946년 미군정의 자문기구인 민주의원에 참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독자적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예컨대 김구, 김규식, 조소앙, 이시영, 신익희 등은 각기 개별적인 정치활동을 벌였다. 임시정부의 가장 상징적인 지위에 있던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은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방해하였다.
김구 선생은 이미 성립한 대한민국을 취소하라고 유엔에 공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김구 선생은 그의 당원에 의해 암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다시 말해 1945년 환국한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법통이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심하게 이야기해서 역사의 날조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역사의 날조에 참여한 이종찬이 세월이 36년 흐른 2023년 새로 선임된 광복회장의 자격으로 광복절 식전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는 궤변을
다시 한 번 늘어놓는 것은 차마 견디기 힘든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그럴만한 자격의 소지자가 아니다. 시세에 기민히 적응해온 정치가일 뿐이다. 일제하에서도 나라가 면면히 이어졌다는 등, 해방은 독립운동 선열의 용기와 결단으로 이루어졌다는 등, 광복절은 독립 운동가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는 날이라는 등, 고종의 죽음으로 왕정이 폐해지고 민주공화정이 세워졌다는 등, 대한민국의 원년, 곧 건국은 1919년 임시정부라는 등의 궤변을 더 이상 삼갈 것은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