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일드 번치>는 개봉 당시 격렬한 폭력장면들 때문에 비평가들과 대중 사이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서부영화 가운데 이 영화처럼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영화는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영화 <와일드 번치>는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며 당시까지 나온 수정주의 서부영화 중 최고로 꼽히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의 여러 영화들 중에서도 유난히 살육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릅니다. 페킨파는 이 영화를 “변화하는 시대의 악인들에 관한 단순한 얘기”라고 말합니다.
서부시대와 무법자 총잡이들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20세기 초, 한물간 나이 먹은 무법자들의 한탕과 의리와 우정 그리고 자존과 자포자기적인 피의 살육전을 장렬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야말로 사나이들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존 웨인의 웨스턴에서 보여주던 전형적인 카우보이 웨스턴의 기본을 완전히 파괴한 작품이며 기존 웨스턴이 간직한 서부의 도덕과 신화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 기관총을 난사하는 파이크
이 작품은 1914년 멕시코 혁명기, 주인공 파이크 비숍이 이끄는 무법자 집단은 서부지역에서 은행강도로 악명을 떨치다가 반혁명군 일당과 엮이게 되면서 명분 없는 참혹한 싸움에 목숨을 내거는 총잡이들을 그린 영화입니다 .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개미떼 속에 전갈을 던지며 노는 장면이 그것인데, 아이들은 그토록 잔인한 상황을 외려 즐깁니다. 전쟁장면이 등장해도 사람들의 얼굴은 두려움과 공포감에 휩싸였다기보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당황하는 정도입니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폭력성의 표출을 이토록 직설적으로 묘사되면서 동시에 폭력에 무감한 모습은 과연 폭력미학의 정점에 서있다고 할 만하죠.
페킨파는 이 영화 한편으로 서부 영화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들은 자동차와 기관총이 있는 시대에 총잡이들은 충성심, 명예, 단결, 영웅주의와 같은 낡고 닳아빠진 신념을 위해 장렬히 싸웁니다. 마치 '변화된 시대에 변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벌이는 최후의 항거처럼... <와일드 번치>로 샘 페킨파는 비로소 자기 스타일을 완성시켰습니다.
* 마파치 졸개들에게 직사도록 얻어터진 엔젤, 이를 본 파이크 일행은 결국...
장면마다 여섯 대의 카메라를 설치하고 정상 속도, 느린 속도,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촬영한 이 영화는 총잡이들이 죽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느린 동작으로 화면을 잡아 유혈이 낭자하지만 반면에 서정적인 분위기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개봉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지금 보더라도 전혀 손색없는 총격씬을 보여주는데, 선혈이 낭자하고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지만 아름다울 지경입니다. 여섯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섬뜩하지만 미려한 영상을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파이크 일당을 쫓는 손튼 일당
초반부와 종반부에서의 슬로우 모션과 정지화면이 교차하는 총격씬은 필요이상으로 폭력을 미화하고 있다고 해서 원성을 샀지만 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윌리엄 홀덴, 어네스트 보그나인, 워렌 오츠, 벤 존슨 같은 성격파 배우들의 몸으로 부딪히는 강인한 연기도 한 몫 했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홍콩 느와르의 대명사인 오우삼을 떠올리게 하는데, 오우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주인공,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된 우아하기까지 한 폭력 장면들은 샘 페킨파의 코드들인 것입니다.
특히 후반부 동료 앤젤을 구하기 위해 결과가 뻔한 싸움을 감행하는 사나이들간의 우정, 의리를 생각케 하는 장면은 오우삼이 주로 차용하는 부분입니다. 그 외에도 샘 페킨파의 조감독 출신인 월터 힐을 비롯하여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등이 그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입니다.
* 살육전
< 줄거리 >
텍사스 어느 은행의 금고를 털러 들어간 파이크 일당들, 하지만 그들은 유인된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밖에서는 한 때 파이크의 동료였던 손튼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잠복해 있었습니다. 문을 나서는 순간 벌집이 될 것이 뻔한 파이크 일행들...
하지만 그들은 인질로 잡은 인물들과 마침 거리를 행진하는 금연금주 캠페인 행렬들을 방패삼아서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하고 마을을 탈출합니다. 이들의 탈주를 하면서 손튼 일행과 벌이는 총격전에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선혈이 낭자하는 장면이 보여집니다. 더구나 총에 맞아 쓰러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고한 시민들이었습니다. 두 집단이 버리는 총격전에 희생되는 것은 하필 그 자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 파이크 일당과 총격전을 벌이는 손튼(왼편, 로버트 라이언 분)
이렇게 오프닝의 거센 총격전이 끝나면 파이크 일당의 '실패한 금고털이'가 허탈하게 보여집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동료들을 희생하면서 얻은 것은 금화가 아닌 쇠고리였습니다. 손튼 일행은 그들을 기다리면서 철저한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동료를 잃고 돈도 얻지 못하고 거기에 거머리 같은 손 톤 일행에 쫓기는 파이프 일당들, 그들은 국경을 넘어서 동료인 엔젤이 자란 멕시코 마을로 진입합니다.
그 마을은 마파치라는 반란군 장군의 200여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장악한 상태입니다. 마파치에게 아버지를 잃고 애인까지 빼앗긴 엔젤의 분노는 큰 사고를 칠 뻔 하지만 파이프와 동료들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고 대신 그들은 마파치에게 솔깃한 거래를 제안받습니다. 바로 미군의 무기수송 열차를 습격하여 16박스의 소총을 탈취하는 것이죠.
* 마적 두목, 마파치
무기탈취 작전은 의외로 쉽고 싱겁게 끝나고 별다른 총격전과 희생도 없었습니다. 몇 명의 미군병사들을 제거하고 그들은 뛰어난 기지로 무기탈취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들을 쫓는 손튼일행의 발길이 계속 파이프 일당의 숨통을 노립니다.
마파치 일당과 거래에 성공하여 무기를 내주고 금을 얻은 파이프 일행. 하지만 마파치는엔젤의 배신을 알고 그를 체포하여 학대합니다. 마을에서의 무거운 하룻밤, 창녀들과 각각 육체의 향연을 맛본 파이프 일행 4명은 엔젤을 구하기 위해서 비장한 아침을 맞이합니다. '가야지', '당연하지' 말이 필요없는 이들. 200대4 라는 택도 없는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그들은 마치 <O.K 목장의 결투>에서 와이어프 일행이 결투를 위해서 걸어가는 폼나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마파치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 살육장면이 아름답기조차 하다
이들 4인방(윌리암 홀덴, 어네스트 보그나인, 워렌 오츠, 벤 존슨)의 도보장면은 훗날 <저수지의 개>들을 비롯한 다수의 영화에서도 참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선혈 낭자한 멕시코 마적들과의 치열한 전투, 죽어나가는 시체들과 난무하는 총알들, 난사되는 기관총, 그리고 한 발 한 발 총에 맞는 파이크 일행들...
* 마지막 혈투(워렌 오츠 분)
<와일드 번치>는 마초들간의 총격전을 통해서 폭력의 미학을 과시한 샘 페킨파 감독의 서부극입니다. 등장인물은 모두 현상범, 현상금 사냥꾼, 멕시코의 독재자 등 대부분 악당이며그들은 사익을 위해서 싸우고 죽입니다. 그렇지만 금을 가지고 조용히 떠날 수 있었던 파이크 일행들은 동료 엔젤의 복수를 위해서 목숨을 내겁니다. 마초들에게도 최소한의 명예와 의리가 있었던 것이고, 악당의 세계에서도 묵시적인 룰이 있었습니다.
영화 내내 파이크를 쫓던 손튼이 파이크 일행이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죽어간 마을에서 현상금도 포기한 채 허탈하게 앉아있던 장면은 이러한 '악당세계에서의 의리와 명예'를 보여주는 '마초들의 의리와 사는 법‘에 얘기이기도 합니다.
* 마파치
당시 40대 감독이던 샘 페킨파 감독은 자신보다 훨씬 선배 영화인들인 윌리암 홀덴, 로버트 라이언, 어네스트 보그나인, 벤 존슨,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등 노장 배우들을 중심으로 하여 이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영화를 '한수 배우면서 '완성한 느낌입니다. 젊은 감독이 베테랑 배우들과 어떻게 호흡을 맞추어 이런 영화를 만들어 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주인공들이 죽어도 슬플 이유가 없는 영화, 하지만 그들이 멕시코 군인들을 쓸어버릴 때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 무고한 인명들이 마구 살상되어 갔던 영화. 서부는 절대 낭만과 꿈의 세계가 아니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가 바로 <와일드 번치>였습니다.
[ 폭력미학의 거장, 샘 페킨파 ]
샘 페킨파는 ‘폭력미학의 거장’ 혹은 '폭력의 피카소'라고 불려지는 감독입니다. 상당히 유명한 별칭들이지요. 그는 영화에서 폭력을 미학으로 승화시킨, 거의 그 시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폭력의 그 순간순간,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잡아내는 여러 감독들이 그를 스승으로 떠받들고 있기도 합니다만, 정작 그는 살아있을 때에 자신이 만든 그 영화 때문에 여러모로 마음고생 심하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심한 찬반양론에 부딪혔던 감독이었으니까 말이죠. 그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알콜 중독자였으며 70년대 넘어서는 아예 약물 중독자까지 되어버렸습니다. 60세가 채 못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 원인도 어쩌면 결국 다 그의 영화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샘 페킨파는 처음엔 TV시리즈의 대본 작가로 시작합니다. 그 후 영화감독, 대본작가로 활동했지만 실상 그의 영화의 전성기는 극히 짧았고, 그가 남긴 영화들은 걸작 칭호를 서슴치 않고 받을 만한 영화도 거의 없는 폭력으로 가득 찬 서부극 감독으로만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 <철십자 훈장>에서...
그러나 그는 작가주의 정신을 찾아보기 힘든 미국 헐리우드 영화의 역사 속에 1960~70년대를 쓸쓸하지 않게 만든 대표적인 감독이며 그가 남긴 영화의 정신이 후대에 이르러 어떤 형태로든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장의 칭호를 받을 만합니다.
그의 영화 세계를 통틀어 특별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는 점은 그의 영화 이전의 서부극들이 존 웨인은 거칠지만 언제나 우직하고 선하며 그의 상대역들인 인디언들은 언제나 악인으로 그려지던 세계에선 천지개벽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인 페킨파의 영화 <와일드 번치>는 총격전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슬로모션을 사용해 죽음의 처절함에서 묘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 뒤 슬로모션은 샘 페킨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지만 그 후 그의 후배 감독이자 그에게 지극한 오마쥬를 바친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등의 영화에서 슬로모션은 고스란히 계승됩니다.
* 영화 <겟어웨이>에서 스티브 맥퀸과 알리 맥그로우
그의 경력은 <건스모크>, <서부인>, <라이플맨>같은 TV서부극의 대본 집필과 감독으로 시작해서 영화 <지독한 동료>(1961)로 영화감독에 데뷔했으며, 이후의 작품 <대평원 >(1962), <던디 소령>(1965)에서 웅장한 서부의 경관, 신사도가 사라진 서부를 떠도는 원한에 찬 인물, 특히 무시무시하고 사실성이 돋보이는 절묘한 총싸움 등과 같은 공식이 이미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페킨파는 타고난 반골 기질 때문에 세 번째 영화인 <던디 소령>을 만들 때 헐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헐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 그 자체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와 충돌을 빚고 그는 할리우드를 떠납니다.
* 다시 <와일드 번치>에서...
그런 페킨파의 재기를 알린 작품이 바로 <와일드 번치>였습니다. 자동차가 막 등장하던 무렵의 서부, 과거 총잡이들과 무법자들이 설쳐대던 서부가 해체되던 시기에 충성심, 명예, 단결, 영웅주의와 같은 낡아빠진 남성들의 윤리를 위해 싸우는 총잡이들의 모습을 장렬하게 묘사한 이 폭력 서부극은 페킨파를 일약 폭력미학의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만년에 마약과 알콜 중독에 빠져들기도 했던 페킨파의 영화인생은 헐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으로 엉망진창이 되다시피 한 그의 개인사와 그 근본을 흔들어 놓았던 미국 영화사에 대한 영향 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 <철십자 훈장>에서 제임스 코번
페킨파의 모든 영화는 세상의 주류 질서를 삐딱하게 보는 관점(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곧 사라질 인물들이거나 주류 질서에 대해 반항적인 인물들입니다.)과 강력한 남성중심주의, 폭력미학의 강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샘 페킨파 감독은 미국 현대사와 헐리우드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했던 영화작가였던 것입니다.
페킨파는 영화에 관해선 꽤나 신경질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뭐, 아무래도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으니 원인이었겠습니다만 (편집권을 많이 빼앗겼던 것도 그를 많이 절망시켰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내가 유일하게 편집권을 자유롭게 행사 했던 것은 영화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정도였다"라고 말했었을까요.) 단순히 자신의 영화를 가리켜 '폭력을 숭배한다'느니 하는, 한 면만 보고 내지르는 비난들은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14편이라는 많지 않은 작품을 남겼고 그중에서 <와일드 번치>, <게터웨이(스티브 맥퀸과 알리 맥그로우 주연)>,<철십자 훈장>,<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관계의 종말> 등이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