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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죄악을 책망
삼하 12:7-12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삼하 12:7-12 / 이때에 나단이 다윗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임금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임금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양치는 목장에서 불러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웠고, 너를 잡아죽이려고 온갖 음모와 술책을 다 쓰던 사울의 손아귀에서도 너를 항상 살려 주었다. 8) 나는 네 상전 사울의 왕궁도 네게 넘겨 주었고 그의 궁녀들만이 아니라 그의 딸까지 네 아내로 삼아 주었고 너를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네게 더 무슨 소원이 있었다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을 것이다. 9) 그런데 네가 어째서 나의 뜻을 무시하고 나를 욕되게 하였느냐? 너는 남의 아내를 빼앗기 위하여 그 남편을 칼로 쳐죽였다. 그것도 암몬 족속의 칼을 이용하여 교묘히 너의 죄를 숨기면서 그를 살해하였다. 10)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네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간음과 살인으로 모든 사람을 속이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으니 이제부터는 앞으로 영영 네 집안에서 칼에 맞아 죽는 사람들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11) 특별히 내가 네 생전에 내릴 재앙을 똑똑히 들어라. 네가 낳은 자식들이 끊임없이 네게 재앙을 일으키도록 하겠다. 네 생전에 너의 아내들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면 그가 대낮에 네 아내들을 데리고 잘 것이다. 12) 너는 아무도 모르게 그런 일을 깜쪽같이 저질렀으나 나는 대낮에 세상이 다 알도록 퍼뜨려서 온 이스라엘이 다 구경하도록 하겠다.'
나단은 다윗의 은밀한 죄를 지적하고 폭로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7-8) 나단은 다윗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를 정죄하자마자 담대하게 다윗을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왕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왕의 죄를 선고합니다.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행한 발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왕이 되었고, 그를 구원하여 주신 이유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맡겼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다윗이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내 죄를 내가 모른척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모르거나 혹 알아도 눈을 감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겼다 하심(9-12) 나단은 계속해서 다윗의 죄를 고소하고 하나님의 판결을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경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김은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과 같습니다.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는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라는 지령을 요압에게만 비밀리에 전달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진상을 폭로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엄중한 판결을 내리십니다(10-12).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윗이 저지른 죄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아를 죽인 일과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일입니다. 벌도 두 가지입니다. 곧 우리아를 살해한 벌로 다윗 자신의 집에서 나온 칼이 그 죽일 대상을 찾을 것입니다. 간음에 대한 벌로 다윗 자신의 아들이 뭇 사람 앞에서 간음할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에는 피 흘린 죄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가 받을 보응의 형벌 역시 유사한 폭력을 내포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11절은 다윗의 범죄사건 이후의 예언으로서 압살롬의 반역, 특히 압살롬이 다윗의 첩들을 범하는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모든 죄가 하나님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다윗은 이웃의 아내를 탐냈습니다. 간음을 저지름으로 이웃의 아내를 훔쳤습니다. 이웃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의 집도 모독했습니다. 이 모든 죄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시인이자 왕인 다윗이 성경 속에서 큰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도 하나님의 시야와 판단 앞에서 감출 수 없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십니다. 나의 어떤 모습을 보시며 책망하실까 자신을 성찰해 보세요.
용서는 타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감추고 싶은 비뚤어진 속내를 꺼내는 것입니다.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고 지나간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그 어두운 과거를 다시 마주치게 됩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신의 비뚤어지고 뒤틀린 마음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정은 작가)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나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 설 교 >
사무엘하 12장 & 성경주석
<사무엘하 12장 흐름정리>여호와께서는 대죄를 지은 다윗을 책망하기 위해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다. 나단은 비유를 통해 다윗에게 죄를 깨우쳤으며,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집안에 재난이 닥칠 것을 예언하였다. 그 재난의 하나로서, 밧세바의 몸에서 난 아들이 죽었다. 이때 다윗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아들이 죽은 데 대해 가슴이 찢어질 듯하였으나, 여호와의 징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서 슬픔을 거두며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이 시기에 지은 것이 바로 시편 51편이다. 이 시편을 통해 우리는, 일시적으로 정욕의 노예가 되어 범죄하였으나 철저히 회개하고 돌아서는 한 인간의 진실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사무엘하 12장 줄거리>1. 나단이 암양 비유를 통해 다윗이 스스로 정죄받게 함.7. 나단에게 책망을 들은 다윗이 저를 고백하고 용서받음.15. 다윗이 아이가 살아 있을 동안 슬퍼하고 기도함.24. 솔로몬이 태어나고 여디디아라 이름지음.26. 다윗이 랍바 성을 취하고 그 백성들을 괴롭게 함.
<사무엘하 12장 성경주석>
12:1 나단을…보내시니. 시간이 지나면서 다윗의 죄는 드러났다. 바로 다윗이 밧세바가 낳은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알려져,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가 다윗일 것이라는 의심이 일어났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720). 다윗은 백성의 통치자였을 뿐 아니라 “주의 기름 부은 자”요 신정(神政)의 우두머리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지도자요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받들고 집행해야 할 사람이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불명예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잘못을 저지른 왕에게 나단을 보내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고 회개에 이르게 할 거룩한 책망의 기별을 전하도록 했다.
12:1 두 사람이 있는데. 이 우화는 다윗의 의분을 일으키도록 교묘하게 고안되었고 그리하여 그로 자기가 저지른 죄를 스스로 정죄하게 했다. 이 기별을 전하는 데는 지혜와 용기가 요구되었다. 이 책망이 왕의 마음에 깊이 와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책망하는 자에게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12:3 암양 새끼. 자세한 이야기는 어린 암양의 주인에게 동정심을 일으키고 이웃의 소중한 것을 비열하게 취한 그 무정한 자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도록 지혜롭게 전달되었다.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이 이야기는 매우 실감나게 전개되었다. 오늘날에도 수리아 지역에는 깊은 애정으로 양을 기르는 집들이 있다.
12:5 크게 노하여. 자기도 죄를 지었지만, 타고난 정의감을 아직 지니고 있었던 다윗은 지체 없이 판결을 내렸다. 왕은 그 사람에게 엄숙한 맹세와 함께 형벌을 선고하였다. 그의 행위는 사실상 자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2:6 사 배. 이것은 모세의 율법과 일치하는 것이다(출 22:1; 참조 눅 19:8). 「70인역」의 어떤 필사본들에는 잠 6:31과 일치하게 “칠 배”로 되어 있다.
12:7 당신이 그 사람이라. 심판자 다윗은 범법자 다윗이 죽어 마땅함을 보게 되었다. 그 형벌을 선고한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내린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시된 사실이 저질러진 범죄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항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다윗이 저지른 악행은 죽어 마땅하다고 스스로 선포한 그 행위보다 훨씬 더 악한 것이었다. 다윗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하였으며, 선고된 형벌이 정당한 것임을 알았다. 죄가 중했지만 그의 양심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의 죄는 한동안 사람들의 눈에 감추어지는 데는 성공했으나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못하였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다윗에게 그가 범한 죄의 무서운 본질을 보도록 했고, 그 자신에게 올바른 선고를 내리도록 했다. 왕의 앞일지라도 위축됨 없이 적용된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거룩한 담대함과 신실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노골적인 책망은 나단에게 생명이 요구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위축되지 않았다. 담대하고 갑작스러운 나단의 말은 악에 머물러 지내던 다윗에게 그의 범죄가 씌워놓았던 악한 주문(呪文)에서 깨어나게 하는 충격을 주었다. 다윗은 본래 선한 사람이었으며 주께 즐겨 순종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험에 넘어졌고 죄를 감추려고 시도하므로 악의 그물에 점점 더 깊이 걸려들었다. 잠시 그의 감각은 권세와 번영과 불신의 망상으로 마비된 것 같았다. 지금 그는 갑작스럽게 양심의 감각을 되찾게 되었다.
12:8 네 주인의 처들을. 여기에서 나단은 선왕의 후궁들을 새 왕에게 주었던 동방의 관습을 언급하고 있다. 성경에는 사울의 아내 한 명(삼상 14:50)과 아브넬이 범한 사울의 첩 한 명(삼하 3:7)만 언급돼 있다. 기록은 다윗이 사울에게 속했던 부인들을 자신을 위해 취했다고 진술하지 않으나, 최소한 그 관습은 허용되었고 당시 하나님은 그 관습에 간섭하지 않았다(참조 신 14:26 주석; 마 19:4~9).12:9 말씀을 업신여기고.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하나님께 지명받은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높이고 그의 교훈들을 백성들에게 가르칠 책임이 있었다. 다윗은 자신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경멸하고 있음을 나타냈고,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교훈을 무시하도록 독려한 꼴이 되었다.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 두려운 대상이 되어야 했던 왕은 백성이 악을 행하는 데 담력을 얻도록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이 부여한 엄숙한 책임에 불성실했음을 스스로 증거하였다.
12:9 네가…우리아를 죽이되. 다윗이 암몬 족속의 손에 우리아를 죽게 한 명령을 내려 충실한 부하의 피를 흘린 것은 자신의 칼로 살생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는 죄였다. 하나님이 친히 다윗을 살인자로 고소하였고 그는 이 선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12:9 그 처를 빼앗아. 다윗은 밧세바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그 여자는 우리아의 합법적인 아내였다. 우리아를 살해하고 그 아내를 취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다윗은 주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세세토록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고 비난할 기회를 주었다.
12:10 나를 업신여기고. 다윗의 죄는 우리아에게 행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여 범한 잘못이기도 하였다. 주님은 다윗을 보좌에 앉히고 왕국을 그와 후손들에게 영원히 줄 것을 약속했다. 이 모든 축복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선대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를 범하였다.
12:10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윗이 다른 사람들을 다루었던 것과 같이 지금은 그 자신이 그대로 받게 되었다. 다윗이 열어 두었던 악의 수문(水門)이 그의 후손들을 고난과 재앙에 빠뜨렸다.12:11 재화를 일으키고. 여기 예언된 악의 창시자나 선동자가 하나님일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728, 739). 누이 다말을 범했던 암논의 범죄(13장)나, 압살롬의 반역(15~19장)에서 다윗은 죄의 쓴 열매와 자기 아들들을 감독하고 감동시키는 데 무능했던 결과를 맛볼 것이었다.
12:11 다른 사람에게. 참조 16:22. 이것은 다윗이 지은 죄의 결과에 대한 또 하나의 예언이다. 자주 그렇듯이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이 제지하지 않은 일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12:12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참조 16:22. 형벌은 그 죄가 비밀리에 저질러졌던 것만큼이나 널리 공개될 것이다.12:13 내가…죄를 범하였노라. 본문은 이 말이 진실된 고백이었음을 보여 준다. 나단의 책망은 그의 심령을 꿰뚫었고 다윗은 죄인임을 겸손하게 고백했다. 이 당시에 기록된 시 51편에서 다윗은 죄를 깨닫고 용서를 간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시 51:2, 3, 10). 시 32편도 마찬가지로 이 위기의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724).
12:13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이 말은 모든 죄인에게 격려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주님은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아를 살해했던 다윗보다도 더 비열한 죄, 더 큰 배은망덕 그리고 더 강하고 잔인한 이기심의 죄를 범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했을 때 주님은 즉시 용서를 베풀었고 그에게 거룩한 은혜를 회복시켜 주었다. 하지만 다윗이 행했던 그러한 과정에는 커다란 위험이 뒤따른다. 회개는 기본적으로 죄인이 죄에 대하여 가지는 기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죄를 좋아하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좋아서 계획하고 고의적으로 행한 죄를 슬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들의 태도와 행동에 완전한 변화를 원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불법의 원인이 되는 그들의 본성 안에 있는 악을 뿌리 뽑기를 기꺼이 원할 때에만 그들은 회개할 것이다. 죄를 반복해서 지으면서 지난날의 죄를 용서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위선적이며 헛되이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12:14 훼방할. 주님이 다윗의 죄를 용서했을지라도 그것으로 악의 영향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회의론자들은 이것을 지적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교회를 비난한다.12:14 정녕 죽으리이라. 다윗이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5절)고 했을 때 이미 심판은 내려졌다. 그 자신의 선고대로 죽어야 할 사람은 다윗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 대신 그의 죄로 낳은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선고했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722). 다윗에게 그 어린아이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 큰 형벌이었을 것이다. 그가 치른 쓰디쓴 경험의 결과로 다윗은 더 깊은 회개와 회심에 이르렀을 것이다.
12:16 하나님께 간구하되. 심판을 선고한 후라도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와 간절한 탄원에 반응하여 형벌을 가라앉히기도 했다(출 32:9~14; 참조 욘 3:4~10). 다윗은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출 34:6) 분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용서와 아이의 목숨을 위해 열렬히 탄원했다. 어떻든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거역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의 자비로 그 아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12:20 다윗이…일어나. 아이의 죽음은 아버지의 간절한 탄원에 대한 하나님의 엄숙한 응답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간청에 호의적인 응답을 주지 않았지만, 왕은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복종했다. 하늘의 응답이 우리의 탄원과는 정반대일지라도, 하나님은 최선을 아시며, 때때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질병 가운데 있는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2:21 어찜이니이까. 다윗의 행동은 신하들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들은 다윗이 아이의 죽음으로 심히 슬픈 기색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는 금식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청하였다.
12:23 어찌 금식하랴. 이 말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고, 죽음의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묘사한다. 아이가 죽은 후 그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며 그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을 겸손하게 받아들였다.12:23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히브리인들은 비유적으로, 죽은 자들이 스올(s∨e’ol)이라는 영역에서 함께 잠자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이 말은 「제임스왕역」에서 “무덤”(grave)과 “지옥”(hell)으로 번역되었다. 지옥(hell)이란 번역은 부적당하다. 왜냐하면 스올은 고통이나 의식(意識)이 있는 상태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때때로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는 것으로(삼하 7:12; 왕상 1:21; 2:10) 혹은 그의 열조에게 돌아가는 것으로(왕하 22:20) 나타난다. 다윗은 자신이 죽으면 아들과 같은 처지로 가겠지만, 그의 아들은 산 사람의 땅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12:24 솔로몬. 아마도 “평화로움”을 뜻할 것이다. 솔로몬은 왕국을 상속받고, 따라서 메시야의 조상이 될 것이었다. 다윗의 일생은 전쟁의 생애였고 솔로몬의 일생은 평화의 생애였다.
12:25 여디디야. 문자적으로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 다윗은 죄를 지었으나 용서받았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를 사랑했고,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그 아이도 사랑했다.12:26 랍바를 쳐서. 요압이 랍바를 포위 공격한 이야기(11:11)가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으로 중단되었다가, 암몬의 수도를 포위 공격하는 이야기로 다시 이어진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살해한 이야기(11:2~ 12:25)는 역대기에 없다.
12:27 물들의 성. 랍바는 얍복강 상류의 좁은 계곡에 위치해 있었다. 이 성채는 저지대의 성읍에서 떨어져 있는 벼랑 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성이었음이 분명하다. 저지대의 도성은 “물들의 성”으로 불렸는데, 아마도 강으로 흘러가는 샘물 때문에 이렇게 불렸을 것이다. 이 낮은 지역을 요압이 정복한 후 윗 도성의 방어자들은 물 공급이 끊어져 오랫동안 버틸 수 없었다. 신약 시대에 이 도성은 빌라델비아로 불렸다(계 1:11에 나타난 소아시아에 있던 도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현대의 이름은 암만(‘Am- man)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트랜스요르단의 수도였고 후에는 새로운 요르단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2:28 이 성을…취하소서. 랍바의 포위공격은 사실상 끝났다. 그 도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미 함락되었고 나머지 부분도 곧 이스라엘의 손에 넘어갈 것이 확실했다. 요압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나머지 군사들을 모아오라고 정중히 부탁함으로, 왕이 친히 그 도성을 취하여 성을 정복하는 영광을 누리게 할 참이었다.12:28 내 이름으로. 다윗이 예루살렘을 취했을 때 그 성에는 “다윗 성”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5:7, 9). 요압은 랍바 성을 정복한 후에 자기의 이름이 아닌 다윗의 이름으로 일컫고자 했던 것 같다.12:29 모든 군사를. 요압은 랍바를 정복하기 위해 모든 백성을 소집했다(28절). 다윗은 이 계획을 수행했고 몸소 성의 마지막 정복에 참여했다. 도성의 함락이 임박했기 때문에 국가적 힘의 동원은 필요라기보다는 선택에 의해 촉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2:30 그 왕의 머리에서. 여기에 “그 왕”이라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자음들은 암몬 족속의 국가신인 말감(또는 밀곰)을 나타낼 수도 있다(습 1:5). 그래서 혹자는 다윗이 취한 왕관은 왕이 아닌 우상의 관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왕관은 한 사람이 쓰고 있기에는 너무 무거워 보이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는 약 34킬로그램이다.12:30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이 구절의 문법적 구문으로 보아, 왕관이든 보석이든 왕의 머리에 썼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무거운 왕관은 오래 쓰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평상시에 쓸 수도 없었다. 왕관은 잠시 동안만 승리의 상징으로 다윗의 머리에 씌워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석을 취해서 다윗의 왕관에 박아 넣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이 행위는 다윗이 암몬을 통치하게 되었음을 나타냈다.
12:31 백성들을…톱질과. 즉 백성들에게 톱과 기타 도구를 가지고 일하라고 지시했다. 평행 구절은 동사의 한 글자가 바뀌어 “톱으로 켜고”(「개역한글판」 대상 20:3)라고 되어 있다. 사무엘서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동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필사자의 실수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이 암몬 죄수들을 고문했다고 생각하였다(참조 대상 20:3 주석). 그러한 잔혹함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일치되지만 다윗의 성품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출처: https://bible-story.tistory.com/334 [BIBLE STORY:티스토리]
다윗의 죄와 그 벌
사무엘 하 十二장 一-十五 / 한경직 목사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삼하 十二․十三-十四)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에 한 소경이 앉아서 구걸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부르짖으며『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분입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난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제왕 가운데 가장 유명한 왕입니다. 다윗이 사방에 둘러 있는 모든 원수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국가의 기초를 확립한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예루살렘을 국가의 수도로 정하고 법궤(法櫃)를 그리고 가져다가 장차 성전의 기지를 정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정의와 인도의 통치자로서 또는 이상적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어떠한 왕보다도 많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녁에 다윗의 생활을 잠깐 회고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문자 그대로 다방면에 천재적 인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어려서는 목사로서 나타났습니다. 또한 수금(竪琴)을 잘 탈 수 있는 음악가로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시를 친히 지은 시인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읽는 시편 가운데 七十三편이 다윗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천병만마(千兵萬馬)를 능히 호령해서 적진을 물리칠 수 있는 위대한 군인이었습니다. 또한 일 국의 모든 정치를 어거(馭車)해 나갈 수 있는 큰 정치가로서, 또한 역사상에 나타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먼저 그의 생활을 간략히 소개하면 그는 베들레헴에서 났습니다. 그 때부터 베들레헴은 다윗 성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도 역시 베들레헴에서 나시게 된 것입니다.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여덟째아들로서, 말하자면 막내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도와서 베들레헴들에서 양을 쳤습니다. 이렇게 아직도 어릴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준비로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점점 자람에 따라서 음악가로서 사울의 조정에 나아가 사울 에게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년 시절에,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큰 원수인 불레셋 사람의 대장인 골리앗을 물 맷돌 하나로써 격멸(擊滅)하므로 말미암아, 갑자기 다윗의 이름이 온 천하에 떨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때부터 사울 왕조에 있으면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가까운 친구가 되게 되었고 또한 사울 왕의 딸 미갈과 결혼해서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마는 다윗의 이름이 점점 높아감에 따라, 또한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서 마지막에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도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다윗은 부득이 왕조를 떠날 수바께 없었고, 멀리 산지로 도망해서 오랜 동안의 피난 기간이 있게 된 것입니다. 혹은 엔게디 굴속에 살며, 혹은 하길라 산맥가운데 숨어서 살며, 혹은 불레셋 사람에게로 도망 가서 살며, 이 곳 저곳 유리하면서 사는 동안에, 혹은 남의 빚을 진 사람들, 혹은 무슨 불평을 가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다윗에게로 모이기 시작해서 처음에는 四백 명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六백 명이 되었고, 점점 그 무리가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려는 동안에 다시 불레셋과 사울 왕조에는 큰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불행히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이 같이 길보아 산이라고 하는 유명한 산상에서 전쟁하다가 그만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에 유다 지파(支派)의 두목들이 다윗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七년 동안 역시 사울 왕가에서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까닭으로 다윗의 집과 사울의 집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 간단없는 전쟁이 계속된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다윗의 집은 점점 강성(强盛)하게 되었고, 사울의 집은 점점 쇠미(衰微)하게 되어서 마지막에는 이스보셋이 죽은 후에는 다윗 왕이 온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후원을 받아서 왕으로 등극(登極)하게 되었습니다. 민족 전체의 왕이 된 후에는 예루살렘으로 국도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三十三년이란 긴 세월동안 왕으로 온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의 업적은 실로 위대한 것이 많습니다. 사방의 모든 원수를 다 격멸해서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가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한 이가 역시 다윗인 것이 사실입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에로 옮겨옴으로 말미암아, 이미 말한 대로, 장차 예루살렘 성전의 기지를 자연히 정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성전 지을 모든 자료를 다 준비해 놓은 것도 역시 다윗이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신앙과 그 성격은 어떠하냐? 성경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는 문귀(文句)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시켜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친히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데 사람은 외모로 보지마는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고 말하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일곱 형제를 다 물리치고, 아직까지 저 산에서 양 치느라고 오지도 아니한 어린 다윗을 불러다가 그 머리 위에 기름 부은 것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경건한 참된 신앙을 가졌던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편 二十三편을 비롯해서 다윗이 지은 허다한 시를 읽을 때에 다윗의 신앙이 얼마나 진지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이와 같이 독실한 신앙을 시작한 다윗의 성격은 고귀(高貴)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보다도 용감하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양을 칠 때에는 혹은 사자, 혹은 이리가 와서 양을 움켜 가지고 가면 따라가서 맨 손으로 사자와 싸워 이기고, 범과 싸워 이기고, 이리와 싸워 이기면서, 양을 찾아오고 보호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소년일 때에 담대히 골리앗과 겨루어서 골리앗을 격파한, 한가지 사실만 모아도 다윗이 얼마나 담대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무용(武勇)에만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은 역시 덕이 높고 의지가 깊은 그러한 위인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생활을 읽을 때에 여러분은 그와 같은 성격의 표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멀리 엔게디 굴에 숨어 살 때에 사울은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三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깊은 굴속에 있는데 사울은 다윗과 그 쫓는 자가 그 굴속에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혼자 그 굴속에 들어간 일도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다윗이 사울 에게 손대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옷 가를 칼로 베어들고, 그 후에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으면 죽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사울 에게 알릴 때에, 사울이 많은 부끄러움 가운데서 다윗에게 자기 죄를 자복한 일도 있습니다.
또는 하길라 산맥 속에 숨어 있을 때에도 사울은 역시 같은 경험을 당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군인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어떤 곳에 가서 막을 치고 밤에 잘 때에 다 잡니다. 그 때에 다윗과 그를 쫓는 몇 사람이 가서 사울의 물병과 창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해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 부하가 사울을 해할 마음이 있었지마는 다윗이 절대로 금한 것입니다. 이만큼 다윗은 덕이 높은 사람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이에게, 본래 자기가 덕을 입은 이에게 절대로 손댈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준 이가 곧 다윗입니다.
사울가(家)가 다 망하고 마지막에 다윗이 온 열두 지파의 왕이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다스릴 때에, 모든 형편이 대략 평안하여진 다음에 다윗이 한번은 사울의 집과 요나단의 집에 누구 남은 자가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이 과연 한 사람 있음을 밝혔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있는데 이름은 므비보셋이요. 그이는 두 발이 다 상해서 절름발이입니다. 그 절름발이 므비보셋 하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에 다윗이 사람을 보내서 므비보셋을 자기 궁중으로 청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사울이 있을 때에 가졌던 모든 토지를 다 므비보셋에게 돌려주고, 한 편 므비보셋을 왕자의 하나로서, 대접을 해서 궁중에서 언제든지 자기와 같이 한 상에서 먹을 수 있도록 요나단을 생각해서 므비보셋을 우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 왕은 의리가 깊은 사람입니다. 좀 있다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줄 알지만 다윗이 그만 말년에 불행히 자기 아들 압살놈의 난을 만나서 갑자기 자기를 따르는 사람 몇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사울의 먼 친척 가운데 하나인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이 그만 자기 아들에게 쫓겨서 형편없는 가운데 도망치는 그 광경을 보고서 옆에 서서 비웃었습니다.『피 흘린 자여, 어서 가거라.』그러면서 다윗을 저주하고 먼지를 날리면서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을 따라가던 무사 하나가 그 개와 같은 어떤 사람이 대왕을 모욕하니 자기가 당장 가서 그놈의 목을 배어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이 아예 그런 일 하지 말라고 금했습니다.『이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에게 이와 같은 책망을 하는 것이야.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나를 이렇게 대접하는데 하물며 사울의 친척이 나는 대접하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이 무엇이냐?』다윗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가만히 자기의 당하는 모든 모욕이 결국은 다 하나님께서 오는 줄 생각하고 겸손히 그 치욕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압살놈이 물론 망하고 다윗 왕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 물론 시므이를 형벌 하려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때에도 시므이를 다 용서해 주고 벌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만큼 다윗은 마음이 너그럽고 덕이 높은, 참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있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위대한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신앙과 성품이 결국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윗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에게도 특별히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고귀한 성품을 가진 다윗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은 정욕에 많이 끌린 사람입니다. 그 때 물론 제왕들이 다 이와 같은 일을 했지마는 역시 다윗도 이방의 다른 제왕과 다름없는 많은 처첩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에 계속해서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다윗의 이 약점인 정욕을 통해서 큰 시험이 들어 왔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말 그대로 여호와의 원수에게 큰 훼방거리가 되는 무서운 범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고 우리가 다 잘 기억하는 다윗이 침대에 일어나서 왕궁 지붕 위에 올라가 온 예루살렘을 살펴봅니다. 자기가 건설한 예루살렘! 아마 마음 가운데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자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던 것 같습니다. 그런 때에 우연히 어떤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불같은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그 여자를 궁(宮)으로 데려오라고 해서는 욕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 여자는 다른 여자가 아니고 자기의 가장 충실된 신하, 충복 가운데 하나인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이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밧세바가 에기를 배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죄를 어떻게든 감출 생각을 가지고 그 때에 자기의 충복 우리아는 암몬 사람과 싸우기 위해서 전장에 나가 있을 때인데 속히 우리아를 불러오라고 그랬습니다.
우리아를 불러다가 그가 그 동안 전장에 나가 싸우기에 수고를 많이 하였으니 오늘 저녁에는 그의 집에 돌아가서 편안히 자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러나 이 우리아는 얼마나 충성된 사람인지,『지금 내 모든 상관들과 내 모든 전우들이 들판 천막 가운데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대적과 싸우고 있는데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예루살렘에 왕명으로 돌아오기는 왔지만 내 집에 돌아가서 편안히 잘 수가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미 돌아왔으니 왕궁 어떤 모퉁이 방에서 오늘 저녁을 지내고 가겠습니다.』종래 우리아가 왕의 명이라도 자기 집에 가서 자라고 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결국 다윗의 계교(計較)가 맞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지은 죄를 감추려고 하는 한 가지 생각 가운데서 오리려 더 죄 지을 생각이 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던 요압 대장에게 우리아를 통해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우리아로 하여금 요다음 날 암몬 사람과 싸울 때에 최전선에 내보내서 암몬 사람에게 죽게 만들라고 하는 이런 음모의 편지를 써서 자기의 충복인 우리아의 손에 주어서 그것을 요압에게 보냈습니다. 이 충복 우리아는 자기를 죽이려는 편지인 줄을 알지도 못하고 그저 충성되게 그 편지를 요압에게 전했습니다. 요압이 그대로 했습니다. 그 이튿날 억울하게 우리아는 암몬 사람에게 죽게 된 것입니다.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그 얼마 후에 그 아내 밧세바를 불러서 자기의 처로 삼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저녁 읽은 성경 말씀 구절이 나단이 다윗을 만나서 이야기한 그 말씀입니다. 나단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다윗에게 와서 이야기할 때에 먼저 유명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동리에 큰 부자 한 사람이 살고 가난한 사람이 삽니다. 그 부자는 집에는 소도 많고, 염소도 많고, 많은 재산이 있는 부자입니다. 이 가난한 집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조그마한 암 양 새끼 하나 밖에 없는데, 이 가난한 사람이 암 양 새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저 한 상에서 먹고 한 자리에서 자고 거의 한 자녀와 같이 이 암 양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자 집에 어떤 손님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자기 집의 많은 양, 많은 소를 아깝다고 그냥 두고 이 가난한 사람이 기르는 암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그 암 양을 잡아서 자기의 손임을 대접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다윗은 그 근본 뜻은 알지도 못하고 본래 정의감은 강한 사람이라 정의감에 흥분되어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서(盟誓)하노니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양은 모세의 율법에 의지해서 네 배나 갚아 주어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단이 다윗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당신을 베들레헴 목동으로 일으켜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귀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처첩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화를 주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더 원하면 더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당신의 가장 충복 중에 하나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서 당신의 아내로 삼았나이까? 당신께서 이와 같은 죄를 지었음으로 말미암아 이 앞으로 당신 집에 칼이 영영(永永)토록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당신은 은밀한 가운데 다른 여자를 모욕했지마는 당신의 처첩은 백주에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죽을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아, 과연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고 나단에게 죄를 자복했습니다. 사실 다윗이 그 때에 참으로 회개한 것은 시편 五十一편을 읽어보면 얼마나 통회하면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였나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참으로 죄를 회개하는 것을 보고서 나단이 하는 말이『당신이 이렇게 죄를 회개하니 죽을 것을 하나님께서 면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벌을 그냥 당신의 집에 올 것입니다.』그 후에 보면 꼭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윗이 죽을 것은 면했습니다. 그 죄는 으레 히 죽을죄이지마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가정에서 된 모든 일을 보면 나단이 예언한 꼭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암논이라고 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도 많은데 그 가운데 다말이라고 하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릅니다. 이 암논이라고 하는 젊은 사람이 자기 이복 여동생 되는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에 대해서 짐승 같은 마음을 품고 결국 그 누이를 모욕했습니다. 가정에 이와 같이 패륜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는 누군 고 하니 다윗의 다른 아들 압살놈과 동복 동생 되는 누이입니다. 압살놈이 자기 누이가 그와 같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볼 때에 마음가운데 독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얼마 후에 무슨 잔치를 한다고 해서 여러 왕자들과 이런 사람들을 청해서 대접을 하는 체하다가 무사를 시켜서 암논을 쳐죽였습니다. 한 아들이 한 딸에 대하여 패륜의 일을 감당했고 한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쳐죽였습니다.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압살놈은 암논을 죽인 후에 멀리 도망쳤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용서함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압살놈이 또한 딴 계획을 했습니다. 정병(精兵)五十명을 자기 집에서 치기 시작했고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이스라엘 사람의 민심을 도득(盜得)하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왕이 되어서 왕으로 선포하게 되고, 자기의 무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자기 아버지를 치려고 쫓아옵니다. 그래서 이미 한 말대로 다윗이 예루살렘을 급히 떠나서 멀리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날 후에 물론 압살놈이 죽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는 왔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여호와의 원수들에게 큰 훼방거리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다윗같이 신앙이 어려서부터 독실했고 그처럼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파렴치의 죄를 지을 수가 있겠는가? 얼른 생각해 보면 참 생각조차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약한 것은 인간입니다. 약한 것은 육신입니다. 그런고로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여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하고, 아무리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지마는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한 면에 약점이 있는 것입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악한 사탄은 약점을 통해서 그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그랬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약점이 무엇인가? 내 생활 면과 내 성격에 있어서 특별히 약점이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살펴서 거기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나 큰 죄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약점을 스스로 깨닫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나 다윗의 전철을 또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에 이와 같은 범죄는 젊었을 때에 많지마는 중년이 지나고 노년기가 가까워 오면 별로 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죄는 청년 시대에 지은 죄는 아닙니다. 중년을 훨씬 넘어서 아마 노년기에 거의 가까워서 이런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청년기가 지났다고 방심할 것은 아닙니다. 또 다윗이 원수와 싸우면서 사방에 일이 너무 분주해서 동분서주할 때에 이와 같은 시험이 오지 아니했습니다. 대체로 원수를 다 정복하고 이제는 다윗 자신이 전장에 나갈 필요가 없고 자기의 부하가 모든 일을 잘 합니다. 암몬 사람과 싸우지마는 요압이 대신 잘 싸워 줍니다. 자기는 예루살렘 성에서 한가하게 낮잠 자고, 침대에서 저녁 때 일어납니다. 한가한 대에 시험이 들어왔습니다. 한가한 때를 우리가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다윗의 신앙과 그의 의리심과 그 높은 덕과 그 용감한 것을 배우는 동시에 다윗의 이 범죄와 형벌 받은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알아서 우리 실생활에 전감(前鑑)을 삼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다윗 같은 이도 이와 같은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도 조심하지 아니하면, 언제, 어느 때에, 어떤 범죄를 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다윗의 생활을 생각하면서 우리 생활의 전감을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밧세바
삼하 12:1-15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는 언제든지 항상 승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영적 무장과 영적 능력의 배양이 필요하다. 둘째는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넋을 놓고 있으면 생각지 않은 때에 예상치 않은 공격을 받아서 어이 없이 패배하게 된다.
다윗의 생애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는데 곧 골리앗과 밧세바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다윗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그의 삶에 큰 변화와 영향이 있었다.
골리앗과의 싸움은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었고 밧세바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은 내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었다. 외부의 적의 공격보다 내면의 정욕의 유혹이 더 무섭다. 외부의 적의 공격은 쉽게 알 수 있고 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면 되지만 내면의 정욕의 유혹은 알아채기가 쉽지 않고 또 이기기도 쉽지 않다.
골리앗은 거인장수였고 밧세바는 아름답고 연약한 여인이었다. 또 골리앗은 다윗이 어린 소년 때에 만났고 밧세바는 원숙한 성인 때에 만났다. 그런데도 다윗은 골리앗에게는 이겼지만 밧세바를 통한 유혹에는 우습게 넘어가고 말았다.
골리앗 때에 그는 무명의 소년이었지만 밧세바 때는 왕이요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골리앗은 전장에서 맞닥뜨렸지만 밧세바는 왕궁에서 보았다.
골리앗 때는 나라의 위기의 때였고 밧세바 때는 모든 것이 평안할 때였다. 골리앗 때는 그가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직접 나갔다가 싸워 이겼지만 밧세바 때는 부하들이 싸우러 나갔을 때에 혼자 왕궁에 남아 있다가 유혹에 넘어갔다. 성도는 열심히 일할 때는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지만, 일하지 않으면 유혹받기 쉽다.
골리앗 때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했지만 밧세바 때는 하나님을 철저히 잊어버렸다. 골리앗 때는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지만 밧세바 때는 기도의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골리앗 때는 완전히 승리했지만 밧세바 때는 철저히 패배했다. 영적 싸움은 기도로 힘을 얻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다.
다윗은 부하들이 전쟁하러 나가 있는 동안에 궁궐에 남아 있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고 그를 불러들여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충신 우리야를 전장에서 불러들이지만 실패한다. 그러자 그는 요압장군에게 우리야를위험한 상황에 내보내게 해서 죽게 한다. 그리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위대한 성군 다윗이, 경건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온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더럽고 끔찍한 죄를 지을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쉽게 다윗을 비난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그도 우리처럼 연약한 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도 다윗처럼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도 얼마든지 다윗처럼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범죄하고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말씀을 교훈 삼아서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이 사건을 우리에게 기록해서 알려주시는 것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거나 잊어버릴 때에 범죄하게 된다. 죄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내가 하나님 대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다.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던 것처럼 사탄은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내가 하나님이 되어 마음대로 행하라고 한다.
‘다윗이 보내니’(삼하 11:1, 3, 4, 6, 27). 그는 자신이 왕이므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마음대로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또 마음대로 사람을 자기에게 보내게 하기도 한다. 그는 한 순간도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의 왕이 되시고 주권자가 되시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할 때 우리는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빼놓고 내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에 범죄하게 된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심하면 하나님까지도 내 맘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다윗의 이 더럽고 끔찍한 범죄는 그가 자신이 한 나라의 왕이라는 생각만 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다윗에게 보내어’(11:5, 18). 밧세바의 임신통보와 요압의 우리야가 죽었다는 보고 즉 요압이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 흉계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왕인 그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신’ 것이다.(12:1)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그에게 보내셔서 그의 죄를 책망하신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서 행세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는 그는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그의 삶의 주인이심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즉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과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그에게 확인시키신 것이었다.
죄란 우리가 하나님의 통제와 인도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모든 것을 내맘대로 하려고 할 때에 범죄하게 된다. 죄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되어서 그들을 내맘대로 움직이려는 것이다. 결국 죄란 언제나 똑같은 것이다. 사탄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하나님 행세를 하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이 유혹에 넘어가면 누구든 언제나 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며 주관자이심을 날마다 고백하고 인정해야 한다. 나의 왕이신 하나님을 언제나 높이며 경배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찬송소리를 듣고 지옥이 떨리며 사탄이 물러가고 실패한다.
복음은 나 자신에게 대한 것이다.
이 다윗의 실패와 범죄는 하나님이 보내신 한 사람에 의해서 반전된다. 선지자 나단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다윗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나단의 설교는 다윗에게 설교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단이 설교하듯이 말하지 않고 이야기하듯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단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은 이야기를 하자 다윗은 분노하면서 당장 그 부자를 벌주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런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당연히 벌을 받아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6절) 그러자 나단은 갑자기 그에게 이렇게 외쳤다. “그 부자가 바로 당신입니다.”(7절) 당신이 바로 죽어야 할 사람입니다.
다윗이 이 때에 나단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는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대한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바로 그에게 주시는 말씀이었다. 그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런 다윗 같은 마음의 자세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 한다. 설교를 들을 때에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신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고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처럼 도대체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하고 정죄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복음은 어떤 사회적 현상이나 상황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문화나 제도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의 문제, 사람의 현실, 사람의 고통, 사람의 실제적인 죄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바로 나의 문제, 나의 현실, 나의 죄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선포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곧 나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능력이 되고 은혜가 되고 복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보게 되고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직접 그를 지목하고 그의 죄를 지적하자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다.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13절) 다윗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그렇게 더럽고 끔찍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사용하시고 복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감추려 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책망을 그대로 다 받아들였다. 그리고 눈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 시편 32편과 51편은 이때의 그의 눈물의 회개기도이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즉시 용서해 주셨다.(13절)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는 죄를 깨닫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고 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에 돌이키지 않았다.
복음의 역설
사람들이 왜 사울처럼 자기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꾸만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려고 할까?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죄를 숨기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의 죄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피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구원과 은총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한 것이다. 나의 죄가 철저하게 낱낱이 드러나고 지적받고 책망받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때이다. 나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내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려고 나를 부르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다. 하나님을 떠났던 삶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다윗의 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었다. 가정을 파괴하고 윤리를 거스리고 사람을 죽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런 그의 큰 죄를 덮고도 남았다. 아무리 사람의 죄가 크고 많아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떤 죄라도 하나님께 나아오면 다 용서하시고 가려주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은 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은 죄에 골몰하고 거기에 매여서는 안된다. 내 죄를 깨달았으면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
왜 내가 내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리가 은혜의 자리인가? 예수님께서 내가 있을 자리에 대신 서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죄를 지은 바로 그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 대신 잡히셨다. 내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내 대신 서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것은 바로 내가 서 있을 자리에 대신 서신 것이다.
거기서 나 대신 정죄를 받으시고 책망을 받으시고 비난을 받으셨다. 그리고 내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내 십자가를 지시고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나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은혜와 구원을 입는다.
형벌과 징계
13, 14절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윗이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자 하나님은 즉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네가 죽지 않으리라.” 그러나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는데 왜 아이가 죽는가? 용서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우리는 형벌과 징계 또는 연단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는다. 이것이 죄의 형벌이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고 죽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죄의 결과와 열매는 내가 받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습관적으로 회개하고 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고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 다윗은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을 받은 것일까?
삼하 12:7-14
[찬송] 찬 8장 거룩 거룩 거룩, 찬 331장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 찬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
T.S: 믿음이란 오늘날에는 진정 자백하는 회개를 하면 징계와 저주와 재앙이 끝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신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성경인물들 가운데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신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위인들은 사실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다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위인들로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욥,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아론, 여호수아, 갈렙, 사무엘, 다윗, 솔로몬, 엘리야와 엘리사,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예레미야 등은 구약의 인물들인데 다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스데반 집사, 사도바울, 디모데 등도 다 천국에 들어간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분명하게 회개를 하고 천국에 들어갔다고 기록된 인물들이 있다면, 구약의 인물로 보면 딱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바로 ‘욥’과 ‘다윗’입니다. ‘욥’과 ‘다윗’은 지금 천국에 있는 24장로들 중에 포함되는 인물들로서 위대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인물은 ‘다윗’이라는 인물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제가 5분 안에 정리해보겠습니다.
다윗은 B.C.1040년경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들 중에 한 명이 일찍 죽어서였는지 그는 일곱 번째 아들로 기록이 됩니다. 그는 어렸을 때에 아버지의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나이 15살쯤 되었을 때에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서 자신이 왕으로 하나님께서 선택되었다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형들의 안부를 물으려고 전쟁터에 심부름 갔다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골리앗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군인을 대신하여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는데, 기적으로 그를 쓰러뜨립니다. 그리고 일약 군대의 지휘관이 발탁되고, 이어 천부장이 되지만, 왕의 시기심으로 인하여 도망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하지만 도망다니는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10년동안이나 보호해주었고, 사울왕이 죽자 그는 비로소 그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에 드디어 유다지파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다시 7년 6개월이 흐른 다음에는 북이스라엘의 11개 지파까지 포함하는 온 이스라엘왕국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의 나아 37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자 그는 ‘기브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하여 그곳에 ‘법궤’를 안치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주변국가들을 정복해 나가기 시작하는데, 남쪽에 있는 블레셋부터 시작하여 아말렉, 에돔, 암몬, 모압, 아람의 소국들을 전부다 정복해 나갑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제 이스라엘 주변국가들 중에 암몬 족속을 정복하는 전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을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때에 다윗은 왕궁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부하장수들이 왕을 보호하기 위해 예루살렘 남아있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군들이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하고 있을 때에 왕은 낮잠을 자다가 저녁에 될 무렵 일어나서 왕궁 옥상에서 산책을 합니다. 그러다 왕궁 가까이 있는 집에서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알아보니 그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수 가운데 하나인 헷사람 우리아 장군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데려다가 동침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얼마후 전갈이 왔습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녀가 임신한 아기가 자기의 아기라는 것을 숨기고자 편지를 보내 우리아 장군을 예루살렘 오게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전장터에 있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초막에서 지내고 있으며, 자신의 전투대장인 요압 장군과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치고 있는데 어찌 집에 내려가겠느냐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 술을 먹여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의 손에 편지를 들려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를 최전방에 보내 죽이라고 하는 일종의 “사형집행영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로 돌아간 우리아는 담대히 적과 맞서다가 전사하고 맙니다. 그러자 다윗은 애곡하는 기간이 끝난 밧세바를 왕궁으로 맞아들입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다윗이 우리아 장군을 죽게 하였으며, 그것은 그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꾸민 못된 짓이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다윗은 그와 같은 사실을 철저히 숨겼습니다.
그런데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왕을 알현하면서 어떤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을 시작합니다. 한 도시에 두 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인데,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한 사람에게는 양떼들과 소떼들이 심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어렵게 사서 기르고 있는 암양 새끼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암양 새끼는 그에게 자식이 되어,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워 잤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인이 부자에게 오자, 부자는 자기에게 온 행인을 대접하고자 자기의 양떼와 소떼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아서 그것을 잡아 행인을 대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윗이 심히 노하여 나단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여야 하오. 이는 그가 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4배를 물려야 하오.”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나단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소”(삼하12:13)
그렇다면 다윗의 이 회개는 진정한 회개였을까요? 그가 그때 회개할 때에 쓴 시편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그는 참으로 진실로 회개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시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시40:12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시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이불)를 적시나이다
그는 회개하면서 심지어 자기가 범한 죄가 하늘에 있는 행위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시40: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히 회개를 했습니다. 신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가장 많이 가장 깊이 회개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다윗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 다윗이 이렇게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그가 지은 죄에 대해서 재앙을 받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이 죄를 범한 후에 일평생 동안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로서 많은 재앙들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회개해도 다 소용없는 것 아니야”라고 말입니다. 회개해도 재앙을 받는다면 굳이 회개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고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약 1년 7개월동안 회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은 자범죄들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들까지 낱낱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고 있는데, “그럼,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회개하는 것이 혹시 소용없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회개했지만 그토록 심한 징계를 받게 됩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해석을 내려놓고 있는데, 다음과 같인 해석이 주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에 대해서는 용서해 주시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그가 지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반드시 징계하신다”
아니 회개했으면 지은 죄에 대해서도 벌을 받지 않아야 정상인 것이지, 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형벌을 다시 받는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회개를 하려고 할까요? 물론 남에게 손해를 끼친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변상까지 해야 한다고 율법에는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를 한다고 해도 다윗처럼 벌을 받게 된다면 누가 과연 회개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냥 회개는 회개인 것이고 재앙은 우리가 일평생 그리고 나의 후손들까지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되는 것인가요?
회개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형벌을 받는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이 세상에서만 형벌을 받는 것이고, 천국에서는 형벌을 받지 않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가요? 그럼, 지금 우리 교회가 외치고 실행하고 있는 회개는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요? 우리가 회개하면, 진정 저주가 떠나간다는 말은 맞는 말일까요? 내가 내 조상들 1~4대가 지은 죄들을 대신 회개하면 세대의 영들이 진정 파쇄된다는 것은 과연 맞는 말인가요?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쳐주는 바른 가르침을 살펴보자 하는 것입니다.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범죄한 후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을 들었고 그가 회개할 때에 죄용서를 받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재앙은 장차 고스란히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다윗은 자신이 회개한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게 되었던 것일까요?
2)청중적 접근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지금 죄를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죄용서를 받는 것과는 별개로 죄의 형벌은 계속해서 받아야 하는 것인가요?
3)본문문제배경
4)문제발생원인
5)문제 심리묘사
믿음이 있어도 회개와 형벌의 관계를 잘 모르면, 회개하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회개와 형벌의 관계를 잘 모르면, 회개해도 형벌을 받을 것이므로, 더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회개와 형벌의 관계를 잘 모르면, 회개하면 그나마 천국에서는 용서받은 자가 되기 때문에 비록 이 땅에서 형벌을 받아도 천국에서는 받지 않을 것이니, 회개라도 열심히 해아겠다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회개와 형벌의 관계를 잘 모르면, 회개를 해봤자 소용없다면서 회개를 하지도 않을 것이며, 하고 있는 회개도 중단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회개와 형벌의 관계를 잘 모르면, 나는 예수님 시대 이후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에 내가 받을 형벌까지도 그때 다 면제받은 것인데, 무슨 형벌 따위를 소리를 하는거야 하면서 회개하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와 형벌의 상관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왜 회개를 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고도 회개하지 않아 엄청난 종류의 저주 가운데 놓여 일평생 고생을 하면서도 왜 저주가 끝났다는데 나에게는 저주가 끝나지 않은 것인지하고 살다가 그만 죽게 될 것입니다.
2)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가. 다윗의 회개했음에도 재앙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다윗은 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만 않았을 뿐 징계는 다 고스란히 다 받게 되었던 것인가요?
그 이유는 첫째, 그가 회개를 하기는 했지만 형식적인 회개만 했을 뿐 진실로 회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가 덜 된 것”이라고 판단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그가 형식적으로 회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분명 피흘린 죄에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럼 다른 이유들을 가정해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이유들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것을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 중에 첫째는, 그가 죄를 짓고도 즉각적인 회개를 하지 않았으며 지은 죄를 계속 감추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신 것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그의 범죄는 일반 평민의 범죄가 아니라 한 국가의 지도자가 저지른 범죄였기 때문에, 그 죄값을 무겁게 물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종”,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칭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죄갑을 무겁게 물려 일평생 그 죄값을 받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그가 회개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가 치러야 할 죄값을 미리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그가 그 죄값을 받게 된 것이고도 할 수 있습니다(삼하12:7~12). 그런데 다들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세 번째 견해가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 주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야라고 나단선지자가 말한 직후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삼하12:7-12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1)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2)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3)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것을 진단하면, 그때 ‘살인의 영’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아들들 중에서 적어도 세 명이 칼로 죽임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장자가 죽어나갔고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숨긴 부끄러움 간음의 행위를 다윗의 셋째 아들이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저지르게 됩니다.
나. 구약시대 다윗이 징계를 받은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다윗은 살아있는 동안 이 땅에서 그토록 엄청난 징계를 받은 것인가요?
그것은 한 마디로 그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의지’이자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경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앞서서 살펴보았지만 다윗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였습니다. 다윗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없는 제사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이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경륜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위요, 그분의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 죄에 합당한 죄값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출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그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당시 사탄마귀도 역시 다윗이 범죄한 것을 다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범죄에 직간접으로 참여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욥처럼 이 세상에서 몇 안 되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죄를 지었는데도 그를 징계하지 않는다면, 사탄은 하나님께 반드시 다윗을 참소할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범죄한 사탄을 심판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역시 다윗을 징계하셔야 맞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사랑하고 있는 만큼 그가 정결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일평생에 징계를 받으면서도 기쁘게 자신을 정결케 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가 늙어 죽기 전에 단 한 번 있었던 인구조사 곧 사탄의 강력한 참소가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범죄함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가 이 사건 이후로 그와 동일한 종류의 범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열왕기서의 기자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왕상15:5).
왕상15: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둘째, 이 때는 구약시대의 일로서 지금 우리 시대와는 경륜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징계하시는 때입니다. 그때 귀신이 자기들 맘대로 마구 재앙을 주는 시대가 아닙니다.
삼하12: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구약시대에는 범죄한 자를 징계하는 존재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시켜서 하시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인 천사를 시켜서 다윗에게 재앙을 일으키게 하고 다윗에게 형벌을 가하게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재앙을 일으킨다는 동사가 ‘쿰’이라는 동사인데, 이 단어는 히필형 분사 능동태 구문이기 때문입니다. ‘히필형’이란 함은 ‘사역능동’으로서 ‘하게 하다’ 혹은 ‘시키다’라는 뜻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문은 “재앙이 일어나도록 시킬 것이다”라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죄를 범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시켜서 재앙을 내리는 시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범죄에 대한 저주까지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이후 누가 범죄한다면 그때 재앙을 일으키시는 존재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아니라 사탄마귀와 그의 귀신들입니다. 그것들이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직접 사람 속에 들어가서 온갖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는 우리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도 죄가 용서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깨끗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요일1:9). 이때 귀신은 더러운 영이므로, 회개하면 우리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1)우리 죄를 사(용서)하시며 (2)우리를 모든 불의에서[부터]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막9: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3)청중의 문제와 해결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지은 죄들을 회개한다면, (1)즉시 하늘나라에 있는 행위책에서 그 죄목들이 지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2)이 땅에서는 우리 속에 들어와 온갖 저주를 불러 일으키고 가난과 질병을 일으키며, 우리와 우리의 자녀의 앞 길을 막고 있는 영들이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지었던 죄들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던 온갖 저주들이 즉시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죄까지 회개한다면 그때 우리 조상들에게 역사했다가 후손들에게 들어오거나, 밖에서 세대의 영이 되어 역사하고 있던 영들이 떠나가게 되고 파쇄되게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예수님을 믿고도 받고 있던 재앙이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오늘날에는 진정 우리가 자백하는 회개를 하면 징계와 저주와 재앙이 끝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까지 이미 담당하신 상태이기에 우리가 지었던 죄이든지,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죄이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죄가 하늘에서도 용서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깨끗하게 됩니다. 이것은 죄 때문에 우리 속에 들어와 역사했던 영들이 떠나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저주가 형통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복
가. 헌신자가 받는 복
나. 청중의 더 큰 복
2)결단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한 번 회개로 다 용서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백함으로 회개하면 우리는 더 이상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와 조상들이 지은 죄를 자백하지 않았는데도 귀신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귀신들로 인하여 우리에게서 나타났던 저주가 자동적으로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지은 죄들과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날마다 자백함으로 저주와 형벌에서 벗어나야 합입니다. 이것들이 지나쳐 우리의 삶을 장악해버리면 우리도 구원도 요원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속 안에 있는 귀신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하루에서 1시간에서 4시간씩 1~2년은 회개해야 하고, 우리 밖에 멤돌고 있는 세대의 영들까지을 파쇄하기 위해서는 또 3~4년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모든 일에 형통하게 됩니다. 더 이상 건강에 이상히 생겨 병원에 입원할 일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내 자녀의 앞길이 막히지도 않습니다. 악한 영들은 더 이상 내 속에서와 내 주변에서 역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 훨씬 더 천국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지게 됩니다.
가. 결단의 필요성과 방법
나. 결단의 축복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다윗이 참된 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재앙을 받게 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다윗이 징계를 받게 된 것은 온 우주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죄 지은 자에게 내리시는 당연한 처벌이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다윗이 징계를 받게 된 것은 그때가 구약시대로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기 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다윗이 징계를 받게 된 것은 다윗이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이미 그를 그렇게 결정해 놓은 상태였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오늘날에는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회개함으로 자백하기만 하면 지은 죄들을 다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하여 들어온 귀신들과 저주들가지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주여 회개가 이처럼 중요한 것인데도 회개하는 삶을 살지 못했나이다. 용서해 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회개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조상들이 지은 죄도 회개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징계받기 전에 즉시 회개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회개하여 형통한 삶을 살겠습니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징계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지 못한 채 징계는 응당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회개하지 않아도 귀신들이 주는 저주를 받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회개를 계속하여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날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다윗은 진정한 회개를 했던 사람이로구나.
2. 진정한 회개를 했어도 다윗이 징계를 받게 된 것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에게 직접 징계를 내리시는 시대였기 때문이로구나.
3. 죄를 지은 자에게 죄값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로구나.
4. 구약시대에는 귀신이 형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리는 천사가 형벌을 주는 시대였구나.
5.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진정한 회개를 하면 하늘에서도 죄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죄 때문에 들어온 귀신들까지 처리할 수가 있구나.
6. 예수님을 믿는 자라고 할지라도 지은 죄를 낱낱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의 종류에 따라 이 땅에서 귀신들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받게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