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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칠은방도들의 세력은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다.
세상은 더러움과 추악함으로 물들었다. 천신(天神)께서는 결코
이런 세상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불의 심판을 내리신다. 그때가
오면 황제도 죽고 고관 대작들도 죽는다. 절대고수라 해도 죽
음만은 피하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 십팔층 열한지옥으로 떨어져 억겁을 고통
속에 지낼 것이다. 비명 소리와 인두로 살을 지지는 노린내가
천하를 진동시키리라.
칠은방에 가입하라.
영생 불사의 힘이 칠은방에 있으니...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을 버려라. 은자 한 냥을 버리면 영생에
서 황금 백 냥을 받을 것이요. 목숨올 버린다면 황제가 부럽지
않은 삶을 누리리라.
칠은방주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없지만 교세는 널리 확장되었
다. 삼 년 연속으로 가뭄과 한파가 몰아쳐 굶어 죽는 사람이
도처에 널렸기에 허황된 말에 쉽게 넘어갔으리라.
관현은 다른 지방보다 조금 나은 편이지만 그래도 칠은방의 교
리가 서서히 침투하여 청성 도인들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날로
늘어나는 형편이었다.
"무당조차 고전한다면 누가 상대할 수 있을까?"
호북성에 근거를 둔 무림대파 무당 역시 칠은방도의 파상적인
공세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형체가 없는 귀신과 싸우는 기분이
었다. 누가 적이라는 것을 알면 간단한데.
칠은방도들은 두 부류로 나눠졌다.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입문하면 무공 종류별로 분류하여 일에
서 칠까지 적힌 은색 무복 중 하나를 입게 된다. 그들은 방주
외 명에 따라 무림의 대소사에 파견된다. 설혹 자신이 무공을
익힌 문파를 치러 가는 일에도 절대적인 복종만 있을 뿐이다.
무향(武香)이라 불렀다.
무공을 몰라 생활에 종사하며 방도가 된 교향(敎香).
문제는 교향이었다. 그들의 정보망은 세상 어느 문파보다도 신
속하고 정확했다. 교향이 있기에 무향의 신통치 않은 무공에도
불구하고 칠은방의 무위(武威)는 날로 높아졌다.
더욱 무서운 점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사술에 현혹되었다 할지라도 목숭에는 미련이 있기 마
련인데 칠은방도들은 죽음을 기쁘게 받이들였다. 그들 말대로
영생이 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어리석게 보였다.
덜그덕! 덜그덕..!
양식을 가득 실은 우마차가 좁은 산로로 접어들었다.
'역시 이쪽 길이야.'
단비하는 피수투와 안에 갈무리된 미혼독(迷魂毒)을 확인했다.
양식을 조달시키지만 않으면 되지, 애꽃은 사람들을 죽일 필요
는 없었다. 그래서 살상독(殺傷毒) 대신에 미혼독을 사용하곤
했다. 벌써 여섯 번째...
덜그덕! 삼장...덜그덕, 덜컥! 이 장...!
적정 거리 안에 들어왔다. 단비하는 서둘지 않고 피수투의 장
심을 전면으로 향한 채 수평으로 내밀었다. 꼭 두 손으로 날아
오는 물건을 받으려는 형상이었다.
그 자세 그대로 진기를 끌어 내어 전신에 일주천시켰다. 다음
모든 진기를 장심에 집중시켜 방사하는 기분으로 운공했다.
부르르...!
피수투가 바람도 없는데 거세게 떨렸다. 곧 이어 미세한 하얀
가루가 실안개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실안개는 피수투에서
흘러나오는 여풍(餘風)을 받아 서서히 전면으로 밀려 나갔다.
"커억! 독...!"
"독이다! 흩어져라! 커억!"
보급 책임자는 무향 소속 칠은방도 이십여 명의 경계하에 보급
품을 운송하는 중이었다. 선두와 후미의 간격은 삼 장에 달했
다. 그런 그들이 선후를 가릴 것 없이 일제히 무너져 버렸다.
일 다경이 지났을 무렵 단비하는 운공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예외는 없었다. 전에 다섯 번이나 당하고도 아직 대책을 마련
하지 못한 칠은방이었다. 인원이 아무리 많아도 독에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증원(增員)에만 심혈을 기울였으
니...
"히히히! 이리 와. 내가 꼭 보듬어 줄게."
"어머니, 여기가 영생이에요. 쇠고기 좀 잡숴 보세요."
"여보 내가 말한 지상 낙원..."
여기저기서 넋 잃은 목소리들이 울려 나왔다.
사목화(麝目花), 응조화(鷹爪花), 금매화(金梅花) 등 이십여
가지의 독초에서 추출하여 제련한 미혼독은 중독당하는 즉시
강력한 환상을 동반했다. 악몽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가장 열
망하던 환상을...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미혼독은 혼절이 아
니라 환상을 일으키는 독이었다.
단비하는 소를 떼어 내고 마차에 불을 질렀다.
두 시진이 지날 무렵, 일행 중 가장 내공이 정순했던 양태원
(梁泰源)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전신이 물 먹은 솜처럼 노
곤했고 열기가 가시지 않아 현실과 환상 사이를 넘나 들었다.
아직도 그의 눈에는 아름다운 미희(美姬)의 알몸이 어른거렸
다. 지상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뚜렷이 얼굴 모습을 그려 낼
수는 없지만 천하제일 미녀였던 환상속의 미녀가 품속에 안겨
있는 기분이었다.
"끄응...!"
손으로 땅을 짚고 간신히 어질거리는 몸을 가눴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내음이 맡아졌다.
우마차와 식량은 다 타버려 재만 수북이 쌓인 가운데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제길! 또 당했군. 끄응!"
여기 저기서 아직도 환상 속에 빠져 있는 수하들의 모습이 어
른거렸다. 그리고...낯선 이방인의 모습도 비쳐지기 시작했다.
유난히 하체와 팔이 길어 원숭이를 연상시키는...그는 도인들
이 입는 회색 도복을 입고 있었다.
"헉! 당신은 청성..."
쉬익...!
매서운 검풍이 일며 양태원의 목은 썩은 무처럼 간단히 떨어져
나갔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칠은방도들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잔치를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죽지."
"하하하!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소관인데 어찌 연연하겠습니
까?"
"나는 모르겠다. 네 일이지 내 일이냐?"
이가동(李家東)은 도끼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마당 한 귀퉁이에 만들어 놓은 도축장에는 황소 한 마리가 잔
뜩 겁먹은 눈길을 뒤룩뒤룩 굴렸다. 미물인 소도 자신의 운명
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퉤엣!"
침을 손바닥에 내뱉어 쓱쓱 문지른 이가동은 도끼를 들어 소의
정수리를 힘껏 내리찍었다.
퍼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거대한 황소는 비명 한마디 내지르지 못하
고 거대한 체구를 축 늘어뜨렸다.
"이놈아, 부디 극락 가거라. 다시 태어난다면 인간으로 태어
나고...하기는 인간도 쓸모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단비하는 이가동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나름대로 효용
가치가 있지요. 그 길을 찾느냐 못 찾느냐에 따라 일생이 좌우
될 뿐..."
"글방 서생같이 고리타분한 소리는...이리 와서 피 한사발 쭈
욱 들이켜라. 몸보신에는 최고야."
"하하하! 나는 싫으니까 이(李) 형(兄)이나 많이 드시지요."
이가동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선지를 받아 한사발 쭈욱 들이
켰다. 그리고 입 안의 비린내를 없애려는 듯 생강을 타악 털어
넣고 어적거렸다.
"이놈은 어디다 풀어 줄까?"
"알아서 하십시오."
"네가 다 팔아먹을 수도 있어."
"그러실 수 있으시면 그것도 좋지요."
"나쁜놈...!"
"하하하!"
단비하는 통쾌하게 웃었다.
관현에 와서 이가동을 만난 것이 기뻤다. 일가 친척도 벗도 없
는 그로서는 유일하게 정을 준 사람이었다.
관현은 칠은방도들의 횡포로 낮에도 문을 걸어 잠그는 지경이
었다.
청성파가 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 이상 평화는 깨질 수밖에 없
었고 힘없는 사람들은 다른 지방 사람들처럼 스스로 자신을 지
켜야 했다.
하지만 온상의 화초를 들에서 막자란 잡초에 비길 수 있으랴?
늘 청성파의 보호만 받아 오던 관현 사람들은 칠은방도들의 횡
포를 잠자코 당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예상외로 청성이 문을 닫고 응대를 않자 더욱 기가 산 칠은방
도들은 거침없이 관현을 유린했다.
단비하가 관현으로 들어서는 첫날도 상황은 똑같았다.
"으아악! 사람살려!"
느닷없이 들려 오는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
단비하의 신형이 쾌속하게 쏘아졌다. 꾸준히 내공을 수련한 덕
인지 몸이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골목 어귀를 막 돌아서자 상반신이 거의 벗겨진 아낙이 장한
다섯명에게 둘러싸여 희롱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히히히! 가슴이 예쁜데?"
"이 봐. 빨리 좀하자. 이거 원 감질나서..."
백주 대낮에 이게 웬 말인가. 더욱 가관인 것은 아낙이 이런
희롱을 당하고 있는데도 길 가던 사람들은 고개를 내리깔고 슬
금슬금 몸을 피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네 이놈들! 이런 찢어 죽일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가히 어린애 몸통만한 거부(巨斧)를 들고 한달음에 뛰어온 장
한은 부랑배들을 향해 황소처럼 돌진했다.
"또 네놈이냐?"
부랑배들은 장한을 익히 아는지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퍼억! 퍼어억...!
장한은 부랑배들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선천적인 괴
력이 있어 아직 쓰러지기는 않았지만 피를 토하고 눕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무공을 알고 모르는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쉬익...!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단비하의 신형이 솔개처럼 날아올
라 부랑배의 턱을 걷어찼다.
아..작!
턱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섬뜻하게 들리는 순간, 몸을 틀며 내
지른 발길질에 부랑배 두 명이 돼지 멱따는 비명을 지르며 나
뒹굴었다. 비호같은 몸놀림 검공에 어느 정도 틀이 잡혔고 내
공도 꾸준히 수련한 덕이었다.
"이, 이...감히 칠은방도를 건드려?"
쉬익! 퍼억! 퍽!
남은 파락호 두 명은 원앙각(鴛鴦脚)에 가슴을 걷어채이고 숨
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컥컥거렸다. 희롱을 당하던 아낙은 어
느틈에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흥! 검을 든 놈들중에도 쓸만한 놈이 있군."
생명의 구함을 받은 거한의 첫마디였다.
"야! 나는 소 잡는 놈이야. 피 냄새가 역겹지 않으면 같이 술
이나 한잔하자."
두번째로 내뱉은 엉뚱한 말이었다.
단비하는 그를 따라가 술 한잔을 대작했고 오늘의 인연이 맺어
졌다. 관현 내에 칠은방도의 횡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많겠지만 단비하가 아는 사람은 이가동 뿐이었다.
밤이 이숙해진 후 이가동은 소를 부위별로 도려 낸 다음 함
(函)에 담았다.
단비하가 칠은방도에게 빼앗아 온 소였다.
우마차는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일 가능성이 있어 불태웠지만 소
잡는 곳에 소가 들어오는 것을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었다.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 기왕에 식량을 탈취할 바에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주자는 것이 단비하의 생각이었다.
뜻이 맞는 아우가 하는 일이라 도와 주고는 있지만 께름칙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청성파는 강골(剛骨)들이었
다. 도인들이기는 하지만 불의를 보고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칠은방도들이 활개치는 모습을 보고도 숨어서 스스로
물러서기를 바라다니...
소를 가져 오는 것도 반대였다. 겨우 소 한 마리로 누구 코에
붙이자고...만약 칠은방도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횡포를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단비하의 실력을 보지 않은 바
는 아니지만 칠은방에는 그보다 더한 고수가 얼마든지 있을텐
데.
"끄응! 문천 산골에다 풀어야 겠군."
쇠고기를 무상으로 나눠 주는 일도 고역이었다. 선행임은 분명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누가 그런 일을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나 이기동이오 하고 신분을 밝히는 날에는 그
날 부로 관현을 떠나야 할 게다. 칠은방 교향에 적을 둔 놈들
의 이목에 걸려들테니.
"이럴 때는 신선처럼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면 좋을텐데."
쇠고기가 가득든 함을 지게에 올려놓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
다.
"흥! 누가 소를 훔쳐 가나 했더니..."
이가동은 갑자기 등뒤에서 들리는 말에 소름이 쫘악끼쳤다.
"제길! 들켰군. 이럴 줄 알았다니까."
손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며 지게 옆에 꼽혀 있던 도끼를 잡아
갔다. 소의 정수리를 후려치던 도끼, 하루에 한 번씩 숫돌에
갈아 날이 번들거리는 도끼였다.
"어느놈이 그따위 망발을...응? 너는?"
뒤를 돌아보던 이가동은 도끼 든 손에 힘이 쭈욱 빠지는 것을
깨달았다. 십여 명의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뒤쪽에 쭈빗거
리며 서 있는 절름발이.
"네 이놈! 네가 형을 팔아먹어?"
"혀엉...형은 죄를 저지른 거야."
"말세다. 정말 말세가 되버렸어. 저 아이까지 물들다니..."
아버지를 닮아 튼튼한 골격을 타고 난 자신에 비해 어머니를
닮은 동생은 늘 허약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려서 질병을 않아
다리까지 절게 된 아우 불구자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는데.
"언제 입문했냐?"
"하, 한달전..."
제길! 하는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한달전이라면 칠은방도가
청성산을 에워 싼 시점이었다. 늘 자기 불만에 가득차 있던 아
우가 칠은방의 교리에 현혹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
다. 그런 점을 생각 못하고 오랜만에 고기나 배부르게 실컷 먹
으라고 등심 한짝을 갖다 주었으니...
"이놈아, 네놈 실력으로 성물(聖物)을 손대지는 못했을 테고
동조자 있는 곳을 대. 그러면 목숨은 살려 주지."
장한들중 제법 나이든 장한이 위압적인 말투로 말해 왔다.
"퉤엣!"
이가동은 가래침을 힘껏 내뱉었다.
"이놈들 누가 죽나 해보자."
쒜에엑...!
소의 정수리를 겨낭하듯 장한의 목덜미를 향해 있는 힘껏 도끼
질을했다. 그것이 그가 할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어리석은..."
쉬익! 탁!
"컥!"
종(種)이 다른 음향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장한이 검집째 휘
두른 검공에 도끼가 튕겨지고 이가동의 명치가 얼얼해지는 것
은 거의 일순간이었다.
이가동의 목은 한자 두께의 말뚝에 묶여진 채 효시되었다.
나무기둥 밑에는 온갖 고문을 겪은 듯 성한 곳이라고는 한 군
데도 없는 인육 덩어리가 놓여져 있었다. 이가동의 몸이란 것
은 부언의 여지가 없었다.
그옆에는 송판으로 급조한 듯 투박한 공판(公板)에 경고의 글
이 악필로 쓰여 있었다.
< 공고(公告). >
< 공적 이가동
죄(罪) 일(一). 칠은방도 육십칠 명을 죽임.
이(二). 칠은방의 성물을 약탈함.
삼(三). 약탈한 성물을 임의 처분함. >
단비하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이가동의 잘린 목을 바라봤
다.
- 허허허! 주량이 그렇게 약해서 어디 영웅호걸이라고 할 수
있냐? 자자, 딱 두동이만 더 먹자고.
호탕한 말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 올 듯 생생했다.
"세상이 아무리 말세라고는 하지만 동생이 형을 팔아."
"이 사람아! 말 조심해."
"아니 내가 틀린 소리 했나? 어디 평범한 우애였나? 낮이고 밤
이고 동생 때문에 고민 고민하더니만 결국 동생 손에 죽었잖
아."
"정말 같이 말못 하겠구먼. 이 사람아 나먼저 가네."
일의 자초지종이 대충 짐작되었다.
'금수만도 못한 놈...'
차디찬 한광이 두눈에 가득 찼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혈
육을 버리다니...
단비하는 이가동의 목이 효시된 말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
다.
"웬 놈이냐?"
"거기 섯!"
몇 마디 호통이 들렸지만 곧 잠잠해졌다. 살기가 크게 뻗친 손
속은 인정 사정없었다. 손에 든 약봉지가 터지며 죽은 후에도
고통을 받는다는 대조독이 풀려 나간 것이다.
주위에서 마른 가지를 모아 말뚝 밑에 쌓고 화섭자로 불을 붙
었다.
'이형, 용서를...'
시신을 태우는 비릿한 냄새와 검은 연기가 눈이 쏟아질 듯 꾸
물거리는 흐릿한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 정말 그놈이 이리 올까요?"
이가룡(李家龍)은 불안한 신색을 떨치지 못하고 집 주변을 두
리번거렸다.
"후후후! 형까지 고변한 네 충성은 지극했다. 조만간 방주님의
좋은 말씀이 있을 게야. 너는 아무 걱정 말고 방주님께 충성할
각오만 다지면 돼."
"하지만 그놈의 독술이 무섭다던데..."
"조용히 좀 해라. 자꾸 떠들면 놈이 오는 것도 모르겠다."
"그...그러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집 주변에
칠은방도 삼십여 명이 은신해 있었지만 놈의 상대가 될 것 같
지 않았다.
그런데 그리 무공이 높을 것 갈지 않은 장한은 태연히 누워 놈
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 세 마디가 십 장 밖에서 들렸다. 일 장 간격
으로 삼 인씩 은신해 있으니 제일 첫 번째 은신자들이 죽음을
맞으며 지른 비명이었다.
"오,왔어!"
화들짝 놀란 이가룡이 펄쩍 일어서며 장한을 돌아보았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너부터 죽인다."
장한의 입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소가 터져 나왔다. 누운
자세는 그대로 였지만 온 신경은 밖으로 쏠린 모양이었다.
"아아악...!"
"아악!"
비명 소리는 끊임없이 별빛 한 점 없는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일장, 일 장 죽음의 마수가 다가온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피가
마르는 노릇이었다.
"더럽게 빠르군."
누워 있던 장한도 긴장이 되는지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이구! 진작 도망 갔어야 했는데...'
후회가 막심했다. 듣기로는 팔이 천 개인 천수관음(千手觀音)
조차 당적하지 못할 괴물이라고 했다. 실제로 칠은방도 육십칠
명이 칠주야 사이에 죽어 가지 않았던가. 눈앞에 앉아 있는 장
한은 그 죄를 형에게 뒤집어 씌웠지만 형이 소는 잡을 줄 알아
도 사람은 잡을수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이가룡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아아악...!"
이제는 비명음이 몇 번째에서 들려 오는지도 구분되지 않았다.
단지 바로 곁에서 지르는 듯 모골이 송연해지니 지척에 이르렀
다는 것은 알겠는데.
장한은 품에서 몇 개의 묵죽통을 꺼내 점검하고는 탁자 위에
쭈욱 늘어놓았다. 보아하니 여섯 치 정도 되는 묵죽통 다섯 개
로 팔두육비(八頭六臂)의 괴물을 상대하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이가룡의 가슴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겨우 저런 대나무 가
지 몇개로 살성(殺星)을 상대하려는 자를 믿고 형을 고변하다
니 어쩌면 칠은방의 교리도 엉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무림고수 하나 상대하지 못하면서 무슨 영생이 있다
고...
덜컹!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 거칠게 열리며 죽립을 깊게 눌러쓴 낯
선 이방인이 성큼 들어서다 말고 주춤거렸다.
"정풍화검(頂風火劍) 당상명(唐霜溟)!"
"후후후! 알아보는군."
"잊을 수 없지."
장한과 낯선 이방인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그 대신 불꽃
튀는 눈 싸움이 벌어졌다.
이가룡은 자신의 몸이 갈가리 찢기는 공포를 맛봤다. 두 사람
의 눈동자는 사람의 눈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싸늘
했다.
'다,당상명? 그럼 혹시 당문의 형옥실 부실장이라는...'
무서운 비명 소리가 연이어 들리는데도 극히 태연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형옥실 부실장이라면 독에 관한한 따를 자가 없
으리라.
'휴우! 괜히 긴장했네. 당상명까지 칠은방에 가입했다면...오
오! 잠시나마 방주님을 의심한 소인의 무지를 용소하소서.'
생각은 이방인이 발한 묵직한 음성 때문에 자연히 중단되었다.
"당문도는 아닌 것 같던데?"
"잘 봤어, 칠은방도들이야."
"너는 아닌가?"
당상명은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후위대주를 죽였다고 들었다. 운이 좋았던 모양이지? 하지만
같은 운은 두번 발생하지 않는다."
"운이라고 생각했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되겠군."
"실실거리던 놈치고는 입담이 세졌군."
"원래가 그래. 알아듣지 못한 놈들이 귀머거리였을 뿐이지."
"독으로 증명해 주기 바란다."
"그러지."
말을 마친 이방인은 서서히 죽립을 벗었다.
"타앗!"
느릿한 말과는 달리 당상명의 동작은 번개를 능가했다. 앉은
자세 그대로 탁자 위에 놓인 조독기 두 개를 들어 발사했다.
이방인이 채 죽립을 벗기 전이었다. 당문 형옥실 부실장이라는
위명에 어울리지 않게 선공을 가한 것이다.
쉬익...!
이방인의 신형은 밑으로 납작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팽이처
럼 빙그르 돌아 독무를 흩뜨렸다.
"어림없다!"
탁! 탁! 탁!
조독기 세 개가 다시 발사되었다. 그리고 당상명의 신형이 바
로 뒤를 따르며 일검을 전개했다.
이가룡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선명하게 그려지
는 이방인의 죽는 모습...뿌옇게 퍼져 나가는 독무에 중독되든
지, 아니면 정수리를 갈라오는 검을 맞든지 둘 중에 하나였다.
순간,
"커억!"
목구멍에서 단내가 나는가 싶었는데 불로 지지듯 뜨거운 통증
이 밀려들었다. 복부도 땡기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사지는
저절로 경련을 일으키고 머리는 지끈거리며 가슴은 칼로 후벼
파는 듯 했다.
"갑자기 왜...?"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익히 보던 대청 바닥이 솟구친다 싶었는데 얼굴에 정면으로 부
딪쳤다. 쿵, 하고 소리가 울렸다. 되게 넘어진 모양인데도 전
혀 아프지 않았다. 참을수 없던 고통도 사라졌다. 꼭 허공에
부유(浮游)하듯 몸이 가벼워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당상명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달리 정풍화검이던가 검공이라면 당문 십절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몸. 검에서 이는 바람을 느끼는 순간
머리가 갈라지는 쾌검을 지녔다하여 붙여진 무명 정풍화검이
아니던가.
'이겼어. 후위대주 자리는내 것...'
그러나 당상명은 즉시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검이 말을 듣
지 않았다. 손이 마비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마비된 곳은
손뿐이 아니었다. 다리도 몸도, 하다못해 목도 돌려지지 않았
다. 분명 독에 중독되거나 마혈이 제압된 현상이었다.
마혈이 제압될 리는 없었다. 그 누구의 손길도 몸에 닿지 않았
다는 것은 확실했다. 독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조독기로 자
포독을 발사하기 전 숨을 들이쉬었고, 한 호홉으로 검공까지
펼쳤으니까 더욱이 단비하란 멍청이가 독을 전개했다고 믿기도
어려웠다. 그의 몸동작 하나하나를 관찰했지만 손쓰는 것을 보
지 못했다.
'빌어먹을...'
검이 단비하의 옷 소매를 스치며 지나갔다. 순간 당상명은 자
신이 졌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쿵!
마비된 몸은 개구리 패대기쳐지듯 나뒹굴었다.
끄르륵...!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전신이 개미에게 뜯기
듯 가렵기도 했고, 기름에 튀겨지듯 뜨겁게 화끈거리기도 했
다.
'언제? 무슨 독을? 어떤 하독방법으로?'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하나도 물어 보지 못했다. 사
지는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며 뒤틀렸지만 그의 혼은 이미 창
천을 날고 있었으니까.
단비하는 당상명의 품속에서 몇 개의 단환과 약봉지를 꺼내 들
었다. 그리고 그 중 황갈색의 단환을 서슴없이 삼켰다. 벌써
교살당하는 것처럼 목줄을 움켜 오는 자포독의 해약임은 눈감
고도 알수 있었다. 자신의 몸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약이
니까, 이 해약을 개발하기 위해 근 일 년간 자포독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황갈색의 단환을 복용하고 아무 이상이 없자.그제야
환히 웃던 독제실장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니까.
해약을 복용한 단비하는 아직도 자포독이 부유하는 방안에 가
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조식했다. 몸에 남은 여독마저도 몰아내
려는 심산이었다. 더불어서 방사에 관한 연구도 해볼 생각이었
다. 자포독이 계속 몸에 침투하니 여건은 아주 좋지 않은가.
타인도 몸을 빌리는데 자신이 자신을 시험하지 못할 까닭이 어
디 있을까.
단비하의 얼굴은 극통을 간신히 참는 듯 악귀처럼 이지러졌다.
하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김살은 서서히 퍼져 갔다.
'당잠청에 이어 당상명이라...당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나? 아니
면 개인적인 원한인가?'
둘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었다.
당잠청은 당자인의 복수를 위해, 당상명은 당문도이지만 칠은
방에 입문했다면...충분히 설득력있는 말이 된다. 칠은방이 무
림방파의 흉내를 내어 교(敎)라는 말 대신 방(幇)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관부의 탄압을 우려해서 일 뿐, 종교적인 색채가
짙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각 문파마다 칠은방에 가입한 문도가 속속 발각되고 문규에 따
라 처형되거나 축출되는 사례가 빈번했기에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찜찜하게 걸리는 것은 당문사람들의 결
속력이었다.
귀속칠가라는 다른 성씨들이 있기에 그 점은 유독 두드러졌다.
당씨성을 쓰는 사람들은 폐쇄적이라 할 만치 타인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러자니 자연 응집력이 강했다.
'당씨들이 칠은방에 가입했다고는 볼수 없지.'
단비하는 탁자에 앉아 생각에 골몰했다.
대청 바닥에 죽어 있는 당상명과 이가룡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
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시신의 증세는 확연히 달라졌다.
당상명은 일반 시신처럼 평범한 시반과 피하 출혈이 생기는 반
면 자포독에 중독사한 이가룡은 돼지처럼 퉁퉁부어 올랐고 혈
색도 까맣게 변색되어 시반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각종 독들이 어떤 증세를 일으키는 지는 잘 알지만 시간 경과
에 따라 시신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은 새로 발견한
사실이었다.
'당문주가 나를 겨냥했다면 이렇게 어수룩한 방법을 쓰지는 않
았을텐데. 참! 이 형의 시신 결에 놓여 있던 방문(房門)에는
내가 칠은방도를 죽였다고 써 있었는데 미혼독에 죽을 리는 없
고...'
청성파가 안으로 움츠러든 이유도 의문스러웠다
칠은방도들과 접전을 벌인 것은 삼첨산에서 사망산검 일행과
함께 그리고 이번...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청성파를 칠 만한
무공도 아니었고, 청성파가 장기전(長期戰)을 쓸만한 존재들도
아니었다.
모든게 미궁에 빠져 지푸라기조차 건질 수 없을 정도로 혼미했
다.
'청성, 당문, 칠은방...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다. 그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당문주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이유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겠군.'
생각을 정하자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벌써 동녘이 환히 밝아 밝은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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