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경쟁'이라는 말을 자꾸 듣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무한히 피곤해짐을 느끼게 된다. 강박의 뿌리는 '경쟁'이라는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이라는 접두어에 있다. 적정 수준에서 피아간에 더불어 향상되는 '창조적 유한 경쟁'이라면 이토록 생이 암담하지는 않을 것을, 남과의 경쟁이 '아주 아주 끝도 없이' 이어진다니 도대체 우리는 어느 언덕에서 풀피리 불며 휴식할 수 있단 말인가? '동물의 왕국'을 보자. 개체는 많은데 식량은 대개 제한되어 있다.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식량을 획득할 수 없고, 식량 획득에 실패한 개체는 굶어 죽는다. 그뿐인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려 줄 배우자의 획득은 어떤가? 자연은 암컷으로 하여금 제일 강한 수컷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암컷 하나에 수컷 여럿. 그렇다면 수컷들은 피범벅이 되도록 싸울 수밖에 없다. 승자가 꿈길 따라 핑크빛 로맨스에 취해 있는 동안 패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야 한다. 그래도 자연은 동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요, 법칙인 까닭이다. 누가 강자인가? 다윈의 '최적자 생존'이라는 개념은 '최강자 생존'이라는 개념과 자주 혼용되곤 했다. '최적자 생존'은 말 그대로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種)이 자연에 의해 선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월라스턴이라는 사람은 '마데이라 군도'에 사는 딱정벌레 550종 가운데 2백여 종이 날개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비리비리한' 놈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구나 29개의 토착 속(屬)들 가운데 23개 속에 해당하는 종들은 아예 날지도 못하는 딱정벌레였다. 그런데도 이들 '비실이' 딱정벌레들은 그 섬에서 잘 살고 있었다. 어찌된 사연일까? 그 섬에는 강한 바람이 분다. 튼튼한 날개죽지를 가진 '일등 딱정벌레'들은 보란 듯이 대지를 박차고 비상하기 무섭게 바람에 휩쓸려 바다에 추락해 버리곤 했다. 그들은 자손을 퍼뜨릴 기회를 얻지 못했고, 세대가 거듭되는 동안 서서히 멸종했다. 반면 '불량 딱정벌레'들은 바닷가 바위틈의 안전한 곳에서 비실비실 '伏地不動'했고, 이것이 결국 용이한 생존의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결국 마데이라의 강풍은 오히려 '불량 딱정벌레'가 적응하기에 더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며, 그들의 생사여탈권은 다름 아닌 개체와 환경간의 함수관계가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학의 연구결과나 한 두 가지 사례를 섣불리 인문사회의 영역이나 인간사의 일상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더구나 이 예를 통해 우리 모두 앞으로는 부담 없이 '불량 딱정벌레'로 처세함이 옳을 듯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런 느낌 따위는 술좌석의 안주거리로나 유용하게 써먹고 잽싸게 버려야 한다. 손정의나 빌 게이츠 등 강자가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사례 또한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일등 딱정벌레'건 '불량 딱정벌레'건 생존이 문제가 될 때는 환경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환경이 요구할 때는 제아무리 '일등 딱정벌레'라 할지라도 짐짓 겉으로는 '불량 딱정벌레'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잠정적인 전략으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중국 역사까지 갈 것도 없이 무협지만 제대로 읽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 남들이 다 하는 말로 이 시대가 정녕 '무한 경쟁의 시대'라면, 좋다! 인정하자. 그러나 분명히 못박고 싶다. 이건 더운 피 흐르는 사람의 모습은 아니다. 누가 그런 말을 지어냈는지는 몰라도, 그리고 '무한히' 경쟁을 부추긴 끝에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그를 만나게 되면 붙들고 울고 싶다. 이제 그만 하자고, 당신도 나도 가끔은 쉬어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바위 밑에 함초롬히 핀 보랏빛 꽃망울도 눈여겨 보고,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꽃씨에 간지럼 타가며, 해거름 산책길엔 토끼풀 뜯어 꽃반지 만들고 네잎 클로버 찾아 책갈피에 말리는, 그런 삶도 이제는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소연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