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체험농장 운영하는 이동우 씨
집안 어른들이 농사짓는 가정이라면 그 자식들은 열이면 아홉 ‘나는 절대로 농사 안 지을 거야’ 할 거라며 껄껄 웃어 보인 이동우 씨는 자신이 그 아홉 중에 하나였다고 말했다. 문제는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터라 기초 학력도 부족하고, 대인 관계가 원만치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연한 두려움으로 청소년기를 보내던 소년은 할아버지의 감자밭 일을 돕던 어느 날 유레카를 외쳤다. 그러고는 ‘나는 농부다’ 셀프 오디션을 시작했다.
“농촌을 머물고 싶은 땅으로 만들고 싶어요”
경북 상주에서 6600㎡(2000평) 규모로 블루베리를 재배하는 이동우 씨(28)는 여름 수확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평일에는 단체, 주말에는 개인 단위 방문객을 대상으로 체험농장 ‘스테이지 파머스룸’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절 특색을 살린 프로그램과 어느 계절에나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두루 갖춘 ‘사계절’ 체험농?이니 그에게는 농한기가 없다.
“고등학생 때였어요. 아버지의 블루베리 농장 일을 도우면서도 농사는 참 싫었는데 할아버지 밭에서 감자 캐고 그걸로 할머니랑 감자전 부쳐 먹고 하는 건 좋았습니다. 그날도 할아버지와 함께 감자를 캐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농사는 망하더라도 자급자족은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 그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로 농사를 택하다니, 좀 엉뚱하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원체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데다가 중학? 때 학교 폭력을 겪으면서 이씨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학업도 놓다시피 해 되는대로 실업계 고등학교 토목과에 진학했더랬다. 농사일을 결심한 이씨는 맨 먼저 꼴찌를 다투던 성적을 내신 2등급까지 끌어올렸다. 목표가 생겼던 것. 한국농수산대학교에 합격한 이씨는 그렇게 첫 관문을 통과했고, 조금씩 자신만의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다양한 취향 위해 블루베리 큐레이팅] 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는 당시 특화작물로 주목받았던 미니 사과 <알프스오토메>나 체리에 관심을 뒀다. 끝내 블루베리를 택한 것은 아무래도 블루베리 농사를 짓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고, 이미 슈퍼 푸드로 널리 알려져 있긴 했지만 특히나 블루베리에 함유된 안토시안 성분이 눈 건강에 좋다는 데 끌렸기 때문이다. 토목과 출신이다 보니 실습 과정에서 용접 작업을 했는데, 다량의 자외선에 그대로 노출되는 용접공의 직업병이 대부분 안과 질환이라는 것을 체감했다. 이씨도 이틀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가슴이 철렁한 적이 있다. 그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장시간 컴퓨터나 휴대전화 등의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요즘 안구 건조증과 같은 질환은 대표적인 현대병으로 분류되지 않던가.
학교 실습으로 전북 정읍에 있는 블루베리 농장에서 5개월, 경기 화성시 송산면에 있는 포도농장에서 5개월 농사일을 익힌 이씨는 2016년 졸업 후 고향 상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블루베리 재배에 뛰어들었다. 현재 이씨의 농장에는 30여 종의 블루베리가 맺힌다. 품종별로 수확 시기에 차이가있어 대부분의 농가에서 다품종을 재배하지만 <듀크> <뉴하노버> <레가시> <팔딩> 등을 필두로 많아야 10여 종 남짓인 것에 비해 확실히 종류가 다양하다.“어떤 작물이든 시중에 유통되는 것보다 실제로는 훨씬다양한 품종이 있습니다. 생산성과 저장성 등의 사정으로상품화가 안 되는 것뿐이죠. 사람마다 취향이 있는데 그취향은 경험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블루베리로 소비 자에게 다양한 감각을 전달해주고 싶고, 또 각자의 취향을찾아주는 데 제 농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를테면블루베리를 큐레이팅하는 개념이랄까요.” [감각적인 소비자들 만나 감을 찾다] 농사 초기부터 직거래 판로를 고민하던 이씨는 블로그를통해 판매를 시도했지만 녹록하지 않았다. 블로그 방문객 수와 판매는 비례하지 않았고, 블로그 운영에 드는 품에 비해 소득은 미미했다. 그러던 중 한 달에 한 번꼴로 서울 도심에서 펼쳐지는 ‘농부시장 마르쉐’를 알게 됐다. 마르쉐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농산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재배됐는지 알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도심 장터로,생산자가 직접 가판을 열고 제철 농산물 또는 이를 재료로만든 먹거리를 선보인다. 이씨는 2017년 마르쉐에 출점하면서 감각적이면서도 가치 소비에 적극적인 소비자들을만났다.
“결국 혼자서 농사만 잘 짓는다고 되는 게 아니었어요. 살아남으려면 판매가 돼야 하잖아요. 팔려면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하고요. 물도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죠. 농사일도 시장 트렌드를 계속 파악하면서 다양한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방에만 머물러서는 트렌드를 포 착하기가 쉽지 않은데, 서울에서도 가장 빠르게 변하는 곳에서 그 감각들을 접하면서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출점을 거듭하며 매대 디자인과 디스플레이를 시각적으로 예쁘게 꾸미고, 포장 용기는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방향으로 변화를 줬다. 동시에 다양한 품종의 블루베리를 그 특징과 함께 소개하면서 소비자가 다양한 감각을 느껴보고 취향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마르쉐에 출점할 때마다 ‘완판’을 기록한 것도 수확이지만 이후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에서 진행한 채소시장, 성수동과 인사동의 핫플레이스로 소문난 카페 어니언에서 제철 과일을 선보이는 ‘과일아침’ 프로젝트 등 새로운 만남들이 이어졌다는 것이 더욱 고무적이다.
[행복한 농촌체험은 안정적 농사 밑거름] 사계절 체험농장은 2018년 지역의 4H 청년 몇몇이 모여 시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조성하고서도 유휴화한 마을의 중덕저수지 자연생태공원을 어떻게 하면 활성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마련하게 됐다. 숙박, 카페, 여행 상품 등 여러 아이디어가 쏟아졌지만 4H 청년들의 공통 관심사가 지역의 우수한 농산물을 알리는 일이니 체험농장으로 귀결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이씨를 포함한 세 사람이 출자해 법인을 설립하고, 지금 체험농장 자리에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대표는 이씨가 맡고, 두 친구는 이사로 운영을 지원하는 구조다. 2019년 6월 파일럿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여름 블루베리 수확을 마치고 다시 공간을 정비한 이씨와 친구들은 2020년 1월 1일 정식으로 체험농장을 열었다. 그런데 문 열고 15일 만에 상주 지역에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나?다. 어쩔 도리 없이 창업과 동시에 폐업을 해야 했다.
다행히 ‘2020년 청년 농업인 기반구축 사업’에 선정돼 다시 한번 기회가 생겼고, 비닐하우스 대신 현재의 창고형 체험장을 신축해 2021년 1월 지금의 ‘스테이지 파머스룸’이 문을 열게 됐다. 2021년 한 해 동안 3247명이 방문했고, 약 80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상주의 농촌 체험농장 중에서 방문객 수 1위, 매출액 2위로 집계됐다. 사람 안 만나는 일을 하려고 농사를 시작했는데 매일같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체험농장도 제가 다양한 블루베리 품종을 다루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블루베리 체험을 하더라도 여러 종류를 두고 각자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취향을 찾아보게 하면서 프로그램이 진행돼요. 제가 학교생활을 할 때 어려움을 겪었던 것도 결국엔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다양성, 각각의 개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고, 농촌 체험농장이 그런 감각을 익힐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 심리상담사와 힘을 합쳐 학생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 운영도 시작했다. 내년에는 상주를 상징하는 ‘삼백(三白)’을 콘셉트로 치유 카페를 열 계획이다. 쌀, 누에, 곶감 등 흰색이 도드라지는 상주의 지역 특산물을 가리켜 삼백이라고 한다. 현재 체험농장은 학령기의 자녀가 있는 가족 방문객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돼 있다. 이 점을 고려해 치유 카페는 연인과 청년을 대상으로 상주의 농산물을 재료로 만든 디저트를 ‘오마카세’ 방식으로 제공하면 어떨까 하고 한창 메뉴 개발 중이다. 상주시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아 올겨울 카페 공사가 예정돼 있다. 이제 체험농장을 넘어 치유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행복? 농촌체험이 지역 활성화와 고객 확보로 이어져 안정적인 농업 환경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죽을 때까지 농사짓고 싶거든요.” 스테이지 파머스룸에서 ‘스테이지’는 머물다는 의미의 스테이(stay)에 땅 지(地) 자를 조합한 것이다. 머물고 싶은 땅, 머물고 싶은 농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만의 오디션을 치러온 이동우 씨. 벌써부터 그의 다음 시즌이 기다려진다.
출처 농민신문 글 서진영 사진 장춘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