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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장완(張琓)은 구운 산토끼를 신경질적으로 뜯어 먹었다.
싸우려면 싸우고 말면 말 것이지, 이런 장기전은 딱 질색이었
다. 더군다나 보급품까지 끊겨 곡기라고는 입에 대본 지가 오
래됐으니...
사람은 역시 육식만 할수 없었다. 산토끼며 노루를 잡아 그럭
저럭 굶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고기 냄새만 맡아도 역겨웠다.
무럭무럭 김이 올라오는 밥에다 나물 반찬 한번 먹어 봤으면
원이 없을 지경이었다.
"야! 칡뿌리라도 캐서 달여 봐."
마침내 신경질적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놈들...앉아서 하는 짓거리라니. 아니, 어줍잖은 무
공으로 청성을 치라니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하지만 방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분명 청성은 반격하지 않을 거라고...안에
틀어박혀 있을 테니까 공격 형태만 갖추고 있으라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만 방주의 말은 옳았다. 청성은 두더쥐처럼 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은 이대로 유람이나 즐기다가
물러나란 명이 떨어질 때 철수하면 그뿐이었다. 단비하란 놈이
보급품을 갈취하지만 않았어도 아무 불편이 없었을 것을.
기름지고 텁텁한 고기를 먹다보니 칡차라도 한잔 마셔야 속이
풀릴것 같았다.
"제길! 한겨울을 여기서 보내야 되나?"
모닥불을 노상 피워 놓고 살았지만 춥고 고생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희한한 것은 밝은 모닥불이 캄캄한 밤을 환히
밝히는데도 청성의 기습이 없다는 것...아무리 장기전을 펼칠
계획이라고는 하지만 지리를 잘 아는 청성파가 야습조차 않는
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장완은 모닥불의 훈훈한 열기를 받으며 몸을 길게 뉘였다.
아무도 없는 산중인지라 할 일이라고는 먹고 자는 일밖에 없었
다. 잠이란 요상한 괴물이라서 한번 물들기 시작하자 반나절을
잤는데도 졸음이 쏟아졌다.
"아함...!"
하품 나오는 입을 손으로 토탁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장
완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떠야 했다. 코끝을 탁 쏘는 야릇한 냄
새...목이 졸린 듯 숨이 막혀 오면서 구토가 치밀었다.
"어헉! 우웩...!"
황급히 일어나 뱃속에서 치미는 대로 토악질을 했다. 방금 먹
은 구운 토끼고기가 붉게 희석된 채 토해졌다. 위장에 든 것은
한 점 남김없이 게워졌다. 그래도 치밀기 시작한 구토는 멈출
줄 몰랐고 급기야는 쓰디쓴 누런 위액까지 기어나왔다.
"우웩! 헉헉...! 우웩...!"
너무 토한 나머지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다른 수하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다들 기운이 빠져 축 늘
어진 모습을 하고 뱃속에 든 것을 게워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빌어먹을! 단체로 체할 리는 없고..."
물기 어린 눈으로 수하들을 돌아보던 장완은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낯선 청년을 보았다. 일어서면 육 척
에 달할 듯 큰 키에 강인하고 단단한 철의 얼굴 거칠게 자란
짧은 수염이 그의 외양을 더욱 굳세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눈이었다. 불길처럼 뜨겁게 활활 타
는 눈...그의 눈길은 자신에게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늑대처럼.
"우웩! 네, 네놈은 누구냐? 우웩!"
장완은 묻는 가운데도 뱃속에서 치미는 토기를 참지 못했다.
"단비하."
"뭐, 뭐? 다, 단비하!"
너무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 너무 토
악질을 해댄 탓에 일시적으로 발생한 현기증이었다.
"다, 단비하가 왔다. 모두...우웩!"
일장에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눈앞에 있건만 장완은
명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앉아 누런 신물을 게워 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수하중에는 그의 명을 받아 검을 뽑을 만한 사람
이 없었다.
"모, 모릅니다. 정말 저는 그것밖에 모릅니다."
장완은 최대한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도록 처절한 표정을 지으
며 애원했다. 고문이라면 온갖 방법을 다 알고 있지만 이토록
지독한 방법은 처음이었다.
"찢어 죽일 새끼, 너만 아니었으면..."
원래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되는 대로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라는 것은 일 각이 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이건 갈잎떨기나무의 수액(水液)이다. 높이는 일 장 정도 덩
굴처럼 가지가 뻗으며 꼬부라진 가시가 난다. 육칠월에 노란색
꽃이 피는데 너무 예뻐 관상수로 심기도 하지. 구월에는 검은
갈색 씨가 든 꼬투리가 맺히는데 염주를 만든다. 열매는 해열
제로 쓰기도해."
무슨 수작인지 몰랐다. 허름한 모옥으로 끌고 들어와 난데없이
갈잎떨기나무에 대해 강론을 하다니, 그러나 수액이 뱃속으로
흘러드는 순간 상대의 의도를 알았다. 강골로 천하가 알아주는
장완이거늘 감히 고문을 하려 하다니.
배가 싸르르 아파 왔지만 처음엔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하지
만 고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심해졌다. 일 다경이 흘러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다음에야 청량한 맛이 나는 진액을 복용
할수 있었다.
단비하는 잠시의 짬도 주지 않고 다른 약봉지를 꺼내 들었다.
"이건 수봉선(水鳳仙) 가루니까 긴장할 것 없어. 잠시 설명하
자면 팔구월에 붉은 자주색 꽃이 피고 시월에 열매가 맺지. 관
상초로 많이들 심고, 타박상이나 뱀에 물린 데는 아주 좋아."
아주 좋아? 좋기는 뭐가 좋아? 수봉선 가루가 코에 흡입되는
순간부터 장완은 색다른 고통에 시달렸다.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면서 미칠 듯이 가려웠다. 하지만 이번 것은 갈잎떨기나무
의 수액보다는 참을만 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역시 일 다경이 지날무렵 장완은 얼굴이 씨뻘겋게 변한
채 바닥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세상에 이렇게 지독한 가려움
증이 있다니 손목이 뒤로 묶이지만 앉았어도 살갗이 헤져 피가
나도록 긁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백서향(白署香)이야. 이삼월에 향기가 진한 꽃이 피
고, 오뉴월에 공 모양의..."
"그만! 원하는 게 뭐야?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어떠한 공갈 협박보다도 단비하의 은은한 말이 더 무서웠다,
차라리 인상을 박박 쓰면서 죽이겠다고 협박한다면 굽힐 리 없
지만 이렇게 사근사근 말하면서 은근히 사람을 죽이는 데는 당
할 장사가 없었다.
"이야기를 중도에서 가로막는 것은 실례잖아? 끝까지 들어 봐.
오뉴월에 공모양의 열매가 붉게 피지, 이게 그 열매 말린 거
야. 아! 이 백서향의 나무껍질은 신경통과 해독에 아주 좋은데
...열매는 어떨지 모르겠네."
입 속으로 붉은 가루가 흘러들었다.
예상대로 독이었다. 홍분이 혀에 닿자마자 톡 쏘는 강한 신맛
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정도는 위장이 뒤틀리는 고통에 비한
다면 별게 아니었다.
단비하는 시간이 무척 많은 듯 전혀 다급함이 없었다. 그게 사
람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심한 고통을 당
해야 한단 말인가.
"제,제발..."
장완의 입에서 사람 음성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는 신음
이 새어나왔다. 근 한 시진에 걸친 고통에 전신 기력이 모두
빠져 나간 듯 했다. 입술은 빠짝 말라 버렸고, 눈은 붉게 충혈
되었으며, 낯빛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청성으로 오기 전에 칠은방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을 수 있
을까?"
장완은 허겁지겁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혹시라
도 단비하의 마음이 변해 다시 이상한 약봉지를 꺼내 든다
면...
"겨우 그 정도야?"
"모, 모릅니다. 저는 정말 그것밖에 모릅니다."
장완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표정 가운데 가장 애처로운 표정
을 지었다.
"수고했다. 그럼..."
단비하는 다시 약봉지를 꺼내 들었다.
"허억! 치, 치사한놈..."
장완은 얼굴색이 샛노랗게 변한 채 말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모종의 결심을 굳혔는지 이를 악물었다.
"이놈아, 방주님이 네놈을 가만둘 것 같으냐? 아마 사지를 찢
어 죽일 게다. 각오해라, 이놈!"
말을 마친 장완은 힘껏 혀를 깨물었다. 독에 고통을 받다 죽느
니 차라리 편한 죽음이 좋겠다 생각해서. 입가에 피를 주르륵
흘리던 장완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 고개를 떨궜다.
'바보 같은 사람...이건 미혼약인데...'
왜 골기도찰법이 생각났을까? 전신에 새겨진 수많은 도흔마다
가지고 있는 사연이 달라서 였을까? 아버지의 소도가 무서웠
다. 약독을 복용하며 고통을 상기해야 하는 과정이 두려웠다.
하지만 해야 된다는 신념 하나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아
냈는데, 어른이 되어 가지고 겨우 이 정도도 참지 못하다니.
단비하는 장완의 시신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장완이 이는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청성이 공격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았다면...아무래도 삼절 진인에게서 풍기는 냄새
가 개운치 않았다.
* * *
적수광인 일양 진인은 하루도 거름없이 사십여 년 동안 꾸준히
연마해 온 조령신공을 운용했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진기
는 거침없이 사지백해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모였다.
청운적하검법이나 칠십이로 파검식, 대라산수 등 청성의 모든
절기는 조령신공을 바탕으로 펼쳐지기에 신공의 성취 여부가
바로 무공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주요 관건이었다.
청성오수의 화후(火候)는 누가 낫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비
슷했다. 그러나 분명하지는 않았다. 정도를 측정할 길도 없고
각기 집중적으로 파고든 무공의 종류가 달라 서로가 존중하는
터였다. 만약 목숨을 걸고 비무를 한다면 우열이 가려지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성취도를 비교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하나 모
두들 자신의 무공이 최고라는 자부심은 가졌다.
그런데 일도일사가 당문의 역주들과 죽음을 같이했다. 충격적
인 일이었다. 그 정도 애송이들은 가볍게 물리칠 줄 알았는데.
귀속사가와의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청성사수의 일과는 무공
수련으로 시작해 수련으로 끝났다.
일양자의 생활도 무공 수련으로 고정되었다. 칠은방도들이 청
성을 에워싸고 있다는 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생사대
적도 아닌 무뢰배들이니 또한 삼절 진인이 직접 나서고 있지
않은가.
조령신공은 초공(初功), 중공(中功), 상공(上功)의 삼공(三
功)으로 나누어졌으며 각 공(功)마다 다시 일각(一覺), 이각
(二覺), 삼각(三覺)으로 분류되었다.
청성에 제일 처음 입문하는 제자가 익히는 것이 초공 삼각이
요. 청성오수나 장문 정도 되면 대체적으로 상공 일각을 익히
는 것이 순례였다. 상공 이각까지는 뚜렷한 구분이나 수련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만 상공 일각은 그런 것이 없었다. 사람과
하늘이 하나로 된다는 도문의 진리처럼 천인묘합(天人妙合)의
경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갈 뿐이었다.
"휴우...!"
일양자는 폐기했던 호흡을 가늘고 길게 뿜어 내며 운공조식을
끝마쳤다.
- 초공 삼각은 기해혈의 위치를 명확히 굳혀 주며 초공 이각은
우주 생성의 원리를 몸 안에서 키워 나가는 방법을 깨닫는데
역점을 둔다. 각각 일 년을 수련한 다음 초공 일각으로 들어서
라. 초공 일각을 수련하는 동안 생성된 진기를 기경팔맥의 각
혈로 유통시킨다. 초공 일각을 수련하는 동안 몸 곳곳이 아플
진대 상관하지 마라. 한번 아팠다 나은 부분은 시원해지며 입
맛이 좋아지고, 대소변이 시원해지며 기분이 상쾌해진다.
안개 같은 기운이 힘으로 변하여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을
유통하면 초공 일각을 완성한 것으로 본다.
중공은 원기를 승양(昇陽)시킨다.
삼각에서 씨를 뿌려 이각에서 여물게 하고 일각에서 거둔다.
상공은 승양된 원기를 천지와 조화시킨다.
천지자연의 모든 이치에 동화되어야 한다, 동화된다는 감각도
없이 흡수되어야 한다. 하늘과 사람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
모두를 하나로 보아야 한다. 그리하면 인간이 천인이 되어 하
늘과 땅의 이치를 알게되리라.
초공을 삼 년 만에 마치고, 중공을 십 년 걸려 완성했다. 상공
삼각과 이각을 거치는 데 다시 십 년, 그 후로는 상공 일각만
십칠 년의 수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부가 입문시에 말해 주
었던 진리를 깨닫을 수 없었다.
너무도 요원한 길이었다.
하지만 상공 이각이 어린아이 장난처럼 느껴지니 분명 진보는
있었던 모양이다.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수 없지만...
일양자는 검을 들어 칠십이로 파검식을 수련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수십, 수백 번
연습한 검로가 도도하게 풀려 나왔다.
일순, 일양자의 검세가 갑자기 난폭하게 변하며 수림 한쪽을
향해 짓쳐 들었다.
파앗!
실로 섬전 같은 기세. 하얀 설지 위에 붉은 핏줄기가 확 솟구
쳤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 상태였다.
정상적으로 공세를 받았다면 절대 피할 수 없는 검공, 상대는
언제든 피해야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갖췄음이 틀림없었다.
"너는 단비하?"
일양자의 눈썹이 하늘로 솟구쳤다.
주루에서 당자인을 데려간 일이 못내 수치스럽게 느껴지곤 했
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그에게는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
의 기회였다.
비록 단비하가 청성을 위해서 칠은방도들의 보급로를 끊어 주
고는 있지만 청성파에 무례하게 침입하여 난동을 피운 것으로
공과는 상쇄되었다. 그런데 또다시 청성에 나타나다니, 청성파
를 안중에 두고 않는 방자한 태도를 징계할 심산이었다.
일양자의 검이 수평으로 뉘여졌다. 칠십이로 파검식의 기수식
을 취한 것이다.
"일양 진인, 진인과 비무나 하자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
단비하는 의외로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취하며 예의를 갖줬다.
방금전 일검을 가슴에 맞아 상태가 중할터인데도 천년 화강암
처럼 흔들림없는 태도였다.
"할말이 있다는 게냐?"
"대답을 들으리라 생각은 않지만, 그래도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흥! 나는 네놈 따위하고는 할 말이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청성과 칠은방과의 관
계는 어찌 됩니까?"
"뭐야?"
"청성과 칠은방과의 관계를 말씀해 주십시오."
"네 이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감히 칠은방 같은 사도
무리를 어디다 견주는 게냐?"
일양자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민 듯 바람도 없는데 도포 자
락이 거세게 흔들렸다.
"휴우! 제가 잘못 안 모양입니다."
단비하는 다시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취한 다음 몸을 돌렸다.
순간,
휘리릭...!
일양자는 조령신법을 전개하여 길을 막은 다음 목덜미에 검을
겨눴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인상에 눈빛마저 싸늘하게 동결시
켜 한기가 절로 풍겨 나왔다.
"네놈이 한 말의 뜻은 뭐냐?"
"...!"
단비하는 말없이 일양자의 눈을 응시했다.
일양자처럼 도문에 있으면서도 성격이 급하다는 것은 그만큼
단순한 성격이라는 말도 된다. 또한 청성 도인들 중 가장 화통
한사람이었다.
"시간을 내 주신다면...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진인
과 나, 단둘이..."
"...!"
이번에는 일양자의 말이 끊겼다. 그는 단비하가 자신을 찾아왔
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청성에 관한 일이라는
것도...
"좋다. 눈위지만 앉아라."
"아닙니다. 이목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따다라와."
일양자는 단비하를 데리고 우두암(牛頭巖) 밑에 있는 조그만
동굴을 찾아들었다. 멀리서 보면 꼭 소의 머리에 날카로운 뿔
이 나 있는 것처럼 기형적으로 생긴 바위였다. 청성 제자들이
라면 누구나 아는 바위지만 그 밑에 조그만 석굴이 있다는 것
은 청성오수 외에는 아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
조령신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생식(生食)이 필수불가결한 요소
였다. 몸에 깃든 악기(惡氣)를 쏟아 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참 먹성 좋을 나이에 산에서 나는 칡이나 산콩, 솔잎가루등
을 먹고 버티라는 것은 무리였다.
청성오수 역시 유년 시절은 마찬가지였고, 이 조그만 석굴은
사부 몰래 토끼를 구워먹던 추억 깊은 곳이었다.
후일 조령신공의 진의를 깨닫고 어느 정도 생식이 몸에 배여
화식(火食)과 오미(五味)를 취하는 속세인과는 냄새 때문에 같
이 생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여기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할말이 무엇인지 말해
봐라. 만약 서툰짓을 할 양이면 죽음을 각오하고..."
일양자의 말은 진담이었다. 단비하가 아무리 빠르게 하독한다
해도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지척지간에서 일양자의 검보
다 빠를수는 없었다.
단비하는 차분한 목소리로 삼절 진인을 만난 일과 장완에게 들
은 이야기를 말해 나갔다. 의문점도 포함해서...
그러나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을 거라는 석굴의 입구에서 도
인 한명이 은밀히 몸을 숨긴 채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깨닫
지 못했다.
일양자도 단비하도...
일양자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칠은방도 중에 당상명까지 끼여 있었다면 평범한 일이 아니었
다. 어쩌면 칠은방의 저력이 상상외로 강할 수도 있었다. 그러
고 보니 원명궁에 찾아온 무뢰배들과 겨룬 청석 진인은 그들의
무공이 자신에 버금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말이 있었기
에 사형 삼절 진인의 뜻에 아무 생각없이 동의했는데.
한쪽에서는 공격할 생각을 않고, 또 한쪽에서는 수수방관하고
있다면 칠은방도들이 무엇 때문에 청성산을 에워쌌단 말인가.
한번 들기 시작한 의구심은 끝이 없었다. 일도일사 종양 진인
의 죽음만 해도...천하에서 다시없는 지모를 지녔다는 삼절 사
형이 전위대의 마지막 발악을 예측하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 하
필이면 그들이 뛰쳐 나오는 길목에 일도일사를 배치하다니, 전
위대 역주들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하고 있었다면 분명한 살인
행위였다.
'아니야. 삼절 사형이 무엇 때문에...'
일양자는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청성이 당면한 현안은 분명 문제점이 많았다.
'혹시 사형이 죽음을 가장한 것도?'
당철휘가 암습해 왔을때 삼절 진인은 모든 통로를 개방해 놓으
라고 지시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철휘가 상청궁을 통과해 호
응정까지 갈수도 없었으리라. 귀속사가들은 삼절 진인이 죽었
다는 소식을 듣고 사라졌다. 그 길로 고율촌에 모여든 것이다.
또한 고율촌 사람들의 몰살도 의문스러웠다, 귀속사가는 비록
멸문한 가문이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가법(家法)을 계승하여
인명을 함부로 해할 사람들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살인을 저질렀다.
지시자가 당문주라면? 청성파를 이용한 완벽한 차도살인이었
다. 그런데 왜 충성스러운 수하들을 죽인단 말인가. 거기에 요
철(凹凸)처럼 아귀가 꽉 맞아 들어간 삼절 진인의 계략은...덕
분에 청성의 힘은 미약해졌고, 일도 일사 종양 진인까지 잃었
다.
이러한 모든 의문과 추리는 단비하가 말한 다음에야 느꼈다.
그만큼 철저하게 삼절 진인을 믿었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한
사형이기에 사형의 성품이 인자하고 온후하기 이를 데 없기에.
일양자는 급한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잠잘 기
분이 아니었다. 당장 호응정에 올라가 사형에게 의문점을 물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한번 생각하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일양자의 성격. 검
을 집어 들고 처소를 나섰다.
"사형! 사형!"
호응정은 삼절 진인의 연공실(鍊功室)이자 처소이며, 양(陽)
자 배 도장들의 밀담실(密談室)이기도 했다. 사방이 미닫이 문
으로 되어 있어 평시에는 환히 트였지만, 지금처럼 겨울이 되
어 문을 닫으면 바람한 점 들지 않는 아늑한 곳이었다.
'잠이 들었나? 하기는 삼경(三更)에 가까우니.'
날이 밝은 다음에 찾아올 것을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내친 김
에 만나 봐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사형! 일양입니다."
안에서는 전혀 응답이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물러설 줄 모
르고 거센 바람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일양자는 불현듯 이상한 예감이 들어 검자루를 힘껏 고쳐 잡았
다. 사형의 무공은 청성 제일이었다. 사부가 장문 자리를 대사
형에게 물려 주었기에 그렇지, 사실 무공이나 지략 모든 면으
로 장문을 능가하는 사형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커다란 소리를
못 들을 리 없었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차앙!
검을 뽑음과 동시에 문을 힘차게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취리리릭...!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듯 섬뜩한 음향과 함께 피부를 저미는
살기가 파고 들었다.
"어떤 놈이냐?"
일양자의 손에서는 칠십이로 파검식이 즉각 쏟아졌다. 조령신
공은 천지자연의 생기와 교감하는 신공, 아무리 어둠속이라 할
지라도 살기가 드러난 이상 자신을 어떻게 할 검공은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파앗!
가슴이 화끈거렸다. 인두로 지지듯 순간적으로 스쳐 간 뜨거움
이었다. 내력이 산산이 흩어지며 뜨거움보다 더욱 지독한 고통
이 밀려들면서 선혈이 솟구쳤다.
베인 것이다.
"칠, 칠십이로 파...검식!"
가슴을 베였다는 사실보다도 눈에 익은 검식이 더욱 놀라웠다.
청성파에서 칠십이로 파검식을 자신보다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일검파천 부양 사제뿐. 그러나 부양사제의 검
공은 아니었다. 그의 검은 가슴을 벤 검보다 빨랐지만 웅휘한
기세는 약했다.
"이십칠로(二十七路) 득정합(得正合式)이다."
아! 죽어서도 잊지 못할 목소리. 바로 사형 삼절 진인의 음성
이었다. 그런데 사형이 왜?
"일양...사십 년이면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래도 너와는 이별
을 나눌 시간이라도 있구나. 종양한테는 인사도 못했지. 선계
에 들거든 종양에게 안부나 전하거라."
"사, 사형! 왜? 왜...?"
일양자는 회의로 물든 눈을 부릅뜨고 힘없이 스르륵 무너졌다.
삼절 진인의 검은 정확히 심장을 반으로 갈랐다. 사실 지금까
지 쓰러지지 않고 버틴 것도 조령신공을 꾸준히 연마한 덕이었
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탁! 탁...!
부싯돌치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화악하고 불길이 살아났다.
호롱불이 밝혀지자 호응정에 도인 두명의 모습이 보였다. 삼절
진인, 그리고 유난히 하체와 팔이 긴 청광 도인.
"내일은 너의 사부다. 팬찮겠느냐?"
"저의 사부는 오직 한분이십니다."
"후후후! 그럼 조양의 죽음은 상관 없단 말이냐?"
"저에게 만약 실력이 있다면 제 손으로 죽이고 싶습니다."
"후후후! 일양의 시신을 치워라."
"알겠습니다."
청광 도인은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처럼 솜으로 일양의 가슴을
틀어 막고 무명으로 칭칭 감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물로
혈흔을 깨끗이 닦은 다음 모과수선국(木瓜水仙菊)의 즙을 뿌려
혈향을 제거했다.
촌각도 걸리지 않을 만큼 빠른 솜씨였다.
"그럼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완벽을 기해라."
"염려 마십시오."
청광 도인은 일양 진인의 시신을 어깨에 둘러메고 호응정을 나
갔다.
"단비하가 좋은 일을 해줬어. 뜻밖에도 일양을 불러 주다니,
누구부터 손댈까 고민 중이었는데...너무 쉽게 해결됐어. 단비
하 ...네가 결단을 재촉했구나. 후후후! 그렇다면 해야지."
삼절 진인은 일양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가 아직도 가시
지 않은 듯 했다. 사방에 드리워진 미닫이 문을 활짝 열어제치
자 차디찬 북풍한설이 훈훈한 열기를 단번에 빼앗아 갔다.
그것이 혈향의 남은 찌꺼기마저 쓸어 가는것 같아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허허허! 이제는 며칠 안 남았군. 너무 오래 걸렸어."
단비하는 찬 기운에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면서도 귀식대법
을 풀지 않았다.
과연 예측대로 일양 진인은 삼절 진인을 방문했고, 죽었다.
성격이 단순한 일양 진인을 이용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음모
의 냄새는 확실히 맡았다. 청광 도인...그를 안 이상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섣불리 움직여 삼절 진인의 촉각에라도 걸리는 날에는 죽음뿐
이었다.
'삼절...나를 이용한 것은 용서한다. 하지만 만약 당문과 관계
가 있다면 결코 살려 두지 않는다.'
모든 의문이 빠르게 풀려 갔다.
삼절 진인에게 무슨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청성오수에게
차도살인계를 쓰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남
은 삼 인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칠은방과 삼절 진인과의 관계도 모호했지만 연관이 있는 것만
은 분명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당문과의 연관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귀속사가의 몰살, 그리고 당철휘의 암습...모든
것이 틀니처럼 착착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자신을 이 일에 끌어들인 이유만은 알수없었다.
굳이 자신이 아닐지라도 청성오수를 분산시키는 것은 삼절 진
인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
'마각은 언제고 드러나겠지.'
단비하는 새로운 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대체로 사람을 이용
할 적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라도 죽일 수 있는 자신이 있어야만 마음놓고 이용할수
있는 게다. 대조독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또한 일양자가 내력으로 풀어 낸 대조독으로 삼절 진인과 맞설
수는 없었다.
좀더 강력한 독, 중독과 동시에 절명하는 치명적인 독.
하독 방법도 문제였다. 아무래도 하독기를 사용한다거나 기후,
지형지물을 이용한 하독 방법은 실패할 가능성이 많았다.
적어도 삼절 진인과 같은 고수에게는.
'방사를 완성해야 돼. 지불가승(知不可勝) 즉수(則守)라, 필승
의 자신이 없는 이상 수비에 전념해야 한다.'
당문 십절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불감당이었다. 하물며 칠은
방도의 보급품을 탈취했으니 한 하늘에 양립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는데 청성파까지 적으로 돌린다면...사천성 모든 무인들이
적이나 다름없었다.
이용할대로 이용하고 버릴 때 그때부터 반격해도 늦지 않았다.
그전에는 완벽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 사천성 모든 무인들이
적으로 돌아선다 해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고 있는 무공이라면 가
람검공뿐인데 절정으로 익히려면 많은 세월을 필요로 했다.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야 활검을 익힐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
가. 하물며 그렇게 해서 가람검공을 절정으로 익힌다 해도 삼
절 진인이나 당문주를 이긴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이 그만한 세월을 기다려 줄 리도 만무하고.
하지만 독이라면 자신있었다. 실례로 칠은방도와의 접전에서
거의 무적에 가까운 신위를 보였다. 물론 그들의 무공이 형편
없기도 했지만 본신 무공만으로 상대하려 했다면 쉽지 않았을
게다. 독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당장 연구해야 돼.'
단비하는 꽁꽁 얼어붙어 감각이 없어진 손발의 감촉을 염려할
짬도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독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삼절 진인이 미닫이 문을 닫지 않는 이상 한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으니까.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함니다.
즐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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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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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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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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