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二十一 章. 파열(破裂), 음모에 뚫린 틈바귀
( 一 )
일양 진인의 시신은 곡구에서 발견되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진 상태였다. 그나마 얼굴의 훼손이 미약하여 일양
진인인 것을 알아볼수 있었지, 도륙된 육신을 보면 누구인지
정녕 알아보기 힘들었다.
종양 진인이 죽은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는데 청성오수 중
또 한사람이 처참하게 명을 달리한 것이다.
청성 도인들은 무섭게 들끓었다.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 칠은방도들을 척살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렇게 분노의 염을 터뜨리던 청성 도인들도 삼절 진인
의 한마디에는 고개를 떨궜다.
"무량수불...! 싸움만이 능사는 아니다. 언젠가 반드시 이 빚
을 갚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한 일검 진천이 의문을 제기했다.
"사형, 사마를 척살하지 못한다면 청성의 체면이 떨어집니다.
더욱이 일양 사형마저 죽은 마당에..."
"그러기에 참아야 한다. 대의란 무엇이냐? 칠은방도들은 거의
가 검을 어떻게 쓰는지 조차 모르는 무뢰한들. 그들을 상대로
한 싸움은 싸움이 아니라 도살이다. 일양자를 죽일 정도의 고
수라면 반드시 세거해야 되겠지. 칠은방주도 제거해야 될 테
고...하지만 지금은 참아야한다. 대의를 위해서는 굴욕도 참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삼절 진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
파의 존장이 처참하게 참살되었다는 것은 굴욕 정도가 아니었
다. 청성파 도인들의 시선은 자연히 결정권자인 장문 옥양 진
인에게 돌려졌다.
"휴우! 나도 이제 늙었나 보이. 자신이 없고 순리를 파악하지
못하겠어. 삼절의 생각대로 행해서 잘못된 것이 없으니 그의
생각을 따라보세."
옥양 진인은 연로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늘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기는 했지만 결단만은 과감하고 신속했는데 지금
은 그런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조양, 청성에 있는 칠은방도를 조사해 주게. 일양을 죽일 만
한 고수가 어디에 있는지, 일양이 당할 정도라면...휴우! 함부
로 나서지 말고..."
"알겠습니다."
무도심창 조양 진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양 진인은 면에 물을 묻혀 난(蘭)의 잎사귀를 닦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연공을 마치고 나면 늘 하던 일이었다.
난은 모습도 청초하고 냄새도 청량하지만 성격이 무척 까탈스
러워 조금만 돌보지 않아도 이내 흔적을 드러내곤 했다. 게으
른 사람은 키울 수 없는 것이 난이다.
"난을 키운 지도 사십여 년...휴우! 아직도 청정심(淸淨心)을
깨닫지 못하다니."
잎사귀에 수분을 공급하고 먼지를 닦아내는 손길에 회한이 찾
아들었다.
아무래도 일양 사형의 죽음이 의심스러웠다.
사형이 전력으로 칠십이로 파검식을 전개한다면 무림에서 맞받
을 자가 극히 드물었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칠은방에 그런
절정고수가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공연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 평생 동안 정들었던 처소를 나선다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 도(道)는 즉 허(虛)다. 허 위에 어찌 일호(一毫)의 실(實)을
보탤 수 있으랴. 부처는 무(無)를 말하였다. 무 위에 어찌 일
호의 유(有)를 얹을 수 있으랴마는 허는 양생(養生)으로 부터
나옴이요, 무는 생활고(生活苦)로부터 떠나려 함이니 본체(本
體) 위에 약감의 의사(意思)를 얹어 놓고 말았다. 허는 곧 하
늘의 태허(太虛)요, 무는 곧 태허의 무형(無形)이다. 일월(日
月), 풍뢰(風雷), 산천(山川), 민물(民物)...무릇 모든 형상이
형색(形色)이 있는 것은 모두 태허, 무형 속에 발용(發用)하며
유행(流行)하되 모두 내 양지(良知) 속에 있나니, 어느 무엇이
양지 밖에 벗어나서 양지의 장애될 수 있으랴.
사부가 늘 일깨워 주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모든 것이 미망(迷妄), 모든 것이 허로 돌아가는 인생이거
늘...
난을 손질하던 손길이 뚝 멈춰졌다.
난에 집착하는 것 또한 미망이었다. 난 한 포기를 건네 주시며
잘키워 보라고 말씀하시던 사부, 오늘 난을 버림으로 해서 진
정한 도의(道意)를 전달해 주셨다.
조양 진인은 평생 동안 애지중지하던 봉을 허리춤에서 끌러 냈
다. 소맷자락에 들어 있던 창촉도 버렸다. 말 그대로 무도심창
(無道心槍)이 되었다.
홀가분했다.
세상 모든 것에 미련이 없으니 이제 떠난다 한들 어떻고, 내일
떠난다 한들 어떠랴. 일양 진인의 죽음을 해명하는 것조차 부
질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미망...'
무도심창은 처소를 나섰다.
인간이 만든 틀속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의 숨결을 듣고 싶었
다. 하늘은 오래간만에 파란색을 띠었다. 늘 함박눈이라도 퍼
부을 듯 우중충했는데...만약 사부가 생존해 오늘의 각성(覺
醒)을 알아준다면...그 또한 미망이었다. 알아주면 어떻고 몰
라주면 어떠랴.
청성파 개파시조(開派始祖) 이래 처음으로 조령신공 중 상공
일각을 대성한 제자가 나온 것이다. 너무도 우연찮은 일로 마
음이 암흑처럼 답답한 가운데...조령신공 상공은 모든 것을 버
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완성이었다.
"사부님 처소에 안 계시기에..."
조양 진인은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청광 진인이 손에 찻잔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가 애용하던 용
정차(龍井茶)가 분명했다. 하지만 어쩐 일일까? 오늘은 용정차
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계곡애 흐르는 맑은 계류가 값
비싼 용정차보다 맛있을 것 같았다.
"허허허...!"
조양 진인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모든 것을 훌훌 떨쳐 버렸
다.
"사부님 어디 가십니까?"
"허허허...!"
청광 진인은 평소와 너무도 다른 조양 진인의 모습에 잠시 어
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곧 눈에 귀광을 발산하며 황급히 몸을
날렸다.
"정말 조양이 그런 행동을 했단 말이냐?"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으읍...!"
"어떻계 했으면 좋을지...?"
"계획이 어긋나서는 안 된다. 어찌 되었건 조양은 빠져 나갈
수 없어. 장문에게 고하기 전에 즉시 시행해라."
"알겠습니다."
삼절 진인은 물러가는 청광 진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침음
성을 터뜨렸다.
뜻밖에도 조양 진인은 수림 한구석에 누워 세상 모르게 단잠을
자고 있었다. 한겨울 그것도 산중인지라 한댓잠을 잘 수 없는
데 조양 진인은 태연했다.
"으음...! 그르릉...!"
제법 코까지 골았다. 늘 단정하던 조양진인의 모습이 아니었
다. 어디를 헤매고 다녔는지 도포는 흙과 눈이 범벅돼 엉망이
었다. 머리도 산발했고 신발도 한짝밖에 신고 있지 않았다.
청광 도인은 태연한 걸음으로 다가섰다.
아직 마각을 드러내지 않은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사부, 사부!"
"으음! 음냐...!"
조양 진인은 꿈속에서 무엇을 맛있게 먹는지 입맛을 쩝쩝 다셨
다. 그런 모습을 한동안 지그시 응시하던 청광 진인은 품속에
서 노란 기름종이를 꺼내 조심스럽게 펼쳤다.
화악...!
청광은 독분을 뿌림과 동시에 몸을 훌쩍 날려 뒤로 한걸음 물
러섰다. 삼절 진인이 조양 진인을 죽이기 위해 벌써 오래 전부
터 준비해 두었던 독분이었다. 중독 즉시 사망하며 해약이 없
다는 절대독.
치지직...!
하얀 설지가 뜨거운 물을 끼얹은 듯 녹아들었다. 조양 진인이
입고있던 회색 도포도 검게 그을렸다. 보기만해도 섬뜩한 독기
였다.
"쿨룩! 쿨룩...!"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조양 진인이 갑자기 격한 기침을 터뜨렸
다. 그와 동시에 칠공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끝장을 봐야 돼.'
청광은 마음을 독하게 다잡고 검을 들어 힘껏 찔러 갔다.
바로 무도심창이 칠십이파검을 변형시켜 전수해 준 무도창법
중 파창신직(把槍伸直) 일초를 검으로 전개한 것이다.
푸우욱...!
골육을 파고드는 기분좋은 감촉이 전해졌다. 청성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온갖 애정을 쏟아주던 사부의 종말을 뜻하는 기음이
기도했다.
'잘 가시오, 사부. 어쩔 수 없었소. 사부는 나의 꿈을 충족시
켜 줄 수 없는 사람이었소.'
청광은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채 두 걸음도 옮기기 전에
멈춰서야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홀연히 나타난 세 사람. 일장금명 선양
진인과 일검파천 부양 진인 그리고 삼절 진인.
일장금명 선양 진인은 부리나케 조양 진인을 행해 신형을 날렸
다. 그리고 명문혈(命門穴)에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부양 진인과삼절 진인은 안색을 차갑게 굳힌 채 천천히 다가섰
다.
"금수만도 못한 놈. 일양의 죽음이 내부 소행이라기에 믿지 않
았는데 바로 네놈이...어찌 사부를 해할 수 있단 말이냐?"
천둥처럼 일갈을 내지른 부양 진인은 급하게 조령신공을 끌어
올리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검공(劍功)은 무림일
절이었다. 조양 진인에게 전수받은 무공이 적지 않고 심도가
깊다고 자부하지만 부양 진인의 상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청광은 다급한 나머지 삼절 진인을 돌아봤다.
아! 삼절 진인의 깜빡이는 눈. 언뜻 삼절이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았다. 부양 진인과 선
양 진인을 유인하여 죽일 참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유
일한 심복인 자신에게조차 계획을 말해 주지 않다니 하마터면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하지 않았는가.
"조양을 어떻게 죽였느냐?"
북풍한설을 얼려 버릴 듯 싸늘한 음성. 그 소리에 청광은 퍼뜩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조양 진인을 죽
인 것과 똑같은 방법을 쓰라는 암시...그래서 기름종이를 두
개나 줬었구나.
청광은 느긋한 마음으로 품속에서 기름종이를 꺼내 들었다.
"흐흐흐! 부양 사숙 사숙도 죽어 줘야겠소."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선제 공격을 가했다. 오른손에 든 검으로
는 무도창법 중 파창상타(破槍霜打)를 전개하면서 왼손으로 기
름종이에 든 분말을 힘껏 뿌렸다. 그런데,
"크윽!"
청광은 갑자기 숨이 곽 막혀 오는 바람에 질겁하며 한걸음 뒤
로 물러섰다.
"제길 내가 중독되었어."
맞바람을 생각 못한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독에 관해서 잘
알지도 못했고, 하독 방법이라고는 그저 뿌리면 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독문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을 야심
만만한 청광이 몰랐다.
청광 진인은 애원의 눈길을 삼절 진인에게 보냈다. 빨리 부양
진인과 선양 진인을 죽이고 자신을 구해 달라는 구원의 음신
(音信)을 담고..."
"놈이 중독된 모양인데..."
삼절 진인은 막 일검을 날리려는 부양 진인의 소매를 잡아당겼
다.
순간,
"헉!"
부양 진인이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공기
중에 흩날린 독분을 흡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청광은 분명히
보았다. 삼절 진인이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일지(一指)를 뻗어
배중혈(背中穴)을 가격하는 모습을...
"사, 사형..."
이미 코에서 검은 피를 주르륵 흘리는 부양 진인의 눈은 삼절
진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또다시 은연중에 다가온 일
지를 영태혈(靈台穴)에 맞는 순간 그의 듬직한 몸은 힘없이 허
물어졌다.
"이, 이보게! 부양, 왜 이러는가?"
애통한 울부짖음이 산곡을 쩌렁 울렸다.
'참으로 뛰어난 연극이야. 역시 내 꿈을 이뤄 줄 사람은 사부
님뿐이지.'
청광은 만족스런 실웃음을 흘려 냈다.
- 너의 사부는 조양 진인이다. 그러나 괜찮다면 너에게 무공을
지도해 주고 싶다. 아, 그렇다고 나를 사부로 섬기란 소리는
아니다. 단지 사백으로서 너라면 한번 지도해 보고 싶기에
하는 말이다.
- 그래만 주신다면 사부로 섬기겠습니다.
- 허허허! 조야의 제자를 뺏을 수는 없지.
청성파에 입문하던 그날, 청광은 조양 진인 외에 삼절 진인이
라는 희대의 기인을 사부로 섬기게 되었다. 삼절 진인의 간곡
한 당부가 있어 겉으로는 조양 진인을 섬겼지만 마음은 점차로
삼절 진인 쪽으로 기울었다. 무도창법도 독창적인 면이 있어
좋았지만 그 정도로 야심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던 탓이다.
"커억! 쿨럭! 어서..."
위내정수(胃內停水)가 느껴졌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위가
출렁거리며 물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침은 끊이지 않고
격렬하게 튀어 나왔으며, 목이 꽉 졸린 듯 숨쉬기가 어려웠다.
부양진인의 죽음을 확인한 삼절 진인은 몸을 솟구쳐 순식간에
전면에 내려섰다.
"쿨럭! 사부..."
청광은 고통에 이그러진 얼굴로 아픔을 호소했다.
해독약이 없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사부라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이놈! 사부를 시해한 놈이 죽은 사부는 왜 부르느냐?"
청광은 순간적으로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늘한 일갈을 종종 터뜨리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살기가 진득
하게 묻어 나오지는 않았다. 아니 삼절 진인의 몸에서 안개처
럼 스멀거리며 피어나오는 기운은 바로 일양 진인을 죽이기 직
전 보였던 살기였다.
"커억!"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뼈가 부러지며 내는
우드득, 소리만 차가운 정적을 일깨웠다.
청광 진인조차 소리없이 제거한 삼절 진인은 운기요상에 여념
이 없는 일장금명의 배후로 다가섰다.
'이놈이 정말 공력 하나는 심후하군.'
일장금명 선양 진인은 특기를 장(掌)으로 삼을 만큼 고절한 내
력을 지녔다. 무도심창 조양 진인에게 내력을 불어 넣고 있는
그의 머리에는 실안개 같은 김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무형의
기운을 유형으로 만드는 경지, 조령신공 상공 중 일각을 상당
히 심도 깊게 깨우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제, 나도 거들겠네,"
삼절 진인은 굵은 땀을 흘려 축축해진 선양 진인의 배심혈(背
心穴)에 오른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진기를 흘려 넣기 시작했
다. 순간 선양진인의 미간이 심하게 찡그려졌다.
배심혈을 통해 들어온 진기는 자신의 진기와 융합하여 흩러나
가지 않고 오히려 맥을 가닥가닥 끊어 놓았다. 의도가 분명했
다. 암습이었다. 그런데 삼절 사형이 왜 암습을 한단 말인가.
그러잖아도 부양 진인의 비명을 듣고 마음이 분산되어 간신히
추슬렀는데...
지금 시점에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조양 진인을 포기하고 삼절 진인의 진기를 밀어 내며 몸을 튕
기는 것, 하지만 그러자면 조양 진인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
었다. 독상을 아직 치료하지 못했는데...원기(元氣)의 손상 또
한 극심했다. 억지로 진기를 튕겨 내는 것은 주화입마 못지않
게 위험스런 일이었다. 자칫하면 영원히 내력을 잃을수도 있
는...
한동안 비지땀을 흘려 내던 선양 진인은 마음의 결단을 내렸
다. 자신이 죽는다 할지라도 조양진인을 살려 내기로.
"사형, 사형! 제발...!"
진기를 쏟아 붓기도 수월치 않았다. 자신의 진기는 갈수록 약
해졌고 배심혈을 통해 흘러든 진기는 혈도의 흐름을 철벽같이
막아섰다. 하지만 조양 진인의 몸에 스며든 독기는 점차로 물
러가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조금만...'
마지막 남은 한 올의 기력을 쏟아 부었다. 이제 조양 진인이
살고 죽는 것은 그 자신의 운명. 선양진인의 내부에서 터지는
화려한 폭발을 감지했다. 텅 빈 기해혈에 쏟아져 들어온 삼절
진인의 진기가 진원(眞元)을 건드렸다.
"크으윽...!"
극렬한 고통이 몰려왔다. 뱃속이 갈가리 찢기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비명은 흘리지 않았다. 그보다 한발 앞서 비릿한 선혈
이 식도를 거슬러 올라왔다.
"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고개를 돌린 선양 진인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삼절 진인의 얼굴을 보며 의문을 던
졌다. 그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내장이 으스러
진 선양 진인의 죽음이었다.
"왜? 허허허! 왜인 줄 모르는가?무예를 배웠으면 입족(立足)해
야지 산골짜기에 처박혀 있어서야 되겠는가? 자네들은 방해만
될 뿐이야. 그동안 도경(道經)을 부지런히 읽었으니 좋은데 갈
걸세."
삼절 진인은 품속에서 기름종이를 꺼내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리고 이미 싸늘하게 굳어져 가는 선양 진인과 죽은 듯 하얗
게 탈색된 얼굴을 하고 있는 조양 진인에게 뿌렸다.
아! 그의 하독 솜씨는 절묘했다. 결코 독을 모르는 사람이 아
니었다. 청광이 하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맞바람이 불어오고
있지만 독분은 정확히 선양 진인과 조양 진인의 콧속으로 스며
들었다.
차가운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밤이었다.
조양 진인은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동자로 흐릿한 밤하늘을 올
려다 보았다.
그의 결에는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선양 진인과 부양 진인 그
리고 자신에게 하독했던 청광 진인의 시신이 말없이 놓여 있었
다.
'사형...세상은 태허인 것을...'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사형과 제자였지만 그들의 죽음
이 조금도 측은하지 않았다. 삼절 진인의 독심을 봤으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흔들림없는 부동심을 소유했다고나 할까?
세상 만물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다음부터 형성된 마음이었
다.
청광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귀찮았다. 그저 잠을 자고 싶었을 뿐,
몸속으로 기이한 독기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완숙에 이른 조령
신공은 굳이 운기를 하지 않아도 항시 몸을 휘돌았다. 아무리
절정의 독일지라도 그외 몸을 상하게 할수는 없었다. 쉬임없이
흐르는 진기는 독기를 싣고 방광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으로 끝
이었다. 그저 기분좋게 요(尿)를 배설하면 되는데,
가슴을 찌르는 검날을 느꼈다.
그것도 귀찮았다. 죽으면 그뿐 호흡 하나로 결정되는 삶과 죽
음이 대단치 않았다. 그는 이미 자연과 일체가 되어 버렸다.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산천초목의 일부가 되는 것.
선양 진인의 죽음은 진정 뜻밖이었다.
밀려오는 진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치료할수도 있지만 모든 게
귀찮아 그저 자연의 흐름에 맡겨 둔 것인데.
삼절 진인의 공력은 자신과 비슷했다. 절정에 이른 조령신공이
라 할지라도 그와 내력 싸움을 해서 이긴다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사제의 죽음이 필연일 바에는 죽도록 내버려 두
자.
'모든 것이 미망...한줌 티끌에 불과한 것을...'
조양 진인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
다. 상청궁이 있는 정봉이 아니라 산자락을 향해서...흘러가는
구름처럼 세속을 떠난 그의 마음은 자유로웠다.
다음날 아침 청성 제자들이 담가(擔架)에 실어 온 삼 인의 모
습은 목불인견이었다. 빨간 반점이 급속하게 퍼져 피부 전체가
빨간색으로 보였다.
"청광! 아니, 선양과 부양도..."
옥양 진인은 현기증이 일어나는지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결에 있던 삼절 진인이 몸을 부축하지 않았다면 추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일 뻔했다. 장문이란 지위는 어떠한 일이 있어서
흔들림이 없어야하는 괴로운 자리였다.
"크윽!"
"커어억...!"
갑자기 참담한 신음 소리가 들리며 하자배 두명이 목을 움켜쥐
고 쓰러졌다. 그들의 몸은 잠시 바둥거리다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잠잠해졌다. 방광에서 쏟아진 축축한 물기가 도복
(道服)을 흥건히 적셨다.
"물러서라!"
삼절 진인의 입에서 쩌렁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하 자배 제자들이 급작스럽게 죽은 동문을 도와 주려는 행동을
본 까닭이었다.
"여독에 중독되었습니다. 독에 중독된 사람을 만져도 감염되는
무서운 독...저 정도의 독이라면 당문밖에 없습니다."
무척 분노한 듯 수염까지 부르르 떨면서 흘린 말이었다.
"사제들이...사제들이 모두 죽었어. 조양! 조양은 어디 있는
가? 어서 조양을 찾아라. 조양이 위험해."
옥양 진인의 침착함은 이미 무너졌다. 며칠 사이에 연이은 사
제들의 죽음이 그의 이성을 혼란으로 밀어 넣었다. 장문으로
부임한 이래 위기다운 위기를 겪어 보지 못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어서 조양 진인을 찾아라."
삼절 진인은 모두의 귀에 뚜렷이 들릴 정도로 커다란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조양 진인의 시신이 없어 께름칙했다.
분명 네 구의 시신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날 해가 저물도록 온 산을 뒤졌는데도 조양 진인의
흔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종래에는 삼절 진인이 직접 수색에 참
여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는 하늘로 솟은 듯 조그만 단서조
차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렸다.
오히려 하 자 배 도인들 십여 명이 시신으로 발견되는괴사(怪
事)가 발생했다. 하나같이 청광 진인이 무공 지도를 맡았던 제
자들이었다.
그들은 만면에 웃음을 떠올린 채 죽어 있었다.
모두들 그들의 죽음은 가볍게 흘려 버렸다. 삼절 진인의 말 한
다디 때문에.
"청광 진인은 행복하겠군. 제자들이 뒤를 따르다니...쯧쯧쯧!
무공은 가르쳤으되 도결(道訣)은 가르치지 않았어. 세속의 의
리보다 중요한 것이 진리이거늘..."
나는 새도 넘지 못한다는 호응정에 전서구가 날아든 것은 삼절
진인이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온 지도 네 시진이나 지난 후였
다.
< 조양 진인 관현에서 발견.
더럽고 선혈이 가득 묻어 있는 도복을 입고 있음.
머리는 산발하였으며 행동거지 또한 정상이 아님.
동네 꼬마들이 광인(狂人)이라 놀리며 돌팔매질을 하여도 히죽
이 웃기만 함.
칠은방 영원불멸. >
삼절 진인은 누가 볼세라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겨진
전서를 입에 넣고 꿀꺾 삼켜 버렸다.
'멍청한 놈들...칠은방의 구호를 함부로 써넣다니 아무래도 말
좀 해야겠군.'
하지만 마음만은 적이 편안해졌다.
조양이 미쳤다면 급히 서두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아냐...! 혹시 놈이 미친 척하는 거라면?'
가능성있는 일이었다. 부양을죽이는 것이야 보지 못했겠지만
선양을 죽일 적에 조양은 진기를 받고 있었다. 또한 마지막에
절독을 하독했다. 사형이 흉수라는 것을 모를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사형이 흉수인 이상 청성파에 남아 있으면 목숨이 위태
롭다고 판단했을 게다.
정녕 이해하지 못할 일은 자신에게도 해독약이 없는 절독을 어
떻게 해독했느냐 하는 것. 굳이 조양진인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은 것도 절독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놈을 죽여야 해...'
삼절 진인의 머리에는 단비하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청성 주변에 그만한 절독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단비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단비하가 조양 진인을 해독한 것 같았다. 그
가 만들었다는 대조독은 물론이고 칠은방도들에게 전개한 미혼
독도 깜짝 놀랄 만한 독이 아니었던가.
사람의 두뇌를 자극하여 환상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독이라
니. 독문에 새로운 분야가 개척된 것이다.
홀로 그만한 독을 만들어 냈다면 아무리 해독약이 없는 천하절
독이라해도 해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그놈을 어디다 쓰려고 살려 두는지...'
삼절 진인은 조그만 한지를 펼쳐 놓고 세필(細筆)로 깨알 같은
글씨를 적어 나갔다.
< 은점(銀點) 전(前).
청성오수 중 사수를 척살.
무도심창 조양 진인은 광인이 되어 저잣거직를 떠들고 있음.
절독을 전개했으나 단비하가 해독한 듯함.
감히 충언(忠言)하건대 단비하의 척살을 서들러야 할 것.
제방도 개미 한 마리 때문에 무너지는 법.
청성파 건(件)은 조만간 종결(終結)될 것임.
점일호(點一號) 서(書). >
쓰기를 마친 삼절 진인은 전서를 곱게 접어 비둘기 다리에 매
달린 전통에 집어넣었다. 사방을 가로막은 미닫이 문을 모두
활짝 열어 제쳤다. 전서를 날리기 전에는 버릇처럼 해오던 습
관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느낌이 좋지 않으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십년공부 공염불 만들수는 없으니까.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던 삼절 진인은 전서구를 힘차게 날렸다.
옥양 진인은 침소(寢所)에 든 후 일어나지 못했다.
실어증(失語症)에 걸린 사람처럼 한 마디도 하지 못했으며 사
지가 마비되어 거동도 불가능했다. 눈동자는 살아 움직였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독기만이 절절이 뿜어
져 나왔다.
청성파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청요(淸嶢)는 마음을 가라 앉히려는 듯 식어 버린 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사제들을 급히 오라고 한 이유는 알고들 있겠지?"
"...!"
좌중에 앉아 있는 십 명의 도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청성파의 거목들이 한 순간에 쓰러졌는데 무슨 할말들
이 있으랴.
"장문께서는 거동도 못 하시고...삼절 사숙께 장문을 부탁할
참이네. 사제들의 의견은 어떤가?"
이견(異見)이 있을 턱이 없었다. 다른 파의 장로들 같으면 서
로 장문이 되려고 으르렁 거릴텐데...삼절 진인은 고고하기 이
를 데 없어 장문을 맡지 않겠다 하면 어쩌나 하는 근심뿐이었
다.
"삼절 사숙께서 장문을 맡지 않겠다 하시면 어쩌지요?"
"지금 이 난국을 타계할 분은 그분밖에 안 계시네. 우리가 죽
는 한이 있더라도 권유해야지. 그래서 말인데...나 혼자 권유
하는 것보다는 모두 같이 가는 게 어떨까 싶네만..."
"사형, 그러죠. 모두 함께 가서 장문을 권유합시다. 만약 거
절하신다면 자진(自盡)하는 한이 있더라도 성사시켜야 합니
다."
"좋네. 그럼 가지."
청 자 배 도인들 중 가장 고령자인 십일 명은 자리를 털고 일
어섰다.
"여보게들, 아직 장문이 건재하신데 무슨 불충한 말들인가? 그
런 소리는 입 밖에도 내지 말게."
생각했던 대로 삼절 진인의 거절은 단호했다. 평시 같으면 다
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을 게다.
"사숙 장문과 청성오수가 안 계시단 걸 칠은방이 알면 어쩝니
까? 그들 정도야 저희들만으로 충분하겠지만 희생이 클 겁니
다.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됩니다. 청성을 생각해 주십시
오."
간신히 용기를 낸 청요가 간절히 부탁했다.
삼절 진인은 허무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평소 내 몸보다도 더욱 사제들을 아끼셨는데...장문께는 언제
나 극존칭을 붙이며 문도들의 귀감이 되셨는데...'
청요는 무리한 청을 하는 자신이 죄스러웠다,
"장문은 수락할 수 없네. 예전처럼 뒤에서 거들어 주는 것은
할수 있지. 장문은 청요 자네가 맡게나."
"제, 제가..."
"허허허! 늙은 폐물은 폐물대로 살아 가는 방법이 있는 걸세.
지금 무림은 젊고 패기 찬 젊은이를 필요로 하지. 청요, 자네
가 적격이야."
"사숙, 정 그러시다면..."
청요 도인은 모종의 결심을 굳힌 듯 이를 악물었다.
"사숙, 청성을 버리지 마십시오."
창!
청요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목젖을 잘랐다. 누가 말리고 말고
할 틈도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사단이었다.
"청요, 아...무슨 경망된 행동인가?"
어느새 날아온 삼절 진인은 막 몸을 굽히는 청요 진인의 상체
를 안아들었다.
"끄르륵!"
청요도인은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는 듯 입을 달짝거렸지만 목
에서 샘솟듯 쏟아지는 선혈에 식도가 막혔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겠네. 청성을 맡지. 편히 가게나."
청요 도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고개를 떨궜다.
옥양 진인은 그날 저녁 다시는 올 수 없는 길로 떠났다. 마치
잠자다 운명한 듯 편안한 얼굴이었다.
분노한 삼절 진인은청 성을 에워싼 칠은방을 한명도 남김없이
척살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하지만 청성문도들이 쏟아져 나왔
을때 칠은방도들은 그림자 하나없이 사라진 후였다.
청성파 문인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즐길 겨를도 없이 전
무림에 장문의 부고(訃告)와 신임 장문의 취임(就任)을 전달해
야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입니다
즐~~~~감!
감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함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건필하십시요
즐감하고 감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