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이라는 것에는 구조가 있습니다.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상대의 미소를 보고 나를 비웃는다고 생각하면 기분 나쁜 감정이 일어나고,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흐믓 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생각에 의해 일어나는 감정들은 대상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불행한 일을 당해 가슴 아프고 속이 상해도 거기에 자유롭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지 입니다. 자유의지, 사람들은 대개 이 부분을 제쳐놓고 살아갑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갖는가에 있어서는 내가 주인입니다. 그 순간 내가 결정하고 판단합니다. “이 친구는 배신자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야, 저 친구 때문에 내가 더 강해졌어. 그는 나를 진짜 도와준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이 무엇이든 내가 결정하는 것 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독일의 정신과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는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그 지옥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명예와 재산은 물론, 옷가지까지 빼앗겨 벌거숭이가 되었고 매 순간 죽음으로 몰아가는 혹독한 환경 속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한 것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먹는가 하는 것, 그것만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수용소에 갇힌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든 노동을 하면서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어려움을 당하나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프랭클은 그런 와중에도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감동을 했고 막사 옆에 피어난 작은 꽃의 아름다움에 취하며 경이로움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루에 한 덩어리 배급되는 빵을 다른 사람들은 허겁지겁 먹어 치웠으나 그는 여러 덩이로 나누어서 빵 한 조각이 주는 의미를 가슴 깊이 느끼며 벅찬 고마움으로 먹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자신이 지닌 귀중한 자유를 가능한 한 향유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이 단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영혼의 성장을 가져다 주는 힘이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죄수 중에는 감사자를 두는데 사람들이 이들을 카포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수용자들을 죽일 수도 있고 다른 작업장으로 보낼 수도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살인마라고 이야기 했지만 프랭클은 저 사람도 내 형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당신은 살인마야”하면서 증오심 어린 표정으로 보는데 어떤 한 사람이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생각 해 보십시오. 놀랍게도 그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카포들이 구해줍니다. 한번은 작업 대기하는 상황에서 줄을 섰는데 갑자기 한카포가 뛰어나오더니 욕을 하며 플랭크에게 발길질을 해 다른 줄에 서게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줄은 가스실행이었고 다른 줄은 작업장을 향한 것 이었는데 처음 플랭크가 섰던 줄이 죽음으로 가는 줄이었 다람니다. 이것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의 삶이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일체는 마음이 만듭니다. 이 말씀은 위대하고 신비로운 법문입니다. 과거의 잘못과 어떤 실수도 손해와 피해, 아픔과 고통 그리고 죄마저도 내가 만들고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내가 바라는 아름답고 멋진 경험이며 소중한 체험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나는 세상의 피해자나 희생자가 아니고 당당한 주인이요 조물주입니다.
지금까지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손해보고 피해를 받았다고 하며 억울해 하고 속상해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경험하기 위하여 내가 선택한 것이며 내가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길 마음먹고 그렇게 생각한 것을 책임지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어떤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도움을 얻고 이익이 되었다면 그가 그러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피해를 주었다고 죄의식도 갖지 않겠습니다. 만일 피해를 입었다면 그들 자신이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 준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착각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상처주고 괴롭힌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큰 착각입니다. 아무도 나를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자신을 부정하고 손해를 입히며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자업자득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도우거나 피해를 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나를 사랑하거나 괴롭힐 수 없습니다. 오직 나 한사람이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운명을 한 순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를 자각합시다. 이것이 일체유심조 되는 이치의 자명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합니다.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 하는 것도 전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지닌 천부적인 재능입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능력입니다. 나에게 최고의 가치이며 어마어마한 잠재력입니다.
먼저 나 자신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인정합시다. 자신의 존재를 귀하게 느끼며 그 소중함에 가슴 벅차합시다. 나의 삶을 한없이 축복하고 축하해줍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합시다. 내가 참 좋다고 말하며 자신을 경이롭게 바라봅시다. 감사와 사랑으로 마음을 충만하게 합시다. 이렇게 가장 좋은 마음을 먹도록 합시다.
지금 내가 만나는 어떤 인연도 나에게는 최고의 인연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일터도 제일 좋은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무엇이든지 나에게 최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면 나의 삶에 놀라운 축복이 찾아 올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의 능력을 너무도 모르고 살았으며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구걸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더 이상 남이 주는 것만 받아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나와 세상을 최고로 만족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 나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가 있습니다. 누가 나를 비난하고 욕하여도 무슨 일이 잘못되거나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어도 인정받고 대접받지 못한다 하여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나는 전혀 상처받지 않습니다. 고통 받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 사랑을 보낼 수 있습니다.
현실은 나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나는 진정 행복자입니다. 이제 깊은 평안을 누립니다. 언제나 나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이 말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 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 법구(法句)에는 논리적 결함도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 마음이 저 뜰앞의 소나무를 만든 것은 아니잖는가. 하늘의 흰구름을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었다"는 표현은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분명히 우리들 마음이 이 세상의 객관대상을 만들어 낸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마음에 달려 있다. 유식(唯識)에서는 일수사견이라는 비유를 든다.
같은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데에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은 물을 보면, 누구나 마신다든지, 발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옥의 중생들은 물을 피고름으로 본단다. 물고기는 그냥 사는 집일 따름이다. 즉 물이라는 객관적 형태를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천차만별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낙엽 지는 호숫가에서 첫사랑을 속삭였던 이는 물만 보면 다정하고 아름다운 감정이 솟구친다. 즉 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교과서적인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 물은 결국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미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옛 기억을 떠올려 보자. 죽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의 시간들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는 번뇌망상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지금의 현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따름이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상념의 차이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마찬가지이다. 신문 사회면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저주와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면으로 보면, 여전히 세상은 따스하다. 문제는 어느 쪽에 액센트를 두는가 하는 점이다. 시끄럽고 말 많은 세상을 보면서,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끼게 하려면 불교가 바로 서야 한다. 그래서 세상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펌글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