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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3331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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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펌글 모음] 명나라 군대 1
1588년 에 출간된 척계광 장군의 군사교범 "기효신서"에 묘사된 중국 군대가 사용한 포르투갈식 화승총 삽화이다. 이 조총은 포르투갈 화승총을 본따서 만든 왜구들의 조총을 복제해서 만든 무기이다. 중국군대는 조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1558년 무렵에는 중국인 대장장이들이 중국 군대를 무장시키기 위해 절강에서만 거의 1만정에 가까운 조총을 생산해냈다.
위의 사진 - 1603년경 조사정(趙士禎)이 저술한 조총 교범인 '신기보(神器譜)'중에 나오는 삽화이다.
A )터키식 화승총
B) 서양식(포르투갈)식 화승총
C) 조사정이 개발한 후장식 화승총
조사정은 명나라 군대를 위해 터키식 화승총을 복제한 조총과 터키식 화승총의 구조에 기초한 후장식 조총을 개발, 생산해냈다.
신기보에 나오는 삽화이며,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포르투갈식 화승총을 양쪽으로 갈라진 지지대로 받쳐든 명나라 병사를 묘사했다.
양끝이 갈라진 지지대로 후장식 조총을 받쳐들고 사격준비를 하는 명나라 병사.
1606년경 개발된 후장식 조총이다. 이 그림은 나무로 만든 총상, 총신, 착탈이 가능한 약실과 대검을 보여준다.
1638년에 저술된 명나라 화기 교범에 묘사된 바퀴격발식과 유사한 부싯돌 격발식 구조를 갖춘 조총이다. 바퀴격발식은 청나라 후기 군대가 많이 사용됬다.
나무로 된 손잡이/자루를 끼워넣을 수 있는 홈이 붙은 명나라의 삼안총(三眼銃)이다.
만곡도와 등패로 무장한 갑주를 입지않은 병사의 지원을 받으며 조총과 삼안총으로 무장한 1620~40년경의 갑옷입은 명나라 병사의 모습이다. 척계광 장군은 적이 멀리 있을 때에는 삼안총을 발사하고, 가까이 접근하면 근접 백병전시 사용되는 타격무기로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봉덕 누가 동아시아의 조총은 개머리판이 견착하기에 불편하게 되어 있다고 그러던데, 위의 조총 모델 중 포루투갈제 B를 보더라도 어째 어깨에 견착하기 불편한 건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옛 소총의 개머리판이 견착하기 불편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2005-06-19 21:23:30
222.98.172.210
눈팅맨 후장식 화승총이면 장전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성능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냥 불랑기에 준해서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 2005-06-20 01:42:03
222.106.166.11
문제중년 후장식 화승총이란게 별거 아닙니다. 그냥 불랑기 작게 만든 수준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니. 저 위의 그림에서는 자총이라 된 부분에 화약과 탄을 장전해뒀다 모총에 꼽아주는 식이죠. 그러니 보통 화승총에서 약실 부분만 잘라내 가져다닌다로 보면 되겠죠. 2005-06-20 13:14:28
marion
문제중년 아무래도 장전과정이 좀 더 줄어드니 발사전체를 보자면 좋아지긴 합니다만 구조적 문제로 가스가 더 심하게 세어나올 경향이 커집니다. 특히 저 시대의 기계 공작기술을 본다면 믿음직하게 만드는게 좀 뭐해지죠. 2005-06-20 13:18:21
marion
문제중년 부가적으로 인간적인 면에서 한번 쏘고 따뜻해진 자총 부분을 뽑아내려면 좀 곤혹스러울 겁니다. 저 경우 그렇게 뽑기 좋게 생겨먹은 것도 아니죠. 손으로 잡고 빼내는 식이니 말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전체 무게가 무거워 진다는 것도 있긴 합니다. 2005-06-20 13:20:27
marion
문제중년 약실 쇳덩어리를 몇개 가져다녀야 하니 말입니다. 한두개야 용납가능하지만 수십개쯤되면 그렇죠. 게다가 이 쇳덩어리가 없어지면 재장전은 물건너 가는데다 이 부분의 제조까지 본다면 더 뭐해지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일회용이 될 수 있으니. 2005-06-20 13:23:57
marion
문제중년 그렇다고 이총 저총 어디나 꼽고 쓸만큼 규격화된 것을 만들기도 뭐하고. 또한 이 약실(자총) 부분이 발사 때 움직이지 않고 얌전하게 고정되어있어야 한다는 것도 만만찮은 부담입니다. 오늘날이야 저런건 저렴의 극치 염가판 총기 제조에 속하지만 저 때는 어렵겠죠. 2005-06-20 13:27:00
marion
신재호 위 그림에는 두개의 후장식 총이 나오네요. 위 그림 C가 조사정이 만든 후장식 총인 격전총(擊電銃)입니다. 중간에 1606년(?)에 제작됐다고 나오는 총은 하여빈이 그의 병법서적인 '병록'에 소개한 자모총(子母銃)입니다. 2005-06-20 16:56:17
etica13
신재호 격전총과 자모총은 둘다 불랑기 원리를 이용한 후장식 총이지만 조사정이 만든 격전총이 기술적으로 조금 더 진보된 것입니다. 격전총은 자총에 발사가스 누출을 방지하기 위해 조금 더 신경을 썼습니다. 2005-06-20 16:58:03
etica13
신재호 격전총은 점화를 시키는 용두도 나밀총처럼 사격후 자동으로 위로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2005-06-20 20:10:52
etica13
서봉덕 총에 장착하는 대검까지 있다니, 동아시아에 총검이 등장하지 못할 기술적 원인은 없는 듯 한데, 왜 끝~~까지 총검이 등장하지 않는 걸가요? 총알이 다 발사된 소총은 단병전에서 바로 둔기로 활용하는 재치는 있는데 말입니다. 2005-06-21 01:04:07
222.99.229.109
일전에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위에 소개된 중국의 소총을 보니, 어째 좀 석연치 않아집니다. 중국총들도 생각보다 엉터리는 아닌 것 같거든요. 2005-06-21 01:12:10
222.99.229.109
신재호 대포류를 제외하고 개인화기만을 본다면 위에 나오는 것들이 중국 자체적인 발전의 거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위 1635년 책에 나온다는 그림이 바로 일종의 수석식 총인 자생화총인데 중국 자체의 개인 화기 발달은 결국 여기서 끝납니다. 2005-06-21 01:46:44
etica13
신재호 청나라의 어제자래화창 계열 총 중 일부와 당격식수발총 같은 것들도 수석식 총인데 본질적으로 명나라 군기도설의 자생화총과 차이가 없습니다. 여하간 개인화기만을 볼때 중국은 17세기 전반의 무기가 19세기 초반까지 발전없이 거의 그대로 갑니다. 2005-06-21 01:49:12
etica13
신재호 더구나 유럽에서는 수석식 총이 출현한 이후에는 화승식 총은 사라지는데 중국에선 이런 세대교체가 결국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부 어용 총을 제외하고 일반 군대용 총은 여전히 화승식 총이 더 많았습니다. 2005-06-21 01:50:56
etica13
신재호 이런 격차는 서양에서 19세기 초반 percussion 방식이 도입된 이후 더욱 벌어집니다. 유럽에선 가장 늦은 나라를 기준으로해도 1700년을 기점으로 사라진 조총류의 화승총을 청나라는 19세기 초반까지도 보유했던 겁니다. 2005-06-21 02:05:14
etica13
신재호 청나라가 정치적인 판단하에 수석식 총의 보급을 제한했는지, 혹은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탓에 신무기에 대해 절실함을 느끼지못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여하간 이런 무기 수준의 격차가 결국 19세기부터는 되돌릴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집니다.
임란 당시에도 명군의 조총 무장비율은 21퍼센트로 일본군의 16퍼센트보다 높다는게 일본 인 시노다 고이치의 연구결과군요
총도 더 많고 아니 그건 아니죠 흠 가장 마노이온 때도 명군은 8만 8-9천이니 저 비율로 따져도 총 숫자는 적구료
갑주 무장수준도 더 좋고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임진왜란과 도요토미히데요시 라는 제목으로 임란 부분이 번역 되어 전자책으로 바로북에서 볼 수 있소 )에는
이것에 대해서 중국군의 사자는 가능한 한의 변명을 하였다. 그는 전갈을 전하고 난 뒤에 일본인의 언어이기도 한 중국 문자, 곧 한자로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를 평양성 안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보여 주었다. 아고스띠뇨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격앙했으나 이미 중국군의 사자는 자기가 원하던 것을 모두 보고 난 뒤였던 것이다.
사자가 돌아간 그 이튿날 아침에 해가 뜨고 나서 2시간 뒤에 사석포(射石砲)에 의한 위협사격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갖가지 북과 악기의 요란한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 사이로 적군은 어마어마한 대열을 이루며 공격해 왔다. 그 모양은 다음과 같았다.
제일 먼저 오는 전투병들은 모두 말을 타고 왔다. 그들이 탄 말은 평소에는 들판에서 무리를 지어 조용히 풀을 뜯어 먹는 온순한 동물이지만, 매우 크고 강건하였다.
병사들은 모두 몸에 적당한 두께의 강철로 된 갑옷을 걸쳤고, 마찬가지로 강철로 된 무릎바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을 타고 있어도 거의 발치까지 이르렀고, 신체의 전 부위가 매우 화려하고 튼튼한 장구로 덮여 있었다. 이 때문에 그때까지 가장 우수한 무기로 알려져 있던 일본군의 칼이나 창을 가지고도 그들에게 어떠한 손상도 가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또한 강철로 된 매우 좋은 투구를 썼는데, 그 중 몇 개는 일본에까지 보내졌다.
공격용 무기로는 그들이 사용하는 가장 좋은 무기인 활과 화살과 창, 그리고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도검 그리고 다수의 총포 부대를 사용하였다. 그들의 총포는 어떻게 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없이 소총을 쏘아댔지만 그로 인한 사상자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자를 건너기 위하여 폭이 넓고 잘 만든 사다리를 수레에 실어 왔는데, 필요한 때에 단지 수레에서 꺼내어 벽에 걸쳐 세우는 것만으로 충분하였다. 아고스띠뇨 자신과 다른 천주교도들도 말한 바이지만, 중국의 기병은 그 사다리를 이용해서 아주 손쉽게 성벽으로 오를 수가 있었다.
성벽은 안쪽이 낮았기 때문에 그들은 곧바로 성안으로 침입하였다. 각자에게는 임무가 할당되어 있어 누구 하나 타인의 임무에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병사들은 사다리를 걸치고, 다른 병사들은 부상자를 운반하고, 또 다른 병사들은 화약과 포대(砲台)를 등에 지고서 운반하거나, 혹은 몇몇은 궁수에게로 화살을 날라주고 있었다. 도망치거나 자신의 담당 임무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자에 대해서는 사형(死刑)으로 다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공격할 때나 적에게 공격당할 때에도 초승달 모양의 전진(戰陣)을 펼치면서 적을 포위하고서는
이라고 되어있소
거기에 일본에는 없는 대규모 포병 1537년에만 3800문의 불량기포 주조 1591년보바이의 난 때는 150문의 중포부대운영 (당시 유럽기준으로는 대규모 포병) 망원경으로 목표조준도 유럽보다 빨리 시작했다고 크리스 피어스는 말하는 구료
거기엔 일본엔 없던 진짜 기병부대의 운용 (많은 수의 몽고 여진인 이 명군에서 복무 , 1570년대엔 젊은 누르하치도 이성량 네 -이여송의 부친- 부대에서 복무 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ㄱ소)
그럼에도 적극적인 전투의도는 없던 명군은 많은 안습하 ㄴ모습을 보이오
그림은 명대 서적에들어가 있는 기병대 삽화요 명군을 그린건 아닌데 모델은 명군 기병이라 하오
1593년 평양성 전투 당시 명군이 각종 화포를 사용하여 왜군을 제압하고 평양성을 탈환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서 조선의 군신들은 명군의 화포를 경이롭게 생각하게된다.
평양성을 공격할 당시 명군의 작전계획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성문을 포위한 뒤 땅에 여러겹으로 장애물을 깔고 성벽 주위에 멸로포, 호준포 등 각종 화포를 배치한 뒤 병력을 늘어세워 왜군이 성을 넘어 도망가는 것을 막은 다음 독화, 신화등 화약과 대장군포등을 여러곳에서 발사하여 성안을 강타하는 방식이었다. 또 밤에는 독화약을 쏘아 왜군이 호흡을 통해 독기를 들여마시게 한 뒤 명화비전을 쏘아 불을 지르고 왜군이 불을 끄는 사이에 다시 화포를 발사하여 제압한다는 것이 명군 작전의 골격이었다.
한편 평양성 전투를 겪은 뒤 명군은 왜군의 조총이 지닌 위력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이후 송응창은 왜군과 교전할 때는 그들의 진영으로부터 400보이상 떨어져 먼저 대장군포를 발사하고 그들의 조총탄환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려 병력을 진격시키라고 작전을 지시하였다. 명군 지휘부는 성을 공략하는데는 대장군포가 가장 요긴한 화기라고 파악하여 출병 이전부터 그것을 확보하여 조선으로 운반해오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즉 조총의 위력때문에 왜군에게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을 화포, 그 중에서도 대장군포를 이용하여 타개하려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명군 지휘부는 자신들이 보유한 화포를 신기(神器)라고 부를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실제 명군 화포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선조의 행재소가 위치해 있었던 숙천에서도 화포발사시의 굉음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어 이원익등 신료들은 평양성 탈환 이후 선조를 면담했던 자리에서 전란이 끝난 후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대상으로 명의 화포제도를 꼽았다.
화포와 화약이외에도 조선이 관심을 가졌던 명의 군사관련 기예로는 등패, 낭선, 당파, 장도 등의 병기를 제작하고 그를 다루는 방법이었다. 당시 조정은 명의 남병들이 검술과 화기술에 능숙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남병 지휘관인 낙상지(駱尙志)등에게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또 화포와 관련된 기술이외에 화살에 바르는 독을 제조하는 방법도 알아내려했으나 명군측에서는 이를 철저히 비밀로 붙이고 가르쳐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선조는 막대한 상을 내걸고 이를 알아내도록 채근하기도 한다.
***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비 한국학 연구총서 14)에서 부분 인용한 글입니다. ***
명군 가운데서도 특히 민폐를 심하게 끼치는 부류는 북병이었다. 남병은 절강, 복건 출신의 화기수와 검술에 능한 보병들이 대부분으로 명에서 왜구를 방어하는데 주로 동원되었고 북병은 광동, 요녕 출신의 기병들로 구성되어 호병(여진,몽골)들을 방어하는데 능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북병들은 대체로 성질이 난폭하고 꺼리는바가 없으며 조선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약탈이 극심하여 그들이 지나는 길은 텅비어버린다고 할 정도였다.
1598년 2월 울산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도주하던 명군은 군기가 풀어지면서 난병으로 돌변한다. 제독 마귀 휘하의 선부, 대동 출신 북병들은 말먹일 풀을 구한다는 명분
으로 민가에 난입하여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는 바람에 부근 30,40리의 촌락이 모두 비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북병 가운데서도 달자(澾子)라고 불리는 여진족 출신 기병들은 조선인을 만나면 목을 벤뒤 머리털을 깎아 왜군이 수급인양 가장한다고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ㄷ다.
또한 남병과 북병사이에는 알력이 있어서 쉽게 화합하지 못하였으며 실제 남병계통의 황응양(黃應暘)등은 제독 이여송을 비난하며 그가 요동출신이기 때문에 살육을 즐긴다고 매도할 정도였다. 군량을 지급받을 때에도 남병은 군기를 유지하여 난잡하지 않지만 북병은 그렇지 못하여 폐단이 극심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또한 당시 북병은 기병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군량이외에 말 먹일 풀과 콩까지 공급해야 했기에 지원 과정에서 남병에 비해 훨씬 부담을 느꼈다.
이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북병은 민폐만 끼칠 뿐 실제 전투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못하는 백해무익한 존재로 여기고 이후 명에 증원군을 요청할 때 주로 남병을 보내달라고 하게된다.
조선
우리 나라가 중국에 자문을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이 군대를 주둔시키는 문제를 의논하여 알리는 일입니다. 이달 1일에 본인은 뒤처리를 위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을 확정하여 알려 달라는 여러 대인(大人)의 요청을 직접 받았습니다. 본인이 다시 생각해 보면 저들 왜적이 우리 나라를 7년간이나 유린하였는데 만약 중국 군사가 구원해 준 힘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그들을 죽이고 물리쳐 오늘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난해에 이들 적이 물러가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는 이미 다 허물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중국 군사가 철수하여 돌아가면 왜적은 당장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이는 존망과 사생(死生)이 관계된 일로서 본인이 아무리 미련하지만 어찌 자신에게 절실한 이해가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우리 나라 당장의 상황으로 보면 반드시 중국 군사의 힘을 빌어 끝까지 보전을 받아야겠으니 요충지에 주둔하는 일로 말하면 3만 명의 병력도 적은 듯하고 1∼2만을 추가하여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 실로 우리 나라의 큰 다행이고 본인의 소원입니다.
《 선조 032 25/11/11(정묘) / 비변사가 중국군 장수와 주고 받은 왜적의 정세 및 조선의 형세에 대한 문답 》
중국에서 군사를 내어 구원하려고 왜의 정세와 우리 나라의 형세를 조목으로 물었다. 비변사가 조목에 따라 진술하였는데, 그 문답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 문:왜노의 분명한 수효는 얼마이며, 어떤 정세이고, 어디에 잠복하고 있는가?
답:왜선(倭船)이 처음 부산(釜山)에 도착한 것은 4백여 척이었으며, 또 뒤따라 도착한 것이 7∼8백 척이다. 그들의 개미처럼 흩어지고 멧돼지처럼 내달아 7도(道)를 나누어 점거하고 있다.
1.문:왜선은 얼마나 되며, 현재 어느 하구(河口)에 정박하고 있는가? 평양에는 현재 얼마나 있으며 얼마나 파괴되었는가?
답:왜선은 길을 나누어 전라도를 침범했는데 본도의 수사(水使) 이순신(李舜臣) 등이 전후 일곱 차례 싸워서 4백여 척을 불태워 격파하였고, 목을 벤 자 이외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부지기수이다. 현재 해항(海港)에 정박하고 있는 것은 4∼5백 척이며, 우리 나라의 어선을 약탈한 평양에 남아 있는 적선은 겨우 수십 척이다. 왜인들의 수비가 매우 엄하여 우리 군사가 밤을 타 몰래 가서 몇 척을 파괴했다.
1.문:팔도의 인심은 어떠하며, 구주(舊主)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의사(義士)들이 호응하여 나라를 회복하기를 도모하는가?
답:본국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임금과 백성들이 오랫동안 황제의 은혜를 입어 사람들이 전쟁을 모르고 지낸 지 2백여 년이 되었다. 갑자기 적의 화란을 만나 군정(軍情)이 놀라 흩어져 풍문만 듣고서 붕궤되었다. 근일에는 각도의 의사들이 서로 모여 군대를 이루어 민가에는 남아 있는 장정(壯丁)이 없다. 선비들이 분발하여 적을 죽이기로 뜻을 품어 모두 적과 싸우다 죽을 것을 생각하고 있다.
1.문:왕경(王京)의 왜노는 얼마나 되며, 평양의 왜노는 처음 얼마였으며 지금 얼마나 더 늘었는가?
답:경성에 남아 있는 왜적은 혹 1만여 명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수천 명이라 하기도 한다. 아침에 동문(東門)으로 나왔다가 저녁 때는 서문(西門)으로 들어가고 이쪽 군사를 저쪽에 옮겨 보태 사람들이 헤아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평양의 적도 그 방법을 쓰고 있는데, 처음 강변(江邊)에 도착한 행장(行長)·의지(義智)·조신(調信) 등이 각기 1천여 명을 거느렸다. 우리 군사가 강을 건너 습격하자 조신의 1군은 거의 사살되었고 나머지 3백 명만 경성으로 돌아갔는데, 평양을 함락시킨 뒤로 또다시 군사를 증가시켰다.
1.문:왜장(倭將)은 몇 명으로 성명(姓名)은 무엇이며, 현재는 몇 명이며 죽은 자는 몇 명인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은 현재 어디 있으며, 요승(妖僧) 현소(玄蘇)는 어떤 환술(幻術)을 지녔는가? 우리 중국인으로서 그들에게 부림을 받고 있는 자의 성명은 무엇인가?
답:관백 평수길은 대마도(對馬島)에 와 머물러 있고, 기집 재상(岐集宰相) 평수충(平秀忠)이란 자는 처음 경상도에 있었는데 전사하였으며, 가등 주계두(加藤主計頭)란 자는 함경도에 있으며, 흑전 갑비수(黑田甲斐守)란 자는 황해도에 있으며, 봉두하 하파수(峰頭賀河波守)란 자는 충청도에 있으며,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란 자는 개성부에 있으며, 삼 일기도진(森壹岐島津)이란 자는 강원도에 있으며, 모리요원(毛利耀元)이란 자는 전라도에 있으며, 우시비전 재상(羽柴備前宰相) 평수가(平秀家)란 자는 대장(大將)으로 경성에 있는데,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그 안에다 겹으로 담장을 치고 그 가운데는 누(樓)를 지어놓았다. 우리 백성들을 모두 목책 밖으로 내보내고서 자기 무리들만 살고 있다
또 소서 섭진수(少西攝津守)·평행장(平行長)·평의지(平義智)·평조신(平調信)·평호 도주(平戶島主)란 자는 모두 평안도를 주관하면서 평양에 있는데 거느린 적병의 수가 많고 가장 정예하여 여러 왜적들이 따르지 못하므로 선봉을 꺾거나 진을 함락할 때는 모두 이 진(陣)을 힘입고 있다. 지금 만약 아군이 먼저 평양을 꺾는다면 파죽(破竹)의 형세일 것이다. 왜승(倭僧) 현소(玄蘇)란 자는 평양에서 종군하고 있는데 별다른 기술은 없고 중국의 문자(文字)를 약간 해득하기 때문에 항상 군중에 있게 한다. 중국인으로 그들에게 부림을 당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겠고, 다만 강 통사(姜通事)란 자가 왕래하면서 통역하고 있다.
1.문:본궁에 기모(奇謀)·이능(異能)을 지닌 검객(劍客)·모사(謀士)로서 군사 일을 의논할 자와 내응(內應)할 자가 있는가?
답:본국은 검술을 익히지 않고 또 이능을 가진 술사도 없으나 집집마다 겹벽을 만들어 몰래 병기를 숨겨 놓고 외병(外兵)이 오기를 기다려 일시에 일제히 일어나기로 약속하고는 주야로 천병(天兵)이 나와 구원하면 향응(響應)할 것을 바라고 있다.
1.문:본국에 현재 있는 양초(粮草)는 얼마나 되며 어디에 있는가?
답:평양에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전쟁을 겪지 않아서 연도의 각 고을에 각기 양초를 비축하여 놓았는데 합계가 쌀 5만 석, 황두(黃豆) 4만여 석이고 시초(柴草)도 거기에 준한다.
1.문:본국에는 현재 병마(兵馬)가 얼마나 되며 어디에 주둔하고 있는가?
답:적이 국내에 두루 흩어져서 각자 둔처(屯處)하고 있기 때문에 각도(各道)의 장관(將官)이 각기 수천 명씩 거느리고 본도(本道)를 지키고 있다. 오직 전라도만은 아직까지 온전하기 때문에 병사(兵使) 최원(崔遠)이 군사 4천 명을 거느리고 가을부터 근왕(勤王)하고 있는데 의병 3천 명과 함께 모두 경기의 강화부(江華府)에 있으면서 경성의 탈환을 도모하고 있다. 평양에는 본도의 군사를 초발(抄發)하여 3진(陣)으로 나누어 감사와 병사가 함께 4천 명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에 주둔하고 있고, 우방어사(右防禦使)가 1만 명을 거느리고 그 남쪽에 주둔하고 있으며, 좌방어사(左防禦使)가 2천 명을 거느리고 그 동쪽에 주둔하고 있다.
【원전】 21 집 566 면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일본은 포르투갈식조총.
명나라는 터키식 화승총..
선조 이새퀴..조금남 정신차렸어도 대포.화승총등으로 왜넘들을 박살낼수있었을텐데..
위사진은 명나라병사의 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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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 임란 후에 중국기술자가 가르쳐 준다니까 님하 감사를 연발하죠. 일본쪽은 항왜들을 통해서 배우고요. 220.76.146.109 2007/01/06 x
加藤淸正 이미 조총에 대한 기술은 16세기 중반에 극동지역 국가 상당수가 알긴했지만 서도 조총 대량운용이 되는 시기는 임진왜란이 있고나서 부터였다고 보고있삼 211.199.5.41 2007/01/06 x
조선의곰객 명나라는 후장식 소형 불랑기 소총에 총검까지 개발했음. 오뢰신기같은 연발총이나 태창같은 대형총도 실제로 쓰였던 물건이고. 화기 운용만 전문적으로 하는 신기영 군사 수가 7만 5천. 222.236.243.67 2007/01/06 x
명성조정력제 명나라 일반보병군복에 대한 좋은자료ㄳ 혹시 출처가 '무비지'인가요? 203.170.105.28 2007/01/06 x
대명국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발견했다. 명나라에 관심 많거든..명나라삼안총으로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위의 군복이나 모자가 저확하다고 봐..우리드라마에서는 군모가 거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같은 복장이나 중국드라마에서는 명나라병사 모자는 거의 다 위와 같이 벙거지모자를 쓴다. 211.216.206.166 2007/01/06 x
거서 임란 때 대포 하나 없던 일본, 겨우 조총만 있었으나 우리나라에는 총통이 있었으며 그 종류도 수십가지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정거리가 300m 짜리 총통도 있었으며, 오늘날의 박격포와 수류탄의 장점을 겸한 총통도 있었습니다. 무기류에서는 절때 뒤떨어지지 않았으나 병법이 전수되지 지도자가 중앙에서 내려와 현지 사정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너무 짧았으며, 파악하도 하기 전에 병법에 밀려서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그 군사를 다루는 병법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지요. 쉬운 예로 스타크레프트에서 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121.139.147.117 2007/01/06 x
명성조정력제 저는 옛날에 명나라 일반보병들의 군복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죠. 일반 사극(직접 본건 아니지만), 사진들을 보면 저 목판화처럼 복원한건 너무 드물더군요. 맨앳암즈의 삽화는 저 목판화에 충실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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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3331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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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펌글 모음] 명나라 군대 2
명의 군제 변천
명사(明史)에는 병지(兵志) 4편이 있는데, 이것을 읽고 군제와 관련된 부분만 나름대로 정리한 겁니다.
위소제(衛所制)
명의 기본적인 군제로 1개 군(郡)을 소(所), 여러 군을 합쳐 1개 위(衛)로 편성합니다.
위의 병력 규모는 5천 6백 명, 천호소가 1천 1백 2십 명, 백호소가 1백 2십명입니다.
이들을 모두 합쳐 5개의 군(軍)으로 나누고, 5군도독부가 이를 통제합니다.
이 5개의 군은 각각의 군마다 이른바 지금의 수도권 부대에 해당하는 위와 각 지방의 위로 크게 구분합니다.
지방의 위는 다시 각 성(省)의 도사(都司)에게 예속됩니다.
이 5군과 달리 황제의 친위대인 상12위(上十二衛)가 따로 있으며, 유명한 금의위(錦衣衛)도 이 12개의 위에 속합니다.
홍무제 때 통계에 의하면 전국의 도사가 17개, 유수사(留守司) 1개, 위가 329개, 수어(守禦)천호소가 65개라고 합니다.
삼대영(三大營)
이름 그대로 5군(五軍), 삼천(三千), 신기(神機)라는 3개의 주요부대를 말하는 것인데, 이들이 중앙상비군의 핵심입니다.
(5군은 앞의 5군도독부와는 다른 것입니다.)
원래 홍무제때 48개의 위가 남경에 있었고, 이를 영락제가 다시 72개로 늘렸으며, 이것을 보병과 기병에 따라 중군(中軍), 좌액(掖), 우액, 좌초(硝), 우초의 다섯으로 나눈 것이 5군입니다.
중도(中都), 산동(山東), 하남(河南), 대령(大寧) 지역의 병사들이 해마다 번을 나눠서 담당합니다.
삼천영은 변방지역에서 항복한 장정 삼천명을 가지고 기병부대를 만든데서 유래합니다.
신기영은 남쪽의 교지(交?)지역을 정벌하면서 얻은 화기운용법을 가지고 만든 화기부대입니다.
또한 5군은 진법, 삼천은 순찰, 신기는 화기를 훈련하는데 각자 다른 영의 훈련을 감독하기도 합니다.
단영제(團營制)
이것은 정통제가 지휘하던 50만 대군이 토목보의 변으로 전멸하자 병부상서 우겸(于謙)이 북경의 방어를 위해 도입한 제도입니다,
우겸은 북경에 남아있던 삼대영의 병사를 시험해서 10만 명을 선발해 10개의 영으로 편성합니다.
즉, 보병, 기병, 화기의 세가지 병과를 10개의 영에 분산 배치 시킨겁니다.
각 영에는 도독 1명, 호두관 1명, 도지휘 2명, 파총 10명, 영대 1백 명, 관대 2백 명을 두었습니다.
또한 삼대영의 도독중 1명을 총병관으로 임명하고, 내신(內臣 환관)이 감독하며, 병부상서나 도어사 1명이 제독을 맡도록 합니다.
또한 선발하고 남은 병사들을 원래 소속된 삼대영으로 돌려보내자 사람들은 그 영들을 '노인들의 집'(老家)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즉 기존 삼대영은 쓸모없는 병사들만 남았다는 뜻이죠.
이들을 북경의 아홉 성문에 배치하고 우겸도 덕승문(德勝門)의 병력을 직접 지휘해서 결국 북경의 수비는 성공합니다.
그러나 잡혀갔다가 돌아와 상황으로 물러난 정통제가 경태제가 죽고 나서 다시 복위하면서 우겸을 죽이고 단영제도 폐지됩니다.
(나중에 정통제는 우겸을 죽인 것을 후회합니다.)
다음에 성화제가 즉위해서 재건과 폐지를 반복하는데, 또다시 4무(武), 4용(勇), 4위(威)의 12영을 만들어 12명의 후(侯)가 지휘하고 각각 도지휘가 보좌하며, 역시 환관이 감독, 훈신(勳臣)이 제독을 맡습니다.
선발하고 남은 병력은 각종 공역(供役)을 시킵니다.
병력의 규모는 7만 5천여 명.
그러나 이때 실질적으로는 환관인 왕직(汪直)이 제독이 되어 군대를 모두 장악합니다.
일찌기 영락제가 자신이 신임하던 환관에게 군대를 감독하도록 한 것이 드디어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홍치제가 즉위하자 도어사 마문승이 제독에 임명됩니다.
그는 성화제 말기부터 군대가 공사에 동원된 것을 그만두게 청하지만 허락되지 않습니다.
또한 각 영마다 보, 기병 2천명을 선발해 돌발사태에 대비하고, 5일간 훈련하는 옛 제도를 복구시키자는 그의 건의는 채택됩니다.
양관청제(兩官廳制)
자잘한 것을 건너뛰어서 드디어 무종(武宗)의 묘호를 받은 정덕제가 즉위합니다.
당시 통계로는 12영의 쓸만한 군사가 6만 5백여 명, 노약자가 2만 5천여 명이었습니다.
당시에 환관 장영(張永)이 경군(京軍)을 지휘해서 반란사건을 처리하면서 다시 환관들이 군대를 장악합니다.
그때 마침 도적떼가 생기자 변방지휘관인 강빈(江彬)등이 기회로 여기고 변방의 기병으로 4위(衛)의 부대를 편성해 북경에 두게 합니다.
이들의 이름을 외4가(外四家)라고 부릅니다.
이때 기존의 12위와 새로 창설한 4위의 선발한 병력을 서관청(西官廳)에서, 정덕 원년에 소(所)에서 선발한 관군(官軍)을 동관청(東官廳)에서 훈련시키는 이른바 양관청(兩官廳) 제를 도입합니다.
이때부터 과거 삼대영처럼 12영이 다시 '늙은이의 집'으로 불립니다.
이때에도 병사를 각종 공사에 동원하는 폐단이 심해서 경영(京營)의 기반이 계속 무너집니다.
당시 급사중(給事中) 왕양좌(王良佐)가 명령을 받고 군적(軍籍)을 조사하니 장부상의 기록은 38만 명이지만, 실제는 14만여 명, 그 중에 쓸만한 병력은 2만여 명에 불과합니다.
다시 건너뛰어 세종 가정제가 즉위합니다.
이때 병력의 정원은 10만 7천 여명이지만, 실제로는 그 절반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자 병부상서 이승훈(李承勳)의 건의로 병부와 상의해서 노약자를 제외시키고 장정으로 대체해서 12만 명을 다 채우게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공사는 점점 많아지는데다가,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소위 빽 있는 사람 대신에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대신 채워넣습니다.
갑자기 변방에서 경고가 전해지자 각 영을 점검하니 겨우 기병 3만을 뽑아 이를 다시 동,서관청으로 부릅니다.
가정 29년에 알탄(명사에는 엄답(俺答))이 침공하자 병부상서가 각 영을 점검하니 불과 5,6만 명에 불과하고, 이들을 이끌고 가는 도중에 전부 도망가 버려서 결국 병부상서가 처형당합니다.
결국 여러 신하들의 건의로 12영, 양관청제 모두 폐지하고 다시 삼대영 체제로 바꾸고, 다만 삼천영은 신추(神樞)영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병력은 5군이 6만여명, 신추와 신기영이 각각 4만 명인데 이 4만명은 북경 인근의 여러 성(省)에서 추가로 모집한 병력을 합한 것입니다.
오군은 대장 한 사람 부장 2명, 좌,우,전,후의 참장(參將) 4명, 유격(游擊) 4명으로 구성되고, 신추, 신기 2영은 각각 부장 2명, 좌격(佐擊) 6명이 지휘합니다.
그 외에도 북경주변의 각 위를 삼대영에 배속시킵니다.
그 후에도 숭정제까지 여러 잡다한 것들이 바뀌지만 별로 중요한 것은 없어서 이만 줄일까 합니다.
......
명사(明史)를 시간이 있을때마다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대충 훝었는데, 해석이 틀린 것도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열전 중에 장거정이나 척계광 등은 대충 보았는데, 장거정은 환관인 풍보와 결탁한 것으로 나오더군요.
그의 사후에 만력제가 벼슬을 깎아내린 것도 바로 이 풍보와 연관된 것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척계광이 몽골족에 맞서 북방경비를 담당한 부대를 훈련시킬 당시 지역특성에 맞는 소규모로 구성된 비슷한 단위부대를 창설했으며 동시에 만리장성을 보강하고 강화하는 공사도 진행했다.
척계광은 마차에 대포를 탑재해서 방어를 겸비한 이동요새로 만들어 북부초원의 기병들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운용한적이 있는 또다른 장수 유대유가 발명한 전술도 자신의 부대에 도입한다.
척계광이 지휘하는 10만 군대는 대부분 강철 갑주와 투구로 무장했으며, 크게 4개 부대로 나누어졌다.
1) 전투용 마차부대
2) 보급용 물자를 담당한 마차부대
3) 보병부대
4)기병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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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용 마차부대와 보급담당 마차부대는 모두 중포와 소형포로 무장했다.(당시 중국인들은 포르투갈제 후장포를 본따서 만든 대포를 사용했다.)
전투용 마차부대와 보급 마차부대에는 화기를 지니지 않은 '특공대"가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마차를 커다란 이동 방벽처럼 사용했다. 특공대는 8명으로 구성된다.
A) 장도와 (일본 왜구들이 사용하던 노다치를 본따서 만들어진 1.95미터길이의 대형 양손검) 조총으로 무장한 병사 4명
B) 등패와 만곡도를 휴대한 병사 2명 (전투마차 부대에 소속된 병사는 화전을 휴대했으며, 보급부대 소속의 병사는 조총을 휴대했다.)
C) 당파와 함께 '화전"으로 무장한 병사 2명 (로켓 추진식 화살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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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마주치게 되면 마차들은 직사각형 대열로 진형을 갖추고 모든 각개병사들은 마차를 방호벽으로 삼아 몸을 숨긴 후 전투를 시작한다. 먼저 원거리에 있는 몽골족에게 대포와 조총을 발사하고 그다음 화전을 쏘아댄 후 특공대는 발사무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마차 방벽밖으로 나와서 대열을 갖춘 후 장도와 만곡도, 등패와 함께 당파를 사용해서 근접 백병전을 벌인다.
보병부대의 경우 조총수와 "근접 백병전용 부대"가 동일하게 편성된 2개 부대로 나누어진다.(척계광은 근접전 전문병사들을 살수 -殺手 - 라고 불렀다.) 각 단위부대의 병력은 보통 10명으로 구성된다. 조총수는 모두 장도를 부무장으로 휴대했으며, 살수들의 무장은 아래와 같이 나누어진다.
1) 만곡도와 등패
2) 낭선(부무장으로 한손용 만곡도를 휴대)
3) 당파 (부무장으로 "화전'을 휴대)
4) 장창(부무장으로 활과 화살을 휴대)
5) 미늘창 - 강철로 된 작은 양날이 붙어있는 무거운 창(부무장으로 합성궁과 화살을 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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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대는 3개 부대로 나누어진다; 좌익, 중간, 우익. 좌익과 우익의 예하 단위부대는 아래와 같은 무기를 갖춘 병사 10명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장도(조총도 휴대함)
2) 위쪽에 총신을 올려놓은 도끼 - 원나라부터 명나라 초기까지 사용된 화기로 총을 쏘고나면 병사는 도끼를 사용해 백병전을 벌일 수 있다.
3) 당파(화전도 휴대)
4) 미늘창(합성궁과 화살을 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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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을 담당한 기병대는 대부분 경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에 적합한 장비로 무장했다.
중앙부대는 대대급 전투력을 갖춘 3개 중대로 포함되었으며 그 중 1개 중대는(역시 최소 단위부대 병력은 10명이었다.)아래와 같은 무기들로 무장했다.
1) 장도를 휴대한 병사 8명 (부무장으로 조총 휴대)
2) 당파를 휴대한 병사 2명 (부무장으로 화전을 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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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2개 중대는 아래와 같이 무장했다.
1) 한손으로 쓰는 만곡도로 무장한 병사 4명 (부무장으로 합성궁과 화살 휴대)
2) 적 기마병을 끌어내릴 수 있도록 창날 양쪽에 갈고리가 달린 창으로 무장한 병사 4명 (부무장으로 합성궁과 화살 휴대)
3) 당파로 무장한 병사 2명 (부무장으로 화전을 휴대)
1. 우왕좌왕하는 원정군
15세기, 명 제국과의 교역은 막대한 부를 낳았기 때문에, 몽골 고원의 패자인 오이라트 부(몽골 부족 중의 하나)의 에센은 명에 교역을 확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통(正統) 14년(1449년) 여름, 무역 교섭이 결렬되자 에센은 지배하에 있는 몽골 각 부족의 병마를 동원하였고, 4개의 경로를 통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은 서녕후 송영(宋瑛)을 대동병마총독으로 임명하고, 증원군으로서 평향백 진회(陳懷), 부마도위 정원(井源)이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을 대동(大同, 산서성 대동시)으로, 도독 왕귀(王貴), 오극근(吳克勤)이 이끄는 1만 5천명의 병력을 선부(宣府)로 파견하였다.
침공을 알리는 보고가 잇따르자, 명의 최고 실력자였던 사례태감(환관) 왕진(王振)은 정통제(正統帝, 朱祁鎭)에게 친정을 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병부상서 광야(鄺埜), 이부상서 왕직(王直) 등은 위험이 큰 친정을 중지할 것을 강하게 간언하였지만, 황제는 왕진의 의견에 따라 친정을 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친정을 위하여 50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대군이 편성되었다. 왕진은 대군으로 위협하면 싸우는 일 없이 에센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센 자신이 이끄는 오이라트의 주력은 대동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 선봉대는 묘아장(猫兒庄)에서 참장 오호(吳浩)를 패사시켰다. 패전 소식을 들은 서녕후 송영은, 무진백 주 면(朱冕), 참장 석향(石享)과 함께 양화구(陽和口, 산서성 양고북)에서 에센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7월 15일, 명군은 군대를 감독하는 태감 곽경(郭敬)의 잘못된 지휘로 인해 대패하여, 송영, 주면은 전사하고 전 군이 거의 전멸하였다.
양화에서의 대패 소식을 듣고서도 왕진은 친정을 강행하였고, 7월 16일에 다수의 대신 및 차관 급의 고위 관료들을 포함하는 대군이 북경을 출발하였다. 종군하고 있던 병부상서 광야, 호부상서 왕좌(王左)는 원정을 중단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지만, 왕진은 이들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이들을 처벌하였다. 28일 원정군은 선부를 지나 양화에 도달하였다. 그 곳에서 왕진 이하의 장병들이 본 것은, 명군의 시체가 들판을 가득 뒤덮고 있는 광경이었다. 적군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를 알고서 겁에 질린 왕진은, 장성을 넘지 않은 채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동으로 들어간 뒤, 북경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 경로에 대한 최초의 안은 적에게 추격당하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철수하기 위해, 울주(蔚州)에서 자형관(紫荊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왕진의 고향이 울주였으므로, 왕진은 황제를 자택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 안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고향의 한 해 수확이 대군의 행군에 의해 짓밟힐 것을 두려워한 왕진은, 철수 경로를 선부에서 거용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변경하고 말았다.
2. 토목보의 변
8월 10일에 명군이 선부에 도착할 무렵, 에센의 군대는 명군의 후미를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명에서는 몽골 출신의 용장인 공순백 오극충(吳克忠), 도독 오극근(吳克勤) 형제를 파견하여 후위 부대로 삼았다. 오씨 형제는 분전하였지만, 에센의 군대를 격퇴하지 못한 채 전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기병 5만 명을 이끌고 후위 부대를 증원하러 가고 있었던 성국공 주용(朱勇), 영순백 설수(薛綬, 몽골 출신의 용장)의 군대는, 주용이 무모하게도 경솔히 진격하였기 때문에, 에센이 요아령(鷂兒嶺)에 배치시켜 둔 복병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14일, 황제 일행은 토목보(土木堡, 하북성 회래 서북쪽 약 10Km 지점)로 들어갔다. 주력을 회래성(懷來城)에 배치하여 오이라트의 진격을 차단한다는 것이 명의 작전이었지만, 왕진은 치중(輜重) 천여 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점을 이유로 들어 토목보에 머무르면서 치중을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광야는 황제 일행을 안전한 거용관으로 먼저 보내는 안을 주장하였지만, 왕진은 「썩은 유학자가 어찌 군대의 일을 말하는가! 두 번 다시 허튼 소리를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노성을 지르면서, 토목보 주둔을 강행하였다.
토목보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은 완전한 실수였다. 명군은 그 곳에서 오이라트 군에 의해 느슨하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토목보에는 대군을 먹일 수 있을 만큼의 물이 없어서 우물을 6m 가까이 팠는데도 물이 나오지 않았고,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강은 이미 오이라트에 의해 제압되어, 명군은 갈증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15일, 에센은 사자를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하였다. 명에서는 즉시 강화를 허가한다는 답서를 사자에게 주었다. 화평이 성립된 것으로 오해한 왕진은 전진 명령을 내렸지만 갈증과 피로에 지친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대군은 대열을 흐트러뜨린 채 물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채 2Km도 가지 못하였을 때 몽골 기병들이 나타나서 「갑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사방에서 습격을 가하였다. 명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고, 저항하는 자는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처럼 되어 죽었다. 황제는 친정군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말에서 내려 혼자 땅바닥 위에 앉은 채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왕진은 「썩은 유학자」만큼의 군사적인 식견도 없다는 점을 증명하고서 혼란 중에 죽게 되었다.
명군의 장병의 사상자는 수십 만 명에 달하였고, 고위 관료로서 사망한 자는 영국공 장보(張輔)를 필두로 하여 50명 이상에 달하였으며, 50만 대군은 소멸해 버렸다.
명군의 패인은 군사적인 재능이 없는 왕진이 총지휘를 맡아서 잘못된 작전 행동을 반복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당시 황제를 수행하고 있던 고위 관료 중의 한 명인 영국공 장보는, 비록 고령이었지만 당시 최고의 명장으로서 누구나 인정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보는 예전부터 왕진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왕진은 그에게 지휘를 맡기는 건 고사하고 작전에도 전혀 참가시켜 주지 않았다.
또 하나의 패인은, 명군이 화기를 비밀 병기로 간주하여 병사들에게 화기 훈련을 충분히 시키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토목보에서는 화기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대량의 대포, 총, 화전(火箭)이 제대로 쓰이지도 않은 채 버려졌던 것이다.
3. 북경의 혼란
토목보에서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북경의 명 정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오이라트의 대대적인 침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남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는 자까지 나왔다. 이 때 「남천(南遷, 남경으로의 천도)을 말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경사(京師, 북경)는 천하의 근본이니 한 번 옮기게 되면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북경을 사수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 이가, 바로 병부시랑(국방차관) 우겸(于謙)이었다. 감국 성왕(郕王), 황태후, 그리고 신하들 중 최고위인 이부상서 왕직이 사수에 찬성하였고, 이들은 일치하여 북경 방위의 총지휘를 우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역사에 만약(if)이란 금물이지만, 토목보 전투 직후 북경에는 10만 명을 밑도는 장병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이때야말로 에센에게 있어서는 북경 침략의 최대의 호기였다. 하지만 에센은 북경이 아닌 변경의 요충지로 향하였고, 황제를 이용하여 그 곳들에 무혈 입성하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곳을 지키는 장수들은 성문을 열지 않았고, 성문을 연 요충지는 없었다. 에센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였고, 우겸은 북경 방비를 재조직하기 위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4. 북경 방위 체제의 재건
병부상서(국방대신)로 승진한 우겸은 우선 최대의 과제인 군대, 즉 경영(京營, 북경 주둔군)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북경·남경·하남의 비조군(備操軍), 산동과 남방 연안의 대(對) 왜구군, 강북 및 북경 각 부의 운량군(運糧軍, 군량 운송 부대) 등을 북경으로 집결시키고 훈련을 실시하였다. 등무칠(鄧茂七) 토벌에 임하고 있던 영양후 진무(陣懋)가 이끄는 군대도 불러들였다. 북경의 병력은 10만 명을 밑돌고 있었지만, 재건된 병력은 20만 명을 넘었다.
재건된 대군을 재무장시키는 데에는 많은 양의 무기가 필요하였다. 무기 생산을 관할하는 공부(工部)에서 증산에 임하는 한편, 남경에 저장되어 있던 무기의 3분의 2를 북경으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토목보 부근에 버려져 있던 무기를 회수하도록 하였다. 토목보에서 회수된 무기만 하더라도 투구 9,000개, 갑옷 5,000벌, 신창(神槍, 화창[火槍], 화염방사기) 11,000정, 신총(神銃, 화총[火銃]) 2만 정, 신전(神箭, 화전, 로켓 화살) 44만 개, 화포 800문에 달하였던 것이다. 기병에 대한 명군의 비장의 수단은 화기였고, 우겸은 북경에 대량의 화기를 긁어모아 두었다.
대군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 확보도 필요하였다. 통주(通州)에는 경영에서 1년간 쓸 군량이 비축되어 있었기에, 이것을 북경으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토목의 변에서 다수의 고위 장수들과 관료들이 전사하여 지휘관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우겸은 도독 석향을 발탁하여 무청백으로 임명하여 경영의 지휘를 맡게 하는 등, 유능한 인물들을 다수 발탁하였다. 그 외에도 면직되어 있다거나 투옥되어 감금 중에 있는 장군들을 사면하여 재기용하기까지 하였다.
우겸은 당면 과제였던 북경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도독 손당(孫鏜), 위영(衛穎), 장월(張軏), 장의(張儀), 뇌통(雷通)을 북경의 성문을 지키는 요충지에 포진시켰다.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급사중 왕(王)이 이들 각 부대를 지원하였고, 성 밖의 주민들은 성 안으로 피난시켰다. 북경의 수비를 단단히 할 뿐만 아니라, 우겸은 변경 방위망의 재건에도 나섰다. 대동은 곽등(郭登)을 총병관으로 삼아 군의 재건과 방위에 임하게 하였고, 선부는 양홍(楊洪)을 창평백으로 삼아 방위에 임하게 하였다. 북경의 침공 경로상에 위치하고 있는 거용관에는 병부원외랑 나통(羅通)을, 자형관에는 우부도어사 손상(孫祥)을 파견하여 방위의 강화에 임하게 하였다.
군을 재건하는 한편, 우겸은 다른 중신들과 도모하여 감국 주기옥(朱祁鈺)을 황제(경종[景宗] 경태제[景泰帝])로 옹립함으로써 인심의 안정을 꾀하였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효과도 있었다. 에센은 황제를 북경으로 보낸다는 것을 침략의 대의명분으로 삼고, 황제의 이름을 빌려 명의 방위 거점을 항복시킬 뿐만 아니라, 외교 교섭에서 비장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의 즉위에 의해 정통제는 상황(上皇, 전 황제)이 되었기에, 그 가치가 크게 저하되었던 것이다.
5. 명군의 포진
10월에 에센은 오이라트에 항복한 태감(환관) 희영(喜寧)의 계책에 따라, 북경 진격의 의지를 굳혔다. 에센은 전군 약 20만 명을 셋으로 나누어, 2만 명을 고북구(古北口)로, 5만 명을 거용관으로 보냈으며, 스스로는 나머지 주력을 이끌고 자형관으로 향하였다(오이라트 군의 총 병력에 대하여는 사료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본고는 「중국고대전쟁전례선편」 제 3권 237쪽의 설을 따른다).
대동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해 오이라트의 침입을 알게 된 우겸은,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22만 명의 장병들을 이끌고 북경의 9개의 성문 밖에 포진하였다.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상서 우겸, 무청백 석향,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그 외에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포진하였고, 북경성 안은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 병료급사중 정신(程信) 등이 지키고 있었다.
우겸은 성문을 닫아 장병들의 퇴로를 끊은 뒤, 전군을 사지에 두었다. 하지만 우겸은 안전한 성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두에 서서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진(陣)에 임하여서 장교가 군대를 등지고 먼저 달아나거든 그 장교의 목을 베어라! 군대가 장교를 등지고 먼저 달아나거든 뒤따라오는 부대가 그들의 목을 베어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로 인해 장병들은 필사의 각오를 다졌고 사기가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선부의 양홍을 필두로 하여 요동의 총병관, 산동, 산서, 하남, 섬서의 각 순무들에게 원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시기의 북경성은 오늘날의 북경의 성 안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당시 북경성의 남쪽에는 금의 중도성(中都城)의 성벽이나 문이 남아 있어서 남쪽 외성(外城)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창의문이라는 것도 중도성의 성문이었다. 사료에는 「토산(土山)」이라는 표현이 보이지만, 이것은 고유의 지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매몰되려고 하는 대도성(大都城) 혹은 중도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6.북경 전투
자형관을 비롯한 명의 저항 거점을 돌파한 오이라트의 주력은, 10월 11일에 북경 교외에 출현하여 서직문에서 덕승문에 걸쳐 포진하였고, 상황을 덕승문 밖에 두었다. 창의문 북쪽에서 최초의 전초전이 벌어졌다. 우첨도어사 왕횡의 지휘 아래에 있는 도독 모복수, 고례가 오이라트의 선봉과 접촉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수백 명을 죽임으로써, 북경 전투의 최초의 교전은 명의 승리로 끝났다. 에센은 상황을 이용하여 우겸, 석향, 왕직 등 명의 수뇌부를 꾀어내어 붙잡으려고 하였지만, 우겸 등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3일은 화기에 불리한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에센은 악천후를 틈타 공격을 개시하고자 하였고, 정찰 기병들을 풀어서 수비의 약점을 찾도록 하였다. 우겸은 덕승문 밖의 빈 집들에 복병들을 배치하였고, 기병들을 풀어 오이라트의 정찰대를 도발하여 자신의 함정으로 유인하도록 하였다. 유인책에 말려든 에센은 1만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덕승문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곳의 빈 집들 안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출격하였고, 신기영(神機營, 화기를 전문으로 하는 포병대)은 화기 사격을 개시하였다. 지붕 아래에서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화기는 예전과 다름없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오이라트 군이 이러한 반격에 기가 꺾여 있을 때, 범광이 이끄는 기병이 돌격하여 오이라트 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화기는 악천후에도 아랑곳없이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였고, 에센의 동생 우량타하이 등의 간부들을 포격으로 쓰러뜨리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덕승문에서 패퇴한 에센은, 서직문으로 공격의 예봉을 돌렸다. 그 곳에 포진하고 있던 도독 손당은 분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에서 앞서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버렸고, 성 안으로 퇴각하고자 하였다. 서쪽 성벽을 수비하고 있던 급사중 정신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성벽 위에서 오이라트 군에 대하여 화전과 포격을 퍼부어 성 밖의 명군을 지원하였다. 그 때 남쪽으로부터 모복수, 고례가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였고, 뒤이어 북쪽으로부터 석향이 파견한 지원군이 도착하여 전투에 가담하였다. 형제는 역전되어 오이라트군은 패퇴하였다.
14일, 에센은 남서쪽의 창의문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창의문 부근의 수비에 관해 우겸은 모복수 등에게 명하여 기병의 행동을 방해하기 위해 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도록 하였고, 요소요소에 화기를 배치해 두도록 하였다. 우겸은 부총병 무흥, 도독 왕경(王敬) 등을 파견하여 창의문 밖에 두어 오이라트 군에 맞서 싸우게 하였다. 명군은 서반(序盤), 신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우위에 서 있었지만, 군의 감독을 맡아야 할 태감 약 100명이 전공을 탐내어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여 진이 혼란스러워졌고, 무흥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등 형세가 역전되었다. 오이라트 군은 퇴각하는 명군을 토성(土城, 금의 중도성의 성벽)으로 몰아갔다. 그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이것을 보고, 지붕 위에서 오이라트 병사들에게 돌이나 벽돌 등을 던지면서 명군을 도와주었다. 이 때 왕이 모복수, 고례 등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이 나타나면서 전세는 다시금 역전되었고, 오이라트 군은 격퇴되었다.
연전연패란 에센에게는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에센의 최대의 오산은, 약체였을 터인 명군이 병력, 사기, 지휘,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하였다는 점이다. 이 무렵 거용관을 노렸던 오이라트 군은, 화기의 위력과 나통의 교묘한 지휘로 인해 7일간의 전투에서 격퇴된 상태였다. 게다가 선부에서 출격한 창평백 양홍이 이끄는 2만 명의 군대를 필두로 하여, 각지에서 지원군이 북경을 향하여 접근하고 있었다. 기세가 오른 명의 주력과의 결전을 피하고 명의 지원군에 의해 퇴로가 끊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에센은 북경으로부터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15일 밤, 에센은 상황과 함께 몽골 고원으로 도주하였다. 첩자들로부터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우겸은, 그날 밤 오이라트 진영을 향하여 포병대를 집중시켰다. 지금까지 명군은 상황이 다칠까봐 두려워 감히 적진을 겨누지는 못하고 있었다. 적진을 때리는 명군의 집중 포화는 맹렬하였고, 1만여 명의 오이라트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명군이 북경 전투에서 사용한 대포의 수는 토목보에서 회수된 것만 하더라도 800문을 헤아렸고, 원래 북경에 배치되어 있던 것과 남경으로부터 수송된 것을 고려한다면 최소한 1,000문 이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리하여 5일간에 걸친 북경 전투는 명의 승리로 끝났다. 명군의 승리의 원인은 토목보 전투와는 대조적이어서, 우수하고 용감한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고, 단기간에 잘 훈련되었으며, 대량의 화기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 「역사군상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 사전 7권 : 중국 중세·근대편」(東京: 學習硏究社, 1999) 116~121쪽의 내용을 인용·번역하였습니다. 게시물의 상업적 이용 및 무단 이동은 사양합니다.
by 문제청년 | 2005-07-19 11:13 | 역사/전쟁사 게시판 | 관련글
만주어 인명·지명을 가타카나로 음사한 것의 경우 번역이 부정확할 수가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리며 정정할 곳이 있을 경우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누르하치의 건국
명 제국의 요동진에 인접한 지역에는, 일찍이 12세기에 금을 건국하였던 여직(女直, 여진[女眞] - 이후 여진으로 통일[옮긴이 註])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건주여진(요동 부근)의 누르하치는, 1583년(23세)에 거병한 이래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병의 천재였다.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다른 모든 부의 여진족을 항복시켜 휘하에 포함시킨 누르하치는, 1616년에 「열국(列國)을 자애롭게 다스리도록 하늘로부터 위임을 받은 스레 겡기옌 칸(영명한[英名汗])」에 즉위하고서 대외적으로 금(金, 후금[後金])을 칭하는 여진족 국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후금과 명의 관계는 교역 문제와 국경 문제 때문에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618년 4월 누르하치는 명의 지금까지의 도의를 벗어난 행위들을 하늘에 고발하고(칠대악[七大惡]), 요동의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무순(撫順)을 공격하였다. 수비대장인 이영방(李永芳)은 항복하였고, 요동총병관 장승음(張承蔭)이 이끄는 구원군은 대패하였다. 양국의 장기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2. 후금의 팔기 제도
후금의 통치 제도이자 군대 동원 제도는 「팔기(八旗)」라고 불리었다. 이것은 수렵민의 사회 제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서, 인민을 8개의 구사(固山, 기[旗])라고 불리는 집단으로 나누어 통치하고, 8개의 군단으로 편성하는 것이었다. 팔기는 깃발의 색깔에 따라 정황(正黃), 정홍(正紅), 양홍(鑲紅), 정남(正藍) (이상 좌익), 양황(鑲黃), 정백(正白), 양백(鑲白), 양남(鑲藍) (이상 우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양[鑲]’은 깃발의 테두리를 가리킨다).
팔기 제도의 최소 단위는 니루(牛彔, 좌익)라고 하며, 각 니루로부터 명목상 최대 300명의 갑사(甲士)를 동원할 수 있었다. 니루 다섯에 잘란 하나를 두고, 잘란 다섯을 모아서 구사 하나가 두어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대로 되지는 않아서, 각 구사 휘하의 니루의 수가 반드시 25개였던 것은 아니었다.
니루에는 지도자로서 니루 어전(牛彔額眞)이, 잘란에는 잘란 어전(甲喇額眞)이, 구사에는 구사 어전(固山額眞)이 두어져 있었다. 이들은 행정의 장이면서 동시에 군대의 장교이기도 하였다. 또한 각 구사는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 손자, 조카인 버일러(貝勒, 기왕[旗王])에게 속해 있었고, 버일러는 구사 하나의 병력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 군의 부사령관으로서 분견대를 지휘할 때도 있었다.
얼마만큼의 군대를 동원할 것인가는, 각 니루로부터 몇 명의 갑사들을 동원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명목상의 상한선은 300명이었지만, 실제로는 건국 초기에는 각 니루로부터 50명의 갑사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고, 훗날 심양(瀋陽)·요양(遼陽) 전투 이후에는 100명의 갑사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외에 구사의 버일러는 구사 휘하의 니루로부터 선발된 바야라 병(兵)이라고 불리는 100여 명의 정예 병사들을 친위대로서 보유하고 있었다.
사르후(薩爾滸) 전투에 얼마만큼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1만 명에서 6만 명에 이르기까지 제법 편차가 있지만, 이 전역(戰役)에는 후금의 존망이 걸려 있었던 것만큼, 최대한의 동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하나의 니루로부터 동원된 병사들의 수는, 동고로(路)에 배치된 500명의 병사들을 세 명의 니루 어전이 지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100명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 후금이 동원한 병력은 약 2만 몇 천 명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후금군은 아직 화기를 장비하고 있지 않았고, 냉병기(冷兵器)를 주 무기로 장비하고 있었다. 주력인 갑사는 중장기병으로 병사들은 갑옷을 착용하였고(마갑은 없었음), 활과 화살을 반드시 장비하였으며, 긴 무기로서 큰 칼과 창을, 짧은 무기로서 단검을 장비하고 있었다.
후금군이 장기로 하는 전술은 기병에 의한 포위 전술과, 화살을 연사하면서 기병 돌격을 실시하는 것이었지만, 누르하치는 명군이 사용하는 화기에 대한 대책으로서 중무장을 한 병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도보 전투 공병으로서 이용한다는 전술을 고안해 두었다.
3. 명의 누르하치 토벌 작전
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지원군을 지휘하였던 양호(楊鎬)를 병부시랑 겸 요동경략으로 기용하여 대 후금 전쟁의 총 지휘를 맡도록 하였다. 누르하치를 토벌하기 위해, 양호는 요동이나 조선에서의 작전 경험이 있는 두송(杜松), 유정(劉綎), 이여백(李如柏), 관병충(官秉忠), 시국주(柴國柱) 등과 같은 노련한 장수들을 기용하였다.
그러나 예정된 10만 명의 병력은 예산 부족으로 인하여, 그 해 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집결할 수 있었다. 양호는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조선과 여허(南關, 누르하치에 적대적인 여진 부족)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대해서는 화승총 부대가, 여허에 대해서는 기병 전력이 기대되었다.
군대가 모이자 양호는 요동총독 왕가수(汪可受), 요동순무 주영춘(周永春), 순안어사 진왕정(陳王庭)과 작전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결정된 작전은, 47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전군을 4개 집단으로 나누어 반원형의 4개 경로로 진격하여, 누르하치의 근거지인 허투알라를 포위하는 식으로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투에 참가하는 명군은 8만 8천 명, 조선군은 1만 3천 명, 여허군은 2천 명으로서, 총 병력은 예정된 10만 명에 달하였다. 각 군의 부서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다(명군의 병력은 추정치임).
① 좌측 북로군
사령관은 개원총병관 마림(馬林), 감군(監軍)은 개원병비첨사 반종안(潘宗顔)이었다. 좌측 북로군은 개원로의 요동병을 주력으로 하는 약 2만 명의 병력에, 여허의 지원군 2천 명을 더한 것이었다. 전군은 3개 부대로 나뉘어져서 제 1진은 마림이, 제 2진은 반종안이, 여허군을 포함하는 제 3진은 유격 두영징(竇永澄)이 지휘하였다. 주력인 좌측 중로군과 사르후 부근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② 좌측 중로군
사령관은 산해관총병관 두송, 감군은 광녕병비사 장전(張銓)이었다. 좌측 중로군은 산해관이나 보정 등 계진(薊鎭)의 각 부대와, 조몽린(趙夢麟)이 이끌고 온 고원(固原), 감주(甘州), 섬서(陝西)의 지원군 등 약 3만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력은 두송과 보정총병관 왕선(王宣), 원임총병관 조몽린이 지휘하였고, 제 2진은 유격 공염수(龔念遂), 이희필(李希泌)이 지휘하였다. 이 부대가 전군의 주력으로서, 무순을 출발하여 사르후를 경유한 뒤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③ 우측 중로군
사령관은 요동총병관 이여백, 감군은 요동병비참의 염명태(閻鳴泰)였다. 우측 중로군은 요동진의 약 2만 5천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부총병 하세현(賀世賢)이 부장이었다. 이 부대는 청하(淸河)로부터 아골관(鴉鶻關)을 나선 뒤 후란로(路)를 거쳐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④ 우측 남로군
사령관은 총병관 유정, 감군은 해개병비부사 강응건(康應乾)이었다. 우측 남로군은 산동(山東), 절강(浙江)의 지원군과 관전(寬奠), 진강(鎭江), 애양(靉陽) 등의 요동병으로 이루어진 약 1만 3천 명의 병력에, 조선의 지원군 1만 3천 명을 더한 것이었다. 주력은 유정, 강응건이 지휘하는 명군이었고, 여기에 조선의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지휘하고 명의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감독하는 조선군이 뒤를 이었다. 이 부대는 관전에 집결한 뒤 동고로를 따라 진격하여 허투알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 외에 원임총병관 관병충이 요양에, 총병관 이광영(李光榮)이 광녕(廣寧)에 예비 병력으로서 주둔하고 있었고, 양호는 심양에 머무르면서 총지휘를 맡았다.
명측의 움직임에 대하여, 누르하치는 점령하고 있던 성곽과 요새를 포기한 채 명군의 주 침공 경로상에 있는 사르후와 자이피안 산 정상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방비를 강화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는 내선(內線)의 이점을 살리는 각개격파였고, 항복한 명의 장수인 이영방은 명군이 복수의 경로를 취할 경우, 병력을 집중시켜 그 중 하나의 경로만을 두들기면 된다고 누르하치에게 진언하였다.
4. 사르후 전투
침공 예정일은 2월 21일이었지만, 폭설로 인하여 출발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력을 지휘하는 두송은 전공을 탐낸 나머지, 다른 부대와 연계하지 않고 먼저 행동을 개시하였다. 두송은 북쪽 변방에서 공적을 세운 장군으로서, 용맹하기는 하였지만 문관의 통제를 듣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었다.
3월 1일 두송의 부대가 접근하자, 후금의 축성 부대는 자이피안 산에서 철수하였다. 두송은 물이 불어난 혼하(渾河)를 건널 수 없는 차영(車營)을 후방에 남겨둔 채, 차가운 강을 건너 사르후 산을 점령하고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후금군을 추격하여, 다시 한 번 혼하를 건너 자이피안 산을 공격하였다. 후금의 호위 부대는 저항하면서 후방의 키린하다로 후퇴하였다.
8시경, 명군이 침공해 왔다는 보고를 받은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 집결한 주력에 출격을 명하였다. 후금군은 다이샨의 정홍·양홍기를 선두로 하여 속속 팔기의 각 부대가 출발하였다.
저녁 무렵 누르하치가 사르후와 키린하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레에 도착하였다. 먼저 도착한 다이샨과 버일러, 그리고 중신들은 키린하다를 구원한다는 작전을 세웠고, 키린하다에 증원 부대로서 기병 1천 명을 파견한 상태였다. 그들의 작전을 들은 누르하치는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하면 다른 명군도 동요할 것이라고 보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사르후를 공격한다고 결정하였다.
사르후 공격 부대는 좌익의 4기에 우익의 2기(양황, 양남)를 더한 것이었고, 정백과 양백의 2기는 자이피안의 명군을 감시하였다. 6기의 장병들은 밤이 되어 어두워진 것을 틈타, 사르후 산을 습격하였다. 사르후의 명군은 예상치 못한 급습을 받은 데다 시계가 저하된 시간대에 습격을 받았기에, 화기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근접전에 말려들어 괴멸되고 말았다.
사르후의 명군을 격파한 뒤, 사르후를 공격하였던 6기와 감시를 맡았던 2기, 그리고 키린하다의 부대가 세 방향에서 두송의 부대를 합동 공격하였다. 세 방향에서 기병의 습격을 받은 두송의 부대는 혼하를 두 번이나 건너면서 전투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피로한 상태였고, 어스름한 어둠 중에는 역시 화기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기에 괴멸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두송, 왕선, 조몽린 등 간부들도 전사하였다.
5. 샹갼하다 전투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을 무렵, 마림의 부대는 샹갼하다로 진출해 있었다. 마림은 명장 마방(馬芳)의 아들로서 요동총병관을 맡은 경험이 있었지만, 시나 글씨에 뛰어난 문인으로서 알려진 장군이었다. 반종안은 마림이 겁쟁이이기 때문에 다른 장군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양호에게 건의하고 있었다. 마림의 용병술은 신중하고 견실하였기에 이 점이 반종안에게는 다른 맹장들에게 비교해 보았을 때 겁쟁이라고 비쳤던 것이었겠지만, 마림에게 불안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강적과 맞선 경험이 없다는 점이었다.
2일 북로군의 접근을 알게 된 후금군에서는, 다이샨이 300명을 이끌고 먼저 출발하였다. 마림은 두송의 부대가 괴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전날 밤의 숙영지까지 후퇴하였다. 그 곳에서 3중의 참호를 파고 호 밖에는 대포를 배치하였으며, 그 외곽에 밀집 대형의 기병을 배치하여 사방 어디로부터의 습격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는 엄중한 진형을 펼쳤다. 이와 같이 엄중한 포진을 본 다이샨은 누르하치에게 지원군을 계속 요청하였다. 제 2부대를 지휘하는 반종안은 1.6Km 정도 떨어진 피에훈 산에 진형을 펼쳤다.
그 날 아침, 혼하를 건너지 않았던 좌측 중로군의 공염수, 이희필이 이끄는 차영과 기병 등 약 2천 명의 부대가 와훔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력은 마림의 부대와 맞서게 한 누르하치는, 홍타이지(정백기)와 함께 1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이 부대를 급습하였다. 명군은 참호를 파고 전차와 화기를 배치하여 수비를 단단히 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공병으로서 투입하여 전차의 방어선을 돌파하도록 하였고, 그 뒤를 이어 기병으로 습격하여 중로군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다이샨으로부터의 급보를 받은 누르하치는 병력을 뒤에 남겨둔 채 소수의 호위병만을 이끌고 곧바로 달려왔다. 누르하치는 명군의 진형을 관찰한 뒤, 근처의 산을 점령하여 위에서부터 아래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누르하치의 의도를 알아챈 마림이 병사들을 그 산으로 이동시키면서 양군이 격돌하기 시작되었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좌익의 2기를 말에서 내리도록 하였지만, 명군의 움직임이 빨랐기에 다이샨은 말에 올라탄 채 명군에 대하여 돌격을 감행하였고, 전투는 격렬한 혼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승패를 판가름한 것은 증원군이었다. 후금군의 경우 6기가 대열을 정비할 틈도 없이 전장에 도착하는 자부터 속속 전장에 투입된 것에 반해, 명군의 경우 지원군이 없었고 피에훈 산의 명군은 그저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명군은 후금군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패주하였고, 극심한 추격을 받았다. 마림은 탈출할 수 있었지만, 유격 마암(麻岩) 등 다수의 장수와 병사들이 쓰러졌다.
반종안은 용기는 있었지만 장수로서의 자질이 없었고, 교전 중의 마림군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산 속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호를 파지 않은 채 단지 전차를 늘어세운 방어진만을 펼친 상태였다. 누르하치는 병력을 재집결시킨 뒤 피에훈 산을 공격하였다. 누르하치는 화기에 맞서기 위하여 병사들의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하여 먼저 나아가게 하고, 말을 탄 병사들이 그 뒤를 잇도록 하였다. 전차 뒤에서 사격을 퍼붓던 명군에 대하여 말에서 내린 병사들이 돌입하여 전차를 제거하였고, 그 곳으로 기병들이 돌입하여 반종안의 부대를 섬멸하였다.
여허의 지원군은 중고성(中固城)까지 진출한 상태였지만, 이 패전 소식을 듣고서 철수하고 말았다.
6. 아부다리·후챠 전투
북로군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누르하치가 병력을 재집결시키고 있을 무렵, 명군이 동고·후란로를 따라 진격중이라는 보고가 도달하였다. 누르하치는 전군을 허투알라로 철수시킨 뒤 다음 목표를 남로군으로 잡았고, 우측 중로군에 대응하기 위해 허투알라에 4천 명의 정예 병력을 배치하였다.
좌측군의 괴멸을 알게 된 양호는 우측의 양군에 대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남로군을 이끌고 있던 유정에게는 명령이 도달하지 못하였다. 유정은 임진왜란이나 사천(四川) 지역의 반란 진압에서 활약한 인물로서, 무게가 120근(약 72Kg)에 달하는 큰 칼을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도(劉大刀)」라는 별칭을 가진 맹장이었다. 유정이 평소에 구사하는 전술은 부대에 녹각목(鹿角木)을 보유하도록 한 뒤 순간적으로 녹각목을 늘어세워 적의 습격을 저지하고, 이렇게 하여 벌어둔 시간에 배치한 화기를 사용하여 적의 전위 부대를 격파한 뒤 기병으로 역습을 가한다는 것으로서, 그는 화기의 운용에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였다.
남로군의 이동 경로는 다른 부대와 비교할 때 길었고, 유정은 신중한 인물이었으며, 조선군의 보급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기에, 행군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유정의 부대는 마을을 불태우며 전진하였고, 2일에는 동고로에서 토보 등이 이끄는 후금의 경계 부대 500명과 교전하여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를 거둔 뒤, 두송이 허투알라로 앞서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두송이 전공을 독차지하지 않을까 하고 유정은 초조해 했고, 4일 녹각목을 버린 채 포위 공격 장비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이끌고 먼저 나아갔다. 강응건의 부대, 강홍립의 조선군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무렵 다르한 히야(정황기)가 이끄는 후금군의 선발대가 토보의 패잔병을 흡수한 뒤, 와르카시 숲에 매복하고서 유정의 부대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유정의 부대는 10시경 다이샨이 이끄는 후금의 주력과 만났고, 유정은 조금 후퇴한 뒤 아부다리 언덕 위에 포진하고서 다른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렸다. 다이샨은 홍타이지(정백기)에게 우익의 지휘를 맡긴 뒤 언덕과 이어지는 산 위로부터 아부다리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자기 자신은 좌익을 이끌고 서쪽으로부터 진격하였으며, 후방으로부터는 다르한 히야의 복병이 습격을 가해 왔다. 명군은 삼면으로부터의 돌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전멸하였고, 유정은 전사하였다.
유정의 부대가 전멸하였을 무렵, 강응건의 부대는 조선군과 함께 후챠 들판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다이샨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홍타이지를 선두로 하여 후챠로 나아갔고 강응건의 부대와 대치하였다. 강응건의 부대는 명군과 조선군의 혼성 부대로서, 장창(낭선[狼筅])과 화기가 층을 이룬 채 포진하고 있었다. 명군의 화기 사격이 시작되었을 무렵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고, 화약 연기가 명군에게 불어 닥쳤다. 이것을 호기로 삼은 후금의 기병들이 화살을 연발하면서 돌격하여 명군의 전열을 무너뜨렸고, 강응건은 수백 기를 이끌고 달아났다. 누르하치는 아민(양남기)과 다르한 히야(정황기)로 하여금 교일기가 감독하는 조선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광경을 조선측의 사료 『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연기 속에서 적(후금)의 기병의 대군이 들이닥쳤고, 양 날개로 갈라져서 멀리서부터 포위해 들어오면서 좌영(左營)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강홍립은 우영(右營)으로 하여금 구원하도록 하면서 좌영과 함께 진을 펼쳤다. 간신히 대열을 정비할 수 있었지만, 적의 기병이 빠르게 돌격을 감행하여,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대포와 총을 한 번은 사격할 수 있었지만, 다음 탄환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이 진 안으로 들어왔고 순식간에 좌·우영 모두 전멸당하고 말았다」
좌영의 장수인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는 선전한 뒤 전사하였고, 우영의 장수 순천군수 이일원(李一元), 교일기는 조선군의 중영으로 달아났다. 중영의 5천 명밖에 남지 않게 된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와 협의한 뒤 누르하치에게 투항하였다. 절망한 교일기는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우측 남로군도 소멸되었다.
7. 사르후 전투의 결과
양호가 내린 퇴각 명령은 이여백에게는 도달하였다. 부장 하세현은 남로군을 구원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이여백은 퇴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여백의 부대는 후금의 초계 부대 20명을 보고 도주하는 등 동요하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온전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명군의 4개 부대 중 3개 부대가 누르하치의 내선을 이용한 교묘한 작전 지휘로 인해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후금의 전과는 명이 공식 발표한 것만 하더라도 잃은 장수들의 수가 314명, 병사들이 약 45,870명, 말이 약 28,400필, 무기의 손실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으며, 살아남은 조선군은 부대 전체가 후금에 투항하였다.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약 42,360명이었다고 한다. 명과 후금의 최초의 결전은 후금의 대승리로 끝났다.
- 「역사군상 그래픽 전사 시리즈 전략·전술·병기 사전 7권 : 중국 중세·근대편」(東京: 學習硏究社, 1999) 122~127쪽의 내용을 인용·번역하였습니다. 게시물의 상업적 이용 및 무단 이동은 사양합니다
by 문제청년 | 2005-07-20 22:30 | 역사/전쟁사 게시판
강홍립의 조선군을 지휘하는 남로군 사령관 유정은
1619년 3월 2일 동고로에서 토보의 후금군 500명을 격파하고
주변의 부락들을 파괴하면서 진격하였습니다.
1619년 3월 4일 오전 10시, 유정의 남로군이 주변의 여진부락을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다이샨의 후금군은 약탈로 대오가 흐트러진 유정의 명군을 기습 하였습니다.
유정은 명군을 조금 후퇴시키고 아부다리 언덕에서 포진하여
후속부대와 합류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다이샨은 아부다리 언덕과 이어지는 산 위에서 명군을 공격하였고
홍타이지의 후금군이 우측에서,
와르카시 숲에 매복해있었던 다르한 히야의 후금군이 후방에서
유정의 군대를 압박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유정의 군대는 궤멸되었고,
강응건의 후속부대도 다이샨과 홍타이지의 후금군에게 격파 되었습니다.
강응건의 후속부대를 격파한 후금군은 강홍립의 조선군을 향해 진격 하였습니다.
패배한 남로군 사령관 유정은 스스로 화약더미 속에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자폭 하였습니다.
1619년 3월 4일 오전 11시,부차에서 신중하게 진군하던 강홍립의 조선군은
전방에서 울려퍼지는 포격 소리를 들었습니다.
강홍립은 군대를 좌영,중영,우영으로 나누고 대오를 정렬하게 하였습니다.
강홍립은 중영의 군대를 이끌고 행군로의 좌측 언덕에 포진하게 하고,
우영은 남쪽에,좌영은 중영 앞 언덕에 포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부차의 벌판에 머물던 좌영의 조선군이 언덕에 포진하기 전에
3만의 후금군이 기습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강홍립은 우영의 조선군을 좌영의 조선군 증원에 투입시켰습니다.
이무렵에 강홍립은 명군 장수 교일기와 우승은을 통해 전방의 명군이 무너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좌영의 조선군은 몰려오는 후금군을 향해 총포를 발사하였고
이에 후금군의 1차 공격 부대가 무너졌습니다.
조선군의 사격이 멈추자 후금의 2차 공격부대가 조선군을 향해 돌격 하였습니다.
조선군은 총포를 장전하고 후금군을 향해 발사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불어오는 모래바람으로 인하여 총포를 발사하지 못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후금군의 기병들이 좌영에 진입하여 조선군을 무너뜨렸습니다.
좌영의 조선군 3천여명은 후금군의 돌격에 거의 몰살 당했습니다.
좌영의 조선군을 격파한 후금군은 좌영을 지원하러 오는 우영의 조선군을 공격하였고
우영의 조선군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영장 이일원은 간신히 중영으로 도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좌영장 김응하는 후금군과 사투를 벌였습니다.
김응하는 버드나무 밑에서 후금의 병졸들을 무수히 찌르고 베었습니다.
후금군이 쏜 화살이 김응하의 왼팔에 박혀도 김응하는 오른팔 만으로 후금군과 싸웠습니다.
김응하는 칼이 부러질 때까지 싸우다가 뒤에서 날아온 투창에 맞고 전사 하였습니다.
후금군은 김응하가 의지했던 버드나무를 장군버들 이라 칭하며 김응하를 존경 하였습니다.
이날 조선군은 좌영과 우영이 무너지고
좌영장 선천군수 김응하, 운산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오직 등 9000여명이 전사 하였습니다.
좌영과 우영의 조선군을 무너뜨린 후금군은 중영의 조선군을 포위 하였으나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중영의 조선군 지휘관들은 항복에 대한 논의를 벌였습니다.
후금군의 포위망을 뚫자는 의견이 제시 되었으나 무시 되었고,
항전하자고 외치는 병졸도 있었으나 역시 무시 당했습니다.
결국 조선군 부사령관 김경서가 후금군 장수의 방에
항복문제를 논의하며 그날 밤을 같은 방에서 지내고,
후금군 사령관들이 안전 보장을 약속하자
조선군은 항복하기로 결심 하였습니다.
1619년 3월 5일
강홍립의 조선군은 후금에 투항 하였고,
강홍립은 후금의 수도 흥경노성에 가서 누르하치에게 정식으로 항복하여
조선은 후금과 싸우려는 생각이 없음을 전했습니다.
그 시각, 이여백의 서남로군은 요동 경략 양호의 철군 명령을 접수하고 퇴각하던 도중에
후금군 기병 20여명을 발견하여 황급히 도주하다가
대열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서로 짓밟혀
1000여명의 병력을 잃고 전장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이로써 명나라의 후금 정벌전은 대참패로 끝이 났습니다.
1619년 3월 1일부터 3월 5일에 걸쳐 전개된 전투는
후세에 <살이호 전투>라고 불리며,
명군은 5일간의 전투에서 314명의 장수와 45870명의 병졸,
28400필의 군마와 셀수 없이 많은 양의 군수물자를 손실 하였습니다.
부차전투에서 항복한 수천의 조선군인들 중 손바닥에 윤기가 있는 사람들(양반 출신)은
모두 살해 되었고,신체가 건장한 사람들은 후금군에 편입 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둔전에 배치되어 군량미 조달에 동원 되었습니다.
그들 중 중간급 장수들 일부만이 조선에 송환 되었고
1400~2000 여명이 탈주의 형식으로 조선에 되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태그저장 | 취소
강희대제(sunho1007)
역사는 미래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당시 조선 측 기록마다 전사자수가 최소3000 최대 9000임 6-7000으로 보는 게 한명기교수 등 학계의 다수라고 들었소 13000중 그정도니 최하로 잡아도 전군 붕괴군요 전사가 3000임 부상은 6000은 될테니
명군45000여 조선군 6-7000 손실에 비해 청군은 1500손실 사르후 전역은 정말 청의 팔기군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죠 125.131.8.45 2006/11/17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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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에 명 나라 장수들이 먼저 행군하고 아군의 3영이 뒤따라 나아가니, 도로는 평탄하나 산골이 연이어 뻗어서,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려, 영졸(營卒)들이 각각 거마작(拒馬柞)을 메고 앞으로 겨우 수십 리를 가서 부거지(富車地) 노성(奴城)에서 60여 리의 거리에 있다.에 도착하니 대포 소리 세 번이 연달아 들렸다. 이에 홍립이 말을 빨리 달려 길 왼편 언덕에 올라 보니, 회오리 바람이 갑자기 일고, 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덮기 때문에 곧 좌영은 맞은 편 높은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중영은 원수가 올라간 언덕에 진을 치고, 우영은 남쪽 변두리 한 언덕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좌영은 이미 벌판에 진을 쳤었으나 적의 기병이 벌써 가까이 있어 이동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 근처 부락 백여 집에 명 나라 군사들이 125.131.8.45 2006/11/17 x
나라 군사들이 불을 질러 연기가 바람이 따라 와서 진영 위에 덮었다. 잠시 후에 진 상공(陳相公)ㆍ우 수비(于守備)ㆍ교 유격(喬遊擊)이 필마단기로 와서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가 모두 함몰되었고 제독도 전사하였다.” 하였다. 대개 유정이 새벽에, “가합령(家哈嶺) 밖은 적의 경비가 전혀 없다.”는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 빨리 달려 먼저 가서 수십 리에 걸쳐서 군사를 나누어 부락을 약탈하게 하여 군대의 대오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오랑캐 장수 귀영가(貴盈哥)가 3만여 기를 거느리고 서로에서 밤새 내내 달려와 새벽에 가합령을 지나서 산골짜기에 매복하였다가, 불의에 뛰쳐 나와서 앞 뒤를 가로막아 끊으니 명 나라 군사의 여러 진영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채 모두 함몰되었다고 한다. 우 수비와 진 상공은 즉시 달려 가 125.131.8.45 2006/11/17 x
교 유격은 말하기를, “나는 귀국 군사를 감독하니 갈 수 없다.” 하였다. 연기와 먼지 속을 바라보니, 적의 기병이 크게 닥치는데, 양쪽 날개처럼 멀리 에워싸고 먼저 아군의 좌영을 치니 홍립이 전령을 내려 우영(右營)으로 하여금 달려와 구원하게 하여 좌영과 진을 연합하게 하여서 겨우 대열을 이루자, 적의 기병이 달려와 충돌하니, 기세가 비바람과 같았다. 포와 총을 한 번 쏘고 나서 두 번째 화약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은 벌써 진중에 들어와 순식간에 좌우영이 모두 함몰되었다. 이에 선천 군수김응하, 운산 군수이계종(李繼宗), 영유 현령이유길(李有吉), 우영 천총(右營千摠)김요경(金堯卿)ㆍ오직(吳稷), 좌영 천총김좌룡(金佐龍)은 모두 전사하고, 좌영 천총신충업(申忠業)은 도망가고, 우영장 순천 군수이일원( 125.131.8.45 2006/11/17 x
연러실기술과 책중일록의 기록이죠 이민환의 기록에도 포와 총을 한 번 쏘고 나서 두 번째 화약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은 벌써 진중에 들어와 순식간에 좌우영이 모두 함몰되었다 이문구가 있고요
원숭환은 광동 동완현 사람이다.
그는 강개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사람들과 군사전략에 대한 논변을 좋아했으며 퇴진하는 군사들을 만나면 변방의 정세를 묻기도 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호사(豪士)>라고 불렸으며 여행 또한 좋아하였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여행을 하여 거의 중국의 반을 돌아다닌 셈이었다. 그는 친한 친구와 군사전략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밤이 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명나라에서는 3년에 한번씩 진사시험이 있었는데 2월 9일에 시작하여 2월 15일에 끝났다. 그리고 3월 1일에 또 한번의 정시(廷試)가 있었다. 원숭환은 만력 47년 정시와 진사시험을 보기 위해 북경으로 갔다. 그해 2월 양호는 요양에서 대패하였다. 원숭환은 자연히 요동의 군사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더욱 변방의 어려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진사에 합격한 후 복건소무(福建邵武)로 파견되었다.
천계 2년, 그는 북경에 직무를 보고하러 와서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요동군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어사 후순(侯恂)의 주의를 끌어 그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병부(兵部) 직방사주사(職方司主事)로 승진되었다.
명나라의 관제는 병부, 상서(尙書) 1명과 좌우시랑(左右侍郞) 각 1명, 그 밑에 4개의 사(司)로서 무선(武選), 직방(職方), 차가(車駕), 무고(武庫)가 있었다. 직방사의 등급은 현재의 총참모부로 낭중(郎中) 1명, 원외랑(員外郞) 2명, 주사(主事) 2명이 있었다. 주사는 총참모부에서 문직중 교부처장(文職中校副處長)에 해당된다. 원숭환의 병부주사의 임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왕화정의 대군이 광령(廣寧)에서 전몰하자 조정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후금군은 파죽지세로 4년 만에 명군 수십 만을 전몰시키고 무순(撫順), 개원(開原), 철령(鐵嶺), 요양을 점령하여 산해관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산해관을 지키지 못하면 북경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북경에는 계엄이 선포되고 초긴장 상태로 돌입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원숭환은 말을 타고 홀로 산해관으로 갔다. 미리 지형과 정세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병부에서는 그가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집안에서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 후 상세한 보고를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청했다.
"군사와 식량을 주시면 혼자 산해관을 지키겠습니다."
만약 평상시 같았으면 그는 파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조정의 정세가 워낙 급박하여 그를 병비검사(兵備檢事)로 승진시키고 산해관으로 파견하였다. 원숭환은 웅지의 꿈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조정의 지지를 받아 그의 고향으로 병사를 모집하러 갔다. 당시 산해관을 지키는 주요 병사는 새로 도착한 절강병(浙江兵)이었다. 이외에도 3천 명의 광동 수병(水兵)이 원숭환이 고향으로 간 후에 도착하였다. 원숭환은 광동 보병(步兵)이 민첩하고 싸움을 잘하는 것을 알고 그의 숙부 원옥패(袁玉佩)의 추천으로 3천 명을 모집하였는데, 그 중에는 원숭환과 죽음을 맹세한 사상정(謝尙政)과 홍안란(洪安蘭) 등도 끼어 있었다.
원숭환은 산해관에 도착한 후에 요동경략(遼東經略) 왕재진(王在晉)의 소속하에 있었다. 왕재진은 그가 책임감도 있고 일도 잘 처리하는 것을 보고 전둔위(前屯衛)로 보내어 난민들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원숭환은 그 명령을 받자마자 아침을 불사하고 밤새 달렸다. 그가 도착할 때는 이미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전둔성에는 존경할 만한 장수가 없었는데 원숭환이 도착하자 모두 그를 따르고 존경하였다.
왕재진은 정식으로 그를 영전병비검사(寧煎兵備檢事)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 그래서 원숭환은 영원과 전둔위 개성을 지키게 되었다. 방사령부 정치위원(防司令部政治委員)으로 산해관 밖의 후금군을 방어하는 제 1차 방어선이 된 셈이었다. 영원은 최전방이었고, 전둔위가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에는 성벽도 없었고, 방어공사도 되어 있지 않아 성을 지키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원숭환은 전둔위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명군은 일체의 방어시설을 산해관에 집중시켰다. 산해관은 방어의 제 1 요새로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북경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반드시 더 북쪽에 성을 쌓아
방어를 해야 산해관도 안전하고 북경도 안전하였다.
원숭환은 이런 관건을 상사에게 제의했다. 왕재진은 만력 20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강소(江蘇) 태창(太創)출신의 문약한 서생으로 군사에 대해서는 식견이 없었다. 안목도 낮아 산해관 밖 8리에 성을 쌓자는 원숭환의 건의를 반대하였다. 원숭환은 다시 제일 높은 상사인 엽향고(葉向高)에게 간청했으나 그도 역시 거부하였다. 그러나 원숭환은 완강하게 계속 재차 상소를 올렸다. 이것은 그의 불굴의 집념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영원 북쪽 십삼산(十三山)에 패잔병과 난민 10여 만 명이 후금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대학사 손승종에게 그들을 구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원숭환은 병사 5천 명을 데리고 가서 도와줄 것을 청했으나 왕재진은 무모한 일이라 생각하여 거절하였다. 그 결과 10여 만 명의 패잔병과 난민들은 모두 후금의 포로가 되고 단지 도망쳐온 사람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후금은 이 당시 노예제도를 실행하고 있었다. 포로로 잡은 한인(漢人)과 조선인(朝鮮人)들을 매매했는데 건장한 한인은 그 당시 가격으로 은화 약 18냥, 혹은 소 한마리와 바꾸었다. 십삼산의 10여 만 명의 한인들은 포로로 붙잡혀 모두 노예가 되었으니 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후금의 경제력 향상에 도움을 준 셈이었다.
원숭환은 영원에 성을 쌓자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다. 조정의 대신들은 영원은 너무 멀어 방비를 할 수 없다고 모두 반대하였다. 그러나 대학사 손승종은 견식이 있는 사람이라 구체적인 사정을 이해하고는 원숭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 후, 원숭환은 왕재진을 대신하여 요동의 원수가 되었다. 천계 2년 9월, 손승종은 원숭환과 부대장 만계(滿桂)에게 영원을 수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원숭환이 이끄는 군대의 시작이었다.
만계는 몽고인으로 용감하고 싸움에 능했다. 이때부터 그와 원숭환의 운명은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몽고 무장(武將)과 광동 원수는 모두 성질이 강직하고 기백이 넘쳤다. 두 사람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격렬한 언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존경하고 있었다.
영원은 산해관에서 200여 리나 떨어져 있어 전략상으로도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영원은 지금의 흥성(興城)으로 금주(錦州)와 산해관의 중간 지점에 있다.
천계 3년 9월, 원숭환은 드디어 영원에 도착하였다. 그전에 손승종은 조대수(祖大壽)를 파견하여 영원에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대수는 명군이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대강대강 엉성하게 짓고 있었다.
원숭환은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독려하여 이듬해에 성을 완성하였다. 이 성은 원숭환 일대 사업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영원지방이 안전하게 되자 요동과 요서의 한인들이 들어와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영원성의 축성은 명나라의 국방 한계선을 북쪽으로 200여 리나 연장시킨 결과가 된 것이었다.
원숭환은 이와 동시에 군기를 정비하다가 교관(校官) 하나가 군량미를 착복하는 것을 발견하고 당장 죽여버린 일도 있었다. 그것은 군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손승종도 화가 나서 그를 책했다. 원숭환이 백배 사죄하였다.
손승종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후금의 공격에 대비하여 24만 냥을 비축해 두자고 조정에 상소하였다. 손승종은 천계황제의 독서선생으로 그의 신임을 얻고 있으므로 황제는 즉시 허락하였다. 그러나 병부상서와 공부상서가 반대를 하여 손승종의 전략은 실행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승종은 둔전정책(屯田政策)을 실시하여 오히려 큰 효과를 거두었다.
천계 4년, 원숭환은 대장 마세용(馬世龍)과 왕세흠(王世欽) 등 군사 1만 4천 명을 이끌고 광녕(廣寧)을 순시하였다. 광녕은 금주 이북에 있는 곳으로 후금의 진지가 있는 심양과도 가까운 거리였다. 원숭환은 아직 후금군과 싸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순시는 도전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군은 응전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숭환은 한 부대를 십삼산으로 보내 보았다. 그러나 이때 후금군은 이미 그 산에서 퇴각하고 없엇다.
3, 4년 동안 이만큼 전세를 회복시켜 놓은 것은 원숭환의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손승종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숭환도 많은 공헌을 세워 병비부사(兵備副使)로 승진했다. 다시 우참정(右參正)으로 승진되었다.
천계 5년 여름,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 손승종은 원숭환의 계획에 따라 여러 장군들을 금주, 송산(松山), 행산(杏山), 우둔(右屯), 대릉하(大凌河), 소릉하(小凌河) 등의 요새로 파견하였고 다시 200여 리를 북진하여 요하(遼河) 서쪽의 옛날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그러나 시국은 점점 어지러워졌다. 천계제는 더욱 목공의 일에 집착하였고, 그에 따라 위충현의 권력 또한 방자하여 무지하고 법도 모르는 그의 손에서 조정은 휘둘리게 되었다.
천계 5년, 위충현은 정인군자(正人君子)를 교살했다는 죄목으로 양연(楊連)을 투옥시키고, 좌광두(左光斗), 위대중(魏大中), 원화중(袁化中) 등을 탐관오리라고 모함하여 역시 투옥시켰다.
분통을 터뜨린 백성들이 북경의 거리로 몰려나와 고함과 울음으로 무고함을 증명했으나 위충현은 정식 재판도 하지 않고 옥중에서 그 대신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위충현은 또 뇌물 받기를 대단히 좋아하였다. 그런데 손승종은 그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서 미움을 샀다. 위중현은 당장 손승종 대신 고제(高第)를 요동경략에 임명하였다.
그는 임명되자마자 각 성에서 철수하여 모든 부대를 산해관으로 집결해야 한다고 했다. 이 전략은 요새 방비를 그르치는 일인지라 원숭환은 당연히 반대를 했다
원숭환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금주, 우둔, 대소릉하, 송산, 행산 등에서 군사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10여만 석이나 되는 양식을 거두어 들였다. 백성들과 장수들은 모두 분함을 참지 못하였고 그 원성이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요하 공격서 대승
후금은 명나라의 허실과 경략의 무용함, 게다가 원숭환의 지지자가 없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천계 6년 정월 요하를 건너 2월 3일에는 영원을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급박한 정세에 놓이자 원숭환은 영웅의 기지를 발휘하여 적에게 대항할 것을 결심했다. 그와 대장 만계, 부장 좌보(左輔), 주매(朱梅), 참장 조대수, 하가강(何可綱) 등과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기로 맹세하였다.
그는 또 전둔 수장 조솔교(趙率敎), 산해관 수장 양기(楊麒)에게 만약 영원에서 도망쳐 오는 병사들이 있으면 잡는 즉시 참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산해관은 그의 상사 요동경략 고제의 소관이었고, 원숭환의 권한은 영원과 전둔 밖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이때는 권한이나 상사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후금군의 선봉 부대는 철갑군으로 모두 2겹으로 된 철갑을 입고 있어 <철두자(鐵頭子)라고 불렀다.
또 후금군의 견차(堅車) 끝에는 생 소가죽을 씌워 돌에 맞아도 다치지 않게 되어 있었다.
후금군의 철갑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밀고 들어와 성곽을 에워쌌다
네덜란드와의 군사적 접촉을 통해 홍이포(켈버린 )포의 위력을 알게 된 명에서는 당시 서광계(徐光啓) 등의 노력으로 화포를 수입하여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1618년 수입해서 1621년 자체 제작하오 홍이포(캘버린)를 자체 제작하게 된 명에서는 홍이포를 실전 배치하여 전장에서 사용하게 된다.그 땐 많은 수량은 아니었소
그러나 영원전투 (1626년)이후 엄청난 양을 생산하오 1629년 북경의 병부관할에서 400문 을 서광계의 감독하에 제작 ( 아담 샬이 기술고문) , 양광총독인 왕존덕이 500문 제작하여 175문을 중앙정부로 보내는 등 대규모 생산인데 이는 영원성전투에서 10여문의 홍이포가 대 활약을 해서요
종전 불량기는 1537년 한해에만 3800문이 제작되는 등 대규모로 포병을 운용한 경험은 있었고 , 크리스 피어스의 [ 전쟁으로보는 중국사-오스프리 men at arms 정리본이지만 ]에는 유럽보다 명나라가 포병의 목표물 조준시 망원경 사용이 더 빨랐다고 합디다 .
홍이포는 현존 실물마다 수치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무게는 2~3톤 남짓, 구경은 100mm, 유효 사거리는 700 ~ 800 미터, 최대 사거리는 4 킬로미터에 달하는 강력한 대포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투에 이 홍이포가 가장 크게 두각을 나타낸 실전은 명과 후금과의 영원(寧遠)성 전투(1626년)에서였다. 장성의 실질적인 동쪽 최대 관문인 산해관의 외곽 성인 영원성을 지키던 원숭환(袁崇煥)은 청 태조 누르하치가 이끄는 13만 기병에 맞서 2만 군사와 10여문의 홍이포로 대항을 한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원정군은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누르하치도 이 때의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이하 연려실기술에 기재된 우리 사신이 목격한 영원전투요
우리나라 역관(譯官)한원(韓瑗)이 사신을 따라 명 나라에 갔다가 마침 숭환을 만났는데, 숭환이 기뻐하며 사신에게 한원을 빌려 달라고 청하여 자기 진(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 때문에 한원이 그 전투를 목견하였는데,
숭환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비록 알 수 없었으나, 군중(軍中)이 매우 고요하고, 숭환이 두세 명의 막료들과 서로 한담을 나눌 뿐이었다.
적이 습격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숭환이 가마를 타고 망루(望樓)로 가서 한원 등과 함께 옛 역사를 논하고 글을 이야기할 뿐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대포 한 방을 쏘니 포성이 천지를 뒤흔들므로 한원이 무서워서 머리를 들지 못하자, 숭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적이 왔다.” 하였다. 곧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니 적병이 들에 가득히 몰려오는데 성 안에서는 전혀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그날 밤 적이 외성(外城)에 들어왔는데, 대개 숭환이 미리 외성을 비워두고 적을 유인한 것이다. 적이 병력을 합쳐 성을 공격하자 또 대포를 쏘니 성 위에서 일시에 불을 켜 천지를 환히 비추고 화살과 돌을 함께 떨어뜨렸다.
싸움이 바야흐로 치열해지자 성 안에서 성첩(城堞) 사이마다 매우 크고 긴 나무궤를 성 밖으로 밀어 냈는데, 반은 성첩에 걸치고 반은 성 밖으로 내놓으니 궤 속에 실상 갑사(甲士)가 엎드려 있다가 궤 위에 서서 내려다 보면서 화살과 돌을 던졌다.
이렇게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성 위에서 마른 풀과 기름과 솜 화약을 함께 던지니 얼마 후에 땅 속에 묻었던 포(砲)가 크게 폭발하여 성 밖에서 안팎으로 흙과 돌이 두루 날아 흩어졌다.
불빛 속에서 오랑캐들을 바라보니 무수한 인마(人馬)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가 어지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로써 적은 크게 꺾여 물러갔다. 이튿날 아침 적의 대열이 큰 들판 한쪽에 마치 잎사귀처럼 뭉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숭환이 곧 예물을 갖추고 한 사람의 사자를 보내 인사하기를, “노장(老將 누루하치)이 천하를 횡행한 지 오래 되었는데, 오늘 나에게 패전당했으니 아마도 운수인가 보다.” 하였다.
이때 누루하치는 먼저 중상을 입었는데, 이에 이르러 숭환에게 예물과 명마(名馬)를 갖추어 답례하고 다시 한번 싸울 기약을 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분통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 《일월록》
이하는 역시 우리측기록인 홍이포기의 영원성전투묘사요
청 태종(淸太宗)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할 때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는데, 그때 나이가 24세였다.(청태조와 태종을 혼동하는것부터 괴이)
우리나라 사신이 마침 성에 들어가, 원공이 바야흐로 향을 피우고 책을 보며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한가로움을 보고, 성안에 군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3000명이 채 못 된다고 하였다.
(이때 영원성 병력은 2만인데 홍이포기가 별 신빙성은 없음을 알수 있소 )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적과 응전할 것인가 하였더니, 이미 계획이 있다 하고 성안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였다. 우리나라 사신이 나아갈지 물러날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한밤중이 채 못 되어 한 장수가 앞으로 다가와서 넌지시 무슨 일인가 그에게 아뢰니, 공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윽고 성 위에서 한 방의 대포소리가 일고 그 소리가 막 그치자, 성 밖에서 우렛소리가 땅을 진동하며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더니 삽시간에 청 나라의 10만 정병이 재가 되어 버렸다.
대개 이것은 땅길[地道]을 따라 홍이포를 토성(土城) 밖에 매복시켜 놓고 시간에 맞추어 쏘아 댄 것이다. 청 태종이 연기와 불꽃 속에서 뛰어나와 대에 올라 굽어보고는 통곡하며 피를 토하고 갔다. 원공이 누에 올라가 저 산밑에 등불 하나가 반짝이면서 달아나는 것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저것이 칸[汗]이다.”
하고는, 한 장수에게 명하여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달려가서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이번 길에 고생이 심하군. 감히 다시 오겠는가?”
하였다. 칸이 큰 원한을 품고 통음(痛飮)하고 달아났으니, 이는 명 나라 군사가 제일 기이하게 이긴 곳이다. 원공이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다.”
하였다.
일설에는, 청 태종이 돌쇠뇌로 성을 공격하여 성이 많이 허물어졌으며, 이튿날 아침 장차 성을 함락하고 들어가려 하였다. 밤사이에 원공이 화포(畫布)로 타첩(垜堞)의 모양을 만들어 성의 무너진 곳에 쳐 놓았는데, 마침 비가 내리고 또 추워서 하룻밤 사이에 얼음이 얼었다. 칸[汗]이 새벽에 바라보고 신의 짓이라 하여 드디어 포위를 풀고 퇴각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위 역관의 기록에 의한 전투묘사에 비해 홍이포기는 상당히 신빙성이 떨어지네요
이하는 일본인 시노다 고이치가 명측기록과 청측기록을 모두 검토하여 기술한 전투상황이오
영원성은 원숭환이 산해관의 외곽에 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스스로 축성을 감독하였다 .
성벽높이가 약 10.2미터 , 여장 ( 총안이 있는 요철모양 부분 )이 높이 1.9미터 , 성벽의 두께는 아랫부분이 약 9.6미터 ,윗부분이 7.7미터 이고 성을 위에서 보면 거의 사각형이고 4개의 문이 있소
이성은 1644년까지도 함락이 되지 않았고 산해관 북방 80킬로미터 밖이고 사실 오삼계의 관녕군의 주주둔지는 산해관이 아니라 영원성이오. 청대에도 성을 파괴하지 않아서 현재 까지 남아 있고 단 청은 이름을 흥성 으로 바꾸오
원숭환이 분석한 결과 지금까지 요동 ( 당시엔 명에선 요하 동쪽 만주 전체를 요동으로부르오) 일대의 성들이 쉽게 함락당한 것은 무엇보다 항상 수천명밖에 없는 성에 (명이 배치한 병력은 요동-만주에 10만이상이지만 여러 거점에 분산 배치되니 각 성ㅇ의 병력은 적은 것 ) 항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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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펌글 모음] 명나라 군대 3
1555년 척계광이 왜구들이 출몰하는 동남해안지역의 절강(浙江)성에 부임했을 때, 북쪽 변방지역에서는 알탄이 이끄는 몽골군이 황군
의 방어력을 뚫고 침입하였다. 몽골군은 포로들에게 가져갈 수 있는 물건 일체를 지워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황군의 군사력이 허약하
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어이없이 손을 놓고 있을 만큼 허약하다는 사실을 조정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동남해안지역이 왜구의 출몰로 인해 절망감과 당혹감에 빠져있는 동안, 50명이나 70명 쯤 되는 왜구가 상륙하여 대담하게도 남경 주위
지방을 약탈하였다. 남경은 제 2의 수도로서 12만에 달하는 수비군이 있는 곳이었으니 이러한 약탈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정은 명의 방어체계와 후방 관리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척계광이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서 나섰다.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우선 새로운 군사를 조직해야만 했다.
< 척 계 광 >
조정은 명의 방어체계와 후방 관리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척계광이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서 나섰다.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우선 새로운 군사를 조직해야만 했다. 그의 군사저작인 <기효신서(紀效新書)>라는 책에는 병사
모집 절차, 월급 액수, 병사 배치의 기본 원칙, 직접 고안한 군기와 군호(軍號), 직접 기안한 전략과 훈련 계획, 군대 내부의 예절,
직접 규정한 군법회의의 규칙 등의 내용이 실려있다. 특히 군법회의의 규칙은 집단책임의 원칙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전투 중에 다른 병사의 임무 수행을 엄호해 주지 않는 군관이나 병사들은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전투시
의 식량 조리방법까지 적어놓고 있다. 척계광이 <기효신서>에 적힌 것과 같은 세부사항들까지 관리해야 했다는 사실은 그 이전까
지는 명의 군사제도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효율적인 보급 쳬계도 없었고, 군사기술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군사 책자나 전투 요령, 군사학교도 존재하지 않았다. 군사조직 구성도와 군수품 목록, 전투 요령 등을 다룬 문서가 있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활용되지 않고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척계광의 저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는 지난 수십년 간 임했던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 왜구는 항상 고지에 앉아서 아군을 기다린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그들은 저녁때까지 움직이지 않다가, 아군이 지치고 나면 달려들
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군이 퇴각을 시작할 때, 반격을 개시해서 아군을 바짝 따라붙었다. 왜
구는 항상 자신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사기가 높을 때에만 부대를 움직였다.
그들은 투구에 여러 가지 색의 색줄이나 금은으로 만든 소뿔 모양의 장식을 달았는
데 그 괴이한 모양에 아군은 겁을 먹었다.
적군은 창과 검을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릴 정도로 갈고 닦았기 때문에, 아군은 싸우지 않고
여러 시간 기다리는 과정에서 그 창검의 위용에 기가 죽어 버렸다.
척계광은 군대를 조직할 때, 군호(軍戶)와 군진(軍鎭)을 외면했다. 그의 군대에 지원한 병사들은 절강성 출신이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정부는 군사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 기존의 세금에다가 부가세를 추가하였기에 병사들에게 지급할 자금을 공급할 수 있었다.
척계광은 그의 병사들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비나 바람이 심해서 아무알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다 해도 군복무중에는 어김없이 은 3분(分)이 지급된다. 이 은화는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므로 그 중에는 병사들 자신의 고향에서 온 돈도 있을 것이다. 고향에 가면 귀병들은 농사꾼이다.
그렇지 않은 자가 누가 있는가? 여러분은 이 세금을 내려고 논바닥에 흘렸던 땀방울을 생각하고, 편하게 쉬면서도 은
화를 받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히 생각해야 한다. 세금을 내는 사람들은 일년 간 귀병들에게 식량을 제공해
주면서도 일하라고 독촉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귀병들에게 바라는 것은 왜구와의 싸움에서 그들을 무찌르는 것이
다. 귀병들이 왜구를 죽여서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누가 여러분을 먹여주겠는가? 왜구와의 싸움에서 도망쳐서
만에 하나 군법회의를 모면하더라도, 하늘은 어딘가에서 누구로 하여금 여러분의 목숨을 빼앗게 할 것이다."
척계광은 도덕적인 설득과 고유의 종교신앙을 적절히 조화시켜서 지원병들의 군율을 세웠다. 그는 부대 전원이 적을 피해 퇴각하면
부대장을 처형할 것이며, 퇴각하는 부대를 저지하던 부대장이 전사한 경우에는 그 부대의 부관을 처형할 것이고, 부대원들이 부대
장을 엄호하지 않아서 부대장이 죽게되면 그 부대원 전원을 처형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규율이 실제로 집행된
사례는 아주 적었지만, 그런 협박은 목적을 달성하였다. 척계광의 군대와 싸워 이기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이런 효과를
달성하기 위하여 군율에 자주 의존했다. 싸움은 참담한 패배로 끝났어도 전투 중 훌륭한 행동을 한 병사에 대해서는 포상을 해야 하
며, 반대로 싸움이 크게 승리를 거두었어도 전투 중에 의무를 소홀히 한 사람은 결코 묵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 중에는 1562년의 전투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의 부대는 왜구에게 빼앗긴 다리를 탈환하는 작전을 수행 중이
었는데 첫번째 탈환 전에 나섰던 소대원 36명 전원이 사망하였다. 두 번째 탈환작전에 나선 소대원도 절반이 전사하였다. 그러자 나
머지 병사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그 때 척계광은 공격 재개를 위해서 퇴각한 소대장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래서 결국 척계광
이 이끄는 부대는 적군을 패퇴시켰으며, 그 전투는 척계광에게 만족할 만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척계광의 군율은 때때로 잔혹할 정도였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병사들의 귀를 잘라서 군율을 유지했다. 확증은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가 자신의 둘째 아들의 처형을 명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잔인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는 고집과 끊임없는 감독을 통해서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냈다. 그의 군대는 우천 시에도 쉬지 않고 여러 시간 동안 훈련 및 작전을 수행하였다.
척계광이 채택한 군사훈련법은 군사교관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수해왔던 것이다. 유대유는 그 훈련법을 구술로 전수하는데
힘을 쏟았지만, 척계광은 그 훈련법을 모아서 군사기술 지도서를 펴냈다.
그의 전법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부대의 협동작전에 관한 것이었다. 각 보병 분대는 길이가 긴 무기와 짧은 무기르 배합하고
방어와 공격을 조화시켜서 창검을 사용했다. 왜구와 대적할 때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길이가 12척이 넘는 창이었다. 창은
위장 동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무기로 창을 사용할 때는 적군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아군이 창으로 목표물을 맞추지
못했는데 적군의 사정거리 내에 남게 된다면 아군은 아무런 반격도 가할 수 없었다. 한 분대에 있는 네 명의 창수를 엄호하기
위해서 그들 전면에 네 명의 병사를 배치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오른 손에 대형 오각형 방패를 쥐고, 다른 한명은 소형 둥근
방패를 쥐었으며, 그 뒤에 선 두 명은 가지를 친 낭선이라는 대나무를 휴대했다. 창수 뒤로는 쇠스랑 모양의 당파라는 무기를
쥔 두 명의 병사를 배치했다. 이 열명 이외에 분대장과 취사병을 포함한 열두 명이 분대를 구성했다.
이렇게 완전히 균형잡힌 부대의 명칭은 '원앙진(鴛鴦陣)'이었다. 두명의 방패수는 검을 쥐었는데 그중 큰 방패를 든 오른쪽
사람은 분대의 선두에 서서 전진했고, 왼쪽에서 작은 방패를 든 사람은 표창을 던지면서 적이 있는 곳까지 포복해가서 적을
공격하기에 좋은 장소로 유인했다. 적이 유인되면, 낭선수들은 창수의 공격이 용이한 거리까지 적군을 몰아갔다. 나머지 두명의
당파수는 측면과 후위를 엄호하다가 필요할 때는 두 번째의 공격을 가했다.그들이 든 당파는 위장 동작을 취할 수 없는 것이
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정확하게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이러한 전법은 성공할 수 없었다. 한 병사가 독단적으로 영웅적 행위를 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각 분대의 병사들에 대해서는 집단으로 포상이나 처벌을 주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창수가 엄호병사와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척계광은 거듭 강조했다. 지형이나 적군의 위치 때문에 엄호가 불가능할 때는 분대를 둘로 나누어서 나란히 전진하
거나, 당파수를 뒤에 남겨두고 여덟명의 병사가 일렬 횡대로 서되, 두 명의 창수는 각각 등패수와 낭선수 사이에 섰다.
등나무 방패와 쇠스랑 모양의 당파, 대나무로 만든 낭선을 기본 무기로 사용한 것을 보더라도 척계광의 군대는 농민군의 외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후일에는 대나무로 만든 낭선 대신 사슴 뿔 모양의 금속무기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금속 낭선의 기능
도 적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적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동종의 무기를 두 명의 병사가 사용하게 하는 척계광의 전술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그리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척계광은 화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교전시에 화기를 많이 사용했으며 군관 이하 병사들에게 화기의 중요성을 강
조하고, 황제에게도 그 사실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는 원앙진법을 폐기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 사용되었던 무기들에 비하면 원
앙진법은 일 백년 이상 뒤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화기 등의 발달된 무기와 원앙진법의 부조화는 해결하기 힘든 복잡한
문제였다.
척계광의 군대는 1559년 3,000명의 병사로 출발하였다. 1561년 군사의 수는 두배가 되었고, 1562년에는 10,0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척계광의 군대에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보급관은 일체 없었다. 그의 군대는 여러 부현으로부터 보급품을 제공받았
기 때문에, 현대화된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지속적이며 통합적인 군수공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보통의 군수품 조달 과정은
지방관이 부현에 대해 세금 총액을 부과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휘무장인 척계광이 견본을 만들어 보내면 지방관들은 자
신의 관할 내에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견본품과 유사한 물자를 만들었다. 이렇게 제조된 보급품은 극히 품질이 나빠서 제조된
조총이 터져버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병사들은 두손으로 조총을 잡고 목표물을 겨냥하려 하지 않았다. 조총에
탄환을 장전할 때마다 척계광은 조총의 한계를 경험하였다. 척계광은 후일, 보병 분대마다 두 정의 조총을 지급하면서 조총
수들을 각종 총검류를 휴대한 병사와 함께 배치했다. 현실적으로 조총수를 더 많이 배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
렇게 하면 부대 전체를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척계광이 배치한 보병 분대의 구성은 농경 사회의 구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척계광은 병사를 모집할 때, 성시 출신 자원자는
받아들이지 않고, 농민 출신 자원자만 받아들였다. 그는 성시 출신자들은 교활하고 불량끼가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안정된 수입을 가진 성시의 상업 종사자들이 군대에 자원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병사의 봉급은 적었고, 승진의
가능성도 적었기 때문이었다. 성시의 건달들은 다른 일이 생길 때까지 임시적으로 숙식을 해결할 방책으로 입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척계광이 입대를 거부한 불량배들은 '용모가 준수하고 눈빛이 밝고 움직임이 가볍고 민첩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군대에는 민첩한 병사가 필요하지 않았는가? 척계광의 경험에 의하면, 민첩한 몸놀림을 가진 자들은 적과
대적하면 자기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모색하고 위험에 처하면 탈영하거나 다른 병사의 탈영을 조장하곤 했다. 하여 척계광은
'건실하고 믿음직한' 성격의 병사들을 확보하기 위해 농촌 젊은이들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의 원앙진 전술은 병사들의
개별적인 특성에 맞도록 조직되었다.
그리고 그의 원앙진 전술은 병사들의 개별적인 특성에 맞도록 조직되었다. 예를 들면 두 명의 낭선수는 강한 근육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지략이 뛰어날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우직한 농민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낭선이 무기로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척계광은 전통적인 정치 체계와 농경 중시 사상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묵묵히 군사를 창설하였다. 척계광의 군대는 세습적인
군호 출신의 병사들과 나란히 싸웠으며, 일당 노동자 수준의 봉급을 받았다. 전투가 끝나면 포상으로 특별 수당이 지급되기
도 했는데, 적군의 목을 하나 베어가지고 오면 은 30냥을 지급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1559년 군사 창설 이후, 척계광 군대가 방어된 적진을 공격하고, 정면 공격을 가하면 포위망을 뚫고 근해의 섬까지
왜구를 추격하면서도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은 그의 독특한 전법 덕택이었다. 척계광은 능력에 맞지 않는 전술이나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어떤 일에 몰두하면 그것을 철저히 파고들었다. 그의 전술서는
세부적인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병사들이 행군 중에 소속 부대를 벗어나기 위해서 용변이 급하다는
핑계를 댄다든지, 적군의 공격이 있으면 어떤 병사들은
'얼굴빛이 노래지고 입안이 말라붙어서 그 동안 배웠던 모든 전법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화기 중에서 불발하는 화기의 비율이나 발사되었지만 적군을 맞추지 못한 탄환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예견하기도 했다. 그는 솔직히 지적하기를, 전투 중에 자신이 가진 기술의 5분의 1 이상을 활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자신이 가진 기술의 절반이라도 활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하무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을 남긴 것은 비관적인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엄연히 인정하면서,
적군과의 싸움이 있기 전에 보다 강도높은 훈련과 신중한 계획에 몰두했다.
<이사진은 내용과 상관없음>
전투 2, 3일 전에 척계광은 두 시간마다 전투계획서를 다시 쓰도록 지시했다. 그는 정찰대를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붉은 색과
검은 색 물감으로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여 군관들에게 작전지시를 했으며, 지형을 본뜬 진흙 모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부대는 그해 특정한 날의 일출시각과 일몰시각을 표시한 도표를 휴대하였고, 시각을 계산하기 위해서 740 개의 구슬이 꿰어
진 줄을 사용해서 보통 사람의 한걸음에 구슬 하나씩을 헤아렸다. 이런 방식으로 척계광은 공격 개시 전에 여러 가지 가능한
각도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또한 그는 공격에 직접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총사령관으로서 척계광은 그의 병사들을 잘 파악
하고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격부대를 지휘한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울 정도였다.
1563년 척계광은 당시 무관 중의 최고 직위라고 할 수 있는 복건 총병(總兵)으로 임명되지만, 그의 군대를 전략적 계획에
거의 관여시키지 않았다. 척계광의 군사는 전술 부대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전투시에 화기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
할 수 없었고 논이 많은 남쪽 지역에서는 기병대를 사용한 공격도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무기를 혼합 사용하
는 다양한 전술을 발견 시킬 기회가 없었다. 그는 대부분 평야에서의 전투는 피했다. 척계광이 선호하던 전술은 적군의 요
새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강력한 적진을 공격할 때는 적군이 예측하지 못했던 공격로를 선택하여 재빨리 공격을 가하
는 방법을 사용했다. 척계광의 군대는 험한 지형에서의 어려운 기습 작전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부대였다.
매복이 가능한 지점에서는 항상 매복공격을 구사하였다. 그의 군사는 간소한 장비만을 지녔기 때문에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총병 척계광은 전투 개시 직후에는 일부러 손실을 감수하였다. 그는 실전 경험을 통해서 대접전 후에는 왜구의 전열이 흩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구들을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 특히 중국인 원주민들이 저항할 의지를 잃고 무기를 버리곤 했
다. 그의 군대는 승전을 거듭해서 다른 관군은 몇 달이 걸려도 진압할 수 없는 왜구의 분대를 몇 시간 안에 전멸시키는 명성
을 얻게 되었다. 척계광은 이러한 작전을 구사할 때는 대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기 위하여, 적군보다 월등히 많
은 병사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1563년 말의 동계 전투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그가 거느린 군사들은 수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거의 5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1564년 봄, 명군이 적의 근거지를 포위하게 되면서 왜구 소탕 작전은 양상이 달라졌다. 해안지방의 약탈이 더
이상 이득이 없다고 생각한 왜구는 퇴각하기 시작했다. 약탈을 계속하는 자들은 광동으로 몰려드는 중국인 집단이었다.
광동은 중국과 일본과의 무역 중심지와는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명은 드디어 왜구와의 전
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나머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해적들은 중국 내부의 반도로 규정하고 엄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
1583년 초에 척계광은 북방 국경을 지키는 임무에서 벗어나 광동의 한가로운 직위를 담당하게 된다. 그는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2년 후 고향에서 보던 업무에서 은퇴하게 된다. 척계광은 결국 새해가 오기 전인 1588년 말에 숨을 거두고 만
다. 자작시로 남긴 아래 구절은 척계광의 생애를 가장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일년 삼백육심일간 나는 항상 병기를 손에 쥐고 말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1557년 척계광은 소흥에서 모집한 3천명의 병력을 훈련시켰다. 다음해인 1558년 주산 군도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승리하지 못했으며 척계광은 소흥 토박이들에 대해서 실망한다. 그는 도회지 청년들을 뛰어난 병사로 훈련시키는 것이 힘들다는 판단하에 오직 농촌 출신 청년만 병사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다음해 여름 척계광은 자신이 수비하는 지역에서 왜구를 몰아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파면당한다. 윗사람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척계광은 항주에서 60마일 가량 떨어진 이우 지역에서 지원자 3천명을 모집해 자신의 방식대로 훈련시킨다.
척계광이 발명해낸 훈련체계들 중 가장 주목받는 것은 대장 1명, 등패수 2명, 낭선수 2명, 장창수 4명, 당파수 2명, 화병(취사병)1명, 도합 12명으로 구성된 전술 대형 원앙진(鴛鴦陣)이다. 새로 설립된 보병분대가 원앙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앙은 암수 한쌍 중 한 마리가 죽으면 다른 한마리도 따라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척계광은 각 원앙진의 대장이 부상을 입지않도록 엄격한 군율을 적용했다. 만약 전투 도중 대장이 전사하고 패배를 당할 경우 대장이 전사한 원앙진 분대의 나머지 생존자들도 모조리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원앙진을 이루고 있는 각개병사들은 대장이 전사하는 것을 막기위해 전투내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적과 싸워야만 했다.
1) 분대장 1명 (분대의 깃발을 들고있다.)
2) 만곡도와 등패로 무장한 병사 2명
3) 낭선으로 무장한 병사 2명
4) 장창으로 무장한 병사 4명
5) 당파로 무장한 병사 2명
6) 취사 및 잡일을 담당한 화병(火兵) 1명 (병참 업무 담당)
나이가 어리고 몸집이 중간이며 신체가 유연한 자 두 명을 제1 제2로 삼아서 등패수로 충원하고, 나이가 장성하고 신체가 커서 힘이 센 두 사람은 제3 제4로 삼아서 낭선수로 충원하며, 정신과 골력이 있는 네 명을 제5 제6 제7 제8로 삼아서 장창수로 충원하고, 살기와 담력이 있는 자 두 명을 제9 제10으로 삼아서 당파수로 충원하며, 사람이 용렬하고 녹록하여 남의 부하가 되기를 좋아하는 자 한 명을 제11로 삼아서 화병(火兵)으로 충원한다.
- 기효신서(紀效新書)중에서 -
척계광은 개인의 적성에 맞게 장비를 지급해서 훈련시켜 전투력을 극대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개인의 기량을 중시하던 그 이전의 병학사상에서 한 걸은 나아가 다소 기량이 떨어지는 개인을 적성에 따라 묶어 집단적으로 운용하려는 특징을 보여준다.
등나무로 만든 둥근 방패(rattan shield). 또는 이 방패를 사용하는 무예를 가리켜 등패라고도 한다. 방패는 등나무의 줄기를 휘어서 둥글게 바탕을 만들고 뼈대를 엮어 대나무껍질로 얽는데, 바깥쪽은 가운데 거죽으로 불룩 나오게 하여 중심에 귀면(鬼面)을 붙이고 안쪽에는 등나무 줄기로 손잡이를 만들었다. 소쿠리의 뚜껑을 짜는 것과도 유사하다.
적 방향으로 향한 부분은 둥그렇게 융기되고 그 가장자리가 바깥으로 휘어 있어 적의 화살이나 창 공격이 뚫지 못하며 빗겨가게끔 세밀하게 설계가 되어 있다. 등패를 왼손에 지니고 오른손으로 칼을 사용하여 적의 칼이나 창,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는 데에 사용했다.
낭선은 노다치(野太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개발된 병기이다. 낭선을 이용해 적의 칼날이나 왜구를 움직이기 어렵도록 옭아매는 동안 다른 원앙진 부대원들이 왜구를 해치웠다. 낭선에는 단단한 나뭇가지와 강철 발톱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노다치로는 낭선을 잘라내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위의 그림은 전술 상황과 지형에 따라 각기 다른 3가지 방식의 대열을 갖춘 원앙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원앙진의 병사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에 따라 상호 병사들간에 협동하고 보조하면서 싸우도록 훈련받았다. 규모가 작은 원앙진의 경우 5명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장까지 포함해서)
원앙진의 전투 방식은 아래와 같다.
A) 낭선수 1명은 등패수 1명 옆에 붙어 낭선을 이용해 왜구와 그의 무기를 얽어매서 등패수를 보호한다.
B) 장창수 2명은 낭선수가 공격에 노출되지 않도록 적을 창으로 찌른다.
C) 만곡도와 등패로 무장한 병사는 장창수가 창을 너무 깊게 짤러 적의 공격에 노출될 경우를 대비해 그를 보호한다.
D) 당파수들은 후미에서 지원한다.
척계광이 창안한 절강병법으로 훈련받은 절강, 복건성 지역의 병사들은 임진왜란에 참전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점령하고 있는 평양성 탈환당시 매우 큰 활약상을 보였다.
절강병이 압록강을 건너왔을 때 이들이 사용하는 방패와 낭선, 장창과 당파등의 기예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보는 것으로 명군이 평양으로 진입한 다음 먼저 화포를 발사하고 뒤이어 화전을 발사하여 왜적의 기를 꺾고 말았다. 명군은 곧 장창과 당파를 사용하는 병사를 동원하여 각기 운용 방식에 따라 사용하였는데, 만약 적이 먼저 돌진해 오면 낭선부대를 집중시켜 대기하고 만약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등패수들이 등패를 들고 전진한 결과 적은 크게 패주하고 말았다.
왜군의 장기는 원거리에서는 조총부대에 의한 연속사격으로 상대방을 제압한 후에 근접전투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병접전으로 조선군을 압도했던 것이다. 왜군의 육전에서의 연전연승은 전술과 무기체계상에 있어서의 우월성의 경과였다. 그런데 절강병들은 원거리에서는 화포로 일본군의 조총부대를 압도했으며, 근접 백병전에서는 다양한 무기체계로 단병접전에 강한 왜병을 압도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병서(兵書)인 ‘병학지남연의’에는 원앙진의 위력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나라 군대가 평양으로 진입한 다음 먼저 화포를 발사하고 뒤이어 화전(火箭)을 발사하니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왜적들은 마침내 기가 꺾이고 말았다. 적이 먼저 돌진해오면 낭선부대를 집중시켜 대기하고,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등패수들이 등패를 들고 전진하니 왜적이 패하여 도망갔다. 천하무적이다.”
1588년 에 출간된 척계광 장군의 군사교범 "기효신서"에 묘사된 중국 군대가 사용한 포르투갈식 화승총 삽화이다. 이 조총은 포르투갈 화승총을 본따서 만든 왜구들의 조총을 복제해서 만든 무기이다. 중국군대는 조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1558년 무렵에는 중국인 대장장이들이 중국 군대를 무장시키기 위해 절강에서만 거의 1만정에 가까운 조총을 생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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