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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우연히 무오사화와 이극돈 항목을 나무위키로 검색해봤더니
종전에 알고 있던 내용과 다른 요상한 내용과 관점으로 쓰여진 것 같아 까페 여러분들의 의견을 여쭙고자 글을 써봅니다.
이극돈-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D%B4%EA%B7%B9%EB%8F%88
1. 이극돈과 김일손에 대한 부분
1) 김일손은 검증도 안된 비난성 카더라를 너무 많이 실었던 엉터리 사관으로, 그의 기록은 신빙성이 꽤 떨어지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무오사화 항목 참조. 김일손 등의 '정창손에 의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 그 출세한 전라도 관찰사 자리에서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군 기생과 놀아났다.' 등의 비아냥거리는 기록이 남았는데, 이에 얼굴을 붉히고 수정을 요청했다고 한다.면전에 바로 수정펀치를 날리지 않은게 신기하다.
* 사관 김일손이 검증도 안된 비난성 카더라를 많이 실었다는 건 나무위키 글쓴 인간이 내린 사적인 결론이 아님? 게다가 (이극돈)이 면전에 바로 수정펀치를 날리지 않는 게 신기하다고?
이건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뭔가 김일손에 대한 개인적인 사심마저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 뭐 계속 봅시다.
2)유자광이 사태를 키운 무오 사화에서도 "임금이 사초를 보게 되면 후세에 직필이 어려워진다"면서 세조를 까는 부분만 절취하여 올렸다.[7] 이걸 올린 것도 잘못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김일손의 스캔들성 사초에 대한 소문은 퍼질대로 퍼져있었고, 연산군은 분노해서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김일손이 죄를 면할 방법은 전혀 없었으며, 이극돈은 실록청 당상으로서 그나마 희생자 수를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 김일손에 대한 이극돈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지금까지는 어떤 왕도 감히 보지 못했던 실록 사초를 뽑아 연산군에게 갖다 바친 자체에 대한 비판은 일언반구도 없고 오히려 실록을 까발려 왕에게 건네줬던 이극돈이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애당초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발췌해서 갖다바칠 정도면 아예 김일손과 그 일당들을 죄다 제거해버리려는 심산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데 말이죠. 그것도 연산군처럼 미치광이한테 갖다바쳤다는 자체가.
3) 조의제문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무오 사화 이후로 그는 늦게 고한 죄로 삭탈 관직되었다. 이후 복권되어 광원군에 봉해졌으나, 정승은 지내지 못하고 연산 7년에 병조 판서만 지냈다. 연산 8년에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반려당했고 다음해 사직했다가 직후 절묘하게 죽었다. 연산군은 이때부터 광주 이씨 집안을 경계하게 되어 이후 갑자 사화 때 트집잡아 집안 자체를 멸문된 것과 다름없게 만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조카인 이세좌가 바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인물이니 집안이 무사하면 그게 신기한 거다. 만약 1년만 더 살았어도 "무오 사화의 수괴(?)가 갑자 사화에서 목이 날아갔다"는 아이러니한 결말을 받았을 것이다(...) 근데 실제로 갑자사화에서 부관참시되었고 그 이후 중종반정으로 회복한 후에 고신 뺏긴 거라...
이 영향은 중종반정까지 미쳐 5대손인 이이첨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이첨은 흑화. 이렇게 양쪽에서 공격받았고 중종반정 이후엔 더욱 지탄받은 불운한 인물. 알고보면 무오사화의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인데도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해버리고 만 케이스다.[8]
* 글쓴이의 계속되는 이극돈에 대한 쉴드가 죽이죠? 사초를 갖다바쳐 수많은 선비들을 미치광이 연산의 손에 죽게 만든 무오사화의 장본인이 단지 눈치보며 늦게 고한 죄로 삭탈 관직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극돈도 한사람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세좌는 성종이 시킨 것을 그래도 시행했을 뿐인데 스스로의 적극적인 판단에 의해 사화가 일어나는 데에 크게 공헌한 이극돈과는 상황이 다르지 않을까요?
왜 이런식으로 이극돈에게만 유리한 정황을 나열하냐 생각해보니까 이 글을 쓴 사람은 아마 이극돈의 후손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원균의 후손으로써 원균의 명예회복을 힘쓰고 있는 원모씨라는 정치인이 있죠? 결이 서로 같은 것 같습니다.
https://namu.wiki/w/%EB%AC%B4%EC%98%A4%EC%82%AC%ED%99%94
2. 무오사화에 대한 부분
1)그러나 이극돈이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들의 임명을 반대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림, 특히 김일손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사람됨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당장 사림파는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훈구파에 의해 옹립된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등용한 세력이었지, 그 능력을 인정해 등용한 자들이 아니었다. 성종이 이들을 중앙 정계로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그냥 초야에 묻혀서 학문이나 닦던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실무 능력은 형편 없었다. 즉, 훈수나 둘 줄 알지, 실제로 시키면 솜씨가 엉망인 이들이었다는 것이다.[5]
그 중에서도 김일손은, 후술할 사초(史草) 건(件)만 보더라도, 춘추관의 사관이라는 인간이 사초를 알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쓰는[6], 관료로서의 능력이라곤 없는 인간이었다. 근데 그런 인간을 당하관(정 3품 이하) 인사, 즉 실무관리직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7]인 이조정랑에 앉히라고 하니, 상식적으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김일손과 사림 무리에 대한 계속되는 디스질.(아마 이극돈 나무위키를 쓴 인간과 동일인일듯) 5), 6)번이 출처이겠거니 해서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보니
[5] 조광조도 학자로는 적격이었을지언정 정치가로는 낙제급으로 영 아니었다. 그런 걸 감안해보면 알 수 있는 셈.
* 사료같은 출처가 아니라 걍 지생각을 끄적여 놓은 것 뿐이네요 ㅎ. 사림의 무능을 비판한다면서 조광조를 끌어들임. 조광조에 대한 지견해가 맞다친들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가 아닐 수 없군요, 즉 A가 그러니 B, C도 당연히 그럴꺼라는 논리측에도 안 들어가는 추축일 뿐. 조광조도 무능하니 모든 사림도 무능했을 것이다. 이게 논리인가 막걸리인가?
[6] 애초에 조의제문 같은 잡글을 역사 기록인 사초에 끼워 넣는 것 자체가 해선 안될 짓이다. 쉽게 말하자면 국가기록원에 들어가는 공식 자료에 정부의 공인하는 타이틀도 없는 재야 교수의 칼럼을 멋대로 넣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민주사회에서도 공인기록물의 중립성에 흠결을 내는 문제인데, 심지어 전제왕정인 조선시대에 임금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글을 넣었으니...
* 역시 지만의 견해 ㅋㅋㅋ 딱보니까 얘는 조선왕조실록이란게 뭔지 모르는 모양임. 실록을 왕마저 못보게 한 것은 왕과 권력마저도 역사의 비판을 피할수 없다는 뜻이고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이 다른 나라들의 관급역사서에 비해 위대하다는 건데 개똥도 안되는 지만의 철학이나 나열하고 자빠졌군요 ㅋ 그럼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죽인 것은 찬탈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사관입장에서 그런 견해조차도 내뱉을 수 없단 말인가. 게다가 지생각을 나열할 거면 출처 표기라는 걸 대체 왜 하냐?. 출처가 고로 지생각임? ㅋㅋ 참 희안한 양반일세 ㅋㅋ
2) 거기에 후술하겠지만, 이극돈의 행동이 무오사화를 키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극돈은 연산군을 최대한 말리려고 애쓴 사람이다. 사초를 보려는 연산군을 저지하고, 무오사화 전개 과정에서 이후 문제가 되었던 다른 사관들의 사초를 내놓지 않은 것도 이극돈이다. 물론 그가 사림파를 옹호한 것은 아니지만[16], 그렇다고 강경 처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 아니 그러니까 애당초 극돈이가 왜 사초를 연산군한테 갖다바쳤냐고요?? ㅋㅋ
3) 일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아니, 뭐 이런 걸 가지고 저러는 거냐?’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일손 일파의 문제점은 매우 심각했는데, 바로 자신들이 못마땅해하는 세조와 그 후손들인 국왕들에게서 봉록을 받아먹는 관료 생활을 하면서, 정작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글을, 그것도 국가의 공식 공문서이자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에 들어갈 자료인 사초에 적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진정한 문제는 후자의 사초 문제. 물론 전자도 분명히 지탄받아 마땅한 짓거리였지만, 후자는 미래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 더 심각했기 때문이다. 김일손 일파는 속으로는 "세조는 왕이 아니라 모리배들이 세워준 우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게 세조가 주는 벼슬을 받고 국가의 녹을 먹어온 것이다.[62] 그 뿐만 아니라, 벼슬살이를 하면서 그 관직을 이용해 몰래 몰래 비난을 일삼아온 셈이었다. 이것은 기군망상(欺君罔上,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농락함.)의 죄로, 당연하게도 전근대 시대엔 대역죄나 다름없었다. 당장에 김종직의 제자라던 표연말과 홍한이 스승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벼슬받고 녹을 받았으면 신하의 입장에서 군주를 비난하면 정녕 안되는 겁니까?. 그럼 자타공인 충신이라 여겨지는 사육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들도 역시 한때 세조의 녹을 먹은 적이 있어요. 설령 왕이라도 비판, 비난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나라가 바로 조선시대잖아요. 신하가 간하는 것을 두고 능상이라고 지껄이고 언로를 막는 데에 인생을 소비했던 연산군에 대한 기막힌 옹호 논리가 아닐 수 없군요.
표현말과 홍한이 저런 반응을 보였던 거에 대해 이극돈에 의해 조의제문이 까발려진 다음 지들 목숨을 보존하자는 것임은 누구나 쉽게 추론할 수 있는데도 마치 연산군의 관점에 적극 감복하여 지지해준 거로 호도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 사건의 가장 큰 본질이라 볼 수 있는 사초를 왕에게 직접 갖다바쳤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 의식이 없어 보입니다.
4)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 성종 때는 주로 사관으로 활동했다. 다만 업무능력은 정말 떨어져서 사관의 업무인 사초 작성을 자기 멋대로 뒤죽박죽 써버렸고, 이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성종실록을 집필할 때 실록청 당상 윤효손(尹孝孫)은 '(김일손의 사초는) 날짜에 따라 기사(記寫)하지 아니해서, 어느 날 아래에 편입해야 될는지 모르겠다' 고 언급하는 등 실록청 관리들에게 무시당할 정도였다.[42][43]
* 김일손이 실록청 관리에게 무시당했다는 주장인데 출처 표기 42), 43)를 한번 봅시다
42)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5일 기미 2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사초 사건에 대한 성중엄의 공초 내용
성중엄을 형장 심문하니, 공초하기를,
"윤효손(尹孝孫)의 이른바 ‘일손의 사초는 날짜에 따라 기사(記事)하지 않아서 《실록》에 실을 수 없다.’ 한 것과, 이극돈의 이른바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라.’는 등의 말은 신이 확실히 이목에게 말했으나, 나머지는 신이 말한 것이 아니옵니다."
하였다.
43) 쉽게 말하면 역사서 초본을 기록하는데, 정리하기 편하게 연도별로 정리해놓아야 할 것을 '1453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1423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고, 1462년에는 이런 일이...' 처럼 개판으로 정리해놨다는 것이다.
* 42)의 경우 이제서야 출처가 나오네요. 김일손이 사관으로써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 나오긴 하는데 문제는 그게 형장에서 이뤄졌다는 것이죠. 즉 온갖 고문에 못이겨 나온 내용이 저 정도일 뿐이고 저 내용으로만 봐도 "날짜에 따라 기사하지 않았다"는 기술적인 오류에 대한 문제만 언급되었지 김일손 사초의 내용이 왜곡되었다는 언급은 없다는 겁니다. 43)의 경우 42) 기록에 대한 대한 글쓴이 견해일 뿐이므로 논의할 일고의 가치도 없겠죠. 특히 "개판으로 정리해놨다"는 것과 글쓴이가 주장하는 중대한 왜곡이라는 것은 가히 안드로메다급 개념 차이입니다.
5) 이극돈은 당대 최고 명문 광주 이씨로서, 무오사화 당시 그의 벼슬은 좌찬성이었다. 다시 말해 차기 정승 1순위 자리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 때문에 다시는 정승직에 못 오르고 판서로 관직을 마치게 된다. 거기다가 어찌 보면 아무 잘못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후세에는 무오사화의 원흉, 주모자로 낙인찍히게 되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무오사화의 가장 큰 피해자들 중 하나다.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해 버리고 만 셈이다. 더군다나 그 5대손인 이이첨도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까였다.
* 계속되는 이극돈에 대한 찬양~ 그러니까 김일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사초를 연산군 같은 왕에게 갖다바친 게 문제가 안된다는 건가요?. 그런 부분은 쏙 빼놓고 이극돈은 아무 잘못이 없고 피해자랍니다 ㅋ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했다? 진짜 글쓴이가 이극돈의 문중 후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극돈에 대한 과한 변호로 일관하는데 참으로 눈꼴 사납지 않나 싶군요 ㅋ
3) 정리하며
* 그럼 이극돈과 배치되는 김일손이라는 사람은 과연 칭송받아야 되는 사람일까요? 따지고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해당 나무위키에서도 나와 있듯이 확인이 안된 풍문을 사실과 철저하게 가려내지 못하고 어쩌면 당파적인 입장에서 서술되었다고 의심받을 수 있는 부분들이 아예 없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사초라는 건 실록편찬 과정에서 걸러지고 교정되는 수많은 기초 자료일 뿐이죠. 편찬 과정에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해 사실이라 판단되면 실록에 실으면 되고 아니라면 거르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이극돈의 경우. 자신이 실록 편찬 책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원한에 눈이 멀어 평소에 안 좋게 봤던 김일손과 그 무리들을 무력으로 처단할 목적으로 사초에서 민감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편취해 연산군 같은 인간말종에게 갖다 바쳤다는 게 큰 문제라는 겁니다. 나무위키 작성자는 이부분에 대한 어떠한 문제의식 없이 단지 김일손이 자행한 "능상"의 문제만 부각시키고 있어요. 김일손을 비판하는 것이 반드시 이극돈과 연산군을 소위 올려치기 할 문제가 아닌데도 나무위키의 글쓴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골적으로 이극돈만을 찬양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예 종국에는 이극돈 피해자론까지 들먹이면서.
게다가 상당수의 출처라는 게 신빙성있는 자료가 아니라 자기만의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별로 옳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강력한 전제 군주정에 대한 열망과 동경심.. 대간 등 당시 조선의 언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요. 물론 세조의 자손인 연산군의 입장에서 볼 때 김일손의 사초와 그의 스승 김종직의 시는 자신의 뿌리를 부정해버릴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짓거리일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연산군과 권력자들의 입장일 뿐이지 거기에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까지 연산군의 입장에 빙의, 견지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어쨋든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죽이고 단종의 충신들까지 죽였던 것은 팩트가 아닙니까. 당시 조선 선비들이 그러한 문제 의식을 품었기에 오늘날 후손인 우리가 사실관계를 대강 파악하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어쨋든 이런 극단적이고 편협한 사심을 가진 인간들이 마치 지식인양 나무위키에 함부로 글을 써대는 거 참 문제라고 봐요. 역사에 관심이 별로 없는 다수 대중들이 이런 내용들을 접했을 경우 불필요한 편견을 가질 우려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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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딱 보니 전형적인 사림 = 무능, 훈구 = 실무 능력자 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쓴 글이네요;; 그리고 애초에 사림과 훈구가 그렇게 칼로 무치듯 나눠지는 것도 아닐텐데.
백번양보해서 하기 싫은데 미치광이한테 같이 죽기 싫어서 사초 가져다 바친 걸 수 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의 책임이 없는 건 아닐텐데 이극돈 쉴드 하려고 저런 식으로 반대편 깍아내린 다는게 참....
여담이지만 보통 사림 = 사대주의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 붙던데 (나무위키 논리대로라면 훈구파인) 이극돈도 대놓고 '중국은 우리나라한테 엄청 잘해주는 좋은나라에염~' 했던 건 안 함정.
제대로 된 출처라도 제시했다면 뭐 이런 의견도 있는갑다 했을텐데.. 출처랍시고 살펴보면 죄다 지생각만 잔뜩 늘어 놓은 것 뿐이니. 참 뭐라 할말이 없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