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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엽이 지고 가로수 플라타너스 넓은 잎이 이리저리 뒹굴어 가던 쓸쓸한 사춘기 시절의 어느 가을날, 학교를 파하고 스산해 지는 하늘에 외로움과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던 나는 나의 애마 구닥다리 자전거를 타고 멀리 떨어진 미술부 친구 놈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기실 친구 놈 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할 뿐이었고 홀로 발라당 까진 감수성을 주체 못해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고 해야 옳았다.
넓은 신작로 를 지나 논길을 마구 달려 언덕배기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이 보이는 곳에 자전거를 세우고 앉았다. 아래로 끝없는 철길이 굽어져 있고 먼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처절한 궁상에 몰입해 들어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며 그 시절 누구나 한 번 쯤 겪었을 사춘기적 의문을 개똥철학에 실어 그렇게 사색에 잠기고 있었을 때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처음 집을 나설 때부터 하늘이 어둡다 생각했지만 구름이 조금씩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순간 하늘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습기가 묻어있었다. 올려다 본 하늘엔 기어이 물방울이 똑 하고 얼굴에 떨어졌다.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개똥철학이고 뭐고 간에 일단 이놈의 비부터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집은커녕 친구 집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체 눕혀 놓은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하늘에선 장대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어느 순간 내 몸은 홀라당 졌어 있었다.
하늘은 벌써 캄캄해 져 있었고, 새로 난 아스팔트 도로에 접어들었을 땐 이미 내리는 가을비가 시간이란 실타래를 풀어 헤치며 밤이라는 공간 속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화물트럭에서 비추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은 플라타너스 잎들이 빗물을 먹어 반짝이고,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동그랗게 뽕뽕 솟아 팅겨 오르며 ‘촤르르.......’ 굵은 바퀴 굴러가는 마찰음의 화음과 함께 환상의 나라로 들어가는 착각을 불러 일으켜 주길 몇 번, 다시 캄캄한 공간 속을 지난 환상의 잔상에 맡긴 체 그렇게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저 멀리 도로 가에선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숨은 멎을 듯 가슴까지 차오르고 있었고, 내리는 빗물과 땀방울이 합쳐져 눈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고 보니 그 불빛이 무진장 반가웠다. 아마도 만화가게나 아님 구멍가게거나 작은 코딱지만한 분식집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 교문을 지나자 뜨문뜨문 가게가 보이고 내 처음의 생각처럼 작은 유리창에 페인트칠이 벗겨진 분식집이 천막을 밖으로 친 체 그렇게 반기고 있었다.
밖에 내어놓은 화독엔 어묵냄비가 올리는 따신 김은 어두운 공간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고, 어눌한 불빛에 안에선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내리는 비는 지친 기색도 없이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자전거를 대충 세워놓고 유리로 된 문을 드르륵 하고 열고 들어섰다. 내 몸에선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좁은 분식점 안에는 낡은 몇 개의 탁자가 놓여있었고, 학교 파하는 시간엔 그렇게 붐볐을 그곳엔 아이들의 낙서만이 벽마다 황칠하듯 삐뚤삐뚤 자유에 갈망하고 있었다.
꼬질 한 젊은 아주머니 한 분이 비에 홀라당 젖은 나를 보는 눈에 애처로움과 약간의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내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확인 한 아주머니는 마른 수건을 한 장 건네주며 어린 학생임을 확인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머리에 떨어지는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대충 닦고, 옷에 묻어있는 물기를 떨어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나를 향해 쏘아보는 강열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같은 동성이 아니라 양극과 음극이 서로 끌어 당기 듯, 성이 다른 암수 끌림이 묘하게 발산하는 강한 빛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얼굴 따끈 거림에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겨가니 아니나 다를까. 작은 구석진 곳에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하나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쏘는 시선과 그 여학생이 발산하는 시선이 좁은 공간에서 마주쳤다. 내 눈에 氣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 강렬한 빛에 실명을 하고 말았을 것이나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강렬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굳이 피하지 않은 그 여학생의 당돌함에 놀라서였을 것이었다. 아마 상대의 눈빛을 거둬가지 못하게 끌어당기는 대단한 힘이 그 여학생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보는 여학생과 5초간 흔들리지 않고 마주한다는 것은 무진장한 용기가 아니고선 못할 일이었으며 그 여학생의 당기는 듯 눈빛이 없었다면 나는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었다. 다만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그 맑은 눈망울은 가끔 깜빡 깜빡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은 내게 대단한 관심을 보이는 행위였고, 어디 거부 할 수 없는 깜빡이였으며, 한 단계 넘어서자면 유혹의 눈빛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져 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고삐리 이년차가 거부하기엔 너무나 빤 한 눈빛에 레이져 광선이 담겨 있었음을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 여학생의 얼굴을 어디선 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었다. 그랬다. 크고 둥글고 투명한 눈빛에 뽀오얀 얼굴과 티끌하나 없는 피부가 그 때 한창 잘 나가던 가수 김세화와 배우 유지인을 반반씩 닮아있었다. 오른 쪽 왼 쪽 이렇게 반반씩 닮아있었다면 괴물이었겠지만 적당히 믹서 해 놓은 얼굴이 참 매력적이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을 했다. 이런 촌구석에 어디서 이런 빛나는 보석이 숨어있었던가? 하고는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가만히 보니 이것은 아직 여물려면 한참이나 남은 내보다 두 살이나 어린 중학교 3학년 아이가 그냥 이상하게 생겨먹은 비 맞은 원숭이를 동물원 구경하듯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순간 김이 팍 새는 순간이었다.
“에이~ 씨.......”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알 듯 모를 듯 욕설이 버릇처럼 흘러나왔고 그 욕설을 들은 중학생 아이는 화들짝 놀라는 모습으로 정신을 차려갔다.
다시 현실로 돌아 온 나는 엉덩이에 젖은 물기를 마저 닦아 내고 삶은 계란 두 개랑 어묵 한 사발을 시켜 방금 뻘쭘함을 만회할 요량으로 열심히 입으로 처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의 그 시선에서 느꼈던 강렬함은 계속 내 뒤통수에 남아있었고, 어묵을 목으로 체 넘기기도 전에 삶은 계란을 넣다가 켁켁거리며 숨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사실 배고픔 보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한가한 시간이라 달리 뽀족한 수도 없어 그냥 주머니 사정에 따라 그렇게 입으로 처넣고 있었을 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그 어린 여학생 아이가 마음속으로 악의적 주문을 외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켁켁 대는 나를 본 분식집 아주머니,
“좀 천천히 먹지 얼마나 배를 골았기에 그래 쑤셔 넣노?”
배를 골다니? 이 말 한마디가 순간 내 자존심을 확 구기고 말았다. 배고파 떠도는 거지란 말이렸다. 그리고는 애처롭다는 듯 맑은 사이다 한 병을 주고 갔다. 꽁짜란다.
밖에는 여전히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멀쩡한 놈 거지되는 건 일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가슴에 싸한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진짜로 배고파 떠도는 거지가 된 마음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진짜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눈앞에 물이 고여 왔다. 그것은 진짜 눈물이었다. 아마 우리 엄니가 보셨다면 나는 맞아 죽었을 것이었다. ‘이놈 자식, 집이 없나 밥을 굶기더나? 네 에미가 죽었나?’ 그러나 어머니 말씀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눈앞에 흐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것이 아니라 무진장 차디 찬 물기였다. 그동안 머리에 남아있던 빗물이 한 줄기 모여 눈으로 흘러 굴러온 것이었다. 에이 씨....... 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자전거 타고 왔어요?”
오빠??? 내 여동생은 집구석에서 응석 부리고 있을낀데? 하며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조금 전 나를 강렬한 눈빛으로 쬐어보던 그 아이였다. 내 시선은 그 아이의 눈을 향하고 있었지만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아이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이 무슨 기현상인가? 하며 내심 짜증스러웠지만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그 아이는 생각보다 키가 컸으며 숙성(?)된 모습이었다.
눈길을 아래로 주자니 봉긋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나는 컥, 하며 숨이 막혀왔다. 입안에 넣고 있던 계란노란자위가 내 목을 한 번 더 억누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거지 행색의 댓가로 꽁짜로 얻은 사이다 병을 입으로 가져가며 시선을 억지로 피했다. 얼릉 대답을 하자니 입 속에 남아있던 삶은 계란은 좀처럼 넘어 가 주지 않았다. 그러자니 한 입 머금은 내 아름다운 입가에선 기어이 참지 못한 노란 국물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그동안 그 아이는 내 대답을 재촉하듯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이 말을 나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냥 그렇게 머금고 있을 수 없어 안간힘을 써 억지로 목에 걸린 계란을 뒤로 넘겼다. 그러나 이제는 가슴이 막혀왔다. 덩어리 체 가슴에서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컥컥대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 아이는 놀라 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기집아 손맛은 매웠다. 주먹으로 쿵쿵 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실어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리는 것이었다. 등짝이 아파 상체를 들고선 그만 하란 시늉으로 손을 들어 사래질 했다. 그러자 이제는 남은 사이다 병을 내 입으로 가져왔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어쩜 이리도 얼굴마냥 마음씨도 이쁠까. 순간 별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마냥 이 아이에 감동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셨다. 정말 이러다 숨 넘어 가겠구나! 고 생각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병에 남아있는 사이다를 몽땅 마셔 버렸다. 가슴에선 조금씩 움직이는 기색이 느껴왔다. 나는 안간힘을 써 마지막 털기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 서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마 신들린 무당이 널뛰기하듯 내 모습은 안중에도 없었다. 얼마를 뛰었을까? 내 앞에서 걱정스레 지켜보던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웃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내 모습에 놀란 분식집 아주머니 새롭게 딴 사이다 한 병을 들고 달려왔다. 잠시 쉬는 틈을 타 그것을 받아 쥔 그 아이는 ‘오빠 이거.’ 하며 내 벌려진 입 속으로 나발 째 밀어 넣고 있었다. ‘이기 미쳤나?’ 이젠 삶은 계란 보다 차디 찬 사이다가 날 죽이고 있었다. 숨이 막혀왔으나 그 예쁜 아이를 손으로 밀쳐 낼 수 없었다. 대신 그 아이의 손에 든 사이다를 내가 빼앗았다. 잠시 손과 손이 스쳐갔다. 이것도 인연이었던가? 순간에도 별 지랄같은 상상력은 여전했으니 지 버릇 개주겠냐 만은 그래도 짜릿한 감흥을 어찌 세월이 지났다 해서 잊혀질 수 있겠는가!
순간이었다. 아이의 정성에 하늘이 감복했는가? 내 입에선 지금껏 진압군에 의해 전몰했던 반란군들의 가스가 한꺼번에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커~~~~억~!”
무진장 굵고 길게 품어져 나오는 그 트림은 생글거리며 걱정(?)스레 지켜보는 아이의 얼굴을 행했지만 큰 불상사는 없었다. 다만 삶은 계란에서 풍기는 비릿한 닭 비린내가 죽였을 것이나 먼 훗날에도 그 느낌을 물어 볼 수 없었다. 쪽팔려서.......
그 아이는 숨이 멎어지는 듯하다가 드디어 임산부 헛구역질 하듯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미안해 할 시간이 없었다. 내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자연 생리현상이었다. 아는가? 심하믄 콧물까지 동원된다는 것을? 난생처음 나는 알았다.
수건으로 잔재가 여전히 흐르고 있는 입을 훔치고 수건을 뒤집어 눈을 닦고 콧물까지 닦았다. 그리고 자리에 다시 앉아 넋을 놓은 체 안정을 취해갔다. 사실 그날 이후 나는 삶은 계란은 절대로 입에 대지 않는 버릇이 생겨났다.
계집아이는 이제 내 앞자리에 앉아서 생글거리며 내 꼬락서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분식집 아주머니의 걱정스런 마음과는 달리 억수로 재미있었으니 어디 할 테면 한 번 더 해보란 식의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었다.
'뭐 이런기 다 있노?‘ 싶었지만 정신을 수습한 나는 가만히 그 아이를 처다 볼 수 없었다. 아무리 내 캉 두 살이란 나이가 있었지만 여자였고, 그것도 무진장 예쁘게 생긴 아이였으니 내 마음은 조금 전의 쪽팔린 기억과 볼 장 다 보여줄 듯 한 행동이 부끄러워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래도 비록 몰락한 사대부라 하지만 반남 박가 판관공파 26대 손인 이 몸이 그 정도에 기가 죽을 수 없다 싶었다. ‘고만 처다 봐라 가슴 녹아내리것다!’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이제 그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니, 아까 자전거는 와 물었노?”
여전히 생글거리며 나를 보고 있던 그 아이는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대답으로 인해 나의 새로운 사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빠, 자전거 타고 왔으면 우리 집 까지 내 좀 태워 줄래요? 아줌마가 우산 빌려 준다 했으니 그 우산 내가 다시 드릴 테니 내일 여기에 가져다 놓으면 되는데.......”
하며 말끝을 흐렸지만 그것도 흥정이라고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내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다.
*
자전거 뒤에 이쁜 아이를 싣고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까 비를 피해 달려오던 그 길을 되돌아 달리고 있었지만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희열에 뛰고 있었고, 자전거 뒤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한 손으로 내 허리춤을 꼭 안은 그 아이의 손길에 어린 날의 혈기는 주체 못할 곳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오르막에서도 힘들지 않았다. 아마 무엇엔가 홀린 듯 특별한 힘이 내 가슴속에서 샘솟고 있었다. 자전거 패달을 밟는 내 다리에 힘이 한껏 들어가 있었다. 그 마감시간은 너무나 빨리 돌아왔다.
그 아이가 사는 동네는 조금 전 홀로앉아 철길을 바라보며 궁상떨던 그 아랫마을이었다.
골목골목을 지나 그 집 마당까지 아이를 바래다주었다. 이미 캄캄한 밤중이 되어 있었고, 아이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었다.
아이의 집은 단촐 했지만 깨끗했고, 여느 농사를 짓는 집 같지가 않았으며 생각보다 나이 드신 어머니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았다. 아마도 늦게 얻은 외동딸인가? 속으로 생각하며 우산을 받아 쥔 내 손에 아쉬움의 떨림이 있었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돌아서는 길, 이젠 처음과는 달리 자전거를 질질 끌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내 허리춤엔 그 아이의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었고 여운이 길게 늘어지길 바랐다. 그리고 천천히 내리는 비를 즐기며(?) 걸어오고 있을 때였다.
그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동네를 막 벗어나자 앞에서 시커먼 물체 여럿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순간 또 다른 형태의 동물적 본능이 팽팽한 긴장으로 감싸오고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빌어 본 그 물체는 근처 농고에 다니는 삼학년 들이었다.
무슨 연유로이 동네로 들어섰냐는 시답잖은 시비에 나는 피식 웃었지만 이미 그 웃음이 체 끝나기도 전에 내 몸은 또랑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그 후, 비 오는 날 처절하게 뒈지도록 터졌다.
보드라운 손길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것은 아이에게 요상한 마음을 먹은 죗값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맞았다. 대단한 맷집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렇게 터졌다.
얼마를 그렇게 맞았을까? 그놈들이 휘두르는 발길질과 주먹질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솔직히 피할 수가 없었다. 자전거를 끌고 혼자서 가는 놈을 여럿이서 달려들어 패는 데에는 장사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이것들이 돌아가며 샌드백 치듯 했으나 나는 그만하길 기다리다 점점 악에 받혀가고 있었다. 그러다 지나는 차 불빛에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본 그 촌놈들은 겁에 질렸는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놈의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데 성공했으나 다시 발길질에 잡은 손을 놓치고 말았다. 내 손에 그 놈의 단추 하나가 들어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아무도 없었고, 여전히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아이에게서 건네받은 우산은 어딜 가고 없었다. 온 몸이 덜덜 떨려왔다.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그놈들이 무슨 이유로 나를 때렸는지 그 이유를 몰라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내리는 비를 향해 악에 받친 고함을 쳤다. 한 마리 포효하는 들짐승이 되어 있었다. 그리곤 몇 몇 놈의 얼굴을 똑 바로 보아온 터라 밤새 찾아다닐까 하다가 쓰러질 듯 내 몸뚱아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빨을 빠드득 갈며 자전거를 찾아 비틀비틀 자리를 떠났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가 시원했지만 그것은 얼굴에 난 상처에 닿는 빗물이었다. 허리가 결리고 옆구리가 쑤셔왔으며 코에선 끈적한 액체가 빗물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몸뚱아리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착 달라붙은 옷이 갈 길을 거부하고 있었고, 속옷까지 홀라당 젖어 느낌이 지랄 같았다.
하이고, 내 팔자야....... 그러게 집에서 엄니가 해 주시는 따스한 밥이나 얻어 처먹고 따신 잠자리에나 들 것이지 무슨 궁상을 떤다고 길을 나서서 이 고생이란 말인가.
나는 그날 밤, 어머니의 걱정과 달리 정 반대의 두 가지 본능에 가슴이 막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다음 날, 나는 학교엘 가지 못했다. 그 꼬라지로 학교로 들어 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사실 몸살과 함께 두들겨 맞은 곳들이 욱신거려 움직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어머니는 恨 같은 것은 가슴에 담아놓지 말고, 보복 같은 거 할 생각은 꿈도 꾸어선 안 된다는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어머니 말씀처럼 그렇게 물 흐르듯 그날의 일을 잊어버리기엔 내 가슴은 아직 만만해 있었고 잊혀지지 않을 만큼의 악에 받친 피가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 결석을 하자 친구 놈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내 망가진 모습을 본 놈들은 ‘천하의 네 놈을 이리 만든 놈이 과연 누구란 말이냐?’ 했싸며, 결석으로 처리 된 것이 아니라 미술부라 어디 대회에 간 것으로 잘 해 놓았으니 염려 할 게 없으니 도대체가 어떤 놈이 내 친구를 이 지경으로 맹글어 놓았는지 이실직고 하라고 난리였다. 그 말을 밖에서 듣고 있던 엄니는 방으로 들어와 절대로 우리 야 땜에 쌈질 같은 것은 해서 안 된다고 다짐을 했지만 이미친구 놈들은 입으로만 “에~” 했을 뿐, 얼굴엔 비장한 의식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 친구 놈들 사이엔 딸랑이란 놈이 끼여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자 얼 마 후, 물 건너 농업고등학교 삼 학년에 다니는 동네친구 싱겁이 놈이 집으로 왔다. 우리 집에 자주 들락거린 터라 이미 내 학교 친구들과도 면이 익어 친구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 놈들은 내 입에선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 말씀처럼 그냥 잊고 지내려는 것이 아니라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그놈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처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재촉에 아무 말이 없자 친구 놈들은 하나 둘 씩 집으로 돌아갔고 딸랑이 놈과 싱겁이 놈만 내 방에 남아 있었다.
나는 전날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 두 놈에게만 털어 놓기 시작했다.
보복을 하자면 120cc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딸랑이 놈에게 기동력에서 도움을 받을 일이 있었고,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과 같은 학교 한 학년에 다니는 싱겁이 놈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 두 놈 다 그 동네를 손바닥 보듯 훤히 꽤 뚫고 있었으며 그 아이의 집안 구조까지 알고 있었고, 그 아이 이름을 말하자 두 놈 다 낄낄 넘어가고 있었지만 서로가 낄낄거리며 넘어가는 이유에 대해 의아해 하고 있었다.
사실인 즉, 그 아이는 두 살이 아니라 나보다 한 살 작은 나이였으며 2남 2녀 중 막내로 형제 모두 서울서 살고 아이랑 어머니랑 둘이서만 고향에서 산다고 했다.
이 시끼들이 이 사실을 우찌 알고 있나 싶었지만 딸랑이와 싱겁이 놈 둘이가 서로들 놀라는 눈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싱겁이 저그 엄마의 동생 형부의 아들이 딸랑이요, 딸랑이 저그 아부지의 동생 처제아들이 싱겁이였다. 하이고, 머리아파라~~ 하여튼 간단히 말하자면 이 두 놈은 서로 사돈 지간이었다. 딸랑이와 그 아이는 친 사촌 간이요, 싱겁이와 그 아이와는 이종사촌 간이였으니.......
짜잔~~~! 하고 내 머리를 때리는 무엇인가 있었다. 그것에는 복잡한 족보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필시 나와 그 아이와의 긴 인연을 예고하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하여튼 인연은 또 그렇게 엮이어 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행운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예쁜 아이는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간 것이었다.
그 아이가 서울로 간 동네는 만주 봉천 개장수 살던 동네가 아니라 이 아니라 관악구 봉천동이었다.
*
달새놈 사진.
그 이후, 비 오는 날 이유 없이 나를 묵사발 만든 그놈들과의 한 판 승부는 각설하고 상상에 맡긴다.
물론 그 아이는 대단한(?) 두 사촌오빠를 둔 덕분에 모든 정황을 알게 되었고, 위로 차 나를 몇 번 찾아왔으며 그 후, 몇 번의 만남이 있었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방학이 끝나 서울로 떠나기 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그렇게 떠나갔다. 가끔 편지 할 것이란 다짐과 함께....... 하이고~ 이쁜것!
물론 홀로 남겨둔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방학 때가 되면 고향으로 내려오곤 했으니 추석명절이나 방학은 신나는 날들이 되곤 했었다. 또한 대학에서 주최하는 각종 미술대회참석차 서울로 간 날들이면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거닐곤 했었으며 영등포 도로공원에서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내가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자 드디어 내게 말랑말랑한 입술을 허락하는 관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다지만 결국 지금의 내 옆풀데기는 그 아이가 아니라 뱃살이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냐고?
이 처절한 이야길 해야 되는가? 시작은 했으니 끝은 내야 되것제?
*답사기 쓰다가 갑자기 어릴 적 생생한 기억속의 갸가 보고싶어
약간의 픽션을 가미해 끌적였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어디서 잘 먹고 잘살고 있겠제?
보고시푸다.......ㅠㅠ*
첫댓글 퇴근시간이 바빠서 대충 보고는 가는디..... 햐! 옛날 생각난다, 그 가시내~ ^^*
헉~~~ 글자 많은 초시님꺼닷! 내일 차근차근 읽어야지이~~~~~~~~
안즉 안 읽었나?
아따 궁금 하기도 하고, 마지막의 그림 출처 "달새놈 사진" 압권 입니다요~~~
"덕수궁 후문 2시 30분..이번에는 제가 먼저 기다리고 있을께요."...우체부아저씨 감사합니다. 이 편지 아직도 갖고 계시는군요... 순정파 초시님..ㅎㅎ /'비오는 날의 수채화' 2편 기다립니다.
보고시푸다...저두요,ㅎㅎ 그때 그아이 보고시푸네요...^^*
사대부 가문 출신이 쓰는 꼬라지 하곤 .....
달새는 아는데 ~~ 달새놈은 뉘신지 ~~~~~?
오랫만입니다. 얻어맞는 장면이 빠지질 않는군요 ㅎㅎㅎ 덕수궁 후문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데 어떻게 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근데요^^* "비오는 날의 수채화" 하고 "달새놈??? 사진" 하고는 무슨 상관관계가 성립하는지 궁금합니다^^* 나도 옛날 생각납니다... 비오는날 그 가시나 만날라꼬 대문앞에서 기다리다 돌아오는길에 마주쳤는데 아무말 못하고 뒷모습만 멍!!! 하니 바라보는데 (그것도 대로변에서 비맞고) 한참후에 보니 상점 아주머니들이 웬 정신빠진놈이 고개를 돌리고 비를 맞고잇나해서 전부 다 쳐다보고 있더군요^^* 그 가시나는 고2때 서울 동명여고로 전학가고 지금 서울서 화가가 되어서 고향 통영문화회관에서에 무슨 전시회도 했다는데.... 보고싶네^^* 디~~~~~~~기^*
기다림님은 남자분? --/'비오는 날의 수채화'는 제가 그냥 적어 논 것인데.ㅎㅎㅎ/기다림님,, 비 안 와도 좋으니 그 이야기 펼쳐보세요.
경복고 시절에 동명 여고랑 미팅을 했었는데....
달새님 경복고? 근처에 진명고랑 했으면 만났을텐데..ㅎㅎ
동명여고 말쌈?내 친구 냄푠이 수학슨상님으로 있는디~~~
초시님여~'봉천동가시나' 저는 처음 제목을 보고 초시님이 왜 봉천동을 가시나 했어요. ㅎㅎㅎ 제목은 표준말로 좀 부탁해여./근데 초시님 글 읽고 남자들이 대거 첫사랑에 빠지고 있네요. 남해대교님, 고운님, 청한님, 기다림님, 다두님은 감추고 있고, 달새님은 없을것 같고.ㅎㅎㅎ..시리즈로 엮어서 올려놓으면 우리 여자들 재미있게 읽을텐데.ㅎㅎ
내가 언니땜에 몬산다...아마 언니 혼자 그렇게 생각했을걸요..ㅋㅋ그럼'봉천동 계집아이'라 하면 더 이상하지..ㅎㅎ
봉천동 지지바? 그것두 좀 그렇지요?
달새님은 빠져요. ㅎㅎ경상도말 잘 모르잖녀..
고운이는 여잔디요??? ㅎㅎㅎ
감추고 있는데 사실은 글빨이 좀 딸려서.... 기다렸다가 나중에 책으로 낼까봐요. ㅎㅎㅎ
ㅎㅎ. 저도 글자가 많아서.. 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지금 읽었네요^^ 여고 시절로 돌아간듯한 감흥에 젖어 잠시 아름다운 상상을 했습니다^^ 저도 그 나이때 지를 좋아하던 남학생이 있었을테니 말이죠 ㅍㅎㅎㅎ ... 참으로 아련한 추억들이지요~~ 돌아가고파~~^^
나도 그머슴아 보고 잡퍼지넹~
ㅎㅎ 너무 재미있어요.. 초시님 고마워요.. 지친 마음에 엔돌핀이 팍팍 꽃혔답니다...^^
저도 글자수가 많을 거라 미루어 두었다가 오늘에야 읽었어요... ㅎㅎ.. 저도 이참에 첫사랑 고백기 한번 써 볼까나 ㅎㅎ...글구 그 예쁜 편지 보관하고 있다가 뱃살공주님한테 들키면 클나요. 보안철저^^
내가 오늘 바뻐 못 읽었는데요...근데 그때 연애편지 여직 가지고 있는건 너무 하지 않아요? ㅋㅋ~ 한편으로 나쁘지도 않네..내도 워낙 많이 한 짓이라~누군가가 아직도 내 편지를 가지고 있다면 행복할거 같어~
아!!..가슴이 말캉말캉해지는거이............맴이 요상하다...그 놈의 말랑말랑한 입술때문에......ㅎㅎ 이기 미친나?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