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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미독환사 전유는 신년(新年)을 하루 남기고 아미산에 들어섰
다.
'일수천명(一手千命)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
멀리 천지봉의 모습이 비쳐졌다.
무산을떠나 아미산까지 오는 동안 새롭게 부각된 신의의 말을
수 없이 들었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죽어 백골이 된 시신도
새살이 돋으며 살아난다는 소문이었다.
원래 소문이야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일수천명이라는 외호(外
呼)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저어도 일세(一世)
를 유아독존(唯我獨尊) 격으로 풍미할 만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또한 의(醫)와 독(毒)은 가는 길이 다르지만 같은 영역이기도
했다. 신의라면 그만큼 독에 관해서도 일가견이 았다는 소리였
다. 다른 사람들은 가볍게 흘려 버릴 인물의 탄생이지만 독문
에 몸담은 사람이기에 관심도가 높았다.
일수천명...그가 모습을 처음 드러낸 곳이 저곳 천지봉이라했
던가? 일수천명의 말대로 몸이 완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흘
동안 꾸준히 약을 달여 먹인 유철린은 한겨울에도 알몸으로 지
낼 만큼 건강해졌다고 한다.
'사십 년 묵은 천마의 독기를 제거하는 처방전이라...'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처방전을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약재들이지만 환자의 맥을
짚는 순간 그런 약재들을 생각해 냈다는 것은 범의(凡醫)가 할
수없는 일이었다.
'일이 끝나는 대로 들러 봐야겠군.'
미독환사 전유는 아미파 장문 소석 선사가 있는 복호사로 발길
을 옮기면서도 천지봉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은은한 향네음이 솟옷까지 배어들었다. 언제나 짙은 약초 내음
속에 살던 사람에게 절간에서 풍기는 향내음은 무척 낯설었다.
"아미타불!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이렇게 찾아오
시지 않아도 되는데..."
아미파는 물심양면으로 무산파의 재건을 도와주었다.
처음 했던 말마따나 문파의 재건을 돕는다는 것은 막대한 은자
가 들어가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소석 선사는 약속을
지켰다. 지금까지 약 일 년 반 동안 원조받은 은자만 하더라도
이천 냥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아미파가 도와 주신 은혜는 무산파가 존재하는 한 잊지 않을
겁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미독환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인사말 증에 가장 정증한 말을
골라서 했다. 사실 아미파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무산파의 재건
온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아미파의 재력 사충전의 절독.
이것이 제갈문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사충전은 사두열목 마대
한사람만 살아 있었고 제갈문의 재건 계획은 무산되는 듯 싶었
다. 그러한 위기의 순간에 단비하의 대조독이 나타난 것이다.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허허허! 그런데 대단한 일을 하셨더군요."
소석 선사의 입에 가는 웃음이 걸렸다.
투자한 대가가 나오기 시작하자 떠올리는 웃음이었다.
정초, 부처님의 탄생일인 초파일 그리고 아미파의 개파일인 구
월 초하루에는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한번도 보지 못했던 웃음
이었다.
"그 정도는 일이랄 것도 없지요. 정작 힘이 부치게 되면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아미타불! 그래야지요."
소석 선사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미독환사는 아미파 장문의 웃음을 보면서 이제 아미파의 원조
는 끝났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것은 제갈문이 무산 일대를
정비할 때가 왔다고 말한 순간부터 예측했던 일이었다.
약초상과 의원들을 정비했다.
당문과 손잡았던 약초상들은 호된 쇠망치를 맞아야 했다. 이윤
이 많이 남는 장사이기에 틈을 비집고 들어서려는 거상(巨商)
들은 많았지만 당문의 서슬 퍼런 눈초리를 의식해 자제해야 했
고 약초상들은 거리낌없이 폭리를 취해 왔다.
그들이 일거에 된 서리를 맞은 것이다.
당문을 기반으로 일어섰던 약초상들이 물러나고 무산을 등에
업은 약초상들이 나타났다. 무산을 중심으로 근 이천 리에 걸
쳐 벌어진 일이었다.
당문과의 전면전까지도 각오하고 벌인 일이었다.
그만큼 성장한 것도 사실이었다. 약초 채집 같은 단순한 일을
하는 문도까기 합한다면 근 오백여 명에 이르고 약초상들로부
터 헌납받는 금액도 적지 않았다. 이제 아미파의 도움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무산파를 계속 지원해
줄 아미파도 아니었다.
만얀 당문과의 격돌에서 무산파가 괴멸된다면?
그때는 야미파도 모른 척하리라.
당문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은 뻔하고 그렇게 된다면
같은 사천성 내에서 손톱을 아프게 하던 가시가 스스로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니 이천 냥의 값어치는 한 셈이다.
"아미타불! 그럼 빈승은 바빠서 이만..."
소석 선사는 들어와 말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채 몸을 일으키
려 했다. 정월 초하루인지라 불자(佛者)들이 많이 오는 탓도
있지만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쪽이 맞을 게다.
"그러시지요. 저도 가볼 곳이 있습니다."
미독환사의 말에 아미 장문의 눈은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어디를?"
"허허허! 천지봉에서 신의가 나왔다니 가 봐야 안 되겠습니
까?"
순간 소석 선사의 얼굴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일수천명의 소문은 그 역시 들었다. 아미산에서 천하의 신의가
나왔다면 어찌 반갑지 않으랴. 하지만 소석 선사에게는 결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아미파의 바로 코앞에서 천하의 신의가
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큰 허점이요, 수치였
다.
"아미타불! 그럼."
'속이 다 시원하네.'
이상한 노릇이었다. 막대한 은자를 지원해 준 아미파이거늘 전
혀 고맙지 않았다. 무엇을 바라고 도와 주는 것과 바라지 않고
도와 주는 것이랄까? 늘 웃음기 하나 떠올리지 않던 사람의 얼
굴이 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통쾌했다. 웃음이 없는 사람이라
면 몰라도 늘 웃음을 머금고 다니던 사람이 웃지 않을 경우는
무시(無視)로 느껴지니까.
단비하가 일 년 동안 머물던 동굴은 정성스럽게 치장되어 있었
다. 미독환사는 동굴 옆에 세워진 석비(石碑)를 보고 일의 내
막을 알았다. 만탁촌의 방정쌍검 진성이 일수천명의 공덕을 찬
양하여 세운 공덕비(功德碑)였다.
미독환사는 동굴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안에도 방정쌍검의 손
을 탔는지 모든 기물이 완벽하게 보존된 상태였다. 한쪽 구석
에 있는 커다란 가마솥, 쓰다남은 술, 약재를 담아놨을 듯한
조리(爪籬)...
솥 있는 곳으로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순간 코끝을 싸하게 만드는 곰팡내가 물씬 풍겨 나왔다. 최소
한 독이 연단되지는 않은 가마솥이었다. 독을 연단한 곳에서는
곰팡이가 피지 못하니까.
조리를 뒤집자 다른 나뭇잎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왔다.
'백합(百合), 앵초(櫻草)...이건 황매화(黃梅花)...'
한줌도 안되는 부스러기 속에서 십여 개의 꽃 이름을 찾아냈
다.
'정말 의원이었던 모양이군. 단비하 인가 했더니...'
미독환사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일 년 전, 갑자기 소식이 뚝 끊어진 단비하의 종적을 찾고자
안절부절 못하는 여인이 두명이나 있었다.
"죽었을 거예요. 그 사람의 성격상 어느 이름 모를 곳을 찾아
서 쓸쓸하게 혼자 죽어 갔을거예요. 만초신의는 당문 십절 중
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래요. 그런 사람이 죽었는
데 상공인들 무사하겠어요?"
단비하가 만초신의를 죽이고 자취를 감췄다는 전갈이 오자 가
장 상심한 여인은 이경화였다. 구파일방 장문들의 성원하에 장
문이 된 삼절 진인이 직접 보내 온 전서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
었다.
"호호호! 그 사람은 안 죽어. 후위대주와의 싸움을 보고 난 직
감했어. 아! 이 사람을 죽일 만한 사람은 없구나 하고 말야.
믿어 봐. 그 사람은 절대 안 죽어."
갈홍아는 쾌활하게 말했다. 웃음짓지도 않았고 행동에도 걱정
하는 기색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야위어 갔다. 점점 말이 없어지고 잘웃
지도 않았으며 가끔 먼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
다.
그것이 단비하에 대한 상념 때문이란 것은 이경화만이 알았다.
물론 무산을 떠나오기 전 미독환사도 알게 되었지만..
"아미산에 일수천명이란 신의가 나타났대. 내 생각에는 꼭 단
비하같은데...할아버지가 알아 봐 줄수 없나요?"
갈홍아가 야심한 시각에 늘 애지중지하던 밀랍차를 끓여 오며
한 말이었다. 어떤 사연이 깃든 밀랍차인지는 몰라도 무산에
온 후로 단 한번도 개봉하지 않고 아끼던 차였다.
밀랍차라고 무조건 아끼는 것은 아니었다. 유독 단지에 반정도
남은 밀랍차만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런 차를
타온 것이다.
"허허허! 왜 그놈 생사(生死)가 궁금하냐?"
"아니, 나는 괜찮은데 언니가 너무 상심해 하잖아."
하지만 그때 갈홍아의 얼굴을 스쳐 가는 어두운 그림자를 놓치
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것을 타인에게 주었을 때는 그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밀랍차...갈홍아의 마음을 지배
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단비하였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미독환사가 일 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손녀 같은 갈홍아의 마음
을 안 것이다.
갈홍아가 돌아가고 한 시진쯤 흘렀을까?
막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이경화가 찾아왔다.
목적은 갈홍아와 같았다. 일수천명이 단비하의 분신 같은데 알
아봐 줄수 없겠느냐는...
미독환사는 혼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수천명은 부평초처럼 종적이 묘연한 사람 찾는 것이
라면 자신보다도 제갈문의 친형이 장문으로 있는 청성파의 도
움을 받는 것이 빠를 것이었다.
다음날 미독환사는 제갈문과 상의했다. 묘하게도 제갈문 역시
갈홍아나 이경화와 같은 생각을 했다. 비합전서는 즉시 날았
다. 청성으로 삼천 리 길을...
하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니 일수천명이 단비하가 아이거나
아니면 종적을 잡지 못했을 터였다.
미독환아는 정월 초나흘까지 아미파에서 머문 후, 일수천명의
종적을 직접 쫓아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동굴을 확인해 본 결
과 의미가 없었다. 단약(丹藥)만 제련했다면 의원임에 틀림없
으니까.
동굴을 나오려던 미독환사는 동굴 안에서 누가 쳐다보고 있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마치 뒷머리를 낚아채는 듯 강렬한 느
낌이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바퀴 돌아보던 전유의 눈에 이상한 것
이 들어왔다. 뱀 껍데기. 죽은 지 오래된 듯 바싹 말라 버린
허물이었다.
'이건...'
뱀 껍데기는 손길이 닿자마자 가루처럼 부서졌다.
'이, 이건...허물이 아니다. 살과 뼈를 녹이고 꺾데기만 남은
거야. 아! 이런 절독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독문 사람이거에 진독을 안다. 지금 죽은 뱀이 보여 주는 형상
은 곧바로 사람의 형상이 되어 투영되었다. 살과 뼈와 피와내
장이 녹아 버린 껍데기만의 허물.
'단비하다. 단비하 그놈이 여기 있었어. 천하의 절독을 만들
었어. 오오! 당문과의 싸움을 걱정했는데 오히려 당문이 걱정
되는군.'
"와하하하핫...!"
가슴속에 짓눌렸던 응어리가 웃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 * *
무산파파는 전서구의 전통에서 나온 뱀 껍데기를 보는 순간 낯
빛이 하얗게 질리며 몸을 떨었다. 그런 점은 독사우공이나 사
두열목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독에 대한 조예가 낮은 갈홍아나
아예 독을 모르는 사망산검, 무당에서 돌아온 이군무, 이경화,
제갈문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휴! 정말 무산일괴라는 말을 안 쓸 수 없다니까? 아니 전
서는 어디다 버리고 뱀 껍데기를 보내 오는 거야."
갈홍아는 못내 속이 상한지 말이 곱지 않았다. 전 장로에게 전
서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뛰어온 사람이 바로 그녀
였다. 혹시 단비하의 소식을 들을수 있을까 하고.
반면에 이경화는 사망산검의 뒤를 따라 제일 늦게 들어왔다.
방에 들어선 다음에도 한쪽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중인들이 나
누는 대화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두여인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행동이었다.
독사우공은 떨리는 손으로 뱀 껍데기를 잡아 갔다. 껍데기 안
쪽의 상태를 보고자 함이었다. 이미 가루처럼 부스러져 있었지
만 독에 의한 흔적임은 한눈에 알아봤다.
"저, 절대독..."
독사우공은 말까지 더듬거렸다. 평소 호탕하고 세상 거칠 것
없던 성격에 비한다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누가 무슨
일로 독사우공의 혀를 굳게 만들었을까.
갈홍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흘렸
다.
"이, 이건 독에 의한 것. 살은 녹였으되 표피에는 전혀 손상이
없는...도, 독이 아니야."
영문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광인으로 오해할 정도로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심중의 격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산파파와 사두열목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인으로 평생을 살
았지만 진정 처음 견식하는 절독이었다.
"단비하가 맞군요."
제갈문이 터뜨린 일성.
이경화와 갈홍아는 고개를 번쩍 들어 가루가 된 뱀 껍질을 응
시했다. 모두가 놀랄 정도로 독성이 강한 절독을 만들어 낸
임. 일수천명이라는 외호까지 얻다니...
'살아 있을 줄 알았다니까, 고마워.'
갈홍아는 이경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
서 끝없이 뱀 가루만 쳐다보았다. 오죽이나 사랑했으면 그의
손길이 닿았던 가루만 보고도 눈물을 흘릴까 자신없었다. 이경
화처럼 순수한 사랑을 할 용기가 없었다.
'됐어. 나는 살아있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만족해.'
그날 저녁 갈홍아는 제갈문의 방문을 받았다.
단비하에게 타주려고 애써 구했던 밀랍차 단지를 멀거니 바라
볼때 였다. 짧은 나날이지만 부인으로 행세하며 세상 모든 근
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살던 시절을 회상하던 중이었다.
제갈문은 빙긋이 웃음을 흘렸다. 이경화 외에 자신의 본심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싶었는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분 나쁘게 왜 웃어?"
"후후후! 단비하가 보고 싶지 않나?"
"농담할 정신이 아니니까 나가 줬으면..."
"단비하에게 가줬으면 하고 찾아 왔는데."
순간 갈홍아의 전신은 미미하게 떨렸다.
"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단비하를 만난다는게 두려웠다. 억지로 맺은
관계. 차라리 이대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하며 간직하고 싶
었다. 하지만 만나서 확인해 보고 싶기도했다. 자신과 몸을 섞
은 여인인에 설마 박정하게 대하랴 싶기도했다.
"중요한 일이야. 장문께도 허락을 득한 일이고 어차피 당문과
무산파와의 싸움은 피할수 없는 수순. 그럴 바에는 단비하를
앞에 내세우자는 의견이야."
"치사하게 그 사람보고 앞장서서 죽으란 소리잖아."
"우리와 연계를 맺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당문과 일전을 치를
사람이야. 싫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는 수 밖에."
"아니. 내가 갈게."
갈홍아는 엉겁결에 말하고 말았다. 두려운 일을...
쉬익! 쉬이익...!
이군무는 하루 열 시진씩 사망산검을 수련했다.
귀의신장 유청 숙부가 어이없이 죽은 후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
고 해온 일과였다. 특히 적극적으로 나서 줄 줄 알았던 무당파
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는 결론을 내린 다음부터는 더욱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무당파의 태청검법보다 날카로움이 강한 사망산검을 익히는 이
유도 그 때문이었다.
쉬이익! 쉬익!
벌이 꽃을 찾아들 듯 극히 유연한 동작이었다. 숙련도가 능숙
하다 못해 절정으로 치달아 가는 중이었다. 빠름 속에 깃들인
여유로움이 그 증거였다.
"호호호! 아예 발악을 해라. 발악을..."
한밤에 정적을 일깨우는 소리에 사군무는 수련을 중단했다.
격열한 검무를 추었음에도 그의 호흡은 한 올도 흐트러지 않았
다. 이미 검사(劍士)로서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것이다.
"갈 매로군. 어서 와."
무산파에서 이렇게 욕설에 가까운 반말을 할 사람은 단 세 사
람뿐이었다. 독사우공, 사두열목, 그리고 갈홍아 그 중에 여인
은 단 한 명이었다.
뽀드득! 뽀드득!
여인이 눈 밟는 소리는 무척 청명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아
름다운 소리 중에 하나이리라.
"검을 제법 쓸 줄 아는데."
"그런가? 네 눈에는 아직도 장난처럼 보일 텐데?"
"그건 맞아. 너는 검을 꼭 막대기 처럼 휘두르니까."
이군무는 어이가 없어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 무산에 왔을때는 뭐 이런 여자가 있는가 했었다. 장문에
대한 예의도 있고 해서 참았지만 어린 여자한테 반말을 듣는다
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습관이 되어 전혀 악감정이 들지 않았다.
언제나 밝고 쾌활하고 외침없는 여자. 이군무가 본 갈홍아의
단면이었다. 갈홍아가 수심에 잠겼다는 말을 들으면 배꼽을 빼
고 웃으리라. 그가 아는 갈홍아는 꺽일지언정 휘어지지는 않는
여자니까.
"무슨 일로 찾아왔어?"
"네가 필요해서."
"뭐? 야, 이, 이거 영광인데. 그래 어디어 쓰실려고 그러실
까?"
갈홍아는 농 반 진 반으로 말하는 사군무를 뚫어지게 응시했
다.
'달빛에 보니...더 예쁘군.'
이상하게도 갈홍아를 대하면 부친에게서 받은 예의범절이 꼬리
를 감췄다. 그녀의 말투 그녀의 행동 습관을 닮아 갔다. 그런
것이 나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속박에서 벗어나 자
유를 만끽하는 것같아 즐거웠다.
여인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체향은 혈기를 들끓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과거를 듣는 순간...다른 사내를 이미 받아들인 여자.
절독에 당한 후유증으로 아이까지 낳지 못하는 여자.
대가 끊기면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리고 갈홍아
에 대한 애정을 접었다. 그가 생각한 부인은 오직 자신만을 사
랑해 주는 현숙한 여인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다
른 아내에게는 눈을 돌리지 않는...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랬고 동생 이경화가 단비하에게 주
는 사랑이 그러하니까. 또한 무당파의 속가제자이면서도 가풍
(家風)에 따라 유교적(儒敎的) 관습이 몸에 배인 부친의 혈통
을 이어받은 점도 그런 결단을 내리는 데 한 몫 거들었다.
그렇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 갑자기 내가 미남으로라도 보여."
"착각하지 마. 네가 정말 쓸모 있는지 타진했을 뿐야."
"그럼 본론을 말해 보실까?"
"그러지 뭐. 너...나를 위해서 죽어 줄수 있어?"
순간 이군무는 말문이 막혔다. 기색으로 보아 농담이 아니었
다. 가볍게 말을 꺼냈지만 한마디 만 잘못 응대하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마음을 묵직하게 가라앉혔다.
"호호호! 굳이 대답 안 해도 돼. 나를 위해서 죽어 달란 말 따
위는 사양하겠어. 내가 그럴 여자로 보여?"
이군무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마치 희롱당한 듯 맥이 빠지
면서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
"다시 말할게. 경화 언니를 위해 죽어 달라면 죽겠어?"
"농담이 아니었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
"빨리 대답해. 나도 시간이 없으니까."
"주, 죽을수 있어."
"호호호! 과연 남매의 정이 돈독하군. 경화 언니가 이 말을 들
었어야 되는데...그럼 지금 바로 가서 행낭을 꾸려 가지고 와.
먼 길을 가야 되니까."
"밑도끝도 없이 무슨 소리야?"
"단비하를 만나러 가. 제갈선생으로부터 지시를 받고...아무래
도 단비하를 도와줘야 될 것 같은데, 너도 아다시피 내 무공은
보잘것 없어서 말야. 동생이 사모하는 낭군인데 오빠로서 당연
히 도와야지. 안 그래?"
"으...음!"
"산 아래에서 딱 한 시진만 기다릴 거야. 그때까지 안 오면 나
혼자 갈게. 분명히 말해 둘 것은 강요가 아니라는 점이야. 내
키면 따라오고 안 내키면 안와도 좋아."
말을 마친 갈홍아는 뒤도 안돌아보고 걸음을 옮겼다.
무엇인가 할말이 있는 것 같은데...이군무는 멀어지는 갈홍아
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단비하를 돕겠다는 말은 곧 당문
과 싸워 달란 말. 정말 죽어 달란 소리가 딱 맞았다.
'나는 대를 이어야 돼. 대를...'
휘이익!
달빛을 즈려밟는 야조의 몸놀림은 무척 빠르고 민첩했다.
지리에 익숙한지 달빛 한 점 새어들지 않는 어둠만을 골라 스
며들었다.
처소로 가던 이군무가 밤손님의 신형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
연이었다. 야행인이 숨는다고 숨은 곳이 하필이면 처소로 돌아
가는 길목. 만약 그런 길이 아니었다면 정녕 발견하지 못할만
큼 은밀한 행동이었다.
스르릉...!
소리없이 검이 뽑혀졌다.
암수를 즐겨 쓰는 무림이기에 언제 어느 곳에 침입자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산파는 무산 일대를 정비한 다음부터 철통
같은 경계망을 세워 놓았다. 제갈문이 직접 돌아다니며 초소
(哨所)를 정한 만큼 믿어도 좋을 천라지망이었다. 그런 경계망
을 뚫고 온 사람이라면 분명 초절정고수. 이것이 이군무가 내
린 판단이었다.
쉬이익...!
밤에 일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암향표(暗香飄)가 전개되
었다.
소리없이 기척없이 족적을 남기지 않고...
이어서 가전검공 사망산검이 펼쳐졌다.
하지만 십 할 성공을 장담한 기습이 무위로 돌아갔다. 상대는
역시 초절정고수였다. 부친과 겨루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
했다. 상대 역시 암향표로 한걸음 물러선 다음 무당파의 독문
신법인 무영신법(無影身法)을 펼쳐 허공으로 솟구쳤다.
"어딜!"
일갈을 내지른 이군무는 역시 같은 무영신법을 펼치며 사망산
검을 펼쳐 냈다. 그러나,
"오빠?"
야행인의 음성은 뜻밖에도 여자였다. 그것도 너무나 귀에 익
은...
이군무는 급히 검을 희수하며 몸을 비틀어 방향을 바꿨다. 자
칫하면 순행하던 기혈이 역혈(逆血)하여 주화입마에 들 수 있
는 위험 천만한 행동이었다. 아직 이군무의 내공 수위로는 내
공을 펼칠 수는 있으되 거두기는 어려웠다.
"음...!"
짧은 침음성이 토해졌다. 중극혈(中極穴)에 묵직한 것이 걸린
듯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곧 정상을 회복했다. 만얀 사망산검의
수련을 게을리했다면 이 같은 경우 틀림없이 치명적인 내상을
당했으리라.
"아니...! 이 밤중에 어디를...너. 너 이 복장이..."
"오빠. 제발 아무 말도 말아줘."
이군무는 동생 경화의 심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용납할 수는
없었다. 당문과 싸우는 일이라면 필사(必死)의 자리. 그런 곳
을 찾아간단 말인가. 도대체 사랑이 뭐기에.
"아버님의 허락을 받았니?"
물어 보나마나 한 소리지만 동생을 잡아 두기 위해서 한 소리
였다. 사실 무귀에 홀린 듯 연마한 동생의 무위는 자신을 능가
했다. 죽기 알기로 가겠다고 한다면 막을 자신이 없었다.
"오빠, 시간 끌지 마. 그 사람을 도와 줘야해. 우리 중 아무
도...아무도 그 사람을 도와 주는 사람이 없잖아. 나라도 도와
줘야해. 오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할게."
"듣지 않겠어."
"들어야 돼. 아버님...마음 상하실 아버님을 잘 위로해 드려
줘."
"경화야!"
"나는, 나는 너무 못나서...이 불효는 언젠가 꼭 사죄 드리겠
다고 말씀드려 줘."
이경화의 말은 잘들리지도 않았다. 갑자기 서러운 마음이 들었
는지 울먹이는 탓이었다.
이군무는 말릴 수 없음을 알았다. 눈물이 많아 무척 놀려댔는
데 영원히 강해질 수 없을 것 같던 동생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
나.
"먼저...가. 나도 곧 뒤따라 갈게."
"정말?"
"정말...부디 몸조심해. 너는 하나뿐인 내 동생이야."
"고마워. 오빠."
이군무는 착잡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부친의 처소를 향
해서...동생은 벌써 까마득히 사라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갈홍아는 행장을 수습했다. 애초에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
지만 한 팔이라도 더 보태면 어떨까 싶었는데. 단비하가 사망
산검 일행을 구해 준 적도 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약속한 한 시진이 다 가도록 이군무는 나타나지 않았다.
"휴우! 지지리 복도 없군."
갈홍아는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톡 쳐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누가 복이 없니?"
예상치 못한 음성. 바로 뒤에 다가오도록 기척을 감지하지 못
한 절정고수. 갈홍아는 흠칫 놀라며 빠르게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얼굴을 보는 순간.
"언니!"
"호호호! 너 혼자 가려고? 전에도 단 공을 따라가더니...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아냐?"
"뭐, 뭐 하러 온 거야?"
"너를 따라가면 단공을 만날수 있을까 하고."
"정말 기가 막혀."
갈홍아는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씁쓸했
다. 그 시간에 이군무는 부친 이철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부친의 노한 얼굴을 상상하면서. 하지만 부친은 의외로 담담했
다. 마치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스르릉!
한시도 떼어 놓지 않던 무광검이 뽑혀졌다. 일순 달빛을 받은
무광검은 시리디 시린 검광을 토해 냈다.
"군무야 사망산검의 끝이 무엇이냐?"
"무광검의 검광을 없애는 겁니다."
"이 아비는 평생 동안 검을 연마했으면서도 검광을 없애지 못
했다. 아마 인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이군무는 때에 맞지 않는 검론(劍論)을 들으며 의아심과 불안
감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은 듯한 부친 늘 잔
잔하면서도 정중한 기품이 배어 있었는데.
"사망산검을 부지런히 연마해라. 너만은 무림에 휩쓸리지 말고
검도를 추구해라. 무광검이 빛을 잃고 평범한 검이 되는 모습
을 꼭 보고 싶구나."
"지금도 불철주야로..."
"이제부터 무광검의 주인은 바로 너다. 이 검을 가지고 무당파
로 들어가거라. 거기라면 혈풍에 관여하지 않고 검도를 추구할
수 있을 게다. 이것이...부자간의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설혹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무광검의 검광을 없애지 못했다면 하산
하지 마라."
이군무는 너무도 엄숙한 분위기에 눌려 건네 주는 무광검을 자
신도 모르게 불쑥 받았다.
"손님이 왔구나. 너는 이만 물러가 쉬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와 함께 독사우공과
사두열목이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낄낄낄! 노제의 청력은 날이 갈수록 밝아지는데? 그건 좋은
일이 아냐. 나이를 먹으면 귀부터 밝아진대잖아."
"멍청이,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 말은 들었어도 귀
밝아 진다는 소리는 네놈한테 처음 듣는다."
두사람이 들어서자 엄숙하던 실내 공기가 갑자기 돌변했다.
'꿋꿋이 살아라. 너는 마음이 약한 게 탈이야. 검법을 익힌 것
과 사람을 베는 것은 다르단다. 손끝에 전달되는 육질의 감촉
을 이겨 낼 수 있어야 살인을 할 수 있어. 휴우! 어쩌면 너의
약한 심성이 다행인지도 모르겠구나.'
사망산검 이철진은 처소로 돌아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낄낄낄! 아우 누가 죽었어. 밖에서 듣자니 꼭 유언을 남기는
것 같던데?"
"야, 이 멍청아! 유언은 죽으면서 하는 말이야. 죽을 것도 아
닌데 유언을 왜 남기냐?"
"어이쿠! 이 늙은이를 그냥...황학산에서 쫄쫄 굶어 죽게 놔두
는 건데."
뱀을 사랑하는 두 기인의 괴행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갔다.
미독환사가 날이 갈수록 점찮아져 괴인의 대열에서 빠져 나가
는 반면 사두열목이 가세했으니 무산이괴의 명성에는 변함이
없었다.
"허허허! 술 생각이 나서 오셨소?"
"낄낄낄! 술은 무슨 말라 비틀어질 술. 어서 일어서."
"그게 무슨 말...?"
"능글맞기는 제갈문 뺨 친다니까. 아, 강호로 나간 딸자식 걱
정에 잠도 못 잘 거면서 앉아 있으면 뭐 해. 낄낄낄! 우리가
길동무 해 줄테니까 빨리 가자. 부지런히 가면 뒤를 따라다닐
수 있을 거냐."
"정말 멍철하군. 멍청해. 가면 같이 가는 거지. 뒤는 뭐 하러
따라 다니냐?"
"이 늙은이가 꼬박꼬박 쌍지팡이 들고 나서네? 야, 뱀대가리!
철없는 계집들이 울고 짜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데 그런
구경거리를 놓치냐?"
"그렇구나..."
이철진은 가슴에 벅찬 감정이 회오리쳤다.
두 기인은 갈홍아와 이경화외 안위가 염려스러운 것이다. 무산
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기에 부담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
각하면 그만이지만 그런 뜻이 아님을 잘 알았다.
"가면서 이야기합시다. 눈도 하얗고 달도 밝으니 길을 떠나기
에는 적합하지 않습니까?"
이철진은 자식에게 준 무광검 대신 독사우공에게 선물받은 무
산파의 검을 들고 일어섰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읽고있습니다
즐감함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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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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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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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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