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에 이자겸의 이름이 거론되었고 하니, 오늘은 이자겸 이야기입니다. 어제 내용과 중복되는 내용이 조금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려 전기는 문벌귀족이라 불리는 금수저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때입니다. 광종 이후 고려 임금들은 딱 잘라서 평가하기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이게 다 문벌귀족들의 힘이 너무 강성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뭘 자의적으로 했고 타의적으로 했는지 구분이 모호한 것이지요.
이 문벌귀족의 정점에 오른 이가 이자겸입니다. 그는 인천 이씨(‘인주 이씨’, ‘경원 이씨’로도 불림)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문하시중(조선의 영의정 급 벼슬)을 역임한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지요. 할아버지인 이자연만 해도 자신의 딸을 셋이나 문종에게 시집보낸 대표적인 외척집안이었습니다.
이자겸 또한 비슷한 행보를 보입니다. 예종에게 자신의 둘째딸을 시집보내 외척으로 군림하지요. 다만 예종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이자겸은 딱히 국정을 농단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얌전히 지낸 편이지요. 이자겸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것은 예종이 급사한 뒤입니다.
예종이 죽었을 때 태자인 인종은 14살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삼촌들, 그러니까 예종의 동생들이 왕위를 넘보았다고 합니다. 이때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이 나서서 인종을 재빨리 즉위시키지요. 어린 임금, 심지어 외척의 힘을 빌려 오른 만큼 외척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본인이 왕의 외할아버지인 만큼 이자겸에게는 이미 충분할 정도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걸로 만족하지 않지요.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까지 인종에게 시집보내버린 것입니다. 인종은 본인의 이모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덕분에 족보가 개차반으로 꼬여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가문의 딸들을 시집보낸 예로 유명한 것은 조선 세도정치의 대표주자 안동 김씨가 있겠으나, 그 안동 김씨도 최소한 항렬은 지켰습니다. 물론 고려시대 때 근친혼이 드물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기는 해야겠지만요. 그렇다하더라도 이 시대의 폐단은 세도정치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부정부패가 빠지면 안 되겠지요. 이자겸의 일곱 아들은 모두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됩니다. 대부분 시랑이나 낭중 벼슬을 얻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아들들이 몽땅 장관, 차관에 앉은 꼴입니다. 물론 이자겸에게 뇌물을 바친 인간들도 각자 한자리씩 해먹지요.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자기 집 강아지한테도 벼슬을 내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이자겸은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정하려 한 적도 있습니다. 여기서 ‘절(節)’이라 하면 왕이나 태자의 생일에만 붙이는 거지요. 그러니까 자신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려 한 것입니다. 김부식이 극렬히 반대해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이후로도 집안에서는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부르며 축하했다고 합니다. 조선이었으면 역모죄로 오체분시되기 딱 좋았겠으나 이자겸을 처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실 아무리 강성한 외척이라 해도 이정도로 막나가는 일은 드뭅니다. 다른 문벌귀족들이 호구가 아닌 이상 이자겸을 견제하는 게 당연하지요. 심하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자겸은 단순히 가문의 위세만 믿고 있던 게 아닙니다. 군사적으로도 믿을 만한 구석이 존재했지요.
믿을 구석이란 것은 바로 척준경입니다. 한국사 최고의 맹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인물이지요. 역덕후들은 그의 무력에 경의를 담아 ‘소드마스터 척’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자겸은 이런 척준경을 포섭했고 서로 사돈지간까지 맺습니다. 누군가가 이자겸을 견제하려고 하면 “척 장군과 상의해보시겠나? 목숨을 보장 못하네만.” 같은 식으로 흘러가는 겁니다. <삼국지>에서 동탁과 여포 관계를 생각하시면 얼추 들어맞습니다.
이자겸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니 인종은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그를 몰아내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계획합니다. 처음에는 척준경의 동생인 척순신과 아들 척순을 죽이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지요. 그러나 이에 분노한 척준경이 크아아아 울부짖으며 인종의 친위대를 썰어버리고 이 와중에 궁궐까지 불탑니다.
이게 바로 이자겸의 난입니다. 이자겸의 난이란 이름이 붙어있어서 이자겸이 먼저 군사를 일으킨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종이 먼저 선빵을 날리고 이자겸이 척준경과 함께 이를 진압한 거지요. 신하가 왕을 진압한다는 표현이 좀 웃기긴 한데 여하튼 사실관계는 그렇습니다.
인종은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궁궐이 불타버려 어쩔 수 없이 이자겸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 이자겸은 십팔자위왕 같은 걸 운운하면서 인종을 암살하고 본인이 직접 왕위에 오르려고 하지요. 그러나 이자겸의 암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자겸의 딸인 인종의 두 왕비가 음모를 간파하고 이를 매번 저지했다고 합니다. 훗날 이자겸이 몰락했을 때 그녀들은 폐비 되었으나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땅과 노비를 하사받고 편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이자겸의 몰락은 엉뚱한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하인이 척준경의 하인과 싸우다 이지언의 하인이 “네놈 주인은 궁궐을 불태우고 임금께 화살까지 날렸으니 대역죄인이다!”라고 비난한 일이 있었지요. 이 이야기를 들은 척준경은 이자겸을 찾아가 관복을 벗어던지고 잔뜩 따졌다고 합니다. 이 날 이후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틀어졌지요.
이자겸과 척준경이 반목한다는 사실을 파악한 인종은 척준경을 회유했고, 척준경은 인종에게 충성한다는 글을 올입니다. 사실 척준경은 다혈질이기는 하나 왕에 대한 최소한의 충성심은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고, 이자겸처럼 대단한 야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척준경은 군사들과 함께 이자겸의 저택으로 쳐들어가고 손쉽게 이자겸을 붙잡습니다. 이것도 자신이 가장 믿던 무장에게 배신당한 동탁과 비슷합니다.
이자겸은 역모죄로 죽어 마땅했으나 왕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만큼 사형을 받지는 않고 영광으로 귀양보내집니다. 그는 남은 일생을 영광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죽지요. 고려 최고의 귀족가문인 인천 이씨는 완전히 몰락하여 다시는 정계의 중심에 올라서지 못합니다. 그리고 고려는 이후 묘청의 난, 무신정변 등을 거치며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지요.
ps1. 송나라의 관리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은 이자겸에 대해 ‘풍채가 맑고 온화한 인물’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나름 미남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외모와 행적이 일치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지요.
ps2. 이자겸이 인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다고 <고려사>에 적혀있기는 하나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인종을 죽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는 점, 역모 치고는 낮은 처벌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이자겸이 왕좌까지는 노리지 않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물론 국정을 농단한 것은 사실이나 세세한 면에서는 창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요.
첫댓글 잘봤습니다.
재현님 찾아 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늘 밤 늦은 시간에 출석하셔서 궁금햇습니다.
저처럼 밤잠이 없는건지.. ㅋ
즐감
감사합니다.^~^
문벌귀족의 정점과 이자겸의 권세.
이자겸은 예종에게는 자신의 둘째 딸을 시집보내고
예종의 아들인 인종에게는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까지 시집을 보낸다.
인종은 본인의 이모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며
족보는 개차반으로 꼬여버린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권력을 독단하려고 딸들을 잘도 시집 보냈네요.
결국 끝은 있는 법이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