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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四 章. 공분(公憤), 당문주의 죽음
( 一 )
장노는 당문을 들어서기가 바쁘게 당철휘의 처소로 납치되다시
피 끌려 왔다. 그러나 그런 점이 전혀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
다. 한연지가 지시한 일이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잖아도 궁금했는데..."
청석이 깔린 마당은 깨끗하게 쓸어져 있었다. 단지 화단(花壇)
이 없는 것이 흠이랄까. 하기는 당철휘의 성격에 꽃이 어울릴
리 없었다.
하필이면 당철휘인지...하기는 당금 당문의 후기 지수들 중 당
철휘만한 사람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가장 뛰어났던 당영지
와 그래도 사람을 이끌 줄 안다는 당자인은 죽었고 가장 무공
이 강할 것으로 추측되던 당동한은 근 이 년 동안 모습이 보이
지 않았다.
친혈족만이 문주에 오른다는 당문의 관습으로 보면 문주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은 당철휘였다.
'연지에게 알맞은 짝이기는 한데...어쩐지 마음에 안들어.'
성도 사람 대부분에게 물어 봐도 당절휘라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사람이 음험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면전에서는 옳은
말을 했다가도 뒤돌아 가면 딴소리를 했다. 백 명에게 물어 보
면 백 명 다 한연지가 아깝다고 할 것이다.
똑!똑!똑...!
처마끝에 배달린 고드름이 녹으며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무인만 사백여 명...잡다한 일을 하는 사람과 가족들까지 포함
하면 근 이천여 명이 운집해 있는 당문이지만 무덤 속같이 고
요하기만 했다. 당문의 비기가 흘러 나간다는 것을 이유로 수
독실을 지하로 옮긴 탓도 있지만 당문주가 워낙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발걸음 소리조차 죽여야 했다.
'나올 때가 되었는데...'
일 다경이 지나도록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장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겨울 바람이 거침없이 몰아치는 마당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은
고역스런 일이었다. 솜옷을 두텁게 입었지만 춥기는 매한가지
였다.
'겨울이 추우면 풍년이 든다던데. 내년에는 풍작이겠군. 그런
데 왜 이렇게 안나오지.'
장노는 전면에 있는 건물 안에서 뜨거운 춘풍(春風)이 불고 있
다는 사실을 몰랐다.
다시 반 시진이 지나자 장노이 몸은 꽁꽁 얼어붙었다.
덜컥!
문이 열리며 전갈문양이 새겨진 당문 무복을 말끔하게 입은 당
철회가 나타났다.
"부,부실장..."
입이 얼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느라고 수고했다."
당철휘의 안면에는 진득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하, 한연지는..."
"네놈같이 천한 놈이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냐."
"그, 그게 무슨 말...커억!"
장노는 부지깽이가 가슴을 후비파는 아픔에 비명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의 비명은 입을 막는 거센 힘에 안으로 삼켜졌다.
"너는 한연지가 당문에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 그래서 네
입을 막기로 작정했지. 그런데 죽는 순간까지 입을 열려고 하
나?"
아픔은 심장을 뚫고 등뒤까지 전해졌다.
뜨거운 기운이 옷을 적시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심장에서 솟구
치는 피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는데...'
장노는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죽음의 입맞춤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저 쏟아지는
잠을 거역할 수 없어 깊이 그 잠에 빠져 들 뿐.
"수고했어요."
요염하면서도 간드러진 음성이 들렸다. 서서히...극히 서서히
한연지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자신감과 함께 언제나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모사의 면목을...그것은 당철휘가 복속
화되는 현상이기도 했다. 한연지라는 거미줄에.
"조금만 기다려.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 설사 문
주라해도 말야."
* * *
< 이 싸움은 본인의 싸움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 무산에 있는 모모가 직접
문도를 이끌고 온다 해도 당문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모
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저의 목적은 당문주 당기룡에게 고정되었습니다. 또한 어려
서부터 당문에서 자란 까닭에 지리를 환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필요없습니다.
당문주를 암살하는 것은 자신있습니다.
저에게는 그만한 독이 있습니다. 자신하건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세 분 선배께서 저를 공격했을 때 저에게는 충분한
승산이 있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시고 자중해 주시기 바랍니
다. 당문주를 암살하고 난 다음 종적이 발각되지 않는다는
것은 보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혼자라면 충분히 빠져 나
올 수 있습니다.
문주를 암살한 흉수.
당문은 끝을 볼 때까지 따라다닐 겁니다 이후 한시도 편할 날
이 없겠지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면 제가 죽어야 할 겁
니다. 여러분의 호의를 감사히 받으면서 인연을 끝맺을까 합
니다.
단비하(段悲河) 배상(拜上). >
갈홍아는 편지를 읽으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품속에는 이와 비슷한 서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행동하기 전에 단비하가 먼저 움직였다. 불귀사선(不歸死線)을
넘어갔다.
'안돼...안 돼!'
마음속 울림이 절규가 되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독사우공의 손길에 꽉 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 돼요. 죽을 거예요. 제가 가야 돼요. 그가 죽으면...흑흑!
그가 죽으면 저도 못 살아요."
갈홍아는 기어이 자신의 심중을 토해 놓고 말았다.
이경화가 있는 한 영원히 마음속에만 간직하려 했던 비밀이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계집애야, 네가 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냐? 그놈 말마따나 방
해만 될 뿐이야."
"그렇지만...그렇지만..."
그때였다.
"아버님, 저를 보내 주세요."
야무진 음성이었다. 이경화가 이철진을 또렷이 응시하며 말문
을 꺼냈다. 그 속에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확고한 의지가 내
포되었다. 더 이상 눈물만 흘리는 소녀가 아니었다.
"경화야!"
"죽음이 두려웠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요. 좋아요. 상공이 문
주를 죽이러 갔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겠죠. 하지만 도와
줄 수는 있어요. 문전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한결 도움이 될 거
예요."
"경화야, 너 정말..."
"아버지.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해요. 하지만 늘 자기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가는 길...막지 말아주세
요."
"훌륭하게 컸구나...가거라."
"아니, 이봐?"
"저런, 가면 죽어!"
독사우공과 사두열목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
"약속해라. 개죽음은 당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게요."
사망산검과 이경화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웃음속에는
부녀간의 깊은 애정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정 장로. 아니 작은 할아버지 저도 보내 주세요. 제 마음을
아시잖아요."
독사우공은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정녕
어리석은 일이지만 연정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빌어먹을! 가려면 같이 가자."
"네?"
"손녀를 사지로 보내는 늙은이가 어디 있다던? 의제(義弟)도
마찬가지일 게다. 아마 경화가 떠나고 나면 바로 뒤따라 나설
걸? 안 그래? 의뭉스럽게 내숭떨지 말고 속을 털어놔 봐."
"허허허! 들켰군요. 하지만 우리에게 전혀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갈 선생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받았습니다. 소림의
연화사(蓮花寺) 주지(主持)인 성소(聖蘇) 법사(法師)가 방장의
밀명을 받고 사천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입니다. 숭산부터 성도
까지는 이천칠백 리... 지금쯤은 성도에 도착했을 거라는군
요."
"으응? 그런 전문(傳文)이 있었어? 그런데 말도 하지 않고...
의제도 점점 제갈문을 닮아 간다니까. 아마 뱃속에 능구렁이가
서너 마리는 들어 있을 거야."
이철진은 독사우공의 비아냥거림을 귓전으로 흘리며 말을 이었
다.
"만약 당문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독을 시험한 사실이 발견된다
면 무림공분을 사게 될 겁니다. 생체 실험 대상이었던 단비하
가 문주에게 복수를 한 것은 명분이 서지만 당문이 문주의 복
수를 하고자 한다면 전무림이 들고 일어날 겁니다."
"낄낄낄! 좋아, 좋아. 자 그럼 다 같이 일어설까?"
"사람을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당문으로 가고 형님과
마 선배님께서는 성도로 들어가셔서 성소 법사를 찾아주십시
오."
"왜 하필이면 우리가 성도로 가야 돼? 나는 싫다. 나도 당문으
로 가서 내 독과 당문 독 중 어느게 강한지 비교할 거야? 독비
독심 당철목하고는 원한도 있는데 잘됐지 뭐."
"형님 정말 딱하십니다. 우리 전부가 달려들어도 당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합니다. 단비하를 살리자는 것이 궁극적인 목
적이지 당문을 공격하자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성소 법사를 찾
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형님 손에 우리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지요."
"그런가? 낄낄낄! 그럼 성소 법사, 그돌중을 찾아내지."
일행은 부산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독을 아는 사람들은 품에 지닌 독을 하독하기 좋은 곳에 갈무
리했고, 이철진과 이경화는 검 이외에도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암기들을 품에 넣었다. 아무래도 독과 암기의 명문인 당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준비가 필요했다.
* * *
< 천독전(千毒殿). >
당철휘는 천독전을 들어서면서 사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언제나 느꼈던 일이지만 제사대 문주 당학성이 쓴 편액을 볼
적마다 끓는 피와 투지가 용솟음쳤다. 당문을 명문으로 만들기
위해 부심했던 선조의 마음이 전달 되는 느낌이었다.
눈에 익은 병장기들 그리고 절독들...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
다. 하루에도 열댓 번씩 드나드는 천독전이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눈 감고도 찾을수 있었다.
준비해 온 마대푸대에 절독들을 손에 닿는 대로 집어넣었다.
당문 칠병 중 혈왕절편 두 개, 당뇌전 다섯 개, 비폭정 네 개,
살음도 여섯 개, 소전십궁 이십여 개.
독을 발사할수 있는 조독기는 이십여 개를 챙겼다.
당문 십독도 쓸어 넣었다.
중독되면 뼈가 검게 변한다는 서열 이위의 투골독, 맛을보면
열 가지 맛이 난다는 십미패독, 살갗에 닿으면 시커멓계 태워
버린다는 황련독산...무시독, 자포독...손에 닿는 대로 집어넣
었다.
마대는 금세 두툼해졌다.
당철휘는 하급 무인들이 쓰는 독고(毒庫)로 향했다. 지금 있는
독만도 능히 천 명은 죽일 수 있는 분량이지만 만족할 수 없었
다.
시조에서 채취한 후란독, 반시뱀과 홍갈의 독을 합성한 홍무
독, 균덩어리를 모아 놓은 한매단...범인이라면 혼자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묵직하게 담았다.
어차피 하나를 훔치나 두 개를 훔치나 마찬가지였다.
< 독의 반입이나 반출에는 문주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가장 휴독한 천형(天刑)에 처해진다.
당문(唐門) 율법(律法) 제삼조(第三條). >
어차피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었다.
한연지는 열락이 채 가시지도 않은 순간부터 입을 열기 시작했
다.
문주가 당동한을 차기 후계자로 생각한다면 문주를 죽이면 된
다. 확실히 문주가 내정되기 전에 문주를 죽인다면 당동한쯤은
...나머지 원로들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아버지도 손 놓고 있지
는 않으리라. 당문은 육실, 삼대, 일원으로 구분되었지만 실제
권력은 삼대의 대주들이 휘두른다. 육실은 그저 삼대의 심부름
이나 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만초실에서 띄은 약재들은 전부 삼대에게 공급된다. 독제실에
서 만든 독단도 암기실에서 만든 암기도...수독실에서 각종 독
술을 익힌 무인들은 삼대에 배속된다. 수독실장 빙안객(氷眼
客) 당연종(唐蓮鐘)은 꺾데기만 움켜잡은 셈. 형옥실장은 또
어떤가, 전위대나 후위대가 잡아온 포로들을 심문하는 것까지
는 좋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정보는 늘 삼대주가 차지하지
않았던까.
육실의 장(長)들 중에서 삼대 편에 섰던 사람은 만채실장뿐이
다. 지금은 그마저 죽고 없으며, 당잠청이 죽어 공석이 된 후
위대주는 형옥실장 임시로 맡고 있다. 독제실이 주축이 되어
반기를 들기에는 아주 좋은 시기다.
살이 절반이나 깎여져 나가 십대밖에 남지 않은 전위대는 만채
실장을 역임하고 있는 독제실장이 상대하면 되고, 전문 살수
오십여 명이 눈을 번뜩이는 중위대는 아직 풋내기들이지만 수
독실에 있는 이백여명의 문도들이 발목을 붙들면 된다.
전위대와 중위대를 제외한다면 문주 편에 설 세력은 암기실장
천수나천 당두감뿐...하지만 그 역시 독비독심 당철목의 견제
를 받아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그 누구한테도 비밀로 해야 한다. 설혹
지금 시기가 아무리 좋더라도 절대 부친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
다.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다음이라야 한다.
그런 상황이라면 천독전에 있는 당문 칠병과 당문 십독뿐 당문
율법 제삼조를 정식으로 깨뜨리후 그런 다음 부친에게 연락하
면 자기편을 들어야지 어쩌겠는가. 승산이 없다면 몰라도 충분
한데...
당철휘는 한연지의 계략이 귀신도 속을 만큼 완벽하다고 찬탄
했다. 푸대자루에 독과 암기를 쓸어 넣은 당철휘는 잠시 귀를
기울여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한연지의 충고대로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일을 벌이기도 전에 오마분시
(五馬分屍)가 될 것이다.
끼이익...!
당철휘가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면서 이토록 애간장을 태운 것
은 처음이었다. 전갈 네 마리가 새겨져 있는 문살을 보는 순간
에도 방심하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까지는 살얼음
판을 걷는 듯 조마조마했다.
그런 모든 긴장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한꺼번에 터져 나
왔다.
"휴우...엇! 아버지...!"
당원휘는 긴장을 풀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 당운담의 노기 찬 눈을 보는 순간 그는 일이 틀어졌음
을 알았다.
'제길! 늙은이들은 절대 모험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한연지가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노인네들은 현실어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높은 직책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런 경
향은 강하다. 때문에 부친과 상의해서는 안된다고...
한연지는 붉은 수건으로 눈가를 찍고 있었다. 보아하니 부친으
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당철휘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천천히 다가섰다.
"게 서라!...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부친의 노기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토록 성난 표정은
처음이었다.
"천독전에 있던 독과 암기들..."
"뭐얏!"
"아버지."
"닥쳐랏! 뉘 앞이라고 꼬박꼬박 말대답이냐?"
당철휘는 분기가 치밀었다. 한연지 앞에서 듣는 꾸중인지라 강
도가 더욱 심했다. 자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좋게 말부터 나궈
봐야 될 것 아닌가. 한두 살 먹운 어린아이도 아니고, 제 앞가
림은 충분히 할 만큼 나이가 들지 않았는가.
"아버지, 다 들으셨겠지만...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상관하지 마세요."
"뭐얏!"
휘익!
화가치민 독제실장은 번개같이 튀어나와 손을 휘둘렀다.
"흥!"
코웃음친 당철휘는 부친을 향해 마주 일장을 전개했다. 결코
무공이나 독술이 아버지의 아래가 아니란 걸 증명하고 싶었다.
퍼엉! 펑!
장(掌)과 장(掌)이 부딪치며 커다란 소리를 울려 냈다.
"크윽!"
당철휘는 답답한 신음을 토해 내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아무래도 공력 면에서는 부친을 능가하지 못했다. 손속에 사정
을 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팔목이 으스러지
는 중상을 당했으리라.
"싸우지 마세요. 모두 제 탓이에요. 아버님, 저를 죽여 주세
요."
한연지가 눈물을 흘리며 가운데로 파고 들었다. 엷게 바른분이
눈물로 얼룩져 더욱 애처롭게 보였다.
"누가 네 아버님이냐?"
"아버님, 저는 이미 당 대가와 부부지연(夫婦之緣)을 맺었습
니다. 당 대가는 저의 영원한 낭군입니다. 죽이시려거든 저부
터 죽여 주세요."
당철휘는 강한 감동에 콧등이 시큰거렸다.
너무 머리가 뛰어나 차가운 여자로 알았는데 이런 순정이 있었
다니 정말 나를 남편으로 생각하는구나. 이런 여인이라면 목숨
을 걸고라도 지켜야 한다.
"요망한 것! 비키지 않으면 정말 죽이겠다."
"죽이세요. 차라리 죽겠습니다. 아버님 손에 죽는다면..."
휘이잉...!
당운담은 정말 일장을 전개했다. 소맷바람이 공기를 떨어 울리
는 소리가 매몰찼다. 전력을 다한 이 일장에 맞는다면 아무리
근골이 강한 장한이라도 절명하고 말 순간이었다.
"안 돼!"
당철휘는 급히 푸대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던졌다.
무독천살 당운담은 자식이 자신에게 살수를 전개할 줄은 몰랐
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피하기도 용이치 않았다. 더욱이 그의
눈은 한연지를 쳐다보고 있었고 불붙은 분노는 이목을 가려 버
렸다.
파앗! 파앗...!
암기는 목전에서 터졌다.
화려한 폭발이었다. 비폭정 두 개가 터지며 일으키는 아름다움
은 무척 현란했다. 청성파 삼절 진인도 간신히 피한 도복 안에
지갑을 입고서야 막아낼 수 있었던 비폭정.
"어헉...!"
비명은 극히 나지막하게 들렸다.
심후한 내력으로 살갗을 찢는 아픔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비폭정에 묻은 흑사의 독만은 참기 힘들었다. 몸이 빙
굴에 빠진 듯 한기가 스며들면서 덜덜 떨렸다.
"네, 네가..."
"아버지!"
당철휘는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설마 이런 결과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부친을 죽이다니
이런 천륜을 저버린 행동이 또 있을까.
"아, 안 된다. 반기를 든다면 죽음뿐...허엇! 한 명도 동조하
는 사람이 없을 것. 도, 독을 제자리에... 저 , 저 요망한
것을...크으윽!"
당운담은 몸을 몇 번 바르르 떨더니 고개를 떨꿨다. 자식 손에
죽은 것이 분통한지 아니면 자식을 가지고 노는 한연지를 죽이
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지 눈도 감지 못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아버지!"
당문에서 가장 높이 떴던 별 열 개 중 하나는 자식의 손에 의
해 떨어졌다. 그의 유성은 붉은색이었다., 혈한(血恨)을 안고
저승으로 간 탓이었다.
"멍청한 놈...곧바로 해독약을 복용시켰다면 병신은 될지언정
죽지는 않았어. 당문 십절은 모두 죽어야해. 그 다음 네가 문
주가되고 나에게 이양하면 돼. 두고봐라. 꼭 그렇게 만들 테니
까."
비통해 울부짖는 당철휘의 등뒤에서 한연지는 귀기를 드러내며
하얗게 웃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애통에 젖은 한탄
이었다.
"저, 때문이예요. 저 때문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왜 그러
셨어요.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왜 그런 행동을 하셨어요. 상
공 이제 어쩌면 좋아요. 흑흑흑...!"
당철휘는 이성이 마비되었다. 도저히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할 힘을 잃었다.
"한 매. 이제 어쩌면 좋지? 나는 어떻게 하지?"
"제가 밉지 않으세요. 우선 저부터 죽여 주세요. 흑흑흑!"
"휴우! 그대 잘못이 아냐. 아버님은 내가 죽였어. 그만 울어."
당철휘는 일의 원인을 찾아 내지 못했다. 자신보다 더욱 슬퍼
하는 한연지를 달래기에 바빴다.
무슨 일이 있으면 수하를 통해 부르지 직접 찾아오지 않는 아
버지의 성품도 잊어버렸다. 너무 중차대한 일인지라 아버지가
찾아온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이 먼저 고변하든가
천독전에서 독과 암기가 분실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는
일의 전모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도.
"휴우! 그래요. 울어 봤자, 소용없죠. 이제 아버님이 돌아가셨
으니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해요."
"어떻게?"
"우선 아버님의 인피면구(人皮面具)를 만들어야 해요."
"인피면구? 그건 안돼! 어떻게 아버님의 얼굴 가죽을 벗겨!"
"그건 원시적인 방법이에요. 밀랍을 녹여서 본을 뜬 다음 돼지
가죽으로 만들면 돼요. 그건 제가 만들 테니까, 걱정 마세요.
부지런히 하면 내일 아침까지는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의 흥내를 낸다는 것은..."
"방법이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과 나는 죽어요. 천독전에
서 독과 암기를 가져 왔어요. 그리고 비폭정에 아버님이 죽었
어요. 변명할 여지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까짓 흉내도 못 낸단
말예요!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소리를 만대에까지 듣고 싶어
요.?"
"연지,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내일 하루예요. 내일 문주를 죽이는 거예요. 인피를 쓰면 가
능해요. 앞에서 날아온 검은 피해도 등뒤에서 짓쳐 드는 암기
는 피하지 못하는 거예요. 무인이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은 방심
...아버님이라면 방심을 유도할 수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아버님도 당신이 죽는 것은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내일 하루
만이에요. 문주를 암살하면 전권을 쥐게 돼요. 그 다음 누가
당신을 상대 하겠어요. 아버님의 장례를 후히 치르려면 그 방
법밖에 없어요."
그도 그럴듯했다.
지금 부친의 시신을 공개한다면 두사람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
었다. 두사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문 율법에
따라 선친 또한 부검 대상이 된다.
시신을 은폐시킨다는 것은 더 큰 죄악이었다.
이름모를 곳에서 서서히 썩어 갈 선친.
평생 동안 한이 되어 떠오를 것이다. 그것도 당문도들의 추적
을 피해 살아난다는 가정하에.
"아버님은 이해해 주실 거야."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
"알았어요. 사랑해요, 가가. 들어가서 한잠 푹 주무세요."
당철휘는 신들린 사람처럼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호호호! 돼지 가죽? 그런 게 있다면 내가 배우고 싶다. 멍청
한 놈 같으니..."
한때는 영원한 반려자로 생각했던 당철휘였다. 소심하지만 마
음이 독하고 독술이 뛰어나 조금만 조정한다면 능히 일파의 장
문을 넘어 무림사에 장식될 효웅으로 보였다.
하지만 당동한에게 농락당한 지금 당문 사람이라면 이가 갈렸
다. 당사자 당동한을 비롯해 모두를 죽일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시작되었고 출발은 순조로웠다. 힘의 바탕이 되어
줄 당철휘를 손아귀에 넣었고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독제실장
을 너무 쉽게 척살했다.
"호호호호호...!"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당운담이 비쳐졌다. 이제 그의 얼굴 가
죽을 벗길 차례였다.
그것도 모르는 당철휘는 제 아비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희희낙
락하겠지. 후에 제 아비의 얼굴인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
까?
같은 시각.
단비하는 소리없이 당문으로 잠입했다.
아무리 철통 같은 경계를 서고 있다 할지라도 당문에서 자란
단비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어디에 개구멍이 있고 어디에 초
소가 있는지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후위대는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
귀속칠가 사람들이 전부 죽었으니 순수한 당문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 수위는 낮았다. 비록 수독실에서 독공과
당문 비전 무공인 환격검법 진천십삼수를 전수받았다지만 몇십
년 동안 무공을 갈고닦은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직도 전부터 맹위를 떨치던 일류무인들이 많아 겉으로 보기
에는 전혀 무위가 떨어지지 않은 것 같지만 너무 허술한 경계
가 진실을 말해 줬다.
끼이익...!
단비하는 서슴없이 만채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약초내음이 강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내음 속에는 묘한 악취도 섞여 나왔다. 마당 깊숙한 곳에 비가
새지 않도록 지어 놓은 장옥(長屋)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
죽책(竹柵)으로 칸막이를 하고 사슴을 기르는 모양이었다.
녹각(鹿角)을 얻기 위해서라지만 똥을 소제하지 않아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수많은 전각 중에 만채실을 선택한 이유는 죽은 만채실장 때문
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통달보리심단이 있는 곳을 말해 주었
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휘위대주가 통달보리심단을 가지고 있
었다니. 하기는 그런 사실을 알았다 할지라도 당시 상황으로는
후위대주의 몸에서 통달보리심단을 꺼낼 틈이 없었다.
결국 통달보리심단은 그의 유해와 함께 당문으로 되돌아왔다.
만채실에서는 액으로 된 통달보리심단을 두 병 만들었다.
그 중 나머지 한 병은 만초신의가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가 죽
은 지금 위치를 아는 아람은 단비하뿐이었다.
당문주의 무영지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독이었다. 당문
의 모든 독물을 견식한 적이 있는 단비하지만 무영지독만큼은
냄새도 맡아 보지 못했다. 독의 성분은 물론 하독 방법까지도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무영지독이 있기 때문에 당문의 장
로들이 절대적인 복종을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죽기로 작정하면 그러지 않아도 되겠지만.
미완성의 통달보리심단이 과연 무영지독을 해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영지독에 중독당한 사람이
없으니까.
단비하는 통달보리심단의 효능을 누구보다도 인정하는 측에 속
했다. 당문 십독 중 하나라는 자포독에 중독당하고도 통달보리
심단을 복용하자 통증이 사라졌다. 완치되기까지는 십 일이나
걸렸지만 후유증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놀랄만한 발전이었다.
효능이 상실된 것은 십독 서열 삼위인 십미패독부터였다.
중독 증상이 그대로 남았다. 피부는 검붉게 변했고 오공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입이 비뚤어지고 숨이 막혔다. 급히 십미패
독의 정통 해약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불귀객이 될 뻔했
다.
당연히 서열 이위인 투골독은 시험되지 않았다.
어떤 독도 풀어 낼 수 있는 만능 해독단의 신화가 무너진 이
상, 시험할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시험해 봤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해독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독의 성분이
각기 다른 이상 당문이 정해 놓은 서열이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단비하에게 독의 강함을 말해 보라면 코웃음을 쳤으리라.
일반 문도들이 사용하는 후란독, 홍무독, 한매단...그런 독들
역시 당문 십독에 버금가는 맹독성(猛毒性)을 지녔다. 분량만
정확히 살포한다면.
만초신의의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다탁 위에 먼지가 기득 쌓인 것으로 미루어 청소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주역(周易)은 펼쳐진 채 먼지가 수북했
고 찻잔속에는 시퍼런 곰팡이가 가득했다. 주담자 안에도 곰팡
이가 가득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만초신의의 개인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제일실 만채실장이라는
공인의 집무실이었다. 그렇다면 만초신의가 죽은 날부터 만채
실은 공석(空席)이었다는 말이 성립되었다.
단비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문의 주된 수입원은 만채실에서 나왔다. 만채실에 있는 문도
들이 약초를 채집해 오면 상태를 보고 금년도의 약재(藥材) 단
가(單價)를 조정했다. 당연히 사천 약초상들은 당문에서 정한
단가대로 거래했다.
그리고 이익의 일부를 헌납했다.
그런 주요 기능을 가진 만채실장의 집무실이 이 모양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기다.'
단비하의 눈은 월광(月光)을 따라 침상으로 향했다. 이부자리
도 일년 전 그대로인 듯 구겨진 새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휘이익!
재빠르게 신형을 날린 단비하는 목침(木枕)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만초신의가 일러 준대로 오른쪽 모서리를 힘껏 잡아당
겼다.
스르륵!
목침은 마치 빡빡한 추체(서랍)처럼 힘들게 열렸다.
"통달보리심단..."
조그마한 푸른 옥병에 찰랑이는 액체. 푸른빛과 겹쳐 검게 보
였다.
나무로 된 마개로 주둥이를 막았으며 겉을 밀랍으로 감싸 공기
의 유입을 막았다. 만초신의의 정성이 알알이 배인 옥병이었
다.
'이제는 당문주...'
통달보리심단까지 얻은 이상 당문주의 무영지독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첫댓글 즐감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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