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파업 나흘째였던 지난달 29일 저녁 7시 50분 무렵. 서울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 도착한 전동차에서 일본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명동에키고자이마스"
서울과 수도권을 오가는 전동차에는 맨 앞칸과 뒷칸에 각각 운전실이 있습니다. 앞에는 기관사, 뒤에는
차장이 탑니다. 이중 뒷칸에 탄 승무원을 차장이라고 합니다. 전동차가 역에 서면 출입문을 여닫는 일과
안내방송을 담당합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전동차 안전 운행에는 필수적인 요원입니다.
그 일을 현재 21세의 대학생도 맡고 있습니다. 철도대학교 철도운전기전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이준형씨입니다. 그는 이날 철도파업 첫날이었던 지난 26일부터 지하철 4호선과 연결되는 수도권 전철 과천-안산선에 투입돼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의 힘든 근무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인 이날에도 그는 이른 아침인 오전 6시 30분 서울 반포동 집을 나와 경기도 안산역으로 가 운행 계획과 주의 사항을 들은 후 오전 8시 54분 안산역에서 오이도역으로 가는 전동차에 타 차장을 맡았습니다. 여기서 서울 당고개역으로 갔다 다시 안산역으로, 또 당고개역으로 왔다 이날 마지막으로 안산역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2시간 가량 걸리는 당고개~안산역 사이를 두 번 왕복하는 것이죠. 점심과 저녁 식사는 잠시 운행이 비는 시간에 창동기지에서 해결했습니다.
"스무살 갓 넘긴 학생이 전동차 차장을 맡고 있다면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준형 학생이 기자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습니다.
"…"
"철도파업에 따른 비상 인력이라고 해도 이해를 못하겠죠.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자의 말문이 막히자 그는 "안전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명제"라며 스물 한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단호하게 "한순간의 방심도 금물"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또 "전동차 안내방송은 모두 음성녹음이 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차장이 직접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승객이 있다고 믿기에 힘들어도 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어를 조금 밖에 못 배웠다는 그가 명동역에서 일본어로 안내방송을 한 이유입니다.
오십을 바라보는 기자가 갓 스물을 지난 대학생과 친구가 된 건 지난 6월 30일이었습니다. 그날은 임진각역과 서울역 사이를 오가던 경의선 통근 열차 마지막 운행이 있었던 날입니다('경의선
완행열차의 마지막 기적 소리').
경의선 마지막 열차는 그날 밤 9시 55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역을 출발할 예정이었습니다. 기자는 이 열차를 마지막으로 탑승하기 위해 그날 오후 서울역에서 임진각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습니다. 그 열차 안에서 21세의 철도대학생 이준형씨를 만났습니다.
임진각역에서 내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임진각 북쪽에 있는 '경의선 마지막 증기기관차'를 보
며 철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장래 희망이 기관사인 그는 "철도 역사를 잘 아는 기관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철도대학에서 철도운전기전과를 다니는 그가 열차 기관사가 되는 건 어렵지 않겠죠. 하지만 그는 "열차에 대한 역사도 함께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의선 마지막 열차를 타는 것도 그 배움의 하나였습니다.
마지막 열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오는 길에 그는 "철도기관사가 되어 언젠가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해보
고 싶다"며 그 첫 운행 때 기자를 "옆자리에 꼭 앉혀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철도파업 대체 인력으로 근무 중인 이준형씨는 지금 "마음이 조금 착잡하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공사에 공무하는 기관사입니다. 노조원이지만 필수요원이라 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지하철 1호선을 오가는 전동차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철도공사 노사 대치의 주요 쟁점은 무엇보다도 '인력 감축'을 둘러싼 갈등 때문입니다. 이준형씨는 철도
공사의 인력 감축 방안에 대해 선뜻 찬성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인력이 줄어도 "안전을 100% 담보할 수 있
을 지"에 대해서 현재로선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한편으로 철도공사의 '인력 감축'을 누구보다도 바라는 사람입니다. 최근 4년간 철도
공사는 단 한명도 공채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영합리화를 위해 인력을 줄여야 하는 철도공사로서는
새로운 인력을 뽑을 리 없습니다.
이준형씨와 같이 철도운전기전과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취업에 큰 걱정이 없다고 합니다. 철도기관사가
필요한 자리는 철도공사 말고는 여러 곳에 많다고 합니다.
조건이 더 좋은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철도공사 입사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있는 철도, 그 현장'을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준형씨는 내년 2010년말이면 기관사 자격을 따 취업전선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가 '철도공사 기관사'
라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나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달리는 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대한민국 철도공사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날. 이를 동행 취재하는 것은 기자의 소망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