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존재론의 출발점은 희랍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란 얘기도 있는데, 그에게 희열(喜悅)은 익숙한 걸 낯설게 보는 데서 온다고 한다. 하긴 우리의 삶에서도 어쩌다 한 번 보는 불 구경이나 싸움 구경만큼이나 희열을 느끼게 해 주는 건 없다고들 하더만...
그러나 존재론(存在論)이 말하는 '있는 것이 있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는 논제는 일견 그럴 듯 당연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불가에서 이르길 '없음에서 나타남이 생성(生成)이요, 있는 데서 없어짐이 곧 소멸(消滅)이라' 한 즉, 그게 화엄경의 핵심 사상이랄 수 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일컬음이라... 들어오고 나감이, 삶과 죽음이, 눈을 뜨고 감음이 어찌 둘로 명쾌하게 쪼개질 수 없다 함은 그 판단은 오직 마음이 정하는 데 따름이라.
장자의 마누라가 죽자 그는 두 다리 쭈욱 뻗고 앉은 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단다. 해서리 조문(弔問)을 온 누군가가 그를 힐난했다나 뭐래나. 하니 장자가 말한다.
"마눌하가 죽었을 때에야 난들 어찌 슬픔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녀가 태어나기 전의 모습을 살펴 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고, 삶이 없었으니 본시 형체조차 없었던 것이요, 형체가 없었으니 본시 기운조차 없었던 것이었을 터. 헌데 아무 것도 아니었던 그것이 변화하여 기운이 있게 되었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체가 있었고, 형체가 변화하여 삶이 있게 되었는데 이제 그녀는 또 변화하여 죽어간 것이니 무에 서러웁고 무에 아쉬움이 남았을까 하느니..."
그러게 삶이 어찌 형해(形骸)가 따로 있고 죽음에 어찌 공(空)과 무(無)만 남았다고 할까. 해서리 장자는 북쪽 바다 깊은 곳에 사는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어느 날 구만리 장천을 날아올라 붕(鵬)이 된다 해서 그 둘이 어찌 하나가 아닌 둘이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우리들에게 고향은 언제나 마음 속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고, 갈 수 없음에 아픔으로 치환되지만, 그 꿈은 언제나 인간은 죽는다(Memento Mori)란 불변의 진리만 새삼 일깨워 줄 뿐이니...이연실님의 '고향꿈'을 들으며 나는 또 어떤 마음가짐으로 내일을 맞을지 생각해 본다.
동산에 달이 밝아 창에 비치니
어언간 깊이 든 잠 놀라 깨었네
사방을 두루두루 두루 살피니
꿈에 보던 고향산천 간 곳이 없소
우리 아빠 무덤가 핀 담배꽃
그 꽃 한줌 꺽어다가 담배 말아서
할배요 일손 놓고 한 대 피우소
너울너울 담배 연기 피워나 보소
우리 엄마 무덤가에 핀 진달래
그 꽃 한 줌 꺾어다가 술로 빚어서
할매요 이리 앉어 한잔 받으소
너울너울 진달래주 취해나보소
우리 님 무덤가에 핀 목화꽃
그 꽃 한 줌 꺾어다가 이불 지어서
누나야 시집갈 때 지고나 가소
너울너울 목화이불 지고나 가소
우리 애기 무덤가에 핀 찔레꽃
그 꽃 한 줌 꺾어다가 물에 띄워서
옆집 아가 배고플 때 마셔나 보렴
길 떠나간 엄마 생각 잊어나 보렴
동산에 달이 밝아 창에 비치니
어언간 깊이 든 잠 놀라 깨었네
사방을 두루두루 두루 살피니
꿈에 보던 고향산천 간 곳이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