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1월30일 송파강 삼전도(三田渡), 그때도 칼바람이 불어왔다.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는 오랑캐로 얕잡아 본 청의 태조 앞에 청나라 죄수복을 하고서 용서를 빌었다.
청의 태종 홍타이지는 승전국의 승장(勝將)으로 높이 16마터의 수항단에 앉았다.
조선의 인조는 치욕의 패군지장(敗軍之將)으로 무릎을 꿇었다.인조의 머리는 상투가 벗겨져 산발한 채
남한산성을 휘돌아 불어오는 강풍에 온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臯頭)를 치러야 했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삼배구고두다.
그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은 선혈이 낭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선와 청나라 사이의 전쟁은 이렇게 조선의 참패로 끝났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3학사를 비롯한 충신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백성과 여인네들이 정든 고향산천과
그리운 가족과 생이별을 고하며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포로가 돼 끌려가야 했다. 전쟁은 백성들에게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그대로 안겼다.
“황제께서 십만 군대로 동방에 원정오니 천둥 같은 기세에다 범처럼 용맹했네.(중략) 우리 임금 복종하여 다 함께 귀순하니
위엄 때문 아니요 덕에 귀의한 것이라네.(중략) 우뚝한 비석이 한강 가에 서 있으니 만년토록 조선 땅에 황제의 덕 빛나리라.”
그해 11월 수항단이 있었던 삼전도에 세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의 비문 일부이다.청나라의 승전비(勝戰碑)가 아니라
대청황제(大淸皇帝)의 공덕(功德)를 기리는 공덕비로 세운 것이다. 청은 그 비문의 문장도 조선에게 지어 올릴 것을 요구했다.
청나라에서 원하는 이 치욕의 비문을 누군가는 지어야 했다. 이 역사의 오명을 짊어지는 일을 인조는 1637년 11월에 비문을 지을
사람을 추천하라고 비변사에 명을 내렸다. 장유(張維), 이경전(李慶全), 조희일(趙希逸, 이경석(李景奭) 등 네 명의 명단이 올라왔다.장유는 모친상을 이유로 사양했다. 다른 이들도 각자 나름의 이유를 댔으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며칠 후 고령에 병중에
누었다고 한 이경전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세 사람이 비문을 지어 올렸다. 그 가운데 조희일은 일부러 글을 조잡하게
써서 일차로 탈락했다. 장유와 이경석이 지은 비문은 청나라에 보내져 최종적으로 이경석의 비문이 채택되었다.
인조는 이경석에게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向背)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난다”라며 고칠 것을 명했다. 이경석은 일부를 고치고는 공부를 가르쳐 준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경석은 나라의 보존이란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명예란 소절(小節)을 버린 것이다.
이 비는 거북 받침대를 상당히 큰 크기로 만들었다. 더 크게 만들라는 요구에 또 한번의 치욕을 당하며 더 큰 받침돌에 비석을 세웠다. 높이 약 5.7m로 만주 지안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약 6.4m)에 버금가는 매우 큰 비석이다. 이렇게 비석의 크기 역시 조선에서 준비한 것은 묵살된 것이다.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크기로 변경되어 비신 12척에 용두 2척 2촌으로 그 규모가 커졌다. 비문은 세 가지 문자로 기록하였다. 정면은 청나라 문자와 몽고 문자이고 후면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비문의 글씨는 당시 형조 참판인 오준이 쓰고 비문 위에 전서로 쓴 `대청황제공덕비`란 글씨 일곱 자는 여이징이 썼다.
이렇게 새긴 다음 비면의 황제 자는 황금빛 니금(泥金)을 입히고 나머지 글자는 주홍색으로 칠을 하여 1639년 12월 8일에
모든 공역을 완료했다.
청나라 사신은 조선에 올 때마다 한강을 건너가 이 비석과 남한산성을 둘러보며 조선의 종주국임을 과시했다고 한다.
이 비석을 대청황제공덕비라고 부르지 않았다. 건립 당시부터 후대의 각종 문헌에 이르기까지 비석이 있는 삼전나루의 이름을
따서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불렀다. 우리민족에게는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은 치욕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1916년 쓰러진채 방치되었던 삼전도비
건립 당시부터 치욕의 상징이었던 삼전도비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조선과의 조공관계가
단절되자 삼전도비는 한강에 던져졌다. 세워진 지 256년 만의 일이었다. 세월은 250년을 훌쩍 넘겼다. 당시의 치욕은 여전했다.
일제는 강물 속 비석을 찾아서 다시 세웠다. 그랬던 것을 1956년에 땅에 묻어버렸다고 한다.1963년 대홍수로 인해 다시 땅 위로 드러나 인근의 빈터로 이전을 거듭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2007년에는 누군가 삼전도비에 붉은 스프레이로 ‘철거’ 등의 글씨를 쓰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의 수사 결과 평소 역사에 관심이 있던 범인은 굴욕적인 유물을 철거해야 한다며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2010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현재의 석촌호수 서호언덕에 이 비는 서있다.
치욕의 삼전도비는 이곳을 지나는 선비들에게는 굴욕과 분노의 흉물이었다. 윤행임(尹行恁,1637~1762)의 동정기(東征記) 일부다.
"송파진을 지나는데, 큼직한 바위가 강 사이에 서 있고, 채색 누각이 덮고 있다. 바로 정축년(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주를 위해
세운 비(삼전도비)이다. 철퇴로 내려쳐서 강 속으로 쳐 넣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석실(石室) 이후로는 협곡의 기운이 서글프고
침울하여 여울 소리가 거세고 빠른데다가 바위가 모두 흑요색이어서,특별히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곳은 없다. 다만 구비마다
인가가 모두 물가에 임해 있어서 사랑스러우며, 밤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르는 개, 닭이 짓고 울어서 마치 산굴로 난리를 피해
들어온 백성들의 거처와 같다. 배를 끌어서 덕담(徳潭)에 이르자 뱃사람은 달빛을 띠고서 밥을 먹는다."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기기 전에는 비석 곁에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그린 부조물(1982년 김창희 조각)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동판에다 병자호란 당시의 내력을 적어 놓았다. 그 마지막 구절은 "수난의 역사가 서려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이 같은
오욕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민족의 자존을 드높이고 자주, 자강의 의지를 굳게 다져야 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문장은 아쉽게도 이 부조물은 비석을 옮기면서 함께 사라졌다. 함께 옮겨오지 못한 것이다.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고 싶은 마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한 논객은 아쉬워하며 이를 개탄하였다. 분명 삼전도비 역시 슬픔과 치욕의 역사적 산물이다.
여기서 지난 시대의 굴욕적인 역사적 상황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의 말이다. 영광의 역사든 굴욕의 역사든 우리에게는 그 모두가 소중한 역사다.
부정의 역사든 긍정의 역사든 우리는 결코 잊지 말자며 그는 역사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