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토기의 전개
지중해는 선사시대 이래 예술 문화 창조의 근원으로, 특히 에게해 주변에서는 개성 있는 토기가 구워졌다. 초기 토기는 특히 생활의 필수 요건인 의식주의 면에서 생각하면 식사에 관계된 도구인 식기가 그 주류를 이룬다. 우리에게 알려진 고대미술품 대다수는 부장품이나 종교적 제단 유적의 출토품으로 도굴범들에 의해 도굴된 것들이 대다수 전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형적인 특징으로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유물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고대인들은 악마보다 강한 것을 만들어 놓으려고, 호랑이, 사슴, 물소, 뱅수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보다 강한 요소를 강조하여 영수, 영금 등을 혼합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단이나 능표 등의 제기용품도 고대생활에선 중요한 것으로 특히 토기나 도기 위의 문양은 고대인의 신에 대한 통신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항아리, 주기 등에 장식된 인물이나 동물문, 추상문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조형성 높은 제기이외에 식과 관련된 용기들은 배선용기보다는 보관, 저장용기로써 일찍 발달한다. 대표적인 것은 '암포라' 다. 가늘고 긴 몸통과 긴 목에 양쪽의 손잡이가 있고, 항아리바닥이 뾰족하게 돌출된 형태이다. 토기로서 주로 올리브유, 포도주, 곡물 등을 담기 위한 저장 항아리이다. 당시 창고나 부엌이 흑바닥이어서 마닥이 뾰족한 암포라는 쓰러지지 않고 세울 수 있었다. 또 그 수가 많으면 차례차례 기대어 세우는 방법으로 여러개의 항아리를 놓을 수 있다.
당시 지중해에서는 여러 척의 돛단배로 무역을 하였다.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추대신 암포라 도자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 당시의 시대상을 알수 있는 것으로 토기제램프가 있다. 남아 있는 종류는 많지 않지만 시문된 문양, 명문, 등은 산지와 시대를 알 수있다.
서아시아는 문명(이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나톨리아 토기)의 요람의 하나로써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시리아 고지, 이란고원, 아나톨리아고원에는 점토로 주변도구를 제작하는 도공이 있다. 특히 이란이나 테소포타미아 지방은 목재나 석재가 적었기 때문에 정착농경민의 흙에 대한 애착은 다른 지역보다 강해서 자신들이 사는 주거로부터 일상생활의 많은 것을 흙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1. 이란의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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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문토기가 가장 일찍 발달했던 곳은 이란 고원이다. 이란의 채문토기는 크게 나눠 남부 이란의 스사토기와 북부이란의 시알크토기로 나뉘어진다. 기원전 4000년대에 속하는 이들 토기는 황갈색 소지에 회흑색 또는 적갈색의 안료로 도안한 동물이나 인물과 기하학문양을 조합시켜 그린 것.
채색문양이나 기형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기도 한다. 북부의 경우는 기원전 2750년경부터 채문토기가 사라지고 흑색연마토기가 나타난다. 남부에서는 채문토기의 전통이 계속되지만 문양은 훨씬 퇴화하고 청동기시대를 맞아 석기문화도 변화하여 토기는 한동안 단색의 연마토기가 계속되면 금속기의 이미지를 반영한 것인 만들어졌다.
현재 이란인의 선조인 아리아계의 기마 민족이 기원전 1500년경에 이란고원에 침입하는데 그곳에서 다시금 기하학 문양이 있는 채문토기가 나타난다. 또한 긴 주구를 갖는 3개의 다리가 달린 표면을 문질러 만든 토기나 소나 산양의 형태를 한 주구토기, 인물형상토기 등의 변화 있는 단색 토기류가 계속 출현하고 역사시대로 계승됨
2. 메소포타미아 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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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고원과 똑같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지역에도 채문토기가 만들어졌다. 메소포타미아의 토기 문화가 확실하게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기원전 4천년대이며, 이곳에서도 북부지역과 남부지역이 조금 다른 양식의 채문도기가 발달. 생활도자는 여러 종류, 크기의 용기만이 아니라 의식용 소상, 문자판, 스탬프 인장, 봉투, 장식품 특히 건축의 요소가 되는 벽판에도 이용. 북방에서는 기원전 4000년경의 것으로 일컬어지는 핫스나의 채문토기로부터 계속해서 사마루라 채문토기가 계속된다. 기하학문양과 직선적으로 도식화한 동물문양과 조합된 문양이 특징.
남부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북의 사마루라기에 상당하는 시기에 간명하게 정리된 기하학문을 특징으로 하는 에리도우기의 채문토기가 발달외고, 장대한 신전 건축을 많이 남기고 있는 으르크기에는 밝은 태양광선에 백색으로 빛나는 것으로 보이는 '백색신전'이나, 적, 흑 백의 꽃잎을 붙인 꽃잎모양의 점토못, 황,청, 흑, 백등으로 물들인 점토못을 원주 전면에 끼워넣고 사각형이나 지그재그문양의 의장으로 장식한 기둥들을 늘어세운 '주신전'이 남았다. 그러나 우르크기의 토기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지역에서 많이 발굴되고 있지만 훌륭한 신전 건축에 비해 조잡하다.
기원전 3000년 경에 도기를 광물이나 색화장토를 상요하여 채식하고 엷은 갈색의 화장토 위에 붉은색을 띠는 갈색의 점토로 그릇 전체에 문양을 그려넣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2900년경부터 초기 왕조시대가 시작되고 강대한 슈메르국가가 출현한다. 채문토기의 전통은 거의 이 시기에 끝나고 장식이 적은 흑색, 갈색, 적색의 차색토로 변해가나다. 기원전 2000년에는 유리질화한 투명유를 발명하여 훌륭한 시유채회도기가 출현한다. 시유도기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만들어졌으리라 추측하는 이유로는 당시 점토판문서가 티그리스 강변의 바빌로니아의 타르 우마르에서 출토되었기 때문. 이 점토판을 해독한 것에 따르면 기원전 18-7세기 경 남바빌로니아지방을 지배한 구루키샤르왕 즉위 다음해으 ldus 기가 있고 그 내용은 연유를 시작으로 각종 색유 제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이런 시유도기는 기원전 9-5세기 좀더 바라달하여 대표적인 유물은 시유된 기와인데 부조된 인물이나 동물 등을 표현한 홀사바트, 니물드, 스사, 바빌론 출토의. 벽면부조이다.
최초의 점토판은 슈메르으 ldnfmxm에서 발견된 기원전 3000년경의 것이다. 채색점토를 붙인 일종의 모자이크 투명석유를 입힌 도판의 거대한 벽이 제작되었다. 앗시리아의 고대 니네베 근처 살곤 2세(기원저 722-705) 의 궁전에서 터기청색의 지면에 황색의 불투명유로 채식된 평편한 벽돌의 커다란 도판이 발견. 또한 큐르테베의 (앗시리아 상업도)를 보면 당나귀를 끌고 온 상인들이 수수료를 내고 문에 들어서고 한쪽에는 상다하는 사람과 항아리들을 놓고 점토판에 뭔가를 기록하는 서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점토판문서가 일상생활의 기록에 필수적인 용품이었음을 알게 하는 좋은 자료이다.
소성점토로 만든 스탬프 인장이나 인쇄기술의 기원이라 하는 원통형 인장은 신석기시대에 이미 소유권의 관념이 있었다는 증거로써 부장품으로 쓰이기도 한다. 기원전 4500-3000년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우바이트기에 스탬프 인장이 나타났고, 우르트 후기에는 점토판상에 굴려서 흔적을 찍어내는 원통인장도 사용. 여기에 동물, 식물, 기하문양 외에 신화나 동물투쟁문등도 사용. 스탬프 인장은 상거래 등에 날인이나 봉인용의 사인으로 사용되었는데 신석기 시대 이후부터 전통적으로 계속 사용되어짐, 스탬프 인장의 재료로 점토나 돌이 대부분으로 끈을 꿰어 구멍이 뜷린 둥근손잡이를 붙여 사용.
2. 이집트 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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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 유역 퇴적토에 농경생활을 시작하여 흙으로 빚어 태양열로 건조시킨 일건연와는 선조왕조시대부터 현재에까지 가옥이나 공공건물의 건축재료로 성벽이나 신전역 주변에 큰규모로 사용. 소성가공을 하는 토제품으로는 일상적 도구를 비롯해 제사, 장례, 주술용으로 넓은 범위에 사용. 이집트의 도자제품들은 형에 의해 성형된 소상이나 물레성형에 의한 발이나 완이라 해도 20cm 이상 되는 것이 없다, 석조물에 비해 도자제품은 상대적으로 발달이 미약했다. 그 이유는 수목이 적어 가마소서을 위한 땔감이 부족하여 보리볏집, 곡물껍질, 가축의 똥, 왕골등의 야생식물 등 잡다한 연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연료의 문제는 소성온도를 높이는 문제가 되었다.
■ 특 징
도자제품은 유리화한 투명유와 청색계의 불투명유에 특징이 있다. 이집트제품은 대개 크기가 작다, 기원전 14-4세기 분묘에서 많이 발견되는 우세부티라고 불리는 소상과 같이 소지와 불투명유가 혼합되어 도자제품과 유리제품을 구별하기 어렵다. 쓰여지는 소지의 대부분이 점토가 아니고 시리카(모래성분)을 많이 함유하여 가소성이 적기 때문에 성형하기 위해 소성중 타버리는 송지(松脂)나 유기성 해제를 혼합하였다.
규사와 알칼리류의 혼합물이 불의 작용으로 유리질의 것으로 되고 이것이 기물에 응용되어, 유약의 원형이 된 것으로 유약은 우연히 발견된 듯 하다. 그이유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고대 돌의 구나 귀신을 내쫓는 소지품에 유리질 유약으로 보이는 물질이 입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토기에 이런 유리질이 입혀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데 당시 고지와 유리질과의 관련지식이 없어, 점토소지가 아닌 규사가 많이 함유된 소지를 써서 시유했다.
고대이집트의 시유도기를 조사해보면 규사가 90~96%로 나머지가 점토이다. 유는 다공성의 소지에 침투하여 강도를 지탱해 주고 있다.
가장 초기의 색유는 동을 사용한 청색이며, 이후 망간을 사용해서 자색과 흑색의 유약을 만들었다. 당시 동과 망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사용되고 있던 안료이다. 상용된 색은 석영분, 동, 알카리성 용제로 구성된 프리트에서 얻은 청색이다. 백색은 주석으로부터 획득하고 투명이 아닌 여러 가지 색의 기제로써 사용. 청색의 불투명유는 기원전 4천년에 목걸이로 사용.
이집트의 제도기법은 제9왕조(기원전 2200년)에서 아랍인에게 정복당한 7세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불투명유가 입혀진 도판은 바닥이나 내벽에도 이용되어, 가장 오래된 도벽은 기원전 2800~2700년 것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것은 삿카라의 마스터바 피라미드의 지하 조제르왕의 묘실을 장식한 것이다. 그림은 흰석회암판 대신 갈대로 짠 문양을 부조로 한 것이다.
이집트 최고 토기는 서부 델타지역의 알파유이나 메리부데, 중부 이집트의 델타사 출토의 소무토기로 소성 온도가 낮고 손을 말아 올린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바타리기에는 빗살무늬와 다양한 기하학문을 시문했다, 나가다에는 기형도 다양하고, 동,식물문, 인물문 채문토기, 적색마연토기 등이 발달.
고왕국시대(기원전 2686~2181년경)에는 수동식 물레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중왕국시대(기원전 2133~1786년)에는 시유도기가 출현하여 특히 소조상에 채색시유한 것이 대량으로 제작. 신왕조시대(기원전 14567~525년)에는 색채가 풍부하여져서 초화문, 동물문이 시문, 구형의 몸체에 긴 목의 항아리 ,파피루스 형태의 병, 부조의 문양을 붙인 주전자 등 외에 동시대의 금속기나 석기, 우리기등의 형식을 따른 것도 있다.
특히 파이앙스에 의한 병, 호, 소조상이 크게 유행한 것도 이시기로, 그 형식이나 장식볍은 말기 왕조시대에도 큰변화없이 계속되어 이후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점토와 모래를 혼합해서 만든 소지인 시유 타일은 기원전 3500년 경에 만들어 졌고, 시유된 도제의 관통도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4. 아나토리아의 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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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000-3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의 채문토기 영향을 직접 받은 토기가 만들어진다. 기원전 2000년대 후반에는 카파토키아식 토기로 통칭되는 아나톨리아 독자의 양식을 갖는 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지만 기원전 12세기경 힛타이트왕국의 멸망에 의해 단절.
기원전 3000-2000년경 대표적인 도자형태로 중앙 아나톨리아의 새부리와 비슷한 주둥이를 한 물따르는 토기, 즉 취형수차토기가 있다. 기워전 1750~1700년경 힛타이트시대로 오면 채문토기는 자취를 감추고 종류로 적어진다. 이미 전 시대부터 계승해온 새부리 모양의 토기는 힛타이트 특유의 마연토기로써 기표면 전체에 적색슬립을 바르고 소문 또는 원화문들을 시문하고 커다란 손잡이와 뾰족한 바닥을 한 것으로 좁은 다리에 대를 붙인 것. 이것은 금속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충분히 연마시킨 것으로 그 형태의 유니크함은 조형작품으로써 훌륭한 형태미를 갖고 있고, 기원전 18-15세기에 성형했다. 아라쟈휴크출토의 토기군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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