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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교감, 천성산 한 자락에 둥지 틀다
<양산 천성 초등학교 : 00.09.01-03.02.28>
◎ 발령을 받고
○ 사전 조사 후 조금 놀란 일
학교에 가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교원명부 하나만으로 나는 몇 가지 조사를 해 보았다. 우선 학교의 규모가 얼마나 큰가를 알기 위하여 교원명부를 펼쳐보고, 나의 전임 교감이 좀 아는 선배임에 놀랐다.
전임 백인권 교감은 교대 선배로 나보다 1년 먼저 양산으로 승진해 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내 전임 교감이라니 세상은 아주 좁기만 한 것인 듯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학교 규모였다. 26학급, 크다고만 할 수는 없는 규모지만 교감 신참인 나로서는 상당히 버거운 학교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에 근무한 사천초등학교가 38학급이었으니 26학급이 뭐 그리 큰 학교일까만 아무래도 교사로서의 입장과 교감의 입장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버겁겠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또 있었다. 아니,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명단을 살펴보니 28명의 교사 중 남 교사는 고작 3명뿐(그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2명뿐이었다)이라는 사실이 그랬다. 내가 주로 근무한 서부경남에서는 학교가 작기는 해도 남교사 구성비 7% 남짓한 학교는 없었었다. 남자가 많아서 꼭 좋다거나 여교사가 많아서 안 좋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만 그저 상황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교원명부에 의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웅상 읍내에 다섯 개의 초등학교(웅상, 서창, 덕계, 평산, 천성)가 있었는데 26학급의 내가 갈 천성초등학교가 가장 소규모 학교인 점이 놀라운 일이었다. 사천읍에 초등학교 고작 두 개 가 있는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면 제법 간이 큰 사람도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09년 지금의 웅상 지역은 더욱 놀랍다. 우선 당시 읍 하나였던 행정구역이 이제는 명동, 덕계동, 평산동, 삼호동, 소주동 등 5개 동으로 확대되었고, 학교 수도 백동, 대운, 신명이 개교(開校)로 보태어져 8개로 늘어났다.
○ 부임 길 이야기
2000년 8월 26일 아침, 전기한대로 전임 교감이 잘 아는 선배라서 전화를 드리고 길을 묻기로 했다. 왜냐 하면 양산이란 곳은 스스로 길을 알 만큼 익은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몇 마디 설명을 하던 백 선배는,
"길도 잘 모릴긴대, 내가 28일날 갈낀깨내 고마 내 차로 같이 네리가고로 하자."
참으로 반가운 말씀, 고마운 말씀이었다. 안 그래도 서툰 운전 실력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초행길에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2000년 8월 28일, 승진 발령을 받은 양산시 웅상읍 천성초등학교로 부임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근무지인 사천초등학교에 가서 몇 가지 서류들을 챙겼다. 함께 가겠다는 동 학년 선생님들을 만류하는 것도 상당히 힘드는 일이었다.
남의 차에 얹혀 가는 처지라서 설득을 하여 모두 돌려보냈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덥기조차 한데 기껏 시간 내고, 큰마음 먹고 학교에 나온 동학년 5명을, 짜증내며 돌아가는 그들을 겨우 보내 놓고 백 교감님께 전화를 하니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닌가?
불길한 예감 속에 이웃에 사는 이재우 선생님께 전화를 했더니 새벽에 벌써 양산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딴에는 철석같은 약속을 태산같이 믿었던 터라 잠시 계산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천성초등학교로 전화를 해 보니 백선배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나를 데리고 간다고 해놓고 우찌 된깁니꺼?"
"아 참, 그랬재?"
그리고는 끝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만 불경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으나 백 선배를 곰 같은 분으로 치부하고 웃고 말았다. 마침 성씨까지 따지면 백곰이 되는 건가?
도리 없이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미 돌려 보내버린 동학년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고 김대홍 교감선생님과 나 둘이만 내 차로 가기로 했다.
남해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서 이정표를 보아 가며 양산교육청에 도착했다.
사령장을 받고는 웅상 가는 길이 완전 초행이라서 학교로 전화를 했더니 백선배가 교육청까지 온다고 했다.
꼬불꼬불한 초행길을 백 선배 차만 보고 달려서 30여 분만에 덕계라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미리 기다리고 계신 교장선생님, 교무선생님. 운영위원장님, 학부모회장님, 학부모회 총무님과 많은 얘기 나누면서 점심을 먹고 학교로 올라갔다.
학교는 지금까지 내가 본 어느 학교보다 최신 시설이었고, 공기 좋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개교가 일천하니(1999년 9월 1일 개교) 시설도 최신식이었고, 중·고등학교와 나란히 교육의 한 단지를 이룬 참으로 좋은 환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때는 길을 잘 못 들어 가깝고 쉬운 길을 두고 부산의 만덕을 경유해서 돌아가는 길로 해서 어렵게 돌아갔다. 집에 당도하여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참으로 우스운 얘기겠지만 도저히 찾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원래 길 잘 못 찾기로 유명한 나였고 양산 덕계 지역은 정말 가보지 않았던 길인데다가 당시 새 도로가 중간 중간에 개설되거나 가지가 많아서 더 어려웠던 것이다.
부임길에 함께 해 주셨던 김대홍 교감선생님은 그 후 몹쓸 병으로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언제나 후배들에게 잘해 주는 선배로 정평이 나 있었던 고 김대홍 선배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후배 일 하나 보아 주고 생색이나 내고 보답을 바라고 성에 차지 않으면 사정없이 나무라는 선배들을 보아왔기에 더욱 그 생각 간절해진다.
◎ 첫 교장선생님의 가르침
교감 초임지 천성초등학교에서 모신 이홍식 교장 선생님은 내가 교감으로 승진하여 처음으로 모시는 교장 선생님이기에 발령과 동시에 어떤 분인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더구나 지역적으로 서부경남에서 교직생활을 주로 해 온 나와는 달리 이교장 선생님은 부산을 비롯하여 동부 경남인 양산, 밀양에서 교직생활을 주로 하신 분이니 사전에 조금도 정보를 가질 수 없는 분이라서 더욱 그랬다.
단 하나 내 전임 백교감 선배로부터 내가 전혀 묻지도 않았는데 참 좋은 분이란 말씀을 전해들은 것이 사전 지식의 전부였었다.
○ 첫 인상
이교장 선생님의 첫 인상은 뭐랄까 귀티가 많이 나면서 서민적인 모습을 함께 지닌 그런 분이었다. 자주 여유 만만한 미소로 상대방을 배려하시고 매사를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유도하시는 그런 분이었다. 49년생인 나에 비겨 46년생이시니 꼭 세 살 터울의 바로 위의 형님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 무식한 교장 론
가끔씩 ‘교장은 무식해도 된다.’ ‘교장은 무식해야 된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웃으시면 이상하게 그 말씀이 교감인 나를, 아니, 나의 마음을 지극히 평온한 상태로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장 선생님이 무식한 분이 아님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교사 때 현장연구 논문으로 푸른 기장을 세 번이나 받으셨음은 물론 어느 해는 대통령상을 받으셨으니 어지간한 연구 통은 명함도 못 내밀 그런 진짜 연구 통이시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짐짓 덮을 것은 덮어 주고, 혹 되짚어 깨우쳐줄 때에도 누구에게나 마음 상하는 일 없이도 더 따끔하달 수 있게 하시는 것이 교장선생님의 실체였다.
그럼으로써 선생님들이나 일반직들이 아주 마음 편한 가운데 창의성 있게 맡은 일들을 해 낼 수 있게 하는 어쩌면 고도의 고등전략에 속한다 할 것이다. 훗날 내가 교장이 되어 꼭 본받아야겠다고 혼자 다짐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 이홍식 교장선생님께서 정년 1년을 앞두고 2008년 2월 29일자로 명예퇴직을 하셨다. 전화를 드리기는 했지만 정년을 다 채우시지 않으신 점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갖고 계신 배울 점들이 무궁무진하신 분인데 그게 이제 다 묻혀버리고 말게 되었다는 생각에--------.
○ 진정한 문인
학교 홈페이지 인사말이나 각종 교육 잡지에 발표하신 글들, 직접 강의하시는 다양한 연수회 연수자료 등 이교장 선생님의 글들을 대하면 독자들로 하여금 참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언제나 불필요한 미사여구의 동원은 찾아볼 수 없고, 늘 자연스런 가운데 설득력 있게 글을 풀어 나가신다. 읽는 동안 감탄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장애물 없는 시내에 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엮어 나가시는 솜씨는 가히 일품에 속한다.
딴엔 나도 여러 종류의 원고를 써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교직생활을 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부탁을 받는 대로 교장, 교감 선생님들은 물론 대상 불문, 종류 불문의 원고 대작(代作)도 참 많이 했기에 글 쓰는 일만큼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교장 선생님의 글을 대하다 보면 언제나 나 자신에게 시조 말고는 넌 아직 많이 멀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정식으로 문단 데뷔는 하지 않았지만, 판정을 하는 내가 그럴 자격을 갖추지 못했겠지만 내가 볼 때는 진정한 실력을 갖춘 문인임에 틀림이 없다.
○ 선생님을 최고로
이교장 선생님은 언제나 선생님들을 최고로 치신다. 이는 선생님들이야말로 아동교육의 최 일선에서 교육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쳐서 교육의 결실을 일궈내는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그러신다고 본다.
예컨대 운동회가 열리는 계절이면 꼭 선생님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의 운동회 날들을 파악하시어 당일에 연가를 얻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하신다. 하루 동안 자녀의 운동회에 동참하여 자녀 교육에 큰 도움을 주게 하고, 돌아와서는 학급 어린이들을 위해 배전의 사랑을 쏟도록 하면 교육 전체의 얻음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운동회만을 예로 들었지만 실은 모든 학교 경영에 있어서 교사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시는 마음 쓰심으로 간접적인 듯하지만 실은 직접적인 성과 극대화의 길을 스스로 열고 스스로 걸어가시는 것이다.
이교장 선생님이 직접 내게 구체적으로 가르치신 것은 없다. 그렇지만 함께 하는 동안 일 거수 일 투족이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매우 수준 높은 교수활동이었고, 받아들이는 나도 미래를 염두에 두고 받아들였으니 많은 것을 배운 셈이다.
훗날 이교장 선생님이 오봉초등학교 홈페이지에 실으셨던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잘 나타내신 글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략>
눈 맑고 가슴 순수한 우리 아이들의 영혼에 꽃보다 아름답고 보석처럼 빛나는 감성을 심어줄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의 희망이 아이들이라면, 아이들의 희망의 돛단배를 움직이는 선생님 또한 우리의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 영혼에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감성을 일깨워주고, 악함, 추함, 거짓을 아이들 가슴에서 몰아내는 열정과 용기를 가진 선생님, 이름모를 작은 들풀의 새싹에서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경외감을 아이들에게 일깨워 줄 수 있는 지혜로운 선생님을 우리는 희망이라 부릅니다.
<하략>
◎ 교감 데뷔전 시리즈
○ 교감 일상의 시작
<첫인사>
첫 출근을 하여 조회시간이 되었다. 차분하지 못한 성격 탓으로 준비도 없이 직원들 앞에서 인사 하느라 딴에는 진땀을 빼야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려는 듯,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귀담아 들으려는 듯 직원들의 자세는 참으로 진지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아마도 아는 것 별로 없다는 얘기, 부족한 인간이지만 함께 하는 동안 천성교육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얘기 정도를 했으리라 스스로 짐작 할 따름이다.
조회가 끝나고 식은 땀 처리도 제대로 안된 가운데 아동들 앞에서도 인사를 해야 했다. 역시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오히려 아동들 앞에서는 훨씬 쉬웠다. 천진난만한 아동들을 대하는 순간 어디선지 모를 힘이 생겨났는데 천상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세월의 혜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두 가지 다 사전에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 보고 준비를 했다면 더 유익한 이야기들로 보람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우스운 착각>
부임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직원 모임을 갖고 첫째 시간이 시작되어 선생님들이 모두 일어나서 교실로 가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나갈 뻔 했다. 사실은 화장실이면 몰라도 내가 들어갈 교실은 없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늘 해 오던 대로의 습관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하긴 그게 30년 가까운 세월이었으니 굳어도 단단히 굳은 것을 어쩌겠는가?
그런 것은 또 있었다.
교무실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어느 선생님이,
“교무선생님 전화 받으십시오.”
반사적으로 내가 전화를 받겠다고 일어서는 바람에 웃고만 사건도 9월 초에 있었다. 초임교감이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인가? 겸연쩍게 웃는 것으로 모면할 도리 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도 통과의례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그런 상황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공감을 얻었으니 비단 나만 쑥스럽게 여길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 행사와 교감의 역할 데뷔
<운동회>
2000년 9월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규모가 약간 큰 학교라 전체적인 컨트롤에 신경이 쓰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체육부장을 맡고 있는 전원숙 선생님은 여교사라는 편견을 전혀 갖지 못하도록 성격도 활달하고 매사 치밀하면서도 적극적이었다.
체육부장이 짠 빈 틈 없는 계획에 의해 차질 없이 진행되는 일들은 어쩌면 컴퓨터에 의한 것 마냥 시원스럽게 일사천리였다. 계획이 치밀하고 적절하니 일 또한 시행착오도 없이 잘 진행이 되는 것인가 보다.
운동회에서의 교감의 역할이란 전체적인 진행을 체크하고 조정하는 것 외에는 별 것이 없었다. 식순 중에 경기규칙 발표, 성적 발표만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손님 접대를 위해 약간 움직여야 했고, 그 외 대부분 천막 아래서 경기의 전반을 살피는 일들이 주 업무였는데 별다른 문제 없이 데뷔전을 치룬 것이다.
<수학여행 아동 인솔>
2000년 11월 10일, 교감으로 승진하여 처음으로 수학여행 인솔 책임자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딴에는 인솔 책임자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 골똘히 생각해서 얻은 결론은 일선으로 나서지 말고 이선에서 아동들이나 담임선생님들의 어려움은 없는지를 살피고 경험을 살려 조언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6학년 담임 시절 함께 오신 교감, 교장선생님들이 하셨던 모습에서 삼가야 할 부분은 꼭 삼가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을 하고 실천에도 옮겼다.
잠 안자고 몰려다니는 아이들 불러 세우거나 꿇어앉혀 놓고, 지극히 준엄한 목소리로
“이노무 자석 니 임마 몇 반이야!”
를 외치는 일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나름대로 잘 실천을 했다.
6학년은 세 반으로 1반 권연숙, 2반 오정년, 3반 구준연 선생님으로 모두 여선생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버스 세대라 통제에 무리는 없었다. 1반의 권연숙 선생님을 중심으로 착오 없이 여행을 진행하는 담임선생님들의 모습이 한없이 믿음직스럽고 고마웠다.
첫 날 저녁 여관에 투숙을 했는데 여관이 좀 한적한 곳이었다. 거의 독립 건물이어서 여관을 나서면 상가나 민가가 거의 없어서 잘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저녁을 먹고는 한가한 시간에 혼자서 로비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덩치 큰 남학생 두 녀석이 다가오더니 어이없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교감선생님, 화투 어디가면 살 수 있습니까?”
요즘 아이들의 어쩌면 소견머리 없는 생각이요, 말이다. 간도 크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전혀 그런 내색은 하지 않은 채 최대한 일상적인 투로,
“아마 이 근처에는 살 곳이 없을 테니 조용히 친구들이랑 다른 놀이나 하거라.”
그러고는 그 맹랑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 들어가고 나서 혼자 실컷 웃었다.
<제1회 졸업식과 학사보고>
2001년 2월 19일 역사적인 천성초등학교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1999년 9월 1일자로 개교 하면서 이웃 덕계초등학교에서 1학년부터 5학년까지만 분리 개교를 했으니 2000학년도 말에야 첫 졸업식을 하게 된 것이다.
졸업식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장선생님과 몇 번 상의를 드리고 실제로 기획안이 완성되는 동안에 나는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방법에서 벗어나서 정말로 아이들을 위하고 아이들의 입장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기획이 되게 하시는 것이 그랬다.
졸업장은 학교장이, 수료증은 교감이, 앨범은 운영위원장이, 기념패는 학부모회장이 전 아동에게 수여하는 모습은 적어도 사관생도의 졸업식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었다.
졸업식에서 교감은 전체를 제어하고 살피는 일 외에 학사보고라는 것이 중요한 업무다. 이미 준비 없이 인사말 하면서 나름대로 곤욕을 당한 부임 당시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아예 읽으면 되도록 문장을 시작부터 끝까지 구성하여 읽음으로써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해 낼 수 있었다.
한 학교의 제1회 졸업식에서 학사보고를 하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게 큰 영광이라 생각되는데 그게 개인적으로 교감이 된 후 처음 하는 것이었으니 더욱 영광스럽고 뜻이 깊은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 등잔봉에서 맞는 웅상의 아침
나는 천성 교감 근무 2년 반 동안 자주 아침 일찍 일어나 등산을 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다섯시면 집을 나서서 산행을 즐겼는데 주로 479고지인 등잔봉 등반을 많이 했다.
선우 4차 아파트에 숙소를 얻어 살던 나는 집을 나서서 새진흥 아파트 옆으로 통하는 약한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면 산의 입구에 이르게 된다. 소나무와 참나무 등 여러 종류의 수목들이 어우러진 숲 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전개가 되는데 호흡이 점차 가빠지면서 내가 산에 오르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등산로의 삼분의 이 쯤 오르면 약수터가 있는데 나보다 연세 많으신 분들과 여자분들이 주로 체조도 하고, 에어로빅, 줄넘기 등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무리를 만날 수 있다. 대개 그 지점쯤에서는 아직 어두운 관계로 각자의 일에만 여념들이 없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시원한 약수 한 모금을 받아 마시면 폐부가 온통 청소되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 때 쯤이면 걷기 운동의 효과로 온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추위를 느낄 수가 없고 가파른 산을 무릎 짚어 오르다 보면 등잔봉에 다다라 정상임을 확인하는 순간 몸의 열기에 의하여 이마에는 저절로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새하얗게 펼쳐진 서리 밭에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심호흡을 하고 앉아 덕계를 거쳐 명곡, 서창에 이르는 웅상의 시가지 불빛을 보면서 별천지에 온 느낌으로 하루를 열 수가 있었다.
한참 앉았다가 내려오는 방향은 올라간 그것과 다르다.
천성초등학교 뒷편에 전개되는 산골짜기 길을 따라 내려오면 그 상쾌한 기분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출발하여 집에 다다르는 시간은 대략 한 시간 반 정도가 되는데 그러고 나면 이상한 힘이 솟아 다음 일과의 진행에 크나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다음에 싣는 시조는 어느 날 새벽 채 날이 밝기 전에 등잔봉의 정상 서리 밭에서 얻은 것이다.
<새벽 등잔봉에서>
듬뿍 찍은 묵즙으로
쉬다 간 길목마냥
완만한 곡선마디
이어간 산의 윤곽
명멸의 불빛을 접고
새아침을 열어간다
코끝에 다가서는
상그러운 바람 끝이
찌든 세파 덕지 앉은
고뇌를 씻어주면
새로이 깃드는 힘이
가슴팍을 열고 든다
◎ 미타암(彌陀巖)과 잎 새 바람
2001년 어느 가을날 전 직원이 함께 미타암 등반을 실시했다.
미타암이란 암자는 경상남도 양산시(梁山市) 웅상지역에 있는 원효산(元曉山)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기록을 참조해도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초기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 뒤 1888년(고종 25) 정진(正眞)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암자이다.
미타암 등반을 위해 들어서는 산의 초입에서 얼마간을 걸어들면 ‘잎 새 바람’이라는 전통찻집이 있었다. 산길이라 자연스럽게 조가 만들어지고 흩어질 가능성이 크기에 하산 길에는 모두 ‘잎 새 바람’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발길들을 재촉하였다.
찻집을 뒤로하고 아늑한 숲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어느 새 숨이 가빠지고 함께 걷는 직원들과의 대화라도 나눌라치면 저절로 심호흡이 잦아지는 가운데 방향을 꺾기를 두어번 하고나면 미타암이 눈앞에 나타난다.
암자 자체가 마치 처마를 의지한 제비집처럼 굵은 바윗돌 벼랑에 지어져 있어 대웅전을 비롯하여 요사채에 이르기까지의 건물들이 저절로 운치를 가득 안고 있다. 따라서 주변의 경관은 뒷쪽인 위를 봐도, 아래쪽 절벽을 포함한 산 능선을 봐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절경이었다.
우리나라의 사찰들이 그 분위기가 대개 거기서 거기란 얘기는 있지만, 그래도 눈 크게 뜨고 자세히 보면 다른 부분을 찾을 수 있을 테고 그 찾은 것들이 바로 그 절의 특징이 될 것이다.
교장선생님과 나, 조용수 교무부장, 그리고도 몇 몇 선생님들이란 이룬 그룹으로 담소하며 걷는 가을 산길이 그렇게 즐거운 길이었다. 지리적 여건 때문에 좁고 길게 이어져 그리 넓지 않은 경내를 돌아보고는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서둘러 내려왔다.
조별로 흩어져 걸은 팀들이 자연스럽게 찻집에 모였다. 인원이 다소 많은 관계로 한꺼번에 수용할 공간은 없었고 주인이 반짝 아이디어로 만들어준 마당의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둘러앉았다. 일제히 대추차 한 잔씩을 주문하고 담소는 계속되었다.
아주 진하고도 달콤한 대추차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늦가을의 한기를 등 뒤로 느낄 때 쯤 불꽃을 일으키며 타는 모닥불과 천천히 덮여오는 어둠이 그렇게 기껍고 운치로울 수 없었다. 일어나는 시심을 재우기는 버거워 도 한 수를 빚었다.
소위 즉흥시조인 셈인데 즉흥이란 글자 그대로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상인지라 고뇌가 덜 들어가서 깊이가 없는 작품일 가능성이 크지만 소개한다.
<모닥불> - 잎 새 바람 마당자리-
가마솥 질화로 삼아
모닥불 피워놓고
둥글게 둘러앉아
지펴내는 세상 얘기
소롯이 솟아오는 정
잉걸불로 타고 있다
등 뒤로 다가오는
늦가을 한기 한 올
대추차 진한 김으로
밀어내는 마당가에
이제 막 내리는 저녁
어둠 한 장 널고 있다
◎ 30년만의 소풍과 운동회
○ 이야기의 시작
1972년 진주교대를 졸업하고(8회) 같은 해에 남해 도마초등학교에 부임하여 5학년을 담임하고 이듬해인 1973학년도에는 6학년을 담임함으로써 교직에서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때 졸업시킨 제자들이 남해 도마초등학교 제29회로 나와는 아직도 끈끈한 인연을 아주 기껍게 이어오고 있다. 그 간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들과 함께한 소풍행사와 운동회 행사를 소개한다.
○ 30년만의 소풍
내가 교감 승진 후 처음 양산시 웅상읍 평산리에 소재한 천성초등학교교감으로 재직하던 2002년 여름, 참으로 아름답고 뜻 깊은(그래 봤자 우리에게만 그렇겠지만) 소풍 행사를 실시했었다.
전기한 남해 도마초등학교 29회 졸업생(당시 42,3세)들 중 부산과 울산에 거주하는 제자들이 30명가량인데 그들이 주축이 되어서 동창회 모임 때 스승을 초청하여 스승공경과 제자 사랑의 정을 나누다가 그 해 여름 울산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소풍 행사를 실시한 것이다. 이름은 소풍지만 실은 수학여행에 가까운 그런 일이었다. 참가자도 서울, 대구, 진주, 남해에서 20 여 명이나 되었다.
다음은 내가 소풍 행사를 마치고 그 소감을 적은 글이다. 그리고, 그 다음 글은 소풍행사를 주선했던 제자의 글이다. 이 글들은 모든 제자들이 회원이고 내가 주인으로서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에 올려져 있다.
-나의 글-
<나는 어제 소풍을 갔다 왔다.
참으로 아득한 옛날 같은 1972년에 처음으로 인연 맺은 남해 도마의 그 철없고 순수했던 5학년짜리 아이들이랑.
아니지.
그들은 이미 마흔 하고도 두 세 살이나 되는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이지.
소풍인 줄 알고 함께 나섰더니 이건 소풍이 아니고 수학여행이었다.
경주 땅 감은사지, 기림사, 감포, 골굴사, 수중왕릉....
이게 어디 소풍이랴?
역사 기행을 주로하는 테마 있는 수학여행이지.
하루 종일 즐거웠다.
옛날처럼 애 써 호르라기 불지 않아도 되고, 옛날처럼 노심초사 안 해도 좋고
도리어 그들이 나를 챙겨 주어 내가 짐이 되어버린 여행이었다.
다음에는 내가 주최하는 운동회도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자 영만 군의 글-
-안녕히 가셨는지요?-
선생님!
어제 소풍 나들이 즐거우셨습니까?
혹시나
오늘 피곤하진 않으신가요?
선생님은 어제 무엇보다 좋은 게 있었지 않았나 싶네요.
뭐냐고요
종태가 선생님을 우리 친구인줄 알았을 때 말입니다.
물론 모두들 웃기는 했지만요.
아직 선생님께 젊음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제 와 주시어 고마웠습니다.
암튼 늘 건강하시어 젊음을 유지하십시오.
○ 30년만의 운동회
소풍을 마치고 그 해 가을, 나는 도마 29회 제자들이랑 마음먹었던 운동회를 열었다.
장소는 내가 근무하던 양산시 웅상읍 소재 천성초등학교로 정했다. 운동회를 마친 10월 중순이라서 운동회 때 썼던 준비물들로 재미있는 운동회를 하려 했지만 당일 날 그만 비가 왔다. 이런 경우를 두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할 수 없이 체육관에서 행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참으로 즐거운 운동회를 할 수가 있었다. 내가 만들어 제공한 현수막을 쳐 놓고 개회식에 이어 즉석에서 종목마다 적당히 두 편으로 나누어가며 경기에 열중했다.
주로 초등학교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우리학교 체육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운동회 물품들을 옮겨와서 진행하였다. 이를테면 지구 공굴리기, 사다리 빠져 나가기, 베 공 던져 넣기 등 다양한 종목에 다들 그렇게 신나할 수 없었다.
다음 글은 그 날 제 엄마 따라 와서 구경하고 즐기다가 간 어느 초등학생의 소감문과 40 넘은 제자의 소감문이다.
-제자 유양엽의 아들의 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어제의 노란 머리 최진우(유양엽 엄마의 아들)입니다.
선생님 학교가 멋졌습니다. 저의 학교는 운동장은 넓지만 학교 시설은 선생님 학교가 더 예쁘고 실내체육관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엄마의 친구 분들과 재미있게 게임을 하였습니다. 오래오래 추억으로 남는 날 이었습니다. 친구 영현(정명화 이모 아들)이와도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축구경기는 정말 신났습니다.
엄마의 친구 분들이 몸살이 안 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신나는 하루였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번 더 가서 그때는 운동장에서 더 신나게 뛰어 놀고 싶습니다. 환절기의 건강 조심하시고 오늘 피곤하신 데 이만 쉬십시오>
-제자 이 복지의 글-
-저 푸른 초원 위는 아니었지만-
선생님....노랫말..처럼...저..푸른초원은..아니지만....
공기..맑은곳에..그림같은...학교에서...생활..하시니...
..너무나...부럽습니다....
..저희들은..끝까지...샘을....귀찮게..하는...존재들이지요...
..그래도...너무나...좋은..추억을...간직하게..되었습니다...
..선생님...덕분에요.....건강하십시요.....
◎ 두 개의 카페 주인이 되다.
○ 그리운 그 때 그 시절
1972년 5월부터 시작한 교직생활 30년이 다 되어 가는 2001년 4월 1일에 나는 그간 혼자 터득한 보잘것없는 컴퓨터 운용 능력으로 내가 주인인 카페를 하나 만들기로 하였다. 대개 이 나이에는 어렵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요즈음의 세태요 현실이지만 딴에는 제법 맹랑하고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서 이 일을 결심하고 공부도 나름대로 했던 것이다.
이쯤 이야기 하면 제법 거창한 일이라도 이룬 것 같지만 실은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는 일은 참으로 손쉬운 일에 속한다. Daum 카페 사이트에서 안내하는 대로 클릭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껏 하나도 어려운 일이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었다.
우선 카페의 이름은 ‘그리운 그 때 그 시절’로 정하고, 가입 대상은 지금까지 내가 근무한 학교마다 직접, 간접적으로 가르쳤던 제자들과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로 생각을 했다. 학교마다 또는 지역 중심으로 게시판을 만들어 제공함으로써 안부도 전하고, 정을 이어가자는 목적과 함께 나와는 관련이 직접 되지만 학교가 달라 전혀 생소할 내 제자들 간의 연결도 꿈의 일부로 생각했다.
다음 글은 대문에 올려진 내 글과 카페를 방문한 내 제자들의 글 중 학교별 최초의 글들만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언제나 너희들이 그립다. 함께 늙어가는 처지의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아직 그 때 그 시절의 그리움과 함께 그 추억도 지니고 산다. 남해 도마(1972.5.1-1977.9.30), 창원 이창(1977.10.1-1980.2.29), 사천 서포 자혜분교(1980.3.1-1981.2.28), 사천 서포(1981.3.1-1986.2.28), 사천 동성(1986.3.1-1989.2.28), 통영 사량(1989.3.1-1992.2.29), 통영 사량 돈지분교(1992.3.1-1994.2.28), 통영 도원(1994.3.1-1995.2.28), 사천 서포(1995.3.1-2000.2.29), 사천 사천(20003.1-2000.8.28)에서 내가 직접 담임 했던 제자들은 소중한 인연으로 간직하고 있다. 2001.4.1 - 김형진(카페 주인)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이창우 입니다. 선생님 까페 개설 축하드립니다. 진작에 방문을 해야 하는데 찾을줄 몰라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4월 7일에 남해 도마초등학교에서 총동창회 체육대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29회 동기들이 축구 우승을 했구요. 내년에는 우리29회 동창생들이 주최를 합니다.
그때는 선생님 께서도 꼭 참석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업무시간이라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만 나가야 되겠습니다. 다음에 또 놀러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01.10.21 09:33 - 이창우(남해 도마)
건승하신 선생님의 목소리에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가끔씩 선생님이 생각나고 했으나 찾아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어떻게 20여년이 지난 일들을 기억하고 계신 지 ........ 그때 친구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때 제자중에 영준, 호천, 민수등은 아직 미혼입니다. 12명의 동기 중 창포에 살았던 민형이만 10여년전 설악산 빙벽등반 중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저는 통영에서 10년째해양소년단이라는 청소년 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자주 들리겠습니다.
김형진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온라인 가족 여러분 반갑습니다. 혹시 통영에 오시면 연락주세요 통영은 무척이나 횟감이 싱싱하죠 01.10.24 21:35 - 김용호(창원 이창)
방이 새로워졌군요.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다른 회원님들과 공감대 나누는 얘길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고 해서 글쓰기 할때도 자주 망설여 지곤 했었는데 이렇게 방을 나누기 좋아요.
얘들아 이젠 마음 놓고 얘기하고 놀다갈자. 후!후! 01.10.09 08:43 - 이성화(사천 서포)
선생님 답 멜 잘 받았구요~~ 저를 기억해주신다니....넘기뻐요~~ 답 멜 받자마자 여기 가입했구요~~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전 지금 작업실에 있어요~~아, 음악하는 작업실이예요~~ 제가 작업한 곡을 부른 가수 중에 이기찬이란 가수가 있는데 아세요?
여기에서 작곡한거 편곡하구 그래요~~ 아침엔 비가 많이 왔었는데 이젠 햇빛이 따갑네요~~ 요즘은 작업하느라 정신이 없어요~~헤헤 선생님~~조금 있으면 스승의 날인데 한번도 제대로 축하를 못드려서 죄송하구요~~제가 찾아뵙기에는 조금 먼곳에 계신것같아요~~꼭 뵙구싶은데...제겐 그때의 추억이 넘 소중하거든요...선생님계시는곳이 사천보다 더 들어가나요?? 선생님~~꼭 시간내서 찾아뵐께요~~ 그럼 건강하시구요~~이 카페 자주 들릴께요~~ 꾸벅~~ 01.05.09 14:20 - 김영훈(사천 동성)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주미정입니다. 방금 헌미한테 연락받고 바로 회원 가입했답니다. 그동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등학교 당시 미정이 담임으로 근무하시다가 지금은 교감선생님이 되셨다구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아줌마가 되었구요. 너무 웃기죠. 그렇게도 장난 많이 치고 촐랑거리던 제가 결혼을 했다니 사실 저도 믿기지 않을 때가 많아요. 지금 한참 신혼이라 너무 재미있답니다.
선생님 어떻게 변했을지 정말 궁금해요. 저도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시죠. 우리 그때 함께 공부 했던 친구들 모아서 그동안 못나눴던 이야기 하며 재미있게 한번 놀아 보자구요. 자주 들러서 글도 남기고 친구들한테도 선생님 홈피 있다고 전달 할께요. 몸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01.10.18 12:31 - 주미정(통영 사량)
○ 진주교대 8회 동기회
제자들과의 만남을 위한 카페가 문을 연지 1년 하고도 두 달, 하나의 카페 운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무렵인 2002년 6월 10일 드디어 두 번째 카페를 개업하기에 이르렀다. 이름 하여 ‘진주교대 8회 동기회’ 카페를 개설하여 문을 연 것이다.
이야기 푸는 자리, 생각하고 쉬는 자리, 서울, 부산, 진주 등 각 지역별 게시판 등 모두 13개의 게시판과 기본 자료실, 여행 이야기, 내가 쓰는 주소록 등 4개의 자료실 그리고, 회원들의 자유롭고 가벼운 출입을 위한 끝 말 이어가기, 한 줄 메모장 등 다섯 개의 자유 게시판을 마련하여 활용을 하고 있다.
이 카페는 앞의 제자 모음 카페와 다른 점이 좀 있다.
우선 처음의 반응이 매우 시큰둥했다. 이유는 뒤에 분석된 일이지만 우리 세대 자체가 컴퓨터를 두려워하는 세대다 보니 카페 가입과 드나들기를 좀은 번거롭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뒤에 가입 방법과 출입, 글 올리는 요령 등을 상세히 안내하는 유인물을 발송한 후 가입자도 많이 늘고 활용도도 매우 향상이 되었다. 나는 카페지지 또는 카페 주인으로 분류되고 몇 몇 친구들은 간부사원으로 임명 되어 카페의 질적 신장에 참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이제 카페를 개설하고 나서 글을 올린 순서대로 세 친구들의 글을 소개하려 한다.
축하합니다. ^-^ 진주교대 8회 동기회 카페 open 많이 동참하여 카페 자리가 가득하길
김형진님 수고하셨습니다. 바이 바이 02.06.28 13:03 - 김성우
동천선생 그동안 어케 살아가셨소. 바쁘다는 핑게로 -중략- 부디 건강하시고 즐거운 나날이 되시길 바라며 안부로 대신합니다.
이런 자리 아니었으면 언제 이렇게라도 얼굴 없는 글자로 당신의 모습을 대신 되새겨 보는 시간이 무척이나 감회 어리게 즐거웠소 02.06.28 14:52 - 류창현
그 넘 클 때부터 알아 봤더니만/ 이렇게 카페 까지 차려 놓고 ㅎㅎㅎㅎ/ 어디 칵테일 맛도 일품이려니 자주/ 찾아서 목마름을 해소해 볼려유/ 정말 반가우이... 02.11.01 10:33 주영돈
<함께 했던 직원들>
2000.09.01/이홍식(교장선생님), 신창래, 김숙자, 장현자, 황혜숙 ,조정자, 조용수, 고승희, 송호열, 이명희, 김영숙, 안인숙, 류옥재, 탁선애, 박연순, 김소희, 이경민, 이주옥, 강미숙, 윤미숙, 전원숙, 정숙희, 최미숙, 김명희, 권연숙, 오정년, 구준연, 박선진, 조혜숙, 박연희(보건), 고영희(유치원), 김홍렬(서무), 황경희(영양사), 안영희(기능), 장도평(기능), 김철호(기능), 김혜순(기간제), 신성철(운영위원장), 차성혜(어머니회장), 최우미(부회장),이외정(총무),손정락(진흥회장),오주홍(총무)
2001.02.25/김종숙(서무) 2001.03.01/정승호, 조은영, 진영태, 이 진 2001.03.23/설동희(기간제) 2001.09.01/오외환(도내 첫 원로교사) 2002.03.01/최구일(기간제) 2002.09.01/장윤희(영양사), 2003.02.01/김영순(영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