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딸들, 건투를 빈다!
혜완, 영선, 경혜.
그들은 대학 일 학년생이었고 그들이 몸담고 있는 학교 방송국의 단 세 명뿐인 신입 여학생 아나운서들이었다. 불문과에서 친해진 그들은 재미삼아 우루루 몰려가 방송국에 지원을 했는데 모두 합격을 해버린 것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혜완과 영선, 경혜가 대학을 다니던 때로부터는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그들의 딸들이 대학을 다니거나 또는 이미 졸업하고 일과 사랑이라는, 그 엄마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30년 사이에 엄마들과 딸들 앞에 놓인 고민의 내용과 강도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안타깝지만,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것이다. 혜완을 괴롭혔던 문제는 그 딸들에게도 여전히 심각하고 버거운 실존의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30년 전 혜완이 대학에서 이론적으로 ‘학습’했던 성적 평등은 요즈음 세상을 달구고 있는 광주 인화학교의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 「도가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로 몸을 바꾸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엄마들을 울렸던 문제는 그 딸들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을 뽑아내고자 버티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단지 결혼이라는 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한 공공연한 약속이라는 것만으로 그렇지 않은 서약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가. 하지만 몇 달 만에 서약을 뒤집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서약이 아니라 무책임한 약속이 아닐까. 그렇다면 몇 달이 아니라 몇 십 년 만에 서약을 뒤집으면 거기에는 타당성은 있는가…… 그렇다 해도, 만일 서약을 어겨야 할 일이 있다면 거기에는 무언가 목숨을 걸 만한 비장감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될 테니까. 존재 자체가 호소하는 위기도 없이 약속을 뒤집을 수 있는 게 쉽게 용납된다면 대체 우리들의 약속은 무엇인가.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잘되기를 바랬던 딸은 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대학 동창 선우의 생각에 잠기어 있다. 이혼에 대해서 그렇게 자신이 없었다면 선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처음부터 그 아무것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지만 그녀는 어머니에게도, 선우에게도 그렇게 또 다른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나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싸늘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팔짱을 끼고 시골집을 떠나는 딸 혜완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다. 먼지를 피우며 버스가 왔고 그것을 탔을 때, 차가 떠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모습이 작게 멀어져 갔다.
매일 밤 바람난 남편을 기다리며 부글거리는 속을 감싸 안고 금방이라도 이혼을 할 것 같이 부산을 떨며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그러나 별거 중인 남편과 함께 사는 딸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는 금새 얼굴에 화색이 도는 의사 부인 경혜의 투덜거리는 결혼생활은 겉으로 보기엔 그런대로 평탄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감독과의 불화(?)때문인지 알코올 중독성 우울증 때문인지 또다른 친구 영선이 자살을 한다.
영정 속의 영선은 수줍은 듯 했다. 미소를 띌 듯 말듯 긴 파마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마도 아이를 낳기 전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인 듯 했다. 아직 많이 불행해지기 전에, 아직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시절,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을 때 영선은 수줍게 웃었다. 법당에 놓인 그 사진 앞에서 노스님이 담담히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쓸쓸한 겨울 산사 뜨락에는 따뜻한 겨울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제서야 혜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언젠가 불경을 읽다가 영선이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 말 참 좋지? 들어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연인지 복고인지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는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없는 실소이며,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삶의 문제, 인생의 질곡으로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불안 요소이다. 여자들은 여전히 말대꾸(?)를 하고, 남자들은 아직도 “제발 말대꾸 하지 말고 그냥 단 한 번만이라도 알았다고 할 수 없냐?”고 역성을 낸다. 이렇듯 부부간의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돈만 있으면 사이좋게 동거가 가능할 것 같았던 일과 육아는 시간이 얼마가 흘러도 아직도 남자와 여자간의 사랑과 전쟁이다.
작가는 말한다. 그렇기에 “첫 출간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메시지와 울림이 여전한 효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 소설의 행운인가 불행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행운이자 동시에 불행”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시대의 불행을 자양분 삼아 잉태되고 또 존속하는 문학의 역설적인 행운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사적 혹은 시대적, 그도 아니면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의 계기로서 다시 한 번 펼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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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영 :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8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단편 구치소 수감 중 탄생된 작품「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착한 여자』 『봉순이 언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즐거운 나의 집』이 있고,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별들의 들판』,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등이 있다. 21세기문학상과 한국 소설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앰네스티 언론상 특별상, 제10회 가톨릭문학상, 2011년 월간 「문학사상」에 발표한 『맨발로 글목을 돌다』로 제35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2010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엮어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