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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웃는 사람은 항상 아름답다.. 가난하든 부자든 있든 없든 그런것들은 사람들간의 이간질 시키는 비교대상일뿐....
이름도 알수 없는 산간 오지마을 공터에서 튀김을 하시는 아주머니의 천만불짜리 수줍은 미소..^^
여기는 ca bin이라는 한적한 마을이다.. 왼쪽으로 4킬로만 더 가면 베트남과 라오스 국경이 나오는데 아마 여기가 국경넘어 첫 간이 휴게소쯤 아닐까 한다.. 아무튼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의자에 앉아 다음 도시인 “후에” 가는 길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아이 둘을 데리고 식당에 들어섰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소금으로 가득한 죽과 설탕으로 가득한 음료수였는데 도저히 입에도 댈수없는 상황이었다.. 이걸 먹으면 나는 정말 죽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여기 사람들 정말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구나 생각했다..
내가 자리에 앉고 주문을 한후 기다리는 동안 맞은편에 앉아서 한결같이 저 자세로 나를 쳐다보는 남자 아이.. 그들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도 이 아이는 자세가 한결같이 오른쪽으로 허리를 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허리 아프니 의자를 돌려서 바로 보라고 했다.. 지켜보던 엄마도 내 뜻을 이해했는지 아이에게 뭐라 하면서 웃으셨다.. 그런데 음식이 두그릇 밖에 나오지 않아서 물어보니까 아이들만 먹고 자신은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지 말고 내가 시켜줄테니까 먹으라고 하면서 주인을 불렀다.. 재차 나의 의도를 조심스럽게 아줌마에게 전달한 뒤에 음식을 주문했다.. 엄마는 웃으면서 만족하는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는 뭐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집에 아저씨가 있는데 포장 하나 하면 안되냐고 나에게 부탁했던것..
까짓거 기분이다.. 여기 짜고 단 음식이랑 포장까지 전부 합해서 오천원.. 기분좋게 먹고 행복해지는 비용은 단돈 오천원.. 카페 스어 다 한잔 안먹으면 된다..
그나저나 큰아들놈.. 밥도 안먹고 나를 쳐다봤다.. 징그러운 자식..
밥을 다 먹고 떠나는 찰나에 큰아들이 나에게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같이 사진 한장 찍고싶다고 했다.. 그러자, 근데 내가 한인물 못되서 미안하다.. 이리와라.. 안아줄게.. 거기 너도 이리와라.. 몸이 가벼우니 왼손으로 안아줄게.. 그리고 일어섰다.. 엄마손에서 손가락 하나가 계속 움직였다.. 사진을 여러장 찍고 있는듯 했다.. 기념으로 내 휴대폰으로도 한장 부탁할게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폰에 함께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있을까.. 어쩌면 외국인에게 안겨서 사진을 찍은 첫경험이 될지도 모르는데 좋은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아있길 바래본다..
역사의 도시, 후에라는 곳에 도착했다.. 목욕탕의 냉수와 온수를 번갈아 들어가듯 나의 여행은 문명과 비문명을 찾아 다니는 여행이라 어느 한 지역에 적응할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 비문명은 내 성향과 맞아서 순탄하게 적응했지만 도시는 항상 그랬었다.. 공교롭게도 대도시였던 나트랑과 이곳 후에 두도시는 만 12시간을 못버티고 숙소를 탈출했던 것.. 빈민굴 같은곳이었지만 비싼 숙박비, 열악한 시설, 곰팡이 냄새, 소음들은 비록 가난한 나지만 결코 양보할수 없는 조건들인데 이 모든걸 완벽하게 갖춘곳에 머문다는건 참을수 없는 고통....
한국인이라는것과 3일 머물면 깎아준다는 숙소 주인의 말에 일단 하루만 머물겠다고 했다.. 짐을 풀고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거리로 나왔다.. 어두웠고 큰도시라 당연히 오토바이는 놔두고서.. 근처 마트에 가서 돼지고기랑 과자랑 맥주 한캔 사들고 숙소로 왔다.. 밥솥에 배추를 깔고 그위에 돼지고기랑 고추장이랑 마늘 잔뜩 까넣고 비볐다.. 이름하여 두루치기..
난 왜 맥주 한병만 먹으면 졸음님이 오는걸까.. 반쯤 먹다남은 두루치기를 뚜껑으로 덮고 주변을 대충 그리고 빨리 치웠다.. 잠으로 아무대나 퍼질러 기절하기 전에 무사히 침대로 가기 위해서는 속전속결이 요구되었다..
다음날 아침 출발하려는데 주인님이 앉아보라며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결혼은 했는지.. 왜 오토바이 여행을 혼자 하는지.. 라오스에서 사업하는지 등등.. 이미 주인님은 밤새 나의 여권을 심층분석 하신듯 했다.. 아마도 나를 좋게 보신듯.. 출발하려는 나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여자 소개해 줄테니 후에로 다시 올수 있냐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만나서 결혼을 한들 무슨 행복이 있겠냐고.. 말 통하는 한국에서도 결혼 못했는데 직업도 없는 내가 어떻게 베트남 여자 앞에서 당당할수 있겠냐고.. 말씀만이라도 너무 고맙다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이곳 말고도 몇군데 더 소개를 받을뻔 했다.. 하지만 나는 한결같은 대답.. 난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어요.....
그렇게 후에를 떠나 다시 산으로 향하는 날이다.. 도시인 동하를 지나 본격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타고 올라갔는데 어느 한적한 길가에 서있는 표지판에 “역사적 기념물”이라고 영어로 적혀있는걸 발견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역사적 “relics” 유물, 흔적, 유적을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간여행을 할수 있어서다.. 정확한 연도가 언제인지도 모를만큼 오래전에 사람이 만든 그것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볼수 있다는 매력, 호기심 덩어리다..
찾아간 곳은 고원지대의 비교적 넓은 평야였다.. 전쟁시기때 미군 연합군이 비행기로 막대한 폭탄을 떨어뜨린곳.. 하지만 이곳 군인들과 지역사람들이 잘 지켜내서 물리쳤다는 역사적 현장이었다.. 드넓은 능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서 죽었을까.. 땅속 깊숙히 박힌 불발탄은 다 찾아낸걸까.. 라는....
비석앞에서 한동안 감상에 빠져있다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원래는 이 길로 가는게 아니었지만 길이 나있으니 가보기로 했다..(맵스미 지도에는 길이 없음). 분명 길은 있는데 한참 가니 사람들도 지나다니는데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철문과 군인 한명이 서 있었다..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나중에 구글지도로 확대해 보니 여기부터는 군사지역이었던곳.. 즉 군인과 관계자들만이 살고 있는 곳이랄까.. 주변에 작은 길이라도 없을까요? 조금만 더 가면 큰길을 만날수 있겠는데.. 라고 군인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왔던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돌아 나오는 길은 바람도 많이 불었고 체감온도가 많이 낮아서 중간에 잠바를 입었지만 아무래도 음식을 먹어야 할것 같았다.. 그래서 간판도 없는, 하지만 사람들은 앉아있는 마을식당에서 휴식겸 점심을 먹기로 하고 자리를 잡았다.. 여기는 외국인을 처음 구경하는 듯, 어쩌면 한국인을 처음 보는듯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 부담스러운 시선.. 감당하기 벅찼다.. 주인에게 손짓으로 가리키며 이것저것 먹고싶다고 하자 주인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저쪽에서 술을 좀 하신듯한 한분이 내 옆에 앉아서 말을 건냈다.. 꼬레아, 꼬레아.. 유어 네임.. 이분 좀 웃겼다.. 술이 취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떨때는 진지한듯 했지만 또 어떨때는 했던말 또하고 또하고.. 내가 더이상 대꾸 안하니까 재미 없어서인지 원래 자리로 돌아가셨다..
무엇을 만드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음식이 나오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기다리는 나에게 남편되는 분이 내 자리에 앉아서 교감으로 통하는 대화를 나눴다.. 나의 여행기와 현재 상태를 감잡은 아저씨는 담배 하나 물고 연필과 노트를 들고 와서는 큰길로 나가는 지도를 그려 보여주셨다.. 잊지 않도록 반복 또 반복해서 차근차근히..
음식이 나왔다.. 가정식 백반이었는데 주메뉴는 조개국과 죽순 삶아 무친것 그리고 간장이었는데 나는 추워서인지 아니면 정말 맛이 있었는지 몰라도 공기밥 3그릇을 비웠다.. 먹으면서 주인에게 말했다.. 밥값 얼마냐고.. 그랬더니 아주머니 하는 말씀.. 우리 가족 식사시간이라 그냥 먹으면 된다고.. 밥값 안받는다고.. 절대 안받겠다고 손스레를 치셨다.. 그래도 이렇게 산골짜기에서 푸짐하게 먹을려면 최소 3만동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밥을 다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있는데 아저씨와 나는 밖에 테이블에 있고 아주머니는 부엌에서 계속 일을 하고 계셨다.. 돈을 주니 안받겠다고 하니 집안 어디에다 살짝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부엌에 있는 아주머니께 밖에서 차한잔 하자며 불러내러 들어가서 같이 나오는 사이 재빨리 그릇 아래 살짝 3만동을 끼워 놓았다..
커피도 다 마셨고 하니 이제 출발할 시간..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어 놓았다.. 그리고 살짝 부엌으로 들어가 여기에 뭐가 있다는 뜻으로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아저씨가 부엌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재빨리 나는 오토바이로 달려갔다.. 어느새 뒤따라 뛰어나온 아저씨.. 나는 거의 잡힐뻔 했지만 겨우 기어 3단으로 도망갈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손을 들어 흔들었다.. 잘 먹고 갑니다.. 라는 뜻으로..
3만동.. 1500원으로 사람을 얻는 순간이었다.. 다시 바이크로 베트남 여행을 한다면 꼭 들리겠다고 다짐했다.. 마을 이름은 thuong nghia..(구글지도 참고)
동남아는 덥다고 생각하고 대비하지 않고 왔다가는 동사할수 있다는걸 뼈져리게 느낀나날.. 그중에 하루였다.. “Khe sanh: 라오스-베트남 국경도시”에서 동호이까지 가는 산길은 하루종일 비바람과 함께였다.. 산도 높은데다 비바람에 시야까지 좁아져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얼마나 추웠던지 군대 있을때 동상걸렸던 손가락이 아파왔다.. 어금니를 얼마나 꽉 다물고 있었는지 턱도 아팠다.. 가방에 있던 옷 있는대로 겹쳐 입었다.. 반팔티 3장에 잠바 하나 그리고 우의까지 입었지만 송곳처럼 파고드는 바람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기억에 남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출발하려는데 카메라 화면에서 저 멀리 숲속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보였다..
아이들이었다.. 아는척 했다가는 사라질것 같아서 못본척 하면서 휴대폰을 다른곳에 찍는척 하면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이런 깊은곳에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싶어 가까이 가봤다.. 두어걸음 띄었을 뿐인데 경계심 많은 아이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그 아이들이 있던 자리에 도착했을때 한사람만 겨우 지나다닐수 있는 좁은 길이 하나 나있었다..
조심스럽게 그 길을 걸어 들어가봤다.. 4명의 아이들은 몸을 숨긴채 나를 바라봤고 마당에서 빗자루질 하고 있는 여인이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카메라를 꺼내 그들의 사는 모습을 찍고싶었지만 그들에게 큰 실례가 될것같아 눈으로만 충분히 담고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토바이로 돌아와 시동을 걸려는데 다시 보이는 아이들.. 어렴풋이 들렸다.. 텐달러..텐달러라는 말을 아이들은 나에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인이 아이들에게 시켰을지도..
10달러.. 줄수도 있었다.. 그게 정말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도움이 안되는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나는 전날에 삶아놓았던 계란과 고구마 그리고 라면, 과자를 대신 주었다.. 건네받은 아이들이 밝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경계심 많던 아이들이 내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 순간까지도 손을 흔들어줬다.. 10달러를 줬다면 그들은 똑같이 내게 이렇게 손을 흔들었을까.. 돈의 가치를 모르는 이 아이들이 10달러를 받고 기뻐할리 만무하다..
덜덜 떨면서 고비를 넘기고 겨우 평지로 내려온 순간 온기가 느껴졌다.. 비는 계속 왔지만 거센 바람이 좀 줄어들어서 느껴진 것이 아닐까 하는게 어쩌면 맞는듯 했다.. 오늘 넘을 산이 아직 더 있다.. 손가락도 찌릿했고 몸도 차가웠다.. 따뜻한 차한잔이 몹시 그리웠다.. 그래서 눈에 띈 첫집에 무턱대고 바이크를 세웠다..
따뜻한 물한잔만 주세요.... 집안에서 할머니 한분이 나오셨다.. 내가 오들오들 떠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 알아차리신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와 물컵을 가지고 나와서 식탁에 놓으셨다.. 할머니는 내 옷을 만지시며 뭐라고 하셨는데 아마도 옷이 얇다고 하신듯 했다.. 물을 그렇게 마시고 있으니 할머니가 집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안내받은 곳은 바로 부뚜막이었다..
((( 사람의 마음은 같을수가 없고 알수가 없다.. 사람이 모이면 갈등과 분쟁은 피할수 없는 어쩌면 당연한 자연의 이치.. 이것을 인정하고 사람들을 대한다면 왠만한 논란거리들은 상당히 사라질듯한데 우리는 잃은것 생각나고 본전 생각나고 거기까진 이해하겠는데 문제는 나는 잘못없고 나를 이렇게 만든 상대방과 사회에 화살을 쏘아댄다.. 이 부뚜막이 없었다면 어쩌면 내 몸에 이상이 생겨도 심하게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만난적 없고 앞으로도 만날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나는 무조건적으로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사람은 원래 다 똑같다.. 좀 안되어 보이는 사람있으면 도와주고 싶고.. 좀 좋은거 들고 있으면 빼앗고 싶고..
내가 다른 목적(사업, 투자, 강도)으로 이 할머니를 찾아왔다면 할머니는 나를 과연 집안에 있는 부뚜막까지 자리를 내주었을까.. 나를 어떻게 믿고서? .. 그러니 사람을 너무 그렇게 다가가지 말자.. 빼먹을것 없나싶어 다가가는 사람은 몇번 뺏겨 먹더라도 결국 빼먹힌다..))))
(((....))) 괄호안의 내용은 여행기와 맞지 않아서 삭제할까 생각했지만 이왕 써놓은거라서 남겨두었습니다.. 저혼자 독백한거라 생각하시고 그냥 넘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물과 10여분간 따뜻한 불가에서 얼린 몸을 녹이니 이제서야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할머니에게 연거푸 고맙다고 말하고는 내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두번째 산을 향하여 오토바이를 몰았다..
빈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조금 더 외곽으로 바이크를 몰아서 “cua lo” 라는 해안 도시에 이틀을 머물기로 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안전이지만 나만 잘한다고해서 사고가 안나는건 않기에 차량 많은 큰도시에서는 되도록이면 바이크는 숙소에 두고 걸어서 큰도시를 구경했다..
cua lo 는 안전을 이유로 큰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지도를 찾아보고 찾아간 곳이었다.. 바닷가를 따라 대형호텔과 숙박시설로 가득한 곳이지만 관광객이 없어서 폐허가 된 건물들도 드문드문 보였고 바다 바람만이 휑하게 불어대는 을씨년스러운 곳으로 나에겐 첫인상으로 다가왔었다..
그래도 여기도 사람사는곳.. 가난한 여행자가 보기에 만만한 숙소를 찾아 돌아다녔다.. 손님이 없어 현관에 불조차 꺼진 어두침침한 곳에 주인처럼 보이는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룻밤 머물고 싶은데 얼마해요? 그녀는 손가락 두개를 폈다.. 20만동이겠지.. 나는 알겠다고 하고 가려고 하자 그녀는 나를 불렀다.. 15만동....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머물면서 바람부는 바닷가를 걷기도 하고 바이크 타고 드라이브도 했으며 시장에서 사온 갑오징어를 삶아 맥주 안주로 먹기도 했다..
이제 떠나는 시간.. 도시에 와봤으니 이젠 산으로 가야겠지.. 짐을 챙기고 숙박비 계산하고 여권을 돌려받고 출발하려는데 그녀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냈다.. 베트남 맥주인 “333” 두개.. 가서 먹으라고....
그렇게 받고 출발했다.. 한참을 달렸다.. 내 성품이 어디갈까.. 받은건 반드시 돌려준다는.. 산으로 향하던 방향을 돌려 다시 그 숙소로 향했다.. 돌아가면서 무얼 사줄까.. 임산부인데.. 하면서 달렸다.. 가게에 들러 물건을 고르는데 마땅한게 없었다.. 돈도 없지만 비싼걸 준비하면 부담감도 생길것 같아 두리안 과자 한봉지 샀다..
숙소에는 아무도 없어서 내가 인기척을 몇번 했더니 2층 방에서 한남자가 내려왔다.. 나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일단 앉으라 했다.. 밥은 먹었냐면서, 따뜻한 물이라도 가져오겠다고 했다.. 뒤늦게 나타난 임산부는 남편으로부터 내가 돌아온 이유를 들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 남편은 한번도 못봤는데 임산부 혼자 청소하고 손님받고 해서 남편 어디갔는지, 일하는 사람 없는지 물어보는게 예의상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말 많이 걸어줬고 과자 한두봉지 사줬고 옷 좀 따뜻하게 입고 있으라 했다.. 매번 저 원피스 차림이다.. 바닷바람도 많이 부는데 저대로 밖에 나간다.. 그래서 내가 몇번이고 잔소리 해댔다.. 잠바 입으라고.. 몸 따뜻하게 있으라고.. 그래서 그녀는 아마 걱정해줘서 나에게 그 고마움의 표시로 맥주를 선물했던것..
남자, 너 그러지 마라.. 아무리 감기가 걸렸기로서니 이틀동안 코빼기도 안보였냐.. 임신한 아내도 밥 혼자 먹게 하고.. 내가 안불렀으면 방에서 계속 꼼짝않고 있었을거 아녀....
사파 마을을 구경하는데 엄마랑 아기 두명이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있으면 적적하기도 하고 바람쐬러 나왔을텐데 포동포동한 아이가 아주 앙증맞게 생겨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라면이랑 과자를 얻고서 집으로 돌아가는길에 내가 따라가서 인기척을 했더니 돌아서는 순간에 한장 급하게 찍었다..
너 뭐여.. 하는 눈빛이다.. 그리고는 곧장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어릴적 생각 많이 났다.. 나도 그랬었지.. 아가야,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자라라..
어릴적 산촌에 살았던 나는 가족들을 많이 보챈것 같다.. 자주 울고 떼쓰고 그러면 누나나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때로는 업고서 그렇게 동네 마실을 나갔다.. 그러면 나의 보챔은 끝이났고 조용해졌다.. 어떻게 아냐고?.. 학교 들어갈때도 그랬으니까.. 보챈 이유는 뭐 사달라고 한게 아니라 같이 있어달라고 했던것.. 울었던 이유는 혼자 있기 싫으니까 내곁에 누가 좀 있어달라고 했던것..
그렇게 옛생각이 났다..
사파에서 첫날을 보내는게 아쉬웠다.. 아니, 흘러가는 시간을 잡고싶었다.. 낮에 경험한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한동안 호텔 로비를 서성였다.. 그러다 저쪽 한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노부부를 보게 되었다.. 가까이 가보니 여자는 전자책으로 독서중이었고 남자는 인터넷 지도와 오프라인 지도를 보면서 내일 일정을 지도에다 연필로 표시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열심히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볼때면 나이를 불문하고 굉장히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다가온 이유를 설명했고 사진 한장 찍고싶다며 말을 건냈다.. 웃으면서 흔쾌히 자세를 취해 주셨는데 나는 설정사진이 아니라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몰두하는 사진을 찍고싶다고 말했다..
겸연쩍은듯 웃어주시는 두분을 닮고싶다.. 부부가 아닌 이제는 삶의 친구이자 동반자인, 타인이 아니라 분신처럼 살아가는 그들이 눈물겹도록 부러웠다..
다음날 아침 우연히 출발하려는 그분들을 현관앞에서 다시 만났다.. 폴란드에서 자전거를 비행기에 싣고 날아와서 홍콩과 중국 그리고 베트남으로 넘어오신 노부부의 자전거 여행이 아무쪼록 안전하고 추억에 남는 시간이길 빌어본다..
하장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동반으로 향하는 길.. 꼬불꼬불한 길을 여러차례 돌고돌아 겨우 한시름 놓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하루 걸어 학교로, 시장으로 갔다가.. 하루 걸어 산으로, 집으로 가는 산골 사람들.. 그중에 두 아이를 보았다.. 형으로 보이는 아이는 한발로 발을 구르며 피리를 부르고 있었고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아마도 야생꽃을 팔기 위해 서있는듯 보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해서 관광객으로부터 과자를 받고, 운좋으면 꽃을 팔아 돈도 만져본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군대갔다와서 했으니 적어도 스무살.. 이 아이들은 나보다 십여년 이상을 사회경험을 먼저 시작했다.. 어리광도 부리고 부끄럼이 많을 나이인데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베트남의 북쪽 끝 “lung cu” 를 구경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대여섯살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두세명씩 이루어 야생꽃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팔고 있었다.. 한다발에 (그냥 한손가득) 2만동 불렀지만 나는 많이 필요없으니 조금만 해서 만동에 팔면 안되겠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안된다고 하다가 내가 계속 그렇게 해달라고 하니 마지못해 들어주는듯 결국 만동에 샀다.. 길가에 노끈 하나 주워서 바이크 백미러에 매달았다..
아이들의 얼굴에 손에 묻은 얼룩이 계속 생각났다.. 훼손된 옷을 입고 맨발로 험한 산길을 걷고 노니는 아이들이 계속 생각났다.. 불쌍하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얼마나 행복에 겨워 살고 있는지 느끼게 해주었다.. 보는대서 사진도 찍지 않았다.. 왜 그렇게 사냐고 말하듯 아이들의 눈에서 내 모습이 반영될까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진 한장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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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깊은 곳에 홀로 집짓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운명이라고 생각이 들어 뭐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절벽을 벗어난 양지바른 곳에, 햇빛도 하루에 적어도 두어시간 들어오는 곳에서 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습기 머문 이불 덮지 않고 햇빛에 잘 말려진 뽀송뽀송해진 이불 덮고 잤으면, 발 잘못 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간절함이 들었다.. 오토바이로도 자전거로도 들어갈수 없는 저 깊은 곳에 홀로 떨어져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넓고 넓은 땅을 두고 왜 그들은 이렇게 깊은 산속, 위험한 절벽으로 들어가 홀로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상처 입어 산속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길.. 세속의 모진 풍파를 견뎌내지 못해 들어온 사람이 아니길.. 그저 내뜻대로 자유롭게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맑고 깨끗한 공기가 그리워,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싶어서이길..
모든이들이 좋아하는 흔한 장미꽃이 아니라 천년 만년에 한번 피는 산삼꽃처럼 독특한 향기를 내는 그런 사람으로 존재하길 바랬다..
baoloc 에서 하장으로 가는길에 마침 장날이 열리고 있는 시장을 지나게 되었다.. 소경매가 이루어지는 우시장도 있었고 전통복장처럼 보이나 실은 일상복이었던 산간 곳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이 이곳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구글지도와 맵스미 지도를 확대해봐도 이곳의 지명은 나오지 않았다.. 단지 내 휴대폰에 마크만 하나 해놓았을 뿐..
그만큼 오지였던 곳에서 장날이 섰다.. 좀 떨어진 곳에 바이크를 세워놓고 시장을 구경했다.. 이미 아침은 든든히 먹은 상태였지만 이곳에서 먹는 맛이야 또 다르지 않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고구마튀김을 하는곳이 있어서 그곳에 자리잡고는 먹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눈에 띈건 노란 오리새끼 가득 담긴 박스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오리 상자 깊숙히 손을 넣었다.. 따뜻한 느낌이 손으로 전해졌다.. 초등학교 다닐때 학교앞에서 팔던 병아리 생각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표정을 지으니 주인이 내 손바닥에 먹이를 올려줬다.. 도망다니는 오리를 내가 잡으려 다녔는데 이젠 오리가 내 손으로 모여들었다.. 따뜻한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가만, 몇마리 사서 여행중에 만나는 아이들에게 나눠줄까..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암컷, 숫컷 두마리만 살게요.. 오토바이에 실으면서 어디가서 줄까 생각했다.. 너무 멀리 가면 오리가 피곤할수도 있겠다싶어 이왕이면 가까운 곳에 가서 주자고 했다.. 때마침 시장 바로 뒤로 나있는 산길이 보였다.. 그리로 곧장 달렸다..
한참을 달려 어느덧 주위에는 안개가 자욱할만큼 높은 곳에 도달했다.. 계속 위로 향해 길이 나있었지만 여기도 충분히 멀리 왔다고 생각해서 적당한 집을 찾아봤다.. 산비탈에 한채 달랑 있는 저집으로 정했다.. 잘 받아줘야 할텐데.. 아이들이 나와서 받아주면 더 좋겠다 생각했다..
하장의 숙소에서 적극 반대했던 도로.. QL34번 도로를 나는 달렸다.. 비포장에다 곳곳에 함정이 있고 달리는 곳마다 먼지투성이.. 공사장.. 좋은길 놔두고 왜 그 길을 달렸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때쯤 그래도 예쁜 시장이 있었고 아기가 있었고 추억이 있었다.. baolam caobang 에 도착해서 음료수 한병 마시고 있었는데 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애기와 애기엄마, 잠시후 주차하고 온 아빠까지 나이를 합해도 나보다 조금 더될까 할 정도로 젊은 가족이었다.. 생글생글 웃어주던 아이와 그 재롱을 지켜보며 흐뭇해 하던 부모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하노이에서 꾸이년으로 가기 위해 여행자 숙소를 나왔다.. 30킬로 이상 떨어진 공항까지는 택시로 10달러라고 숙소에서는 말했는데 나는 그보다 저렴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멀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고 해서 택시 이용할 것을 권유하는걸 나는 남아도는 시간이 너무나 많고 조금 일찍 공항으로 출발하면 된다고해서 대화에서 내가 이겨버렸다.. 결국 나는 대중교통인 버스를 이용해서 두번 갈아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이용요금은 800원..
택시를 이용했다면 10000원 넘었을 것을 두번의 버스 이용으로 800원만 지출되었다.. 그렇게 아낄수 있었던건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베트남 대학생 덕분이었다.. 그들은 내가 몰라서 물어본 것들을 아주 상세히 가르쳐 주었고 혹시나 잘 몰라서 확인해야 하는 것들은 인터넷 검색으로 그리고 지인에게 전화를 해서 알아내어 나에게 알려주었다.. 공항에 잘 도착할수 있도록 함께 버스를 타주었고 환승하는 역까지 같이 내려서 공항 가는 버스 위치까지 안내해 주었다.. 너무 고마워서 기념 사진 찍고싶다는 내 제안에 친구들 모두 모여들었다..
에필로그.
사람은 저마다 향기를 내뿜는다.. 코로 숨쉬는것 뿐만 아니라 몸에서도 곁에 있으면 향기를 맡을수 있다.. 어떤 이에겐 인상을 찌푸릴만큼 고약한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겐 코가 벌렁벌렁 거릴만큼 좋은 향기가 난다.. 아직 베트남 여행이 끝난것은 아니지만 나는 향기 좋은 사람을 곳곳에서 참 많이 만났다.. 천사같은 사람도 악마같은 사람도 어느 한곳에 따로 모여 사는게 아니라 곳곳에서 서로 상처주고 치유하면서 어울려 함께 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머물고 있는곳이 어디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것 같다.. 내 몸에서 나는 향기가 좋으면 좋은 사람이 모이고 고약한 냄새가 나면 고약한 사람이 모이든지 아니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배가 고파서 굶어죽는 시대는 지났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죽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요즘.. 내몸에서 좋은 향기가 많이 내뿜어져 나도 내곁에 있는 그들도 이처럼 향기로운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 따위 느낄 틈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길 빌고 또 빌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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