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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의 자아로 시의 돈오(頓悟)를 기다리다.
― 고영섭 시집『황금똥에 대한 삼매』에 화답(和答)함 -
민 순 의
(학자)
0.
무릇 철학‘하는’ 이에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기존 철학자의 사상 체계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론과 체계를 구축하고 구현하는 사람. 아마도 철학하는 모든 이들의 궁극의 이상은 후자가 되리라. 그러나 모두가 그것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근기의 부족으로 또 때로는 끈기의 부족으로, 혹은 이상에 도달할 힘을 지키지 못하여 또 혹은 애당초 그 꿈조차 넘보지 않은 채, 철학하는 많은 이들이 타인의 사상적 궤적 속에서 안주하곤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설명하는 그 철학을 자신의 삶에서조차 유리시킨 채.
여기 한 사람의 시인이 있다. 고영섭. 그는 불교학을 업으로 삼은 학자다. 한국불교라는 육중한 사유와 역사의 궤적을 부여잡고 담론의 양단과 시간의 축을 종횡무진으로 가로지르며, 그는 불교와 함께 직조되어 왔던 우리네 살림살이를 비추고자 한다. 분석하고 설명하는 사람. 주어져 분석되고 설명된 그 관념의 궤적은 그래서 그 자신의 삶이 되었는가. 꼭꼭 씹히고 몸으로 스며 삶을 살찌운 끝에 더 환히 승화되어 곱게 배설되었는가.
시인 자신의 말처럼 그의 시적 의단은 1시집의 ‘몸’과 2시집의 ‘물’을 거쳐 이 세 번째 시집에 이르러 ‘똥’에 다다르고 있다. 소욕지족(少慾知足)의 화두를 들고 깊은 애정 쓸쓸히 어루만지었던 몸. 그리고 불보다 더 강렬한 부드러움으로 쓸어내고 닦아주리라 의지했던 물. 자신의 몸을 붙들어 물을 헤엄쳐 흐르고, 몸 안에 흐르는 물의 실체를 깨달아 그 몸조차 그대로 물로 풀어주더니, 이제 그렇게 몸의 안팎을 드나들었던 흐름의 실체가 시인 자신의 관념의 찌꺼기임을 간파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고약하다 버릴 것인가? 관념의 찌꺼기이자 살림과 세월의 찌꺼기였던 그 똥은, 그러나 한 때는 그를 살찌웠던 양분이다. 그 자신의 몸이다. 온 몸의 세포로부터 풀려나 소장 대장을 자유롭게 흐르다가 다시, 몸 밖으로 떠나간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나아간 똥은, 곱게 익었을 때 구수한 향을 풍기며 세상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이념으로부터 승화된 감수(感受)의 말씀으로서!
그렇다. 그는 학자다. 그의 시는 사유와 관념의 얼개를 지닌다. 그 시의 행간은 옛 성인들의 온갖 경전의 앞선 가르침으로 빼곡하다. 지성의 말씀이 개개 삶의 현장에 스며드는 데에는 그것을 몸짓으로 경험하여 체득한 이의 감탄사 한 마디가 필요할 터. 사유와 관념의 얼개를 지니는 그의 시는 그렇게 감각과 감성의 향기로 풍만하다. 깊은 침묵 속에 벼리며 기다리는 감성, 버리고 놓음 끝에 속진(俗塵)과 하나 되는 감성, 시시절절(時時節節)의 생명력과 조응하는 감성, 그리고 바로 발밑의 고단한 일상에서 삶을 다시 여며 가려는 감성. 구수한 향을 풍기는 빛깔 고운 황금색 똥으로 배설된 그의 언어에 함께 몸을 내맡기는 것은, 그래서 즐거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문자향 가득한 서권(書卷)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묻고 긴긴 침묵의 안거(安居)에 들었던 선승(禪僧)은 산을 내려와 저자거리에서 선정(禪定)의 깨달음을 노래한다. 속제(俗諦)를 물들이는 진제(眞諦)의 향기. 시 속에서 부처의 깨달음이 하나 되는 삶. 나는 그의 시를 선시(禪詩)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1. 고치를 풀어내는 누에, 돈오(頓悟)를 구하는 구도자의 자세.
입에서 토해낸 한 올 실마리로
온 몸을 스스로 칭칭 묶으며
흰 고치의 감옥 속에 온전히 갇혀
움쩍 달싹 못 하는 누에 한 마리
좁디 좁은 타원 속에서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던 그가
허공 속에서 실마리를 뽑아냈다
한 코 한 코를 밀고 당기며
걸림 없는 마름질로 누벼 짜낸
절창의 누비 옷 한 벌 오늘
펄럭이는 시의 옷자락으로
허공의 하늬바람을 갈라
소리 중의 소리를 휘날리며
육자배기 한 자락 뽑아내고 있다
제 자신이 뽑아낸 시집 한 권 펼치며.
(「우주 감옥 속의 누에」 전문)
누에는 시절 한 철 먹고 또 먹으며 제 몸을 살찌웠던 것들을 어느 순간 게워내기 시작한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이지 않고 육화(肉化)된 모든 것들을 그저 한 오라기 길고 긴 실, 말로 토한다. 몸짓의 시작, 해방의 단초(端初). 그러나 그 말은 아직 정제되지 않았다. 무두질로 단련되고 유약으로 덧입혀지지 않았기에, 거친 표면의 요철을 따라 서로서로 얽혀드는 그 말은 다시 저희들끼리 엉키어 단단한 고치를 이룬다. 한 때 몸이었다가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해방이었으되, 그 몸짓의 말은 다시금 누에를 칭칭 동여매는 속박이 된다. 말의 감옥 속에 갇힌 누에.
차마 파편으로 흩어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은 채 길이길이 이어지는 그 실은 어쩌면 이미 하나의 완성일 수도 있다. 산발(散發)의 개념으로부터 관념화된 말의 길. 그것을 사유의 말, 학문의 언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어찌 사변만으로 삶이 해방될 수 있으랴. 학문의 언어는 나름의 체계를 갖춘 채 제 논리의 건물을 구축하지만, 논리의 건물에 들어앉아만 있을 때 인간은 건물 밖 삶의 숨결을 향유하지 못한다. 젊은 한 때 논리적 사변의 말을 믿고 명제의 집적 속에서 인간 본질을 규명하려 했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말년에는 지난날의 지적 소산인 『논리철학 논고』를 뒤로 하고 인간경험의 다양성을 탐구하며 『철학적 탐구』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오감으로 감수하고 식(識)의 관념으로 체화되었던 그 사유의 집적은 말로 게워진 뒤에도 온전히 풀려나지 못한 채 여전히 시인의 삶을 옭죄고 속박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 상태를 우주 감옥이라 명한다. 누에의 타원형 고치로 상징된 시인의 기울어진 관념 덩어리는 말 그대로 감옥이다. 감옥인데, 우주 감옥이다. 언뜻 모순된 두 단어의 조합. 기이하다. 끝없이 광활한 단 하나의 전체가 내 몸을 꼼짝 없이 조이는 속박, 세상없이 비좁은 고치의 또 다른 은유라니.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자. 우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광활함이지만 또한 품어줌이기도 하지 않던가. 태초부터 묵묵히 존재하며 작용하듯 작용하지 않듯 세상을 품고 또 세상을 열어 준 영원 무제한의 모태. 그리고 거기에 품겨드는 이 세상 전체.
이제는 아포리즘이 되어 버린 표현으로 헤세는 이렇게 외쳤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에는 고치를 벗어나야 한다. 관념의 언어에 갇힌 시인은 다시 태어나고 싶다. 누에의 몸으로 들어앉은 그에게 고치는 그가 아는 유일한 세계이지만, 그것이 풀려나 해방되는 날 그의 존재는 고요적적 광활한 그 우주에 진실로 맞닿을 수 있을 것이다. 우주 감옥. 언젠가는 우주가 될 감옥, 그러나 지금은 그저 내 우주 전체인 감옥. 우주이되 감옥인 감옥, 감옥이되 우주인 감옥.
어쩌면 시인은 또 자신을 이 세상 전체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주 안에 품어진 것이 바로 세상이므로. 하지만 그것은 타인을 배제한 채 홀로 존재한다는 자만(自慢)의 자의식이 아니다. 낱낱 개체 전부와 더불어 살며 그 하나하나가 모두 존엄한 세상 전체라는 자의식. 또는 낱낱 개체 전부가 사실은 나와 분리되지 않는 한 덩어리로서의 전체라는 자의식. 감옥이 우주일 때, 그는 그렇게 세상 전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누에는 고치를 벗어나야 한다. 시인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언젠가는 우주가 될, 그러나 지금은 답답하고 비좁기만 한 그 공간 속에서, 누에 시인은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몸을 움직이며 말이 풀려나는 한 순간을 향하여 수행하는 구도자가 된다. 세상 가장 작은 미물의 몸으로 우주적 전망을 향하는 그 지점에서, 자신의 성불(成佛)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지닌 채, 안거(安居)에 든 구도자의 자세로 시적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리며 삶을 조탁한다. 그리고 그 구극에의 수행은 끈기로 행해진다. 근기는 곧 끈기임을 갈파하며.
누상촌에서 태어난 나는 또
누에고치 앞에서 와선臥禪을 하며
근기를 끈기로 알고
더욱 더 정진할 수밖에.
(「근기는 끈기」 일부)
성불의 순간은 “얍!/ 하는 기합 소리에” “푸드덕!/ 날아가는 새 한 마리에”(「돈오」중) 섬광 같은 돈오의 그것으로 오는 것이지만, 안거에 든 구도자는 그 기다림을 극한까지 밀어 붙인 점수(漸修)의 자세로 채운다. “백 척 간두 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듯/ 벽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달려드는 담쟁이 넝쿨”(「담쟁이」중)처럼, 멈출 줄 모르는 도전과 포기할 줄 모르는 끈기로 또렷하고 고요하게 화두를 들고 오롯이 나아간다. 백 척 간두 위 한 걸음 더 나아간 밖에 있는 그 돈오의 순간을 위해, 한결같이 끈기로운 점수 수행자의 자세로 그는 묵묵히 몸을 뒤척이고 또 뒤척이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은 고난의 행보지만, 그러나 시인은 그 고난조차 환한 절창(絶唱)의 순간을 향하는 삶의 일부로 긍정한다. “내가 살아온 이 시간 이 모두가/ 나의 생이고 나의 운명”(「황진이―박연폭포에서」중)인 것을 알고서. 그리고 그 노력이 고치의 벽에 부딪혀 절망하게 될 때마다 시인은 절박한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끝없이 되묻는다. 하안거로 맺은 열매 떨어뜨리며 노오란 잎 곱게 실은 은행나무의 목소리로.
그래 너는 이렇게 눈썹 날리며
가슴과 등짝을 흠뻑 적시며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전체를 살아본 적이 있느냐
그래 너는 저렇게 승부 끝내고
미련과 집착을 죄다 버리며
달관의 몸짓을 지어내면서
모두를 던져본 적이 있느냐.
(「은행나무」 일부)
돈오로 오는 시적 깨달음의 순간은 바로 관념과 사변의 말이 시의 말로 풀어지고 직조되어 ‘노래’되는 순간이다. 고치의 덩어리는 유약을 덧입어 매끈하게 빛나는 명주실로 거듭 나, 문자적 사유의 흔적을 털어내고 삶의 숨결로 짜여진 육자배기 누비 옷 한 벌로 완성된다. 허공을 가로질러 세상을 덮으며 펄럭인다. 감옥 같던 관념의 사유가 한 권 시집으로 영그는 순간!
이제 시인은 노래한다. “한 올 한 올의 실로 떠낸/ 한 권의 우주 시집// 자음과 모음의 씨줄 날줄로 짜낸/ 절창의 비단 이불 한 채”(「근기는 끈기」중)를. 배설되었으되 아직 구린 똥 덩어리에 불과했던 그 혼탁한 관념의 언어는 펄럭이는 한 자락 시의 언어로 조탁되었을 때 비로소 삶을 빛내는 환한 노래가 된다. 구수하게 여문 황금똥이 된다. 황금똥. “풀어진 내 삶의 절도를 돌아보지 않고/ 무엇의 탓으로만 돌렸던 지난 어느 날”(「황금똥에 대한 삼매」중) 시인을 급체(急滯)케 했던 의문의 부호들이 온전히 소화되어 냄새 곱게 뽑혀져 나오는 여유의 흔적. 일찍이 “난 아직도 허물이 많아서/ 늘 가락의 올올마다 코가 걸리기만 하는데”(「여름 하늘」중, 『몸이라는 화두』)라 고백했던 그이였음에랴.
몸 속에서 미처 소화되지 못한 나의
때 묻은 언어들이 서로 길항하며 썩고 썩어
시도 때도 없이 일으키는 갈등의 독가스
아, 내 삶의 구극적 바램은
온전히 소화된 내 시詩의 자음과 모음 들이
냄새 곱고 빛깔 누런 똥을 누는 것!
선정에서 나와 풀어졌던
내 삶의 문자들을 여미며
중도中道의 할喝로 숨결을 틔우자 이내
선 것과 된 것 그리고 급히 삼킨 것과
씹다 삼킨 것들이 바깥으로 떨어지고 있네
안에서 잘 타고 나온 황금똥 가래들.
(「황금똥에 대한 삼매」 일부)
깨달음의 순간을 한 가닥 유장한 시의 몸짓으로 풀어낼 때, 누에의 몸은 어떻게 될까. 오랜 기다림 끝에 진한 황금빛으로 눌러 붙은 번데기 한 마리. 아마도 그는 탈진하리라. 그러면 육자배기 절창 한 자락 귀에 끄은 채, 우리는 또 가슴 깊이 앓아 깡마른 번데기 한 마리를 입 속에 털어 넣으리라. 그 우리가 “용추폭포 아래서 소리를 얻고자/ 칠 년 동안 벌였던 자신과의 싸움”(「강변」중) 끝에 강가의 소나무 청솔가지 위에 정좌한 참매미의 지음(知音)이어도 좋다. “방학동 막다른 골목 두 번째 집 담장가에서 가부좌를 튼 감나무 한 그루가 십년의 하안거 동안거 끝에 남긴 사리 한 과果를”(「까치밥 2」중) 쪼아 먹는 철부지 참새 한 마리여도 좋다. 시인은 시의 돈오를 얻고 우리는 그 각성의 수혜를 맛보는 것이다. 고난조차도 삶의 일부로 긍정한 시인은,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마저 다시 버려 세상에 나눠줌으로써 남겨진 우리들의 몸 속에서 또다시 육화될 터인 즉. 근기와 끈기로 시의 순간을 기다리듯, “아아,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것!”(「퇴계의 독백―일의 옳은 것」중) 탄식하면서도, 세상 모든 무례와 몰염치를 묵묵히 지키고 견디어 낸 그 돈오의 시어(詩語)―“익을대로 익어 숙성되고 발효된 삶의 진액”(「대추차」중)―로 철없는 누군가의 속을 깊게 닦아주리라.
2.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버렸으나 떠나지 않는.
여름 내내 타원 속에서
이리 뒤뚱 저리 뒤뚱
갖은 몸부림을 치다
허물 벗은 나비 한 마리가
나무 둥지를 떠나
구 만 리 장천을 훨 ! 훨 !
날개 짓 하며 노란 깃털
떨어뜨리는 이 늦가을.
(「우화羽化」 전문)
날아가리라 했다. 구만 리 긴긴 여정으로도 모자라, 훨훨 몸을 띄우는 날개 짓의 여백도 무색하게, 느낌의 배광(背光) 하나하나에 또 넓고 넓은 간격을 세워 두며 ‘구 만 리 장천을 훨 ! 훨 !’ 날아가리라 했다. 시의 말을 얻은 그 날이 되면 시인은 아무 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갈 봄 여름의 열기를/ 다 잠재운 겨울산이/ 동안거에 들어”(「겨울산」중) 있듯, 무례와 몰염치를 묵묵히 견디어 내고 분심(忿心)과 불만조차 맑게 가라앉힌 채, 시를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삶을 기다려 오랜 침묵 끝에 얻어진 말간 해방의 시간. 시인은 숨소리 한 자락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잘 것 다 잘 주무시고
아침에 일어나셔서는
먹을 것 다 잘 드시고
입을 것 다 잘 입으셨던 할머니가
좌변기坐便器에 살며시 앉아
쉬! 하고 물을 내린 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눈을 감고
아무도 모르게 살짝 가셨다
미동도 않으시고 삶의
군더더기 다 내려 놓으시고
좌탈坐脫의 자세 그대로
고요히 잠드신 반가사유상!
손자가 안고 와 이불 위에 뉘어도
숨소리 한 자락도 남기지 않고
아무 소리 소문 없이 허물 벗으며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노니.
(「좌망坐亡」 전문)
몸 안을 돌아 흐르던 물 한 줄기조차 모두 풀어내고 숨소리 한 자락도 소리 없이 가실 수 있는 그 허허로운 놓음의 경지. 삶은 온통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임을, 버리고 갈 뿐 비우고 갈 뿐 애착으로 남겨 둘 그 어느 것 하나 없음을 시인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텅 빈 경지. 열반의 공간. 진실로 자유롭고 또 자유로와라.
그러나 그 자유는 전체를 살아본 적 있느냐고 모두를 살아본 적 있느냐고 치열하게 묻고 또 물으며, 끈기로운 점수 수행자의 자세로 수많은 날 몸을 뒤척인 끝에야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치열함과 끈기는 속진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다. 비록 시인이 “나도 화두를 들고/ 그 안에 앉고 싶다/ 저자에 솟아있는 저 산”(「겨울산」)을 바랐지만, ‘저자에 솟아있는 저 산’은 저자‘로부터(from)’ 벗어나 솟아있는 산이되 동시에 저자 ‘속에(in)’ 거하며 솟아있는 산이 아니던가. 잘 것 다 잘 주무시고 먹을 것 다 잘 드시고 입을 것 다 잘 입으시며 살아낸 시간이 있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살아온 이 시간 모두가 나의 생이고 나의 운명이었다고 주억이는 황진이의 고백이고서야 또한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 버리고 놓은 텅 빈 자유의 공간을, 시인은 차마 떠나지 못한다. 이 삶 한가운데에서 얻어진 자유를 즐거이 누린 시인은, 끝내 그 자유조차 다시 풀어놓는다. 다 버렸으되 다 떠나지 못하는 연민의 심정, 해탈을 알았으되 속진 이 세상에 열반의 집을 짓고자 종종종 움직여 가는 보살의 발걸음으로. “외로움 데우려는 나같은 영혼들이/ 줄에 줄을 만들며/ 추억을 이어가는/ 뜨신 끈!”(「털보네 호떡」)에 대한 시인의 사무친 연민이 우리를 말없이 이끈다. 관계는 그렇게 허허로운 내적 긍정을 가로지르며 나에게서 너에게로 이어진다. 여백은 은근히 채워져 가는 담배연기처럼 외롭고 고단한 이들의 피부를 간질이며 눈물 어룽진 웃음을 끌어낸다.
은은히 퍼져가는
담배 연기 속으로
서서히 부서지는
긴장의 벽들!
(「파안」 전문)
시인은 희생한다. 양보와 배려로 다시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비록 갈 봄 여름 없이 긴긴 하안거 동안거에 들어 점수 수좌의 초극으로 체득한 귀한 깨달음이지만,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자신보다 앞서려는 주위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며 묵묵히”(「낙타」중) 가는 낙타의 그렁한 눈망울로 세상을 응시한다. 속되고 속된 세상의 상품이요 고달픈 노동의 흔적인 카멜표 성냥으로 거듭 나고서라도 우리들 찬 가슴을 데워 주려 한다. 그렇듯 자신을 비워 스스로를 낮추고 타인을 배려하려는 시인의 의지는 “제 자신을 거름으로 죽여/ 라이벌을 밀어준 감자 덕분에/ 더욱 더 환해진 살맛나는 세상”(「감자대통령」중)을 찬탄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희생의 의미를 돋을새김하기에 이른다.
다시, 본래무일물이다. 본래 아무 것도 없으니 버릴 수 있지만, 본래 아무 것도 없으므로 그 버림의 즐거움 또한 홀홀히 내어줄 수 있는 것이려니. 그 때 그 희생의 수혜를 입은 우리 역시 시인을 따라 좌망에 든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될 수 있다.
내리막길 바닥을 타고 내려오는 한 줄기 물이
주위의 막대기를 길잡이로 삼아
한 없이 아래로 임하고 있다
저와 저의 것을 부정한 그가
머리와 팔다리를 땅바닥에 내던진 채
큰 바다를 향해 전신투지를 하고 있다
그 주위 언저리의 바닥 먼지들도
낮은 데로 흘러가는 그를 따라
내와 강과 바다로 나아가고 있다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것을 버림으로써
모두를 이끄는 도리를 터득한 그는
결국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자기의 중심을 비움으로써
자기의 주변을 이끄는
한 줄기
물.
(「하심下心」 전문)
상선약수(上善若水)라, 그는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물처럼 자신을 낮추어 흐른다. 주위의 막대기를 길잡이로 삼으며 관계와 인연 속에 깃든 존재의 연기성(緣起性)을 깨닫고, 덩달아 자신의 본성 없음조차 깨닫고 저와 저의 것을 부정한 채, 한 없이 낮은 곳으로 몸을 낮춘다. 그러자 그 주위 언저리의 바닥 먼지들도 그를 따라 흘러간다. 세계의 참여, 우주의 동화!
그런데 낮은 곳으로 몸을 낮추었다는 그가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한다. 시인은 이제 타인을 ‘이끄는’ 유일무이의 중심이 된 것일까. 시의 운율을 다시 따라 가자. “자기의 중심을 비움으로써/ 자기의 주변을 이끄는/ 한 줄기/ 물.” 말은 아래로 흐르며 점점 가물어진다. 낮은 데로 흘러가는 물길을 따라 그 마음 차차 낮아지면서[下心], 시인의 존재 역시 점차 육탈(肉脫)하며 형해(形骸)된다. 제 중심을 비움으로써 주변을 이끄는 중심이 되지만, 그 중심됨은 역시 제 중심을 비우고서야 얻어진다는 것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흐르는 강물이 “내와 강 가로질러/ 너와 나의 가슴으로/ 한 없이 스며들며// 우리가 가진 것들 모두/ 흘러가는 것임을 가르치려/ 온 몸을 스스로 다 비우네”(「겨울 강가에서」중) 노래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를 떠나/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었으므로/ 이미 저는 없었고/ 저의 것도 없었습니다// 저를 둘러싼 갖은/ 울과 벽을 놓아버리자/ 저라는 말까지 사라져서 비로소/ 모두가 될 수 있었습니다.”(「모래」중) 속삭인다. 온 몸을 다 비워 저도 없고 저의 것도 없었을 때, 자신을 에워 싼 모든 인간, 모든 존재, 우주 전체와 비로소 하나로 융해되었노라고.
우리는 앞서 우주 고치 속에 든 세상으로서의 시인의 자아를 엿본 바 있다. 낱낱 개체 전부와 더불어 살며 그 하나하나가 모두 존엄한 세상 전체라는 자의식. 또는 낱낱 개체 전부가 사실은 나와 분리되지 않는 한 덩어리로서의 전체라는 자의식. 그것을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자아에 편승하여 우리 모두도 그의 시적 깨달음, 그 환한 돈오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자아와 하나가 되어 그 깨달음에 동참한 세상. 그 궁극은 둥근 질서로 충만하다. 두 바퀴가 상응하고서야 넘어지지 않고 굴러갈 수 있는 자전거처럼 세상은 둥글게 조화하는 너와 나의 연대로 질서를 얻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기 안에 채워져 있던 것을 비우고 그 비어 있음을 다시 세상 속에 채워 넣는 무한 반복의 형식미는, 연대로 이루는 질서에의 긍정을 넘어, 둥글게 굴러 이어지는 무한 반복의 관계망에 대한 자각으로 귀결되기에 이른다.
나라와 백성의 바퀴
스승과 제자의 바퀴
부모와 자식의 바퀴가
그려내는 둥근 질서!
가만 앉아 있는 동안
이 내 마음 거기 있네
허나 혼자 갈 수 없는
자전거의 무릉도원.
(「자전거 도시―경북 상주시에서」 일부)
너와 나 사이에서 구르는 사랑의 말들
이곳과 저곳 사이를 이어주는 둥근 바퀴들
이 마음과 저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둥근 매듭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사이를 굴러다니며
각지고 모난 것들을 갈고 쪼는 둥근 공들
모두들 좋아한다 멈추지 않고 튀어오르는
희망의 공空놀이를
다들 어제의 기억과
내일의 예지에 매이지 않고
오늘의 인식에 스쳐지나가는 둥근 놀이를.
(「둥근 공空놀이」 일부)
전설 속의 나무꾼은 길 잃은 발걸음 끝에 무릉도원에 도착했지만, 시인이 그리는 무릉도원은 결코 혼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너와 나, 우리와 우리, 나아가 세상 전체가 둥근 바퀴에 올라타 마음과 힘을 모아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무릉도원이란 우리가 ‘함께 있음’으로써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임을 뜻하기도 하지 않겠는가.
낱낱의 개체가 모여 조화롭게 일구어진 세상. 여기에서 우리는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의 화엄세상을 엿본다. 자기 안의 중심을 버린 끝에 남과 하나 된 전체로서의 더 큰 중심을 이루며 뭇 인연 속에 깃든 존재의 연기성을 깨달았던 시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연기성이 거대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졌다는 화엄(華嚴)의 법계연기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세계는 공놀이로 형상화된다. 둥근 공놀이. 텅 빈 공(空)놀이.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은 실상 비어있는 것이며, 관계를 흐르는 연대의 뿌리란 개개별별의 본질 없이 텅 빈 충만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충만한 비어있음이 사실은 지금 이 자리, 지금 이 시간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비롯됨을 또한 시인은 잘 안다. 그래서 “다들 어제의 기억과/ 내일의 예지에 매이지 않고/ 오늘의 인식에 스쳐지나가는 둥근 놀이를” 노래하는 것이다.
3. 성(性)의 생(生), 생명력에의 희구.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도덕경』 6장 전문)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춘추전국시대, 그 난폭한 이전투구의 현장을 살았던 노자(老子)는 타인을 짓밟고 위로 올라서는 패자(覇者)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깨뜨리고 부수기 위해 존재하는 이[齒]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이가 들면 모두 빠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말하고 설득하는 데에 쓰이는 혀는 그 뒤에도 싱싱하게 남아 제 구실을 한다. 태풍이 불면 큰 나무는 쓰러지지만 풀은 아무렇지도 않다. 물은 그릇에 따라 그 형체가 변하지만 산이나 언덕을 제 속에 잠기게 하는 힘이 있다.
겉으로 약해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정 강한 것이다. 노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미의 태(胎)중 양수로부터 나왔던 상태, 모든 공격력과 방어력을 다 무장해제한 채 오로지 천진하고 유약한 생래 본연의 모습에 자연스러운 강함의 근본이 있다. 갓난아기가 갖고 있는 것은 다만 삶에의 의지, 생명력일 뿐. 노자는 풀과 물의 유약함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원초적인 생명의 힘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의 발단이 바로 암컷의 자궁, 성애(性愛)의 의지와 행위에 있다.
현빈(玄牝)은 신비로운 암컷이다. 암컷의 음문(陰門)을 형상화한 것임에 틀림없는 계곡의 신[谷神], 그것은 죽지 않는다. 세상 모든 생명의 근원이므로 거듭거듭 생명이 이어지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신의 쓰임[用]을 위하여 애쓰지 않는다. 애쓰지 않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으리라. 잉태하고 양육하는 여성적 생명력, 영원히 마르지 않는 성애의 에너지.
시의 혀 곧 시의 말을 기다리며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흘러 주변을 모으는 큰 중심이 되기를 원했던 시인이 노자의 가르침에 공명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인 역시 노자의 길을 따라 생명에의 꿈을 꾼다. 속제의 관계망을 시의 언어로 그물코 짜듯 연결하길 희구했던 시인은 여기서 잠시 수평적 관계의 속살을 헤집고 여성성의 가장 깊은 곳에 놓인 생명의 힘을 엿본다. 신비로운 안개를 피우며 생명의 에로티시즘을 쪄 올리는 곡신불사의 성적 에너지. 그래서 시인은 『도덕경』의 저 경구를 반복한다. 가장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언어로.
마포 삼성 스포츠 클럽에서
한 일 자로 다리를 쭉 펴는 그녀
날이면 날마다 산을 내려와
부드럽게 가랑이를 벌리는 그녀
가믈가믈한 그 속에서
나는
가는 실눈을 뜨고
꾸물꾸물 기어나와
생애 처음 쉬는 들숨 날숨을
크게 들이 내쉰다 산 봉우리
보다 낮은 골짜기에선
매일 아침 또 만물이 소생하고.
(「현빈玄牝」 전문)
날이면 날마다 산을 내려와 부드럽게 벌리는 그녀의 가믈가믈한 가랑이는 글자 그대로 현빈, 신비로운 암컷이다. 저로부터 풍기는 기운도, 또 그 기운의 쓰임[用]도 모른 채 매일 아침 무심히 스트레칭의 완급을 반복한다. 그녀의 무심한 완급의 반복으로부터 역시나 무심코 생명의 기운을 감득해버린 한 사내. 그녀의 가뭇한 기운에 감응하여 한 그루 우주목(宇宙木, axis mundi)을 우뚝 세워 세계를 떠받친다.
매일의 아침마다 이루어지는 자웅 에너지의 교합. 매일의 아침마다 일어나는 태초의 생명력.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아침은 첫 아침이 된다. 그들이 내쉬는 들숨 날숨은 온통 생애 첫 호흡이 되고, 그들이 맞이하는 모든 날들은 날마다 새롭게 잉태된다. 조화로이 반복되는 음양의 합산(合散) 속에서 살아지는 모든 나날이 거듭 재생하는 것이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성애의 에너지는 그렇게 삶을 가로질러 생명의 기운을 수놓는다.
아. 이다지도 지독히 속스러운 에로티시즘의 현장임에랴. 시인은 다시 은밀히 고백한다. 틈이 맞고서야 그 맛이 나는 살맛이란 교합(交合)의 맞음이 이루는 살[肉]의 맛이자 관계 그물의 시절인연이 일구는 삶의 맛이라는 것을. 그리고 조용히 너와 나의 배꼽, 세상 모든 중심에 낱낱의 꽃송이를 피워낸다. 난만한 욕정의 배흘림, 그리고 그 위에 일구어지는 수다스런 화엄(華嚴)의 세상! 개개 존재자 하나하나에 갖추어진 꽃으로 온통 화려하게 장엄되는 세상 그것이 다름 아닌 화엄의 연화장(蓮花藏) 세계인 까닭이다. 무한 반복되는 생명력의 생기(生起)가 연화장 화엄 세상을 낳는다.
간艮이 맞아야眼 밥맛이 나듯
틈隙이 맞아야合 살맛이 나듯
너와 나의 배꼽 위에 피어나는
온 누리의 꽃 한 송이!
(「배꼽 한 송이」 전문)
물론 그 성애의 난만함이란 특정 개인, 특정 사건의 깊이로만 함몰되는 것은 아니다. 마포 삼성 스포츠 클럽에서 매일 아침 다리를 펴는 그녀는 마포 삼성 스포츠 클럽에 매일 아침 나오는 모든 그녀다. 그녀의 기운에 감응하는 시인은 시인의 자아에 동참한 모든 우리다. 그래서 온 누리의 ‘꽃 한 송이’는 나 혼자만의 배꼽이 아니라 너와 나의 배꼽에 피어, 비로소 ‘온 누리의 꽃’ 한 송이가 되지 않았던가. 생명력은 공간적으로 편만(遍滿)한다.
한편 생명에의 이끌림은 날카롭지만 또한 지극히 무심하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길 가다 우연히 “지하 맨홀 위에서 마주친/ 내 들숨 날숨의 합일 구멍!”으로부터 “태극과 무극 넘어 아랫 단전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동심원처럼/ 활짝 뻗어가는 내 삶의 맥박 펌프”(「빙열」중)이기도 한 것이다. 생명력은 시간적으로도 편만하다.
시공간적으로 편만한 이 우주적 시원(始原)의 생명력이 자루 없는 도끼 구했던 원효와 천지간 홀로였던 요석의 사흘간 인연 궁전으로 축성(築城)된다.
땅은 나무로 솟아 하늘로 뻗어가고
하늘은 나무 위의 꽃봉오리로 내려와서
내 마음의 사막 가에 절로 피어난
서울 남산의 오아시스 화엄꽃들
허공 꽃밭 속의 꽃들은 저마다
꽃 속 보석을 드러내며 서로 재고
날 잡아봐라 외치는 하늘 땅이
절정의 궁합을 보여주는 봄날 오후
봄바람에 동한 원효가
자루 없는 도끼 구하는 노래 부르다가
개나리 저고리 진달래 치마 입은 요석과
사흘 동안 피워 올린 화엄의 꽃바다
절정의 순간에 초대받지 못한
참새와 나비들은 짝 바꿔 노닐고
사랑놀이 시샘하듯 부는 흙바람에
철철철 떨어지는 꽃 피 몇 방울들.
(「남산 화엄」 전문)
원효와 요석은 이제 난만한 법계연기의 색동옷을 차려입고 울긋불긋 화려한 남산화엄의 꽃대궐을 차려낸다. 뭇 인연의 그물망으로 생기한 화엄의 꽃바다 속에서! 그 인연의 시절이 다만 사흘에 그치면 또 어떤가. “…우주의/ 무수한 블랙홀을 지나 제게/ 맞는 향기를 찾아다니며” 전생에 익힌 기운을 좇아 미끄러지듯 스며 들어온 아이(「아이가 내게로 왔다」중), 설총을 낳았으니. 흙바람에도 꽃 피 방울들 철철철 떨어지는 그 순간에는 초대받지 못한 참새와 나비들조차 서로 “서둘러 옷을 벗겨주며” “뿌리 끝에서 타오르는 욕망들이/ 용암같이 분출”(「봄의 황홀」중)하리라. “그렇게 숨죽이며 뭣들 하느냐고/ 신방 창호지를 뚫고 들여다보는 봄”(「봄의 틈새」전문)의 틈새에서.
화엄 세상을 건설하는 이 난만한 에로티시즘의 생명력은 때로는 곱디고운 한 마디 진한 서정(抒情)으로 갈무리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서정으로 다시금 삼계(三界) 중생의 세상살이를 향해 중중무진 법계연기의 화려한 현상학적 화두(話頭/華頭)를 내어 놓는다. 세상살이의 화두, 중중무진 법계연기의 화두, 화려강산 제 현상의 화두를. 무궁화, 붉은 단심(丹心) 품고 나날이 새롭게 태어나 결코 지지 않는 꽃으로!
내 그대를 생각하면
간단없이 점화되는
한 조각 붉은 마음
새벽에 피었다
해질 무렵에 떨어지며
나날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오직 그대와 생사를 함께 하며
영원을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 진실로 진실로
삼천리 화려강산의 화두를 들고
한여름의 땡볕을 가로지르며
하안거의 진물을 견뎌내는 것도.
(「무궁화」 전문)
4. 고단한 부조리의 일상에서, 시절 인연을 꿈꾸며.
그러나 삶의 현장은 녹록하지 않다. 일상은 심난하고 생활의 그늘은 엄혹하다. 길고 지루한 인생에서, 해탈과 열반의 한 소식 얻어들은 이에게 난감한 것은 오히려 그 이후의 상황일지 모른다. 홀로 즐거운 부처의 자리를 버리고 보살의 마음으로 저자거리를 거닐기로 결심한 그. 때때로 누군가에겐 화신(化身)의 몸으로 자신을 나투어 펄럭이는 시의 절창으로 깨달음 한 소식 나누어주지만, 인간의 몸으로 인생을 사는 이상 그는 역시 생활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락(至樂)의 즐거움은 마음을 놓고 망념을 놓고 집착을 놓는 한 찰나 섬광처럼 감지되지만, 생활인의 굴곡진 능선은 그 찰나 이전 뿐 아니라 이후에도 지난하게 우리의 삶을 퇴색시킨다. 지친 일상은 박진감 넘치는 순간의 생동(生動)을 탈색시키고 현상의 자자한 색감을 퇴거시킨다.
아침 저녁 좁디 좁은 두레박 타고
어둔 천길 낭떠러질 오르내리며
흰 세월에 쫓기는 나그네처럼
자나 깨나 일에 치는 나는 사무원
사방에는 일의 그물 펼쳐져 있어
우물 속엔 숨 돌릴 틈 보이지 않네
어물어물 하다가는 세월만 죽여
빈털터리 꿀통만을 남길 두레박
나와!
나와!
나와!
나와!
귀를 비워 기울여도 들리지 않고
눈을 활짝 떠보아도 보이지 않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메아리 소리
우물 속을 가르는 텅 빈 두레박.
(「두레박―岸樹井藤을 빌어」 전문)
불전(佛典)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한 사람이 광야를 가다 코끼리에 쫓겨 어느 우물 안 칡넝쿨에 매달려 피하게 되었는데, 밑을 보니 네 마리의 독사가 입을 벌리고 위에는 흰 쥐 검은 쥐 번갈아 칡넝쿨을 쏠고 있더라는. 그런데 그 사람은 칡넝쿨 속 벌집에서 떨어지는 꿀맛에 취해 생명의 위험도 잊고 있었다던가. 안수정등(岸樹井藤)―인생고(人生苦) 무지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이야기.
모르는 게 아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삼법인(三法印)에 무지한 게 아니다. 처음 듣는 귀에는 그 경각에의 할(喝)이 해방의 기제일지 모르나, 이미 알았으되 시지푸스의 유형(流刑)처럼 반복 일상의 굴레를 헤어나지 못할 때 비극의 그늘은 짙어지는 것이다. 하얗게 탈색된 세월에 쫓기는 나그네처럼 망망히 펼쳐진 노동의 그물에 치여 벌집의 꿀이나마 비우며 하루하루를 말라가는 것이다.
그 답답한 절박함의 우물 속에서 시인은 “나와!/ 나와!/ 나와!/ 나와!” 단말마의 비명을 올린다. 나의 자아(自我) 이 동굴을 벗어나리라고. 그와 함께 그대들의 자아도 그 동굴을 벗어나라고. 그런데 그것은 내가 그대들과 함께, 또 그대들이 ‘나와(with me)’ 함께 이루어야 하리라고 그는 외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메아리로만 울려 “우물 속을 가르는 텅 빈 두레박”만 덩그마니 남겨질 뿐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 메아리가 있기에 너와 나의 은밀한 유대의 가능성은 유예될지언정 끊김이 없지 않겠는가.
굴러 떨어지는 바윗덩어리를 거듭거듭 추어올리는 시지푸스의 부조리한 난행(難行)은 신화 속에서 형벌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그 부조리함이 삶의 실상인 것을 알아차린 까뮈는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오랑 시민(市民)들의 투쟁을 통해 극복의 사례를 제시한다. 비록 전염병의 퇴치는 불확실한 성공으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오랑 시민들이 보여준 우애와 인간존엄의 확인은 비루한 삶을 초극하는 의미의 실재를 웅변한다.
시인 또한 그것을 안다. 속진의 부조리는 의미에 대한 자각으로 초극되리라는 것을. 삶의 의미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운수반시(運水搬柴), 이른바 물 긷고 나무하는 일상의 평상심(平常心) 속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평이한 일상심(日常心)에 길이 있는 것이요[平常心是道], 인간이 행하는 뭇 작용과 현상이 묘유진공(妙有眞空) 아님이 없는 것이다. 지루하고 고단한 부조리의 일상조차 생활의 의미로 긍정하며 감싸 안을 줄 알고서야, 시인의 큰 포부 그대로 속제 속에 진제의 향기 가득할 터. 생활인의 철목(鐵木) 가지에도 꽃이 피어난다.
헐떡거리던 지난해의 마음을
탁 놓아버린 곳에
새싹이 호젓이 솟아났다
갖은 흙탕물 속에서
쉬고 또 쉬며
흙들을 가라앉히자
쇠로 된 나무에 꽃이 피었다
얽힌 실타래와 깨어진 유리조각들을
나무하고 밥 짓고 빨래하듯
단순 반복의 불도저로
깔끔하게 밀어버리자
텅 빈 내 마음의 벌판 위에
온갖 빛들이 쏟아져 내리며
새 세상을 연출하는 이 봄날.
(「철목개화鐵木開花」 전문)
시인은 헐떡거리던 지난해의 마음을 탁 놓아버렸다 주장하지만, 사실 마음을 놓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고난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쉽게 의지와 노력에 의한 극복을 강권하곤 하지만, 그 변화와 흐름은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절 변화와 조응해야 하는 일이고, 그리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 나와 세상이 부합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비다.
“마음의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기만 하는 나의 살대”(「투호投壺―퇴계의 노래」중)처럼 매번 뜻과 어긋나기만 하는 삶의 정황. 그래서 생각을 거듭하던 시인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또 다시 연기(緣起)의 이법. 존재가 자성(自性) 없는 텅 빈 충만으로 연대되듯이, 현상 역시 가깝고 먼 여러 인연의 융합으로 빚어진다는 것을.
생각을 거듭했다 삶의 벼리는
때에 맞춰 이루어지는 것임을
절도에 들어맞는 때임을
숨을 들이 쉬고 내쉴 때마다.
(「투호投壺―퇴계의 노래」 일부)
실로 이 세상에는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미련을 떠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광활하고 영원한 우주의 섭리 속에서 자연의 기운은 시시절절 변하기 마련이요, 우리네 살림살이 또한 그에 맞추어 흘러가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눈 좁고 귀 짧은 인간들은 한 때 한 곳의 즐거움과 영화에 집착한 채 그것을 붙들고 놓지 못한다. 긴긴 변화의 과정 속에서 또 다른 만남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채.
눈 맑은 시인은 인간사 좁디좁은 이전투구 모두가 끝내는 도저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 따라 변해 가리라는 것을 한 발 앞서 깨달아 노래한다. 시절은 변화하는 것이요, 우리 모두는 그 자연의 우주적 섭리를 배우고 순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때의 변화에 순응하고 채워진 것을 비워버린 연후에라야 삶은 다시금 새로운 것으로 채워지고, 우리네 인생은 다양성과 공명하며 윤택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추석이 지났는데도 저 매미는
여름의 끝자락을 잡아당기며
녹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고
가을에 들어섰는데도 저 산은
매미소리 앞에서 머뭇거리며
나뭇잎들 보고 기다리라 하네
아, 매미는 또 매미대로
여름산은 또 여름산대로
갖은 이유를 대고 고집을 피우며
제 시대를 연장하려 하지만
누려온 것들 놓기 싫어 뭉개고 있는
저 노회한 여름 나무들도 끝내는
물드는 단풍 앞에선 속수무책일 뿐.
(「가을」 전문)
물드는 단풍, 저 기특한 시절 인연! 거기에 감응할 줄 아는 시인은 이제 “덜 삭은 술은 떫다/ 너무 익은 감은 시다”(「숙성」중)고 충고하며 시절의 맞음을 기다린다. 우리 삶의 모든 양상이 그렇듯 떫고 신 것은 사실 양 극단이되 이어져 있는 양 극단이다. 모든 극단은 일련의 스펙트럼 위에서 상대적으로만 존재한다. 그 사이 어디엔가 가장 좋은 곳에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있는 것, 그게 바로 시절 인연이다. 시절의 맞음이다. 자연의 변화 섭리에 조응하고서야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느껴질 수 있는 바로 그 경지. 그래서 부처의 첫 깨달음도 중도(中道)가 아니었던가. 시인 역시 “떫지도 시지도 않은 삶을 꿈꾸며/ 오늘도 항아리 속에서 발효되어 본다.”(「숙성」중) 시절의 맞음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깊고 진하게 숙성시킨다.
아, 그러니 지금 시인으로서 시를 살며 시로써 세상과 더불어 경계 허문 중심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바램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온전히 소화된 내 시의 자음과 모음들이/ 냄새 곱고 빛깔 누런 똥을 누는 것!” 그것을 위해 중도의 할(喝)로 숨결을 틔워 안에서 잘 타고 나온 황금똥 가래들을 기쁜 마음으로 그리는 것. 다시 처음처럼 수행자의 자세로 돌아간 그는 이제 돈오의 순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자신과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우주적 품앗이의 기운을 묵묵히 영글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또다시 기다린다. “큰 똥으로 대박을 터뜨려/ 황후가 된 그녀처럼 언제인가/ 시절 인연이 들어맞아/ 숲에 가려진 내 시의 그늘이/ 사람들 사이에서 빛이 될 날은”(「큰 똥으로 황후가 된 여인」중) 언제인가 자문하면서.
그 뿐만이 아니다. 이미 한 번 돈오의 순간을 감득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경지에 이른다. 미처 풀려나지 못하고 해묵은 노폐물로 몸 안에 쌓였던 낡은 것까지 새로운 시작의 기제로 변화시키는 내공을 발휘하는 것이다. 때에 맞추어 떠나보내지 못하고 몸 속에 가두어 둔 집착과 미련의 끈일지언정, 그래서 오랜 시간을 머문 끝에 끝내 신열이 되어 시인을 찔러대지만, 그 신열은 그 시간을 묵으며 오히려 더 요란하게 익었던가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달라진 채 새 시작을 촉구하며 엄습하는 그것. 낡은 것의 변화. 묵은 것의 거듭남.
낡은 것이 새 것으로 변화하여 시절 변화의 흐름에 조응할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이제 시인은 그 스스로 시절의 변화에 참여하려는 적극성마저 보인다. 우주였던 감옥을 뚫고 나온 그, 진정 광활한 우주에 가 닿은 것일까. 시인은 자신이 차마 우주 변화의 섭리를 돕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또 활짝 만개할 봄을 기다려 누군가와 더불어 누리려는 듯.
지난 해 봄 끝부터 쌓인 것들이
식도 끝 자리에서 솟아 올라와
목젖 너머 눈 코까지 쏘아 올리며
온몸을 찔러대는 신열身熱의 가시!
한 해 내내 붙잡혀 못 떠나가고
이내 몸속 구석을 돌고 돌면서
이전보다 막되게 달라진 채로
미칠 듯 달려드는 환장할 봄녀!
(「환장換腸―봄앓이」 전문)
‘봄봄’을 쓴 김유정 역의 전 역이다
그곳은 아직 겨울 강물에 붙들려 있다
나는 강으로 가서 물을 떼어 놓는다
그 틈새로 봄기운이 봄봄봄 솟고 있다.
(「겨울 강에서 봄 마을에로―강촌역」 전문)
∞.
고영섭.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비루하고 미련한 살림살이. 세상 여하한 ‘예(禮) 아님’과 ‘염치없음’ 조차 웅숭깊은 근기로 묻어버리고, 끝을 알 수 없는 끈기로 뭇 본성의 회복을 기다린다. 생래(生來) 품부 받은 본각(本覺)의 귀래(歸來). 자신의 또 타인의 깨달음의 한 때를 기다린다. 시의 말이 돈오(頓悟)처럼 다가올 순간을 기다리고, 그 말의 울림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길 기다린다.
시의 운율. 시인의 빛나는 목소리. 그 속에서 관념의 지성은 삶의 현장을 얻고, 감수를 타고 돌며 마음을 적신다. 날카롭게 번득이는 운율의 형식미는 시적 쾌감을 선사하며, 그 생기발랄한 생동감을 듣는 이의 감각세포로 전달한다. “나와! 나와! 나와! 나와!” 심장 박동에 맞추어 벼락처럼 외치던 그 희구의 함성은, 어느 새 “구 만 리 장천을 훨 ! 훨 !” 노니는 활수하고 여유 가득한 나비의 몸짓이 되어, 깨진 얼음장 사이로 “봄봄봄” 물소리 내며 그 생명력을 솟구쳐 올리는 것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람. 그의 근기와 끈기에 어찌 인간적 분심과 불만이 없으랴. 다만 “어린 아이가 막 우물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는 순간/ 차마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내”(「입정-맹자의 孺子入井을 빌어」중) 몸 안의 성품을 곧추세워 모든 몰염치 속에 깃들었을 불성의 씨앗을 또렷또렷이 믿기 때문일 터. 미혹스런 마음을 탁 놓아버린 자리에 흰 연꽃처럼 피어날 고요적적한 평온의 순간을 시인은 바라마지 않는다. 근기와 끈기로 세상 모든 살림살이의 깨달음과 치유를 바라는 염원이 시의 말씀 속에 영글어 있다.
그리하여 그 끈덕지고 온화한 기다림을 감촉하고 누군가는 삶의 끝자락에서 세상과 화해할 용기를 얻는다. 뭉치고 엉켰던 마음의 체기를 탁 풀어놓고 삶의 온기로 제 가슴을 지필 힘을 얻는다. 그를 향한 귀소(歸巢)의 본성을 감지해버린, 낯 두꺼운 못난이였던 그 누군가는.
첫댓글 고영섭 교수님! 민순의 선생님의 찬사가 과녁의 중심에 제대로 꼿인 건가요? 위의 전문을 모두 프린트하려고 합니다. 꼭 다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필승!
<황금똥에 대한 삼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