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 민문자
1970년경 배다리 서울신탁은행 지하 산유화 다방은 그래도 하이칼라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분위기가 모던한 다방이었다. 팔월 초사흘 오후에 갑자기 숙모의 부름을 받고 물기 머금은 감은 머리가 마를 사이도 없이 맞선을 보게 되었다. 평소에 선을 볼 때는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예쁘게 하고 옷차림도 신경을 많이 썼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바라본 노총각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거구라 깜짝 놀랐다. 지금은 보통체구이나 그 시절에는 대부분 홀쭉한 체형들이라 상대적으로 더욱 눈에 뜨이게 뚱뚱하게 느껴졌다. 그는 어머니와 형님 내외를 모시고 왔는데 형이 훨씬 더 총각같이 보였다.
차 한 잔씩을 나누고 둘만이 남았다. 유난히 좋은 목소리라고 느껴져서 이끄는 대로 송도로 나아가 콜라 한잔씩 나누고 가능성을 가지고 사귀어 보자는 말을 들었다.
그 시절 스물일곱 살로 혼기가 늦은 나는 집안 맏딸로 그 해 안에 출가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신랑감으로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여러 번 맞선 본 노처녀 신세로 차마 이번에도 “아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토요일 오후, 산유화 다방에서 만나서 어른들의 허락이 있으면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로 했다. 어머니와 작은 아버지가 상대방이 모르게 미리 보고 기다렸다가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 약속이란 것이 합격이면 이마위로 머리를 쓸어 올리는 것이고 불합격이면 손을 이마 아래로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작은 아버지가 앉아계신 쪽으로 여러 번 시선을 보냈으나 신호가 오지 않았다. 시선의 초점을 바로하지 못하고 있을 때 노총각은 회사에 전화를 걸어야 한다고 일어서지 않는가. 그 시절에는 공중전화도 시내전화만 할 수 있었고 인천에서 서울로 전화하려면 우체국이나 전신전화국에 가서야 시외전화를 걸 수 있었다. 내가 상대를 따라 일어서 나오며 어른들 쪽을 바라보니 작은 아버지가 당황하시고 빠른 동작으로 신호를 보냈는데 손을 올린 것인지 내린 것인지 분별이 안 되었다. 나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전화국에서 그가 서울로 전화를 거는 동안 몰래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어른들이 합격이라고「백호정」한정식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부모님들의 허락을 얻어서 만나는 동안 서른 살까지 왜 결혼을 안 했을까 궁금했다. ‘누구는 시집가고 보니 첩이더라.’ 하던 말을 들은 기억도 나고 해서 나는 혹시 하는 생각에 철원 본적지 주소를 알아서 직접 확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
그 당시 서울 이북 쪽에는 가본 적이 없어 지도를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전 날 저녁 서울 친구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첫 버스를 탔다. 너무 생소한 지역이므로 무척 두려웠다. 그 시절에는 간첩신고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 있을 때이고 사상적으로 의심받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던 시절이다.
옆자리 중년 남자는 지도를 펴 보이며 궁금한 것을 묻는 나에게 친절하게도 “저기는 OO고지, 저기는 육이오 때 중공군 몇 만이 죽고 아군피해는 어떻고 백마고지는…. ”등등 주변지리를 자세히 설명해주다가 중간에서 내렸다. 신철원 읍내에 버스가 도착하고 내가 내리자마자 형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에 무엇하러 왔습니까.”
“신랑 될 사람 신원 조회 차 왔습니다.”
나의태도가 진실해 보였는지 신분증을 살펴보고 아무 말 없이 돌려주었다. ‘그 친절하던 사람이 간첩신고를 했구나.’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읍사무소에 가서 호적등본을 떼어보고 의문은 기우였지만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려고해도 겁먹은 심정 때문인지 먹히지 않았다. 옷 한 벌을 준비해 갔는데 갈아입고 오려했지만 혹시 더 의심받고 미행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입던 옷차림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곱게 단장하고 만나려던 생각은 무위로 돌아갔다. 노독으로 흩어진 차림새 그대로 종각에서 내려 전화를 하고 그 당시 유명한 고려당 제과점에서 그를 만난기억이 새롭다. 버스에서 내릴 때 넘어져 무릎을 깨면서….
지금은 팔십삼 킬로 체중이 흔하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뚱뚱한 사람을 본 일이 없어 건강이 걱정스러워 별로 좋은 줄도 모르면서도 서울 인천을 직행버스로 오가면서 하루건너 만큼씩 스물다섯 번을 만나다가 첫눈 오는 날 약혼식을 올렸다. 약혼식이 끝난 후 송도 유원지로 가서 산책을 하는데 바람이 몹시 몰아쳐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우리의 미래가 어찌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도 많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바람이 시새움 할 정도로 서로 좋아 하려나, 웬 날씨가 이리 사나운가.”
지금도 그 목소리의 여운이 귓가에 맴돈다. 사십 번을 만나고 크리스마스 다음날 결혼식을 올리고 바늘에 꿰인 실이 되어 삼십 오년, 눈보라치는 모진 바람도 겪어내고 그래도 행복한 날이 많았다고 자위해 본다. 모지고 울퉁불퉁하던 서로의 성향을 세월은 밀가루반죽이 잘 된 것처럼 주물러 놓았다. 부부는 종교와 취미가 같아야 한다고 말하던 그 청년이 이제 칠십칠 킬로 체중의 머리허연 할아버지가 되었다.
이제 서른한 살 노총각 작은 아들이 팔십삼 킬로 체중으로 맞선을 본다. 산유화다방에서 맞선을 보던 날의 모습이 그 얼굴에 오버랩 되어 미소 짓게 한다. 『문학저널』2005.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