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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콘서트】 윤정모 소설가 & 맹문재 시인 대담
폭력이 존재하는 한 소설 쓰기는 계속
일시 : 2021년 5월 29일(토)
장소 : 경기아트센터 야외극장
맹문재 : 많은 후배 문인들이 존경심과 친밀감으로 “정모 누님”이라고 부르는 윤정모 선생님, 한참 만에 뵙네요. 오늘은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선생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재작년에 순천향병원 빈소에서 뵙고 난 뒤 살아가기 바쁘다 보니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이네요. 오늘 경기민예총 문학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대담에 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근황은 어떤지요?
윤정모 :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맹문재 : 선생님의 약력을 살펴보니 1946년 11월 3일 경북 월성군 현곡면 나원리에서 태어나 6살 때 나원국민학교에 입학했고, 부산 동래로 이사를 가서 금정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학하네요. 그리고 부산 혜화여고를 졸업한 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족 사항과 성장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윤정모 : 저의 인생은 참 바쁘고 번잡했습니다. 태어나서 두 살 때 서울로 이사를 갔고, 네 살 때 전쟁으로 인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열한 살에 부산으로 옮겨갔고, 19세 때 대학 진학차 서울로 왔습니다. 그 이후 줄곧 서울에서 살았는데 서울에서도 이사를 30번 이상 했습니다. 제가 남들과 다른 점은 단 한 번도 양친과 함께 살았던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키워주셨고, 대학 때부터 혼자서 흘러 다녔습니다. 저의 원초적 열등감은 정상적인 가족사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맹문재 : 연보에 기재된 약력보다 복잡하네요. 선생님께서는 1981년 『여성중앙』에서 시행한 중편소설 공모에 「바람의 딸들」이 당선되기 이전에 여러 권의 소설집을 간행하셨습니다. 서라벌예대 재학 중에 『무늬져 부는 바람』(1968)을, 졸업한 뒤에는 방종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생의 여로에서』(1971), 정인숙 사건에 실마리를 얻어 작품화한 『저 바람이 꽃잎을』(1972), 음성 나환자 유판진의 전기소설인 『그래도 들녘엔 햇살이』(1973), 재수생 이야기인 『광화문통 아이』(1976), 그리고 창작집 『관계』(1977) 등을 출간해요. (『관계』는 개작해 1986년 ‘문이당’에서 재출간). 정말 놀라운 창작력을 보여주셨는데, 창작 동기가 궁금하네요. 선생님께서 왜 소설을 쓰려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네요.
윤정모 : 저는 어릴 때 도둑 영화를 좀 많이 봤습니다. 제가 본 영화가, 제목은 잊었습니다만 그 영화의 시나리오가 명랑이란 잡지에 실렸습니다. 초등학고 5학년 땐데 그걸 읽고 나도 시나리오라는 걸 써봤습니다. 그리고 잊었는데 중 2 때 글짓기에서 ‘지우개’라는 콩트를 썼습니다. 아이들이 새 지우개를 칼로 잘라내기에 지우개도 아프다라고 썼던 것인데 국어 선생님께서 앞으로 계속 글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버릇처럼 이런저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동기인 것 같습니다.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1975년 김향환 씨와 8살이란 차이를 딛고 결혼해요. 선생님의 산문집 『우리는 특급 열차를 타러간다』(눈과마음, 2001)에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선생님의 결혼 생활을 구체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선생님의 결혼 생활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어요.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국 여성들의 삶을 다시금 생각해보네요. 부군께서 2019년 11월 2일 돌아가셨어요.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윤정모 : 제가 만약 평범하거나 상식에 맞는 배우자를 만났다면 괜찮은 결혼 생활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저는 누가 됐던 최선을 다하는 성격인데, 상대가 나이가 어리다 보니 최선의 척도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부족한 남편이지만 그래도 저에게 아이를 주었고, 그 아이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깊은 것을 보았을 때 저의 불만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아이, 뇌병변이 된 제 아빠를 거의 17년간 수발했습니다. 아이의 노고가 딱해서 제가 거들기도 했습니다만 그때도 최선을 다했던 까닭은 아이로부터 원망을 듣지 않고 저 자신에게도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맹문재 : 선생님의 따님 “솔지”의 근황이 궁금하네요. 캠브리지대학을 포기하고 런던대학에 입학하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소설과 같아요. 선생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큰 필연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저는 살아가면서 자주 생각해요.
윤정모 : 자식, 정말 인생 최대의 필연이지요. 죽을 때까지 불변인 관계는 저에겐 자식뿐이니까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인생을 새롭게 배우기도 했으니 자식은 나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맹문재 : 선생님의 영국 생활에 도움을 주셨던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 이한열 열사의 동생 이훈열, 그리고 박태주, 배규식, 김영혜, 황대권 등 분들과도 계속 안부를 주고받는지요. 특히 따님 “솔지”의 대학 진학에 큰 영향을 준 이승준 선생님의 가족 근황이 궁금하네요.
윤정모 : 영국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만 허덕이며 살다 보니 안부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특히 우리 아이 대학 입시 때 전적으로 도움을 준 이승준, 그 청년은 불의의 사고로 고인이 되었습니다. 그 청년과는 입은 은혜도 추억도 많아서인지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마음이 아픕니다.
맹문재 : 참으로 아픈 일이 있었네요. 선생님의 작품에서는 1980년의 5·18광주민중항쟁(5·18민주화운동)을 그린 것을 빠트릴 수 없지요. 「등나무」와 「밤길」을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새롭네요. 최근에 간행하신 『자기 앞의 생』(문학과행동, 2017), 『누나의 오월』(산하, 2020)도 광주민중항쟁을 다루었는데,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요?
윤정모 : 광주민중항쟁은 제 눈을 똑바로 뜨게 하고 정신을 차리게 하는 죽비였습니다. 문학의 방향을 잡지 못해 헤매고 있던 저에게 길을 일러준 이정표이기도 했습니다.
맹문재 : 5·18광주민중항쟁 때 학생운동의 주모자로 지명 수배된 윤한봉을 비롯해 박효선 등을 선생님 댁에 숨겨준 일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잘 알다시피 윤한봉 선생님은 지명 수배 생활을 하다가 1981년 4월 화물선을 타고 35일을 연명해 미국으로 밀항해 민족학교와 재미한국청년연합 등을 결성해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지요. 1993년 수배가 해제되자 귀국해 5·18기념재단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민족미래연구소장과 들불야학기념사업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다가 2007년 타계하셨지요. 박효선은 윤상원의 친구로 광주항쟁 당시 상황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지요. 극단 ‘토박이’를 만들어 연극으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힘을 쏟다가 1998년 간암으로 타계하셨지요.
윤정모 : 네. 그렇습니다. 윤한봉 씨는 박찬대라는 선원의 도움으로 화물선을 타고 적도를 거쳐 뉴질랜드를 경유, 미국 시에틀로 갔습니다. 시에틀에서 LA로 옮겨 민족학교를 세우고 미주 청년들에게 조국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국내 민주화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강직한 분이셨지요. 박효선 씨는 그분과 반대로 성품이 온화한, 외유내강이었지요. 우리 집에 숨어 계실 때 그분의 약혼녀가 왔는데 그때 약혼녀에게 매우 냉정하게 대하셨어요. 잡히면 사형이나 무기를 살 수 있으니 자기 곁을 떠나게 하려고 말입니다. 그의 약혼녀, 그렇게 푸대접을 받았던 약혼녀가 그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학교 선생이셨는데 생각이 올곧고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부인과는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서는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 또한 외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의 작품 세계의 토대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주제만으로도 몇 시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선생님께서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 혹은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잘 알려진 『고삐』(풀빛, 1988)는 윤락 여성의 삶을 르포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고,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고려원, 1990)은 정신대 이야기이지요. 창작집 『딴 나라 여인』(열림원, 1999)에 수록된 작품들도 모성 콤플렉스를 그렸지요.
윤정모 : 저는 여성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피해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가해자들입니다. 가부장제, 사회인습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끝없는 동정심을 가지지만 여성의 강점, 혹은 약점을 이용해 남성이나 사회, 가족을 우롱하는 여성들은 대항하거나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합니다. 그 발단은 친구 어머니였습니다. 홀로 딸을 키운 어머니가 자신의 딸이 자신의 정부에게 겁간을 당했고, 딸이 그 사실을 고백하자 거짓이라고 때리고 머리를 깎았습니다. 문제는 그 딸이 가출해서 윤락으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성에 눈이 멀어 자식도 보이지 않는 그런 여성들, 더러 있습니다. 피해자들의 경우는 제가 성장한 동래온천장의 기생들, 양색시가 된 내 친구,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 등인데 그분들 경우는 거의 소설화했습니다. 가해자에 대해서도 쓰기 시작했는데요 그 첫 번째가 미투를 이용해 거짓을 남발한 여성을 다루었습니다. 그 거짓말쟁이가 승소를 하고, 서지연 검사 같은 실제 피해자가 패소를 당하는 세상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서지현 검사 사례를 소설로 쓰고 싶습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법률 공부도 해야 하고 그 세계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한다는 것을요.
맹문재 : 기대해볼게요. 선생님은 광주항쟁과 여성 문제 외에 분단 문제(『그들의 오후』), 전쟁 문제(『전쟁과 소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봉선화가 필 무렵』), 그리고 농촌 문제, 노동 문제, 나환자 문제 등 우리 사회에서 뿌리 뽑힌 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담아냈습니다. 『가자, 우리의 둥지로』(문예출판사, 1985)와 『빛』(동아, 1991) 등에서는 외세 문제(반미)를 담았지요. 이와 같은 작품 세계에 대한 말씀을 다 들으면 좋겠지만, 시간 관계상 불가능하므로 몇 가지 사항만 여쭈어볼게요. 선생님의 창작집 『가자, 우리의 둥지로』(문예출판사)는 1985년 간행되었으나 당국으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아 1986년 『밤길』이라는 작품으로 재발간했고, 다시 표제작을 추가해 『봄비』(풀빛, 1994)로 간행했지요. 판매 금지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윤정모 : 『밤길』은 광주항쟁 이야기입니다. 그때 당시는 광주항쟁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표제목을 『가자 우리의 둥지로』로 했음에도 검열에 걸려 판금이 되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 1984년 1월 선생님께서 구류 선고로 유치장 생활을 21일 하셨는데, 그 상황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봄비』에 들어 있는 단편소설 「신발」이 그 상황을 담은 것으로 보이네요.
윤정모 : 그랬습니다. 택시를 타고 전두환에 대한 욕을 했더니 택시 기사가 신고를 한 것이지요. 기사는 포상으로 모범택시 기사 자격증을 받았더군요. 즉결재판 과정에서 반론을 했다가 일주일에서 14일, 엉터리라고 고함을 질렀다가 21일로 가중된 것이구요. 그때는 광주학살에 대한 분노가 거의 폭발 지경이라 좌충우돌 저항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박효선 씨로부터 광주에서 죽어간 시민 학생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것이 저에겐 날로 자라는 분노의 나무, 시한폭탄이 되었던 것이죠. 지금도 어느 구석엔가 그 분노가 남아 있네요. 전두환, 5.18, 활자만 봐도 마음에서 회오리가 일어납니다.
맹문재 :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서 농촌문제를 다룬 작품들도 주목되어요. 『들』상·하권(창작과비평사, 1992)은 순창농민회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며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실제로 선생님께서는 황새울로 이사해서 농촌 생활을 하셨지요. 그 상황은 첫 에세이집인 『황새울 편지』(푸른숲, 1990)에 담고 있어요.
윤정모 : 대추리쪽 황새울은 홍일선 시인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용인쪽 황새울에 살았는데요, 그곳에서 팀스프리트 훈련으로 어린 여자아이가 강간미수사건이 있었고 그에 대한 소설 ‘빛’을 쓴 이후 미군들의 코부라 헬기 두 대가 우리 집 앞과 옆의 밭에 앉아 위협을 주기도 했지요. 저는 그 사실도 『한겨레』 칼럼에 썼습니다. 1980년대가 학살의 연도이긴 했지만, 리얼리즘 작가에겐 쓰면서 싸울 수 있는 황금기이기도 했습니다.
맹문재 : 선생님의 장편소설 『섬』(한마당, 1983)은 소록도의 나환자 마을을 다루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한동안 그곳에서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이 작품집은 개작해 『그리고 함성이 들렸다』(성현출판사, 1990)로 다시 출간해요. 『그래도 들녘엔 햇살이』(1973)란 소설집을 간행한 적도 있어요. 선생님께서 나환자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윤정모 :『그래도 들녘엔 햇살이』는 유판진 씨의 자전소설을 대필한 것입니다. 그때 취재했던 자료들을 바탕으로 『섬』을 썼고 그것을 다시 수정해서 『그리고 함성이 들렸다』로 출간한 것이지요. 유판진 씨는 어느 목사님이 소개했습니다. 제 가난이 딱해서 자서전 대필 일거리를 주선해주셨던 것인데, 그 목사님 덕분에 유판진 씨와 소록도 비사를 알게 되었지요. 그 목사님의 은혜,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맹문재 : 『섬』의 작품집 발문을 이호철 선생님께서 쓰셨어요. 이호철 선생님께서 결혼 주례를 서 주셨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는데, 두 분의 인연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지요? 이호철 선생님 1주기를 맞아 14명의 후학들이 추모한 소설집 『큰 산 너머 별』(도화, 2017)을 간행하기도 했지요. 제가 지난주 오월문학제에서 논문 발표를 한 뒤 선후배 문인들과 함께 광주 5·18묘역(국립5·18민주묘지)에 갔다가 이호철 선생님 묘소를 참배하고 왔어요. 채광석 선생님의 묘소에도 다녀왔는데, 두 분 사이의 인연도 듣고 싶네요. 선생님의 창작집 『님』(ᄒᆞᆫ겨레, 1987)을 쓰는데 채광석 선생님이 자료를 많이 챙겨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윤정모 :이호철 선생님에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은혜를 갚는 대신 배신감만 안겨드렸습니다. 저의 그 잘못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지금도 한이 되고 있습니다. 채광석 씨에게는 여러 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만 제가 갚은 것이 없어 늘 죄스러웠고 죄스럽습니다.
맹문재 : 윤이상 작곡가의 일대기를 담은 『나비의 꿈』상·하(한길사, 1996),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통일공화국을 추구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아일랜드 공화군을 그린 『슬픈 아일랜드』(열림원, 1999), 인류 최초의 문명지인 수메르가 한민족에 의한 건설되었다는 가설을 전제로 한 판타지 소설 『수메르』1~3(다산책방, 2011), 수메르의 도시국가인 우르크를 통치한 길가메시의 일생을 다룬 『길가메시』(파미르, 2007), 세계 최초의 문명국 수메르의 건국사를 풀어낸 『수메리안』상․하(파미르, 2005) 등 작품의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의도하는 바가 있는지요?
윤정모 : 미리 의도한 바는 없습니다. 그때그때의 시사가 창작을 결정했던 것이지요. 『슬픈 아일랜드』는 영국에 거주할 때 IRA 혁명군, 북아일랜드 사태가 자주 신문에 오르내렸고 그래서 쓰게 되었는데 세계사 지식이 일천해서 유학하던 우리 청년들의 도움을 받았고, 청년들이 수집해온 자료와 현장 답사를 종합해서 그 작품을 썼습니다. 『수메르』는 대영박물관 수메르관을 관람했을 때 송호수 선생 등 우리의 민간 사학자들의 동이족-수메르의 관련성에 대한 글이 생각났습니다. 겁 없이 썼던 것인데 시간 나면 다시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수메르 발원지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 강 사이에 있었습니다. 특히 인류 최초의 문명을 꽃피운 우루크와 우르를 탐문하려고 터키까지 갔다가 미군들이 전쟁을 일으킨 통에 그냥 돌아온 것이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여유가 되면 꼭 한번 가고 싶은 곳이 이라크 남부, 수메르의 옛 유적지입니다. 걸프만 조금 아래쪽에 바레인이 있습니다. 바레인에는 수령 5천 년이 되는 생명의 나무가 있고, 지금도 그 나무를 보려고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5천 년 전 길가메시가 그 나무를 심었다고 해서 저도 제 소설에 그렇게 서술했습니다. ‘생명의 나무’ 또한 가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수메르 중 이름이 ‘우르카기나’라는 영웅이 있었는데 그분이 체 게바라 같은 사람으로 인류 최초의 혁명가였습니다. 그곳에 간다면 그분 유적지도 찾아보고 싶습니다.
맹문재 : 계획이 대단하시네요. 선생님께서 영국에 계실 때 칼 마르크스가 묻혀 있는 하이 게이트 공동묘지를 자주 산책하셨다고 『우리는 특급 열차를 타러 간다』에서 밝히셨어요. 마르크스 묘지의 풍경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려요.
윤정모 : 칼 마르크스 무덤은 하이게이트 세메토리에 있습니다. 정문에 위치를 가리킨 안내문이 있고요, 안으로 50미터쯤 들어가면 흉상이 있습니다. 훙상 앞 석상에는 꽃들과 쪽지가 있는데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메모를 남겼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브라질에서 온 노동자의 메모였습니다. 영어로 쓴 것이었는데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은 어디쯤 오고 있습니까?’ 라고, 제 아이가 번역해주더군요.
맹문재 : 제가 소장하고 있는 선생님과 관계된 자료 중에 『적도의 여인 부대』라는 시나리오 각본이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것으로 한국(대양필름)과 홍콩(향항대화영업공사)에서 합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상영되었는지요? 또한 선생님의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가 1991년 지영호 감독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로, 2014년 서울시극단의 연극 <봉선화>로 공연된 적이 있지요. 선생님의 작품이 영화, 연극 등 다른 장르로 연결된 것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려요.
윤정모 :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1982년에 발표했고 ‘고려원’에서 재출간을, ‘당대’에서 1995년에 개작 재출판을 했습니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괜찮았는데, 감독이 섹슈얼 각도로 찍어서 정신대 대책 위원장인 이효재 선생님, 윤정옥 선생님께서 화가 나셨고 저도 불쾌해서 그 영화를 보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된 작품은 <아들>, <님> 등이 있습니다. 제가 쓴 희곡은 <봉선화>가 있고 번안 희곡은 <가을 소나타>와 <은고리>(부제 ‘아들과 어머니’)가 있습니다. <가을 소나타>는 김용림, 김미숙 등이 출연해서 제법 관객을 끌었던 연극이었습니다.
맹문재 : 선생님의 문체는 담백하면서 힘이 있고 또 속도감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소설 작법은 상상력보다는 사실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의 소설 쓰기의 방법 내지 철학을 좀 들려주세요.
윤정모 : 제 소설에 르뽀적 경향이 가미된다고들 합니다. 역사 폭력, 식민지 폭력, 사회 폭력, 가정 폭력이 존재하는 한 저는 그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징, 혹은 의식 흐름 등의 소설은 저에게 주어진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맹문재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네요. 그리고 후배 문인들에 대한 한마디 말씀도 부탁드려요.
윤정모 : 자신이 선택한 일은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만이 후회없는 인생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맹문재 :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또 뜻깊은 말씀들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더욱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주시길 기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자주 찾아뵐게요.
【약력】
■ 윤정모
부산에서 성장.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대학 재학 중 『무늬져 부는 바람』으로 작품활동 시작. 1981년 『여성중앙』에 「바람벽의 딸들」이 당선. 작품으로는『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그리고 함성이 들렸다』『님』『고삐』『들』『나비의 꿈』『슬픈 아일랜드』『꾸야 삼촌』『수메르』『자기 앞의 생』 등이 있다. 1988년 신동엽 창작기금, 1993년 단재문학상, 1996년 서라벌문학상을 수상.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지식인 시의 대상애』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있음.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