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의 잔치가 끝난 다음날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크게 외쳤다.
‘호산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예기적인 외침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구원자로 보았다.
그들은 시편 118편을 인용하였다.
이 시는 100년 전 유다 마카비가 시리아의 군대를 몰아낼 때 불렀던 노래였다.
종려나무 가지는 그 무리들의 정치적 욕망에 대한 상징이었다.
왜냐하면 종려나무는 마카비 혁명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민족주의 정신의 상징이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무기를 들고 그들이 미워하는 로마인들을 축출하는 것을 보기 원했다.
이런 폭동의 기운 가운데 예수님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다.
500년 전 선지자 스가랴는 9:9에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내 왕이 내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고 예언했다.
누가는 이 장면을 설명할 때 예수님께서 결코 타보지 않았던 노새를 끌고 오도록 그 제자들에게 명령하였다고 한다.
예수님은 노새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 자신이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정확하게 아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와 일치시키고 있었다.
동시에 예수님은 자신이 과거나 미래의 다른 세계의 정복자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신은 알렉산더나 시이저와 같은 정복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새는 이스라엘에서 왕이 타는 짐승이었다.
이스라엘의 왕은 전쟁 때에 말을 타지만 평화 시에는 언제나 노새를 탔다.
노새는 평화의 동물이요 겸손한 동물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유형의 새로운 왕이셨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일 무리들이 그것을 이해했다면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리들은 검을 가진 왕을 원했다.
16절에 의하면 제자들도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 왜 그렇게 하셨는가를 이해하게 되었고 스가랴서의 예언은 바로 예수님께 대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리들은 열정적으로 흔들며 뛰면서 돌아다녔다.
무덤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았던 사람들과 그 사건에 대해 들었던 사람들은 밀려오는 물결처럼 함께 모여들었다.
19절은 이에 대한 바리새인의 반응을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쫓는도다” 라고 요약하고 있다.
지금 요한이 이 기대하지 않은 사건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가를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몇 사람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빌립은 안드레와 함께 이 사실을 예수님께 말했다.
유월절에 헬라인들이 예배하러 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헬라인들은 상습적으로 이리저리 배회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헬라인들은 진리를 따라 돌아다니는 구도자들이었다.
헬라인들이 지식을 구하고 철학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까닭이었다.
그들은 실로 예수님에게서 진리에 대하여 듣고 싶어하였다.
여기서 요한은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오심과 희생의 사건에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하였다.
마태복음 2장에서 우리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왔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본문에서도 바로 이런 종류의 헬라인 현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다.
승리의 입성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왕인지 제시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을 만나러 온 헬라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인자가 영광 받을 때가 왔다고 말했다.
이 같은 말을 들었을 때 기대에 찬 무리들은 심히 흥분되어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그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다니엘의 예언 중에 나타난 세계를 지배하는 인자를 기억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리들에게 로마에 대항하는 선전포고를 하고 그의 왕국을 시작하려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얼마나 실망시켰을까?
24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 받는다는 의미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로 설명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갑작스런 침묵에 빠졌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왕 즉 정복을 통하여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통치하는 왕에 대하여 말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는 너무 단순했다.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을 손에 갖고 있을 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다.
씨 뿌리는 계절에 밀알은 마치 무덤에 있는 것처럼 땅에 뿌려진다.
그때 그것은 죽은 것 같이 된다.
말하자면 땅 속에 파묻힌다.
그러나 움이 돋고 싹이 나서 마침내 결실을 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그때 한 알의 밀알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다른 생명의 밀알로 확장된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자신이 죽어 많은 생명을 산출하는 이런 왕의 역할을 성취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떻게 자신이 자기 왕국을 통치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통치는 알렉산더나 나폴레옹 같은 힘에 의한 통치 차원을 넘어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강제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25절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시며 이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오히려 그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 삶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 즉 죄가 죽지 않으면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 결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용어는 희생이요 죽음이다.
인류역사 중 위대한 사건은 모두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희생이야말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힘이요 능력이다.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영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스리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잘 섬겨야 한다.
우리가 살기를 바란다면 죽어야 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죽음과 희생이 없다면 우리 안의 커다란 가능성은 새벽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풍성한 삶과 능력 있는 삶을 살려고 하면 희생하고 죽어야 한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죽음으로 사는 법칙을 배운 사람들이다.
죽는다는 것은 로마서 12:1-2 말씀처럼 순간순간 우리 삶이 영적인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 삶이 무기력하고 침체되어 있고 영적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면 지금 우리는 죽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살아있는 거룩한 제물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에게 생의 역동적인 힘과 영적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원리다.
예수님은 26절에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이 사실을 잘 요약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죽고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길이다.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행진했을 때 무리들은 예수님을 열렬이 환영하였다.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는가?
그들이 예수님을 어떤 왕으로 이해하였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하여 희생적 죽음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의 왕이시며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죄에 죽고 세상에 죽고 정욕에 죽고 자신에 죽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이 계시는 영광된 자리에 인도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