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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같이 보기
[1] 석가모니를 표현한 초기 불상 중 하나다. 다만 초기 불상이라고 해도 석가모니 부처가 살았던 당대의 것은 아니다. 불상이라는 것 자체가 석가모니 부처 입멸 이후 거의 5백 년이나 지난 뒤에야 제작되기 시작한 데다, 종교적 목적으로 제작되는 이상 작성자의 주관 즉 제작 대상에 대한 경모의 감정이나 작성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형태의 신성관이 들어가기 때문에 미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석가모니도 그렇고 예수도 그렇고 실제 얼굴이 어땠는지 현재 시점에서 100% 완벽하게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2] 석가모니의 정확한 탄생 연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와타나베 쇼코는 <불타 석가모니>(법정 역)에서 탄생 연도에 대한 세계 학자들의 주된 의견이 기원전 560년경이라고 설명했다.[3] 覺者.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서 모든 의혹과 번뇌를 버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존재.[4] '샤켜무니'에 가깝게 발음한다. 네팔어와 힌디어도 같은 철자를 사용한다.[5] /s̪id̪̚ˈd̪ʱɑːɾ.t̪ʰɐ/ /ˈɡɑw.t̪ɐ.mɐ/ '싯다르타 거우타마'에 가깝게 발음한다.[6] 다만 원전인 팔리어 경장에는 등불이 아니라 섬으로 되어 있다. 흔히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自燈明法燈明 自歸依 法歸依)로 알려진 이 구절은 "누구든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뒤에나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으로 삼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다음 구절이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몸에서 몸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느낌에서 느낌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기억하면서, 마음에서 마음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현상에서 현상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이다.[7] 이러한 소왕국의 군주를 '라자Raja'라고 한다. 라자는 중세유럽기준으로는 군소 영주 정도로 리히텐슈타인이나 모나코 공국 정도의 규모의 영주이다. 마하라자가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부족을 통합하는 장(長)을 의미하며, 도시국가나 성읍국가의 왕 정도로 볼 수 있다.[8] 아소카왕이 죽은 이후로 불교의 중심은 북인도에서 서인도(쿠샨왕조)로 옮겨졌다. 지금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이다. 이 지역의 뛰어난 승려들로 인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문으로 번역된 것은 중국으로, 팔리어로 번역된 것은 스리랑카, 태국으로 전해진 것도 이 시기이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을 통해 한자 불경이 전해졌으며, 한국은 한글 반포(1446년) 이후 세조가 설치한 간경도감(1461년)을 통해 언역 즉 한국어(중세 한국어)로 불경이 번역되었다.[9] 티베트, 몽골, 한중일 등지에 많이 퍼진 종파.[10] 남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지에 많이 퍼진 종파.[11] 고대 종교의 창시자 중 정확히 언제 태어나고 사망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그런 부류 중에서도 유독 전승이나 학설에서 언급되는 생몰년도의 폭이 매우 크다.[12] 그중에는 현재 파키스탄 지역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서, 석가모니 탄생지를 현 파키스탄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13] 산스크리트어로 '과거에 그러하였던 것' 즉 대략 역사를 뜻하는 단어이기는 하다.[14] 원래 역사 기록을 목적으로 남긴 게 아니었는데 후대에 역사 기록으로써 쓰이게 된 것은 중국의 춘추좌씨전과도 비슷하다.[15] 오래된 것이라는 뜻이다.[16] 특정 인물에 대한 전기 및 행전. 차리타 문헌의 예로는 가령 7세기에 작성된 바르다나 왕조 하르샤 왕의 전기 《하르샤차리타》(Harṣacarita) 등을 들 수 있다. 후술할 석가모니 부처의 행적을 기록한 서사시 불소행찬도 원래 산스크리트어 제목은 '붓다차리타'이다.[17] 특정 군주에 대한 찬가[18] 연대기. 왕샤왈리 문헌으로는 12세기 초의 《제왕들의 강》(Rājataraṅgiṇī)을 꼽을 수 있다.[19] 한문으로 번역하면 대사(大史) 즉 '위대한 역사'이다.[20] 한자로는 마명(馬鳴)으로 번역되며, '마명보살'이라고도 불린다.[21] 데바남피예나 피야다시나 라지나. 아소카 대왕은 자신을 지칭할 때에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아소카 라자(Devanampiya Piyadasi Asokaraja) 이렇게 불렀다. '데바남피야'는 '신들의 신임받는 종'이라는 뜻이다.[22] 아소카가 남긴 칙령들 가운데 작은 돌기둥 담마 칙령에 속한다.[23] 지금도 룸비니 성지에 가면 아소카 대왕의 석주를 볼 수 있다.[24] 다만 8. 화살의 경(salla sutta)과 12. 두 가지 관찰의 경(dvayatanupassana sutta)은 부처의 일생보다는 가르침에 중점을 두었다. 화살의 경은 4장 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경(kama sutta)을 부연설명한 듯한 내용이다. 두 가지 관찰의 경은 4장 11. 투쟁과 논쟁의 경(kalahavivada sutta)을 부연설명한 듯한 내용. 사성제와 12연기에 대해서 설명하였다.[25] 수당대에 번역된 방광대장엄경(랄리타비스타라)이나 불본행집경도 비슷하게 석가모니의 출생과 출가 과정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까지가 그려져 있지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은 다루지 않고 있다.[26]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아슈와고샤(Aśvaghoṣa)이다. 그가 태어날 때에 그리고 그가 설법을 행했을 때에 이를 들은 말들이 모두 울었다고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데바와 용수, 그리고 동수(쿠마라라타)와 함께 '일출논사(日出論師)'라고 불린다.[27]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즈나냐굽따Jñānagupta이다.[28] 마찬가지로 산스크리트어 이름을 음차한 것으로 훈독해서 일조(日照)라고 부르기도 한다.[29]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에는 불경이 없었으며 열반 후 제자들에 의해 결집되었다.[30] 물질적인 기적이 관련 설화에 나타난 경우가 아예 없진 않지만, 분량이 적고 그나마 불가피할 상황에만 일어난 수준이며, 오히려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도 인과응보의 세상 이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발언이 나오기까지 한다.[31] 깔라마 경의 내용 중 일부를 축약해놓은 것이다. 실제 내용은 더 길게 설명되어 있으며 석가모니의 대답은 깔라마 경 9번째 게송을 인용한 것이다. 중아함경의 가람경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으나 석가모니의 답변은 조금 다르다.[32] 1944~ . 이 사람은 유대인(!) 출신으로 1973년 스리랑카에서 비구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다. 2002년부터 미국에 머무르며 저서를 펴내고 있으며, 니까야를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그의 저서로 <아비담마 연구>와 <분노와 논쟁 사회에 던지는 붓다의 말>이 번역되어 있다. #[33] 이런 식으로 경전 속 교조의 말씀을 지 좋을 대로만 따다 인용하면서 악용하는 건 다른 종교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개독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고, 이슬람에는 탈레반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있다.[34] 연기를 통해 다른 것에 의존한 것[35] 삿된 견해.[36] 단박에 깨달음.[37] 겔룩 뿐 아니라 닝마, 까규, 사캬 등 모든 티베트 불교 종파들은 사실상의 점수(漸修) 체계를 갖추고 있다. 현교의 경우 삼사부(三士夫) 도차제(道次第)를 강조하는 까담 전승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밀교 역시 온드로(Ngöndro)라고 일컬어지는 기초 수행을 비롯해 생기차제(生起次第), 원만차제(圓滿次第) 등으로 구성된 밀교의 도차제(道次第)를 따른다.[38] 고구려 덕흥리 고분 묵서명에 기록된 표기이다. 무덤의 주인인 유주자사 진은 생전 불교 신자였다.[39] 힌디어도 표기와 발음이 동일하다.[40] 석가모니 부처를 가리키는 용어 가운데 하나인 산스크리트어 단어 바가반(भगवान्, 薄伽梵) 즉 세존(世尊)의 티베트어이다. 바가와떼(བགྷ བཏ་)라고도 한다.[41] 티베트어로 써서 쌰꺄무니라고 읽는다.[42] 몽골에서는 절대자라는 의미로 정착해서, 그리스도교의 신을 번역할 때에도 이 단어를 쓴다. 그러다 보니 예수가 부처의 아들이 되는 괴이한 해석이 나타나기도 한다.[43] 무차무등(無差無等)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불교는 누구든 깨달은 자, 각자(覺者)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와 불교가 탄생하기 전에도 부처는 존재했고, 그 뒤로도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불교 문화권에서 부처라 하면 일반적으로 이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절에서는 이 깨달은 자란 의미를 살려 석가모니 외의 다른 무수한 종류의 부처를 모신다. 다른 나라들이 붓따, 부따, 부떠에 가깝에 발음하는데 비해 한국에서 '부처'라고 부르는 것은 구개음화의 결과물이다. '불타'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국 한자음에서 원래는 ㄷ받침을 가졌던 음가들이 전부 ㄹ받침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으로, 그 현상을 감안해서 '불타'를 다시 읽어보면 '붇타' 즉 Buddha와 매우 비슷한 발음이 된다.[44] 한자로는 응수공양(應受供養)을 줄인 말이기도 하며, 또한 산스크리트어 ‘아르하뜨(Argat)’를 번역한 말로 아라한 등의 말의 유래와 같다.[45] 산스크리트어 '삼먁삼보리'를 번역한 말이기도 하다.[46]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뇩다라'이다.[47] 붓다라는 존재 그 자체[48] 붓다라는 존재가 가지는 덕[49] 나자렛 출신인 예수를 으레 '나자렛 예수'라고 부른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자렛'이라고만 부를 경우 나자렛이 예수의 이름인 것마냥 혼선이 생기게 되는 것과 같다.[50] 사실 일본에서도 석가모니 부처를 줄여 부를 때에 '석가'라고만 부르는데, 대표적으로 '석가에 설법 공자에 오도(釈迦に説法 孔子に悟道)'라고 하는 속담이 그것이다(한국 속담으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기',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라는 의미와 같다). 일본의 와타나베 쇼코는 이런 이유로 석가모니 부처를 줄여 불러야 할 때는 '석가'보다는 '석존'이 더 적절하다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저서는 한국의 법정 비구에 의해서 <불타 석가모니>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의 원제는 '신석존전(新釋尊傳)'이다.[51] 불교에서는 과거의 부처가 어떤 공덕을 완수한 자에 대해서 "너는 먼 미래에 부처가 되어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라고 일러 주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런 식으로 미래불로써 나타날 것이라는 '인증'이 바로 '수기'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그 자신이 과거로부터 행해온 모든 선업에 따라 부처가 될 운명을 받고 부처로써 태어났고, 여기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선업이 미래에 부처가 될 만한 것이라는 '인증'도 포함되어 있다.[52] 불경을 읽어보면 석가모니 부처는 이미 과거불 즉 석가모니 자신의 '선배' 부처인 연등불(디팡카라 붓다)로부터 "너는 미래에 부처가 되어 '석가모니 부처'라 불리게 될 것이다"이라는 수기를 받았으며, 이는 연등불 이전의 과거칠불이라 불리는 부처들도 마찬가지다.[53] 애초에 불교는 최고의 이상적 인격이자 신적인 존재인 '붓다'가 될 수 있는 길은 선악의 여부마저도 초월해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미천한 미물부터 지고한 왕족, 귀족이라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과보(까르마)'를 모두 치르고 나면 그 순간 부처(붓다)가 된다고 가르친다.[54] '위대한 선출자'라는 뜻이다.[55] 한역 불경인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약사에 관련 내용이 한역되어 있다.[56] māṇava. 청년, 어린이를 뜻하며 특히 초기경들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바라문 가문 출신으로 아직 결혼하지 않고 스승 밑에서 학문과 기술을 연마하는 사람을 칭한다. 당시 인도의 전통 바라문 지식계급의 청년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다른 초기경들에서도 상당수 바라문 학도들이 본경에서처럼 베다와 바라문의 권위에 대해서 석가모니와 격론을 벌이고 있다.[57] 암밧타 경의 주인공인 암밧타 브라만 학도는 스승 뽁까라사띠 바라문의 명령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확인하러 가서 석가모니 부처와의 대화에서 "브라만 밑으로 다른 카스트야 별 볼 것도 없죠"라는 투로 은연중 카스트에 대한 자부심을 비치다 "너는 아직 너의 생을 완성하지 못한 것 같다"는 석가모니의 일침에 과거 자신이 석가족으로부터 받은 모욕을 기억하며 석가모니 앞에서 "고따마 존자여, 사꺄 출신들은 거칩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꺄 출신들은 성미가 급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꺄 출신들은 포악합니다. 아주 비천하면서도 바라문들을 존경하지 않고, 바라문들을 존중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숭상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예배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공경하지도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꺄들이 비천하고 비천한 출신이면서도 바라문들을 존경하지 않고, 바라문들을 존중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숭상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예배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공경하지도 않는 것은 적당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비난하다가 도리어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석가족이 어떤 종족이며, 암밧타의 조상이 실은 석가족의 시조 옥까까 왕이 데리고 있던 여자 노비의 후손이었음을 일깨워주었다가, 이를 알고 다른 바라문들이 암밧타를 비난하자 "그의 조상은 노비이긴 했어도 훌륭한 선인이었다"고 추켜세워 신분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58] 뿌라나 문헌에서는 옥까까를 최초의 인간인 마누의 열 명의 아들 가운데 첫째라고 하고, 마하바라따에는 마누의 5대 손이라고도 하는데, 팔리어 문헌의 옥까까 왕 이야기가 산스크리트어 뿌라나 문헌보다 더 오래되었고 그것이 산스크리트어 문헌에 흡수된 것이라고도 한다.[59] 아들의 이름은 옥까무카, 까라깐다, 핫띠니까, 시니뿌라이고, 다섯 딸은 각기 삐야, 숩삐야, 아난다, 위지따, 위지따세나이다. 한역 불경에는 네 명의 아들의 이름만 소개되었고, 모두 표기도 발음도 다르다.[60] 팔리어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이다.[61] 석가족과 콜리야족이 마냥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농사 짓는데 논에 댈 물을 두고 싸울 때는 서로를 '문둥이', '개돼지'라 부르며 얕잡아보기도 했다.[62] 한역하면 사자협왕(師子頰王)이다. 경률이상에는 시휴라(尸休羅)라고 했다.[63] 한역하면 별성(別成)이다.[64] 첫째는 이름이 우모거(優牟佉)이고, 둘째는 금색(金色)이고, 셋째는 사백상(似白象)이고, 넷째는 족구(足瞿)이다.[65] 지세경에는 사자왕에게 사자족(師子足)이라는 동생이 있었다고 했다.[66] 숫도다나(정반), 도또다나(곡반), 삭코다나, 숙까다나(백반), 아미또다나(감로반). 두 딸의 이름은 아미따(감로)와 빠미따이다. 다만 북전(산스크리트어로 전승된 문헌) 불경인 기세경 권제10이나 한역 불경인 불본행집경에는 사자협왕의 자녀가 4남 1녀였다고 적어서 어느 쪽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알 수 없다.[67] 마야 부인과 마하파자파티의 어머니 야소다라는 깟짜나의 오빠인 안자나 왕과 결혼했다. 근친혼이자 일종의 겹사돈. 그리고 둘 사이에 마야 부인과 마하파자파티 외에도 숩빠붓다와 단다빠니가 있었다.[68] 다만 북전(산스크리트어) 기세경에는 데바닷타는 석가모니 부처의 삼촌인 아미또다나(감로반)의 아들로 아난다와는 친형제간이라고 되어 있다. 스리랑카의 연대기인 디파밤사(도사) 등 남전(팔리어) 문헌에는 아미또다나의 아들이 마하나마와 아누룻다(아나율)라고 했고, 북전 기세경과 마찬가지로 아난다가 아미또다나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한편 팔리어 전승에서는 숫도다나와 아미또다나를 제외하고 석가모니 부처의 다른 삼촌들은 자녀가 없었다고 했지만, 마하와스뚜(대사)에서는 슈끄로다나(숙까다나)의 아들이 아난다이고 데바닷타와 우빠다나의 형이라고 적고 있다.[69] 한국의 불교 종파 가운데 유일한 비구니 종파인 대한불교보문종은 마하파자파티를 종조(宗祖)로 삼고 있다.[70] 그중에서도 난다는 미모로 유명했던 공주와 약혼식을 치르려는 중에 출가했으며, 약혼녀도 훗날 출가해 두 사람 모두 수행의 경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71] 불교의 주요 후원자였던 파세나디(바사닉) 왕이 아들 비루타카(毘琉璃) 왕자의 반란으로 물러난 게 결정적인 침공계기가 되었다.[72] 아리야란 고결한(noble), 명예로운(honorable)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리그-베다(Rg-veda) 등에 나오는 이 말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선주민(先主民)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다.[73] 남북으로는 빈디야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으로 한정되며, 동쪽으로는 프라야가, 서쪽으로는 비나샤나에 이르는, 현대의 웃타르 프라데쉬 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그들은 이곳을 중국으로 불렀다.[74] 이들 4개 국은 나르마다 강에 위치한 아반티를 빼면 모두 강가 강에 위치하고 있었다.[75] 디가 니까야의 마하빠리닙빠나 수트라 즉 대반열반경이라 불리는 경전을 한역한 것으로, 장아함경 유행경에도 내용은 비슷하다.[76] 대표적인 장자로는 아나따삔디까 장자가 있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수닷타 장자라고도 하며, 석가모니 부처에게 제따와나 사원을 지어 기증한 인물이다. '아나따삔띠까'는 수닷타 장자의 별명으로 한역하면 둘 다 급고독(給孤獨), '고아와 과부, 독거노인을 위해 베푸는 자선가'라는 뜻으로 제따와나 사원의 부지는 원래 사위국의 제타 태자가 소유한 원림이었는데, 아나따삔띠까가 처음 제타 태자에게 이 땅을 석가모니 부처님께 봉헌할 사찰을 짓고 싶으니 자신에게 팔아달라고 요청하자 제타 태자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 땅바닥에 네가 가진 보물과 돈을 빈틈없이 깔아낼 수 있다면 기꺼이 너한테 팔아주마"라고 했는데, 아나따삔띠까 장자는 그걸 말 그대로 실현에 옮겨버렸고 놀란 제타 태자는 그 땅을 약속대로 그에게 팔았다. 이후 석가모니 부처에게 봉헌된 그 사원은 '제타 태자의 원림 터에 아나따삔띠까 장자가 세운 사원'이라는 뜻의 '제따와나 아나따삔다다샤 아라마'(jetavana-anāthapiṇḍadasya-ārāma)이라고 불렸고, 한역하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舎)로 불린다. 한국의 경주에 있는 기림사나 일본의 고전인 헤이케모노가타리 첫 구절에 나오는 기원정사도 모두 여기서 따왔다.[77] 그리고 아리아인들이 지속적으로 동쪽으로 이주해 오면서 원주민들과의 혼혈이 늘어난 점도 사성제도가 흔들리는데 한몫했다.[78] 학자들은 이들을 몽골계 종족으로 비정한다.[79] 이 점에 있어서는 태어날 당시 유대가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예수와도 비슷하다.[80] 훗날 숫도다나 왕의 뒤를 이어서 카필라의 왕이 되는 마하나마가 여종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81] 이때 단단히 빡친 비루다카가 호고(好苦)라고 하는 어느 브라만의 아들에게 "내가 나중에 왕위를 이어받게 되거든 내게 '너는 샤카 족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말아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고, 호고는 그 말대로 하루에 세 번씩 "전하, 샤카 족에게 당한 치욕을 기억하소서"라고 태자에게 아뢰었다. 비루다카가 즉위할 때도 그를 찾아가 똑같이 "폐하, 샤카 족에게 당한 치욕을 기억하소서"라고 말하자 비루다카는 그를 칭찬하고 곧바로 카필라 국의 침공을 단행하였다고 한다.[82] 증일아함경에는 포로로 잡은 샤카 족을 일일이 죽이느라 시간이 많이 든다며 지면에 머리만 나오게 묻어놓고 코끼리를 풀어 밟아 죽이게 했고, 도망쳤던 카필라 국 여자 5백 명도 니구류원(니그로다 나무 정원)에서 비루다카에게 붙잡혀 와서 "종년의 자식에게 수청 들 생각 없다"며 욕하자 더욱 빡쳐서 여자들의 손발을 모두 잘라서 구덩이에 처넣으라고 명령했다. 증일아함경에는 이렇게 죽인 샤카 족의 수가 9990만 명이었다고 한다.[83] 비루다카 왕에게는 기타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비루다카의 원정에 참가하지 않고 궁에 있으면서 술 마시고 놀았다. 카필라 국을 멸망시키고 돌아온 비루다카가 기타에게 "너 내가 카필라 국을 치러 간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같이 안 가고 이렇게 술 마시고 놀고 있어?" 라고 물었고, 기타 태자는 "죄 없는 중생을 죽이느니 술판에 빠져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비루다카는 기타 태자마저 죽였다.[84] 석가모니는 비루다카 왕이 죽은 뒤, 비루다카 왕이 어째서 그런 최후를 맞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샤카 족은 모두 전생에 라열성(羅閱城)이라는 어촌의 주민들이고 비루다카 왕과 호고는 그 어촌에 있는 어느 연못에 살던 물고기였는데,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된 마을 주민들이 연못으로 가서 물고기를 잡아먹자, 두 물고기는 "우리는 이전에 이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 사람들은 지금 와서 우리를 잡아먹고 있으니, 우리가 환생하게 된다면 원수를 갚자"고 맹세했고, 죽어서 각각 비루다카 왕과 호고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때 마을의 여덟 살 된 한 어린아이는 물고기를 잡지도 않고 목숨을 죽이지도 않으면서 물고기들이 언덕 위에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며 킥킥거렸는데 바로 전생의 석가모니 자신이며, 그 과보로 부처가 된 지금도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85] 당시 출가자들은 맨발로 다니는 게 보통이었다.[86] 라훌라는 바로 싯다르타의 아들이다.[87] 위에도 나오듯 절의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곳이다[88] 예를 들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98년에 발간한 <<서울새남굿(중요 무형문화재 제104호)>>을 보면, 무가를 기록한 부분에서 '서가세존', '서가여래'라고 부르는 구절이 있다.[89] 엄밀히 말하면 무속 세계관에서 천상계와 마주하는 극락세계의 지배자. 서유기 원전만 읽어도 그런 모습이 많이 반영되어있다. 옥황상제도 쩔쩔맨 손오공을 석가여래가 제압한다.[90] 미국처럼 근대의 이민자들 때문에 인종이 다양한 것이 아니라 본래 원주민들 자체가 인종이 다양하다. 사실상 유럽인과 차이가 없는 카슈미르 산악지대 사람부터 한국인,중국인과 외모 차이가 거의 없는 티베트-버마계 소수민족들도 수백만명 단위로 산다고 한다.[91] 사멸하는 언어를 가정하면 과거에는 더 많았을 수도 있다[92] 기독교도 비슷한 왜곡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코헬렛(전도서).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쇼펜하우어가 불교 보듯이 코헬렛을 보면 허무 타령만 가득한 책으로밖에 안 보인다.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이런 식으로 불교를 공격하면서 전도하려 드는 사람이 좀 있는 듯하다. #[93] 제목인 싯다르타는 석가모니가 아닌 별개의 인물로 이 소설은 석가모니의 전기가 아니다. 헤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데미안>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世界)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알을 깨고 나온다'란 곧 불교적인 해탈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94] 이 인간이 그 유명한 "전라도 사투리가 세계 언어의 뿌리"라고 주장한 사람이다.[95] 조선의 진묵스님이 석가모니불의 환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이런 스토리는 주로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에서 인용됐다. 이 능가경 구절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 능가경 구절과 법화경 여래수량품은 의미 자체가 다르다. 여래수량품은 석가모니가 무량겁 전에 이미 성불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의미한다. 풀이하자면 모든 중생이 이미 성불한 부처이지만 번뇌망상으로 인해 자신들이 부처인지 모르고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의미이다.[96] 자신 역시 왕족 출신이지만 호화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속세에 싫증이 나 출가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자본주의에 의해 세상이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며 불만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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