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6)중국가서 망하는법-01 (021128)중국가서 망하는법-02
중국에서 망해 본 한국인 선배(?)들의 경험담.
반복하지만 않는다면 중국에서 한국인이 성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1 한국인과 조선족 문제 2 한국인끼리의 문제 3 한국 남자와 중국 여자문제4 한국 남자와 중국 남자 문제 등등 순으로 연말까지 연재 예정.
국내에서도 외지에 가서 사업하려면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합니다.
하물며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한다? 시행착오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중국 생활을 하면 할수록 '중국은 정말 가깝고도 먼나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칼럼을 시작할 때 지적했듯이 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한 많은 분들-필자를 포함-이 중국을 너무 모르고 진출,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자와 필자 주변에 있는 몇 분들의 경험을 토대로 중국에 가려는 분들-이미 중국에 진출한 분들은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을 위해 간과하기 쉽거나 꼭 이해해야 할 문제들을 몇가지 정리해 봅니다. 1년 가까이 연재한 이 칼럼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처한 입장이나 보는 시각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릴 수도 있는 문제들이지요. 따라서 상당 부분 주관적인 판단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중국은 하나다!
중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말이다.
하나인 중국을 상정해 놓고 사업을 기획하게 되면 처음부터 꼬이게 된다. 특히 유통과 가격 그리고 인사관리 부분에서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1원만 남아도 13억원' 이라는 함정을 피해야 한다는 것.
중국 국기를 보자.
붉은 바탕에 왼쪽 위 모서리에 노란색 별이 다섯 개 그려져 있는 五星紅旗.
5개 별 중 왼쪽에 큰 별이 중국 공산당이고 나머지 4개의 작은 별이 공산당 통일 전선의 주축인 노동자 계급, 농민 계급, 소 부르조아 계급, 민족 부르조아 계급을 의미한다.
이들은 결국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중국 인민의 대단결을 상징한다. 엄연히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한나라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나라라는 것은 정치, 외교, 국방 등에 국한되는 것으로 봐야한다.
사업하러 중국에 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경제 문제와 지역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표현이다.
우선 중국어를 보자.
우리가 중국어라고 하는 한어는 중국의 표준어 즉 보통화를 의미한다.
중국의 표준어는 북방방언으로 분류되는 북경어를 근간으로 북경어의 토속적인 성분을 배제한 것. 실제 북경 토박이들은 혀를 심하게 굴리는 데다 연속해서 말을 할 때는 불분명하게 우물거리는 특징이 있다.
북방방언은 官話라고도 하는데 이는 明, 淸 시대를 거치면서 관계에서 통용된 언어이기 때문이며 이를 영어로 만다린(Mandalin)이라 한 것도 포루투갈어의 만다린(mandarin,관리)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북방방언은 상해어를 근간으로한 吳방언, 호남어라고도 하는 湘방언, 객가방언 등 7대 방언 중 하나이며 이 7대 방언에서 갈라진 次방언-우리의 사투리와 비슷한 개념-이 있다. 이들 방언은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 혹은 스웨덴어와 노르웨이어의 차이보다도 크다. 여기에 55개 소수민족이 그들만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모택동주석이 대장정 이후 중요한 회의 등에 8명의 통역을 대동할 수밖에 없었다던 상황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어디 말뿐인가? 음식은 어떤가? 말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의식 구조도 천차만별이다.
역사와 문화, 전통, 가치관, 종교관 등이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니 자연스런 일 아닌가?
뿌리에서 상투까지 다른 사람들이 한 국가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외국인과의 사업-합자, 합작, 임가공, 무역 등-에 어떤 자세로 임하는가 하는 문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역과 업종에 따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한국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중국은 한나라이지만 한나라일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한나라가 아니라면 지역에 따라, 업종에 따라, 인간관계에 따라 각기 다른 대책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결코 한나라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국 이해의 첫걸음이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나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경험이 전혀 없는 사업과 관련, 쉽게 약속을 한다는 점을 두 번째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인이나 중국에 있는 한국인, 중국을 제법 안다는 한국인으로부터 귀동냥(?)한 사업에 대해 덜렁 덜렁 약속을 한다.
심사숙고 한 후 결정을 내리고 결정이 난 후 약속을 해도 약속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데 한국에 와서 제대로 사업성을 검토하기도 전에 약속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현장에서 곧바로 입장을 밝혀야만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지만 이때는 어쩔 수 없이 각자의 임기응변 능력에 맡길 수밖에.
한국에서 자금만 투자하고 중국 내에서 사업을 할 수 있는 업종의 경우를 보자.
중국에서 입수한 정보를 한국에 와서 확인하는 과정에서 갖가지 문제들이 나타난다.
비슷한 업종에 발을 들여놨다가 망한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지역과 인간관계는 다르더라도 부정적인 말을 듣는 경우가 태반이다.
허가 문제에서부터 유통 문제, 수금, 인력 관리 문제 등 사업에 대한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
한국에서 해본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없어질텐데 해보지도 않은 사업 아닌가?
중국 측에 확인한다. 약속을 하고 온 중국인으로부터 "아무 문제가 없다" 는 답변을 듣는다.
"중국인에게 물어봐라. 백에 백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변할 것이다. 그 것이 중국이다."
중국인이 어떻게 답변할 것이라는 것까지 점쟁이 처럼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
점점 흔들린다. 중국에서 하고 온 약속은 지킬 수 없는 처지가 된다.
한국에서 자금을 투자한 후에도 한국과 연결되는 사업은 더더욱 변수가 많다.
통관하는 문제에서부터 원료 공급 시기, 공장 출고 시기 및 유통 문제 등 해보지 않은 사람이 선뜻 사업을 벌이기에는 넘어야할 산이 너무 높다.
다음으로 점심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너무 쉽게 약속을 한다는 점이다. 구두로 한 약속이어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치부한다면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너무 중요한 대목이다.
음주 문화의 차이! 문화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지라도 중국인의 음주 행태는 우리의 그것과 너무 큰 차이가 있다.
앉는 좌석에서 그날의 술 종류와 건배 순서에 적당히 술에 곁들인 식사가 끝날 때가 되면 노래-식당에 노래방 기계가 설치된 곳이 의외로 많다-로 이어질 때 노래하는 순서등.
예행 연습이라도 한 듯 진행된다.
외국인 1명에 3-4명이 배석하는 중국인 중에는 술잔은 들어도 술을 마시지 않는지 그날 있었던 모든 일을 녹화라도 한 듯 기억하는 사람이 필수적으로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다음 상담 자리에서는 모든 중국인이 이 전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알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식당은 물론 요리까지 정해 놓는다.
책상 다리에 익숙치 못한 외국인들-중국인도 마찬가지-을 식탁이 없는 방으로 안내해 식사를 하기 일쑤다. 10분도 되지 않아 몸을 비비틀 수밖에 없는 지경인데 술을 계속 권한다. 한국에서는 술을 권하는 것이 예절이라고 침을 튀기면서 말이다.
상대방의 의향이나 술 실력(?)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많은 술이 오가고 그러다 오랜 지기라도 만난 듯 횡설 수설(?)하게 된다.
2차만 해도 그렇다. 사업 상대자와 함께 할 수 없는 자리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도 엄청나게 소비되지만 도대체 서로에게 얻을 것이 전혀 없는 기이한 술집들.
그리고 3차까지 이어지면 사업도 인간관계도 '이상 무'(?)라고 단정한다.
'한국에 초청하겠다'
'법인이 설립되면 이런 저런 자리를 주겠다'
'일이 성사되면 이렇게 저렇게 해주겠다'
'한국의 000씨, 000씨 등 유명 정치인, 경제인과 잘 아는 사이다'
'언제까지 올테니 이렇게 저렇게 준비해라'
'준비 과정에서 돈은 걱정 말아라. 돈이 없으면 중국에 와서 사업을 할 생각을 했겠느냐'
'대사를 포함, 주중 한국 대사관 000, 000와 이런 저런 사이고 그 외에도 아는 사람이 많다. 부탁할 일이 있으면 부탁하라'
'다음에 오면 더 큰 사업에 착수해야 하니 중국 중앙 정부의 고위층과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해 둬라'
점심에 2-3시간, 저녁에 3-4시간으로 이어 지는 식사 및 술자리에서 오고 간 수많은 말들.
약속을 했다 헛물 켠 중국인들은 그 약속을 아주 오래 오래 기억할 수밖에!
약속은 깨진다? 아니 깨져야 한다?
중국에서 사업을 해본 사람들은 "중국에 오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말을 스스로 자주 하기도하고 다른 한국인으로부터 자주 듣게 된다. 비아냥 조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어느날 스스로 이상한(?) 행동을 해 나중엔 서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지켜 본 중국인들이 또 다른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 어찌 행동할까? 다른 한국인 때문에 중국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국인은 중국에서 과연 어찌될까? 참으로 암담하다.
중국에 가서 망하지 않으려는,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몇 가지. 조선족 문제, 여자 문제 등 우리 자신의 문제점 가운데 마지막으로 약속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너무 많은 이들이 헌신짝처럼 팽겨쳐진 약속 때문에 피해를 봤고 현재도 보고 있고 앞으로도 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 스스로 고의가 아니었다고 항변하지만 결과적으로 약속을 깬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과 약속'
필자의 머리엔 이 또한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는다.
2001년 10월 초.
중국에 다녀온 후배가 찾아 왔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간 후 그 후배는 거품을 물고 중국인에 대해 욕을 해댔다. 중국인들은 도무지 약속 개념이 없다는 것.
아뿔싸!
'투자할 사람을 간신히 설득해 투자자와 함께 북경에 갔다. 이미 한국에서 北京市 D區 담당 국장을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북경에 도착해 다시 약속을 확인했다. 다음날 투자자와 함께 약속 장소로 갔으나 약속 장소에는 국장 대신 주임이란 분이 나왔다. 투자자에게 면목이 없었지만 하는 수 없어 주임이란 분과 상담을 마쳤다. 주임이란 분과 헤어진 후 상담 자리를 주선하고 통역으로 참여했던 분이 담당 국장은 일본 사람을 갑자기 만나야 했기 때문에 약속 장소에 나올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상담 후 담당 국장과의 저녁 자리를 약속해 놨고 그 자리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호언 장담한 터였다. 담당 주임과 의례적인 저녁 자리가 있었다. 다음날 담당 국장과의 상담 자리 주선을 부탁하고 하루종일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후 투자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시일을 끌더니 투자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신용 잃고 사업 깨지고.
그 국장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못한 원인이 뭘까?
이번 경우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약속이 정확히 되지 않은 상태일 수도 있고 애초에 사업성에 문제가 있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인과의 상담에 관심이 적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중국인이 신용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 보다는 일본인에게 높은 점수를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필자로선 예사로 넘길 일은 아니었다.
어느 중국인이 똑 같은 목적으로 일본인과 한국인을 만나야 한다. 어쩔 수없이 한쪽의 약속을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느 쪽의 약속을 깰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중국인은 일본인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미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비교는 또 어떨까? 물론 미국인일 것이다.
중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사업을 하려는 다른 나라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또는 중국인 스스로가 신용이라는 잣대로 다른 나라 사람을 비교, 평가할 자격이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는 것은 다 다음 문제다.
현재로선 우리가 중국인들의 눈에 다른 나라 사람과 비교, 신용이 없다고 보여진 이유가 무엇인가를 냉정히 분석,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래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결책을 찾아 낼 수 있다. 늦었지만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말이다.
믿음이 깨진 상황에서 사업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당연한 이치 아닌가?
우선 사업 자금이 준비되지 않은 채 중국 사업을 하려는 한국 사람이 너무 많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어렵게 다리 놓은 중국인과의 상담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힐 수는 없다. 상담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자신이 한국에서 해왔던 사업이 한국에서는 사양산업이지만 중국 시장에서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거나 믿을 만한 인맥을 통해 입수된 정확한 정보를 사업화 하려는 과정에서 일부 사업 자금이 부족한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이 파기되는 경우의 대부분은 의향서나 협의서, 심지어 계약서까지 체결해 놓은 후 한국에서 자금을 끌어들여 사업을 진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계약이 체결되기 전에 필요한 사전 준비 작업에 필요한 자금뿐인데도 말이다.
중국인과 짜고 사기성(?) 사업을 진행하려는 사람이나 한국에 갈 수 없는 입장이어서 이것 저것 손을 대는 사람 또는 잘못된 정보를 갖고 처음부터 헛발을 디딘 사람 등의 경우는 여기서 논할 가치가 없다.
자금이 없는 경우 약속이 파기될 때까지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급할 수밖에 없다.
둘째, 허풍을 떨 수밖에 없다.
셋째, 사업 성공을 위해 계약 단계에서 꼭 짚어야할 것들을 짚지 못한다.
넷째, 준비 단계에서 필요 이상의 자금을 쓰게된다. 영수증도 요구할 수 없는 자금 말이다.
다섯째, 투자 약속을 어긴 한국 사람을 원망할 뿐 계약 당사자로서 중국 계약 당사자에게 당연히 해야 할 해명 등 약속 파기에 따른 정리 절차를 간과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약속을 파기한 당사자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이리 저리 찌그러진 '한국인의 얼굴'이 대륙 깊숙이 그려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그 엄청난 파급효과를 알고 있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을까?
안에서 새는 쪽박 밖에서도 샐 수 밖에!
2001년 9월 초. 서울 서초구 양재동.
귀국 후 정말 어렵사리 구한 사무실에 친구가 찾아왔다. 중국에 가기 전에도, 중국에 가서도 가까이 지낸 친구. 그 친구는 당시 주재원으로 파견됐었으나 임기를 마치고 귀국 후 퇴사, 현재 새 길을 찾고 있는 중이다.
이야기 끝에 그 친구 10년 후배 얘기가 나왔다. 얼마 전까지 자신의 일을 도왔던 믿을 만한 후배가 지방에서 축산물 가공사업을 하고 있는데 사업이 아주 잘 된다는 것. 사업을 확장, 서울에 진출하려고 공장 겸 창고 건물을 찾고 있는데 적당한 건물을 소개할 사람이 있으면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고 말을 이었다.
친구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대학 친구 몇 명이 모여 사업을 시작했다. 젊은 친구들이 중국에도 관심이 많아 자주 만나는데 이번에 도와주면 앞으로 한 배를 타고 간다는 마음으로 함께 사업을 벌일 수도 있는 건실한 후배들이라는 것.
중국에 관심이 많다는 말이 필자의 뇌리에 남아 있을 수밖에. 힘이 되면 도와 줘야지. 암.
2-3일 뒤 가까운 선배가 필자 사무실을 방문했다. 필자가 중국 가기 전에는 무역업을 하시던 분이라서 아직도 무역 일을 하시냐고 묻자 부동산 쪽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며칠 전 공장 건물을 부탁한 친구의 말이 생각나서 친구가 말한 조건을 얘기하고 조건이 맞는 공장 건물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배로부터 다음날 전화가 왔다. 동대문구 전농동에 조건에 딱 맞는 공장 건물이 있다는 것.
그 선배가 직접 관여된 부동산은 아니지만 소유자로부터 판매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은 사람을 알고 있으니 믿을 만한 부동산이라고 강조했다. 선배는 항상 살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며 진짜 살 사람인지, 자금은 확실한지 등을 꼬치꼬치 물었다.
현장을 방문한 후 구입 의사를 밝힌 친구의 후배가 부동산 관련 서류를 요청했다. 선배는 서류를 마구 주는 것이 아니라며 대리인이 실수하지 않도록 부동산을 구입할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라고 했다.
특히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소유주와 직접 연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되면 이번 일은 성사될 수 없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필자로서는 부동산 업계의 사정을 모르니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겠느냐?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선배를 안심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부동산과 관련된 자료가 친구 후배에게 전달됐고 대리인과 필자의 선배 등 중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수수료도 적당한 선에서 조정됐다.
친구 후배는 여러 차례 현장을 방문했고 나중에는 친구와 필자도 함께 공장 건물을 확인했다. 청량리 역 부근 6차선 대로변에 인접한 네모 반듯한 땅에 길 쪽에 3층 건물과 건물 뒤편으로 1층 가건물이 들어선 곳이었다.
친구의 후배는 매우 만족해했다. 친구 후배가 좋은 부동산을 소개해 줘 고맙다며 초청, 친구와 함께 강원도 시골에 있는 가공 공장에도 다녀왔다. 중국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아 우리는 나이에 따라 '형 동생'하는 사이가 됐다.
부동산을 구입할 의사는 있는데 가격을 좀 낮췄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하자 선배는 구입할 의사만 확실하다면 대리인이 포항에 거주하는 소유자를 찾아 가 가격 문제를 협상하면 된다는 것. 그리고 가격이 결정되면 소유자를 직접 만나 세부적인 문제는 협의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부동산을 구입하기로 한 친구 후배는 자금이 마련되는 대로 곧 연락할 테니 절대 다른 사람을 연결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며칠 연락이 없었다.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날 아침 출근했더니 사무실에 선배가 와 계신 것 아닌가?
잔뜩 화가 난 선배의 얼굴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구나 생각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억장이 무너진다.
선배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추석 직전 포항에 있는 부동산 소유자에게 웬 젊은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공장 건물을 꼭 사고 싶은데 중간에 선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아 직접 전화를 걸게됐다. 서울에 오실 계획이 없느냐고 물었다.
부동산 소유자는 대리인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으니 대리인과 상의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4차례나 다시 전화가 왔다. 나중에는 추석 연휴 기간 중 포항에 내려갈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소유자는 대리인이 그 부동산 외에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몇 건의 부동산 판매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며 거절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친구에게 전화했다. 전혀 모르는 사실이란다.
잠시 후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넘겨 받은 서류에 의문 사항이 있어 전화했을 뿐이란다.
필자는 너무 화가 나-선배가 옆에 있어 더욱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친구의 후배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10억원이 넘는 부동산을 구입하려는데 부동산 소유자와 통화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다 아는 수가 있다는 것.
"절친한 친구의 후배라고 해서 믿었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위임 받은 분을 어떻게 뵐 수 있겠느냐? 중간에서 일한 사람들 몫으로 부동산 소유자가 부담해야할 세금까지 떠맡겠다고 했다니 젊은이들이 해도 너무했다."며 선배는 자리를 떴다.
이런 쪽박이 외국에 간다고 안 샐까?
2000년 8월 초. 중국 남부 廣東省 廣州市 국제공항 로비. 친구 J씨와 공항 출국장을 빠져 나온 K씨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출국장 앞에서 봐서는 안될 사람을 만나게 된 것.
처음엔 이국 땅 공항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 하나만으로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세상에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는 판단이 서자 화가 치밀었다.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된 S씨. 2개월 전 함께 이곳에 와 타일 제조회사를 소개해 준 S씨.
얼마 전 S씨를 소개해 준 친구 J씨 앞에서 머리를 쥐어 박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는 입장이어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지만 끓어 오르는 화를 달랠 수가 없었다.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은행원의 길을 걷던 K씨.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이후 갑자기 불기 시작한 중국 바람. 전공도 전공이었지만 중국의 미래(?)를 내다 보고 은행을 과감히(?) 그만두고 중국에 와 사업을 시작했다.
몇번의 시행 착오 끝에 새로운 사업을 물색하던 중 친구 J씨로부터 20여년 간 국내에서 타일 판매 사업을 해 왔다는 S씨를 소개 받았다.
몇번 만난 후 허물없는 사이가 됐고 S씨의 요청에 따라 중국내 타일 제조 회사를 물색하게 됐다. 결국 2000년 5월 S씨와 함께 광동성 P시에 있는 타일 제조회사를 방문하게 됐다.
5년 전 스페인 사람이 투자한 그 타일 제조 회사는 자본과 설비를 투자했던 스페인 사람이 투자금 회수 후 철수, 현재는 스페인으로부터 기술만 제공받는 회사.
제품의 가격, 색깔, 강도, 월 생산량, 생산 인력등을 꼼꼼히 확인한 S씨는 "한국의 타일 제조 공장을 다 합해도 이곳 한곳 보다 적을 것"이라며 대단히 만족해 했다. 그리고 그 회사 간부들에게 "한국에서 20여년 간 타일 판매업을 크게 하고 있다. 이번에 같이 와 통역하고 있는 친구 K씨가 중국 수입 업무를 모두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
귀국 즉시 일정량의 타일을 주문하겠다고 약속한 후 K씨와 S씨는 이틀간에 걸쳐 그 회사 간부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무역부 최고 책임자는 "약속만 지켜지면 몇 개월 뒤 한국 독점 판매권을 줄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자신의 집에 초대할 정도-중국인이 자신의 집에 외국인을 초대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임-로 가까워졌다. 물론 통역은 계속 K씨 몫.
귀국하는 비행기. S씨는 침을 튀겨 가면서 말을 이었다. "덕분에 정말 좋은 회사를 알게됐다. 이제 다른 일은 그만 두고 이 일에만 전념해 달라. 중국 업무는 모두 맡아 달라. 나는 국내에서 판매만 맡겠다. 수수료는 수익 금액의 일정 부분이나 컨테이너 당 일정액 중 원하는 대로 지불하겠다.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첫 주문을 했고 주문 물량이 도착했다. 판매도 순조로웠다. K씨는 한국에 도착할 때 까지의 모든 중국 업무에 매진했다. 그런데 1차 수입분에 대한 수수료를 주겠다고 약속한 금액 중 일부만 건네 주면서 S씨는 "수입한 물건이 제대로 판매되지 않아 판매되는 대로 나머지를 주겠다"고 했다. 절친한 친구의 소개로 만난 사이고 공장이 중국에 있다. 그리고 중국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속이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고 판단, 두 번째 수입 업무까지 마친 상태였다.
S씨는 그 후 계속 수수료를 송금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S씨를 소개해 준 J씨가 대리석 수입 문제로 광동성에 급한 일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해 이날 J씨와 함께 광동성 광주 공항에 내리게 됐고 바로 그 자리에서 S씨를 만나게 된 것.
S씨는 "수입한 제품이 잘 팔리지 않아 수수료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연락하지 않고 온 것은 당신이 다른 일로 너무 바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알게된 조선동포가 무역업무에 밝은 동생이 있다고 해 그 동생을 통역으로 이곳에 오게됐다. 한국에 귀국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겠다"고 말하곤 조선동포 통역과 함께 사라졌다.
하도 기가 막혀 S씨를 소개해 준 친구 J씨를 나무라고 있는데 그 중국 타일 회사 간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공항에서 S씨를 태워 회사로 온 그 회사 승용차 운전기사가 출국장 앞에서 K씨를 알아보고 회사에 보고, K씨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게됐다는 것.
타일회사 무역부 최고 책임자는 "S사장이 조선동포 통역을 데리고 와 지금까지 일해 온 K씨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이 일에서 손을 뗐으니 앞으로 이번에 같이 온 조선동포 통역이 모든 중국 업무를 맡게됐다고 설명했으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친한 친구 사이이고 앞으로 이 일을 계속 맡게 될 것이라고 소개해 놓고 거래를 성사시킨 사람을 제외시킨 것 아니냐? 도무지 한국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다. S씨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냐?"고 오히려 물었다. K씨는 제대로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K씨는 지금까지 수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S씨도 결국 손을 들게 됐다.
중국측이 K씨가 배석한 자리에서 약속한 한국 독점 판매권 계약을 미루는 사이 다른 한국 회사가 나타나 타일을 경쟁적으로 수입하게 되면서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는 소식을 친구 J씨로부터 전해 듣게됐다.
약속한 수수료를 아끼려다 쪽박까지 깨고 말았다.
그뿐인가 한국인들에 대한 비웃음이 남았다.
사업을 같이 하려다 등을 돌리고 서로의 길을 가는 경우는 왕왕 있는 일이다. 국내에서도 '동업은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전세계 어느 곳이고 한국인이 진출한 곳에서 이같은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아는 분들은 아시리라.
'왜?'라는 질문은 여기서 하지 말자.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고 이 같은 일이 없겠는가? 문제는 중국인이나 특히 일본인에 비해 그 빈도수가 높고 피해 규모가 크다(?)는 데 있다. 그리곤 서로 간에 민족성까지 들먹이며 제 얼굴에 침 뱉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이 동종 업종 간에 과잉 경쟁이다. 한집 걸러 비슷한 업소가 마구 생긴다는 것이다.
장사가 제법 잘된다고 소문만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업종의 상점이나 음식점이 바로 인근에
생겨 그야말로 피터지는 경쟁이 벌어진다. 일부에선 나름대로 상권이 형성돼 서로 좋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자금 부족등 열악한 상황에서 손 쓸 겨를도 없이 당하고 마는 이들이 적지않다.
2002년 3월.
북경에 갈 때 마다 단골로 묵는 호텔에 갔다. 로비에 들어서자 마자 00여행사 한국부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로비 안쪽 후미진 객실에서 한국부를 운영하던 여행사가 돈을 벌어 밖으로 진출했다고 생각하고 여행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당연히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전에 로비 안쪽에서 영업하던 여행사냐?"고 묻자 유창한 한국어-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었다-로 그 여행사는 아직도 로비 안쪽에서 영업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단 호텔 방을 정한 후 뭔가 이상해 후미진(?) 그 여행사를 찾아갔다. 이전에 몇번 본 얼굴이 금방 눈에 띄었다.
호텔비도 저렴하고 짜투리 시간이 있으면 한국 신문과 정보지 등을 손쉽게 볼 수 있어 이 여행사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었다. 공항에서도 가까운 곳이고 인근에 한국 음식점도 있어 안성 마춤.
그 직원의 설명을 들으니 대충 전후 사정이 정리됐다.
최근 한국인이 많이 몰리면서 공항과 시내에서 가까운 호텔은 방 잡기가 어려워졌다. 5년 전 부터 이 호텔에서 영업하던 여행사-자금은 한국인이 내고 실질적인 경영인은 조선족-에 한국분이 찾아 왔다. 처음에는 이것 저것 물어 단순한 고객으로 생각하고 있는대로 답변을 해줬다. 그러던 어느날 그 한국분이 여행사를 동업으로 하자고 제안해왔다. '여행사 규모를 3배 가량 키우자. 추가로 들어가는 자금은 부담할테니 이익을 반반으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축적된 영업망도 있고 자금을 댄 한국분 의견도 있고 해서 동업에 반대했다.
1개월 뒤 로비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칸막이 공사가 시작됐다.
그리곤 다른 중국 여행사 한국부라는 간판이 걸렸고 중국어를 잘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업무를 시작했다. 장소도 좋고 규모도 3배 가량 컸다. 주로 한국인들이 영업을 하니 기존의 여행사는 일손이 끊길 수 밖에. 기존 여행사 사장은 사무실에 얼굴도 제대로 비치지 않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 조그마한 호텔에 한국인을 겨냥한 여행사가 2개? 동업 제안을 받아 들였어야 했나?
얼마 전 모 월간지에 소개됐던 눈에 띄는 사례 하나.
중국에서 5년간 유학 생활을 한 후 사업을 시작하려던 K씨.
첫 사업에 실패, 현재 재기할 수 없는 형편에 놓여 있다.
5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사업을 벌이기로 마음 먹었다. 여러 곳을 물색하다 C시 시내 한가운데 한국인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한국식 횟집을 차리기로 결정했다. 마침 좋은 장소가 나와 중국인 건물주와 임대 계약을 한 후 5000만원 정도 들여 실내 장식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웬 중국인이 뜬금없이 나타났다. 그 중국인은 이번에 건물을 구입한 건물 새 주인 이라고 소개한 후 갖가지 서류를 보여줬다. 그 서류 중에는 현재 실내장치를 하고 있는 K씨의 식당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니 아무 때고 계약 당사자를 내 보낼 수 있다는 서류까지 있었다. 새 건물주는 식당 자리는 자신이 다른 용도로 이용할 테니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날 벼락이 있나.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였으나 허사였다. 결국 중국인 '어깨'들로부터 주먹 세례까지 받고 쫓겨 나야했다.
얼마 뒤 그 식당은 K씨가 공사하던 실내 장식을 그대로 이용해 마무리 공사를 했다. 개업을 한 그 식당 주인은 K씨도 이전에 한 두번 본적이 있는 한국인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처음에는 그 한국인이 우연한 기회로 그 식당을 하게 된 것으로 생각했었다.
뒤늦게 일의 전모를 알게 된 K씨는 이가 갈렸다.
새로 건물주가 된 중국인을 아는 다른 중국인으로부터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듣게 된 것. 애시 당초 식당을 개업한 한국인이 건물을 넘긴 건물주와 새로 주인이 된 중국인과 짜고 자신을 내 쫓았다 것. 어떻게 만든 돈이고 어떻게 잡은 장소인데. 한국인에게 이렇게 당할 수가 있나. 억울하고 분해 쌍욕이 절로 나왔지만 중국 현실을 아는 입장에서 법적 투쟁 등 다른 해결 방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필자가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필자는 그 글을 쓴 분에게 이메일을 보내 인용 의사를 밝힌 후 자세한 내용을 물어 봤으나 더 이상의 사실을 알려줄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을 뿐이다.
여기서 사실 여부를 따지지 말자. 유학 생활 5년 만에 첫 사업을 벌이려던 한 젊은이가 한국인에게 처절하게 당했다고 믿고 있고 그 사실이 글을 쓴 그 분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본인의 잘못도 있을 수 있다.
K씨! 첫 사업 경험을 거울 삼아 다시 도전하시기를...
절대로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건투를 빕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다 망한 소수의 한국인들에 대한 얘기는 여기서 접자.
대부분의 경우 황당무괴 한데다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참여할 수 없는 사업들 아닌가? 정상적인 사업을 하려다 망한 경우가 아니니까 당사자나 그 사람에게 자금을 지원해 준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수 밖에.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더라도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치 아닌가?
이제 주변에서 왕왕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필자를 포함한 한국인 바로 우리의 얼굴을 그려보자. 그려진 얼굴을 보고 나서 그런 얼굴로 외국 그것도 중국으로 사업을 하러 또는 공부를 하러 나가야 하는지를 냉정히 심사숙고 해보자.
남을 욕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 봐야한다고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벌이는 사업 초기에 동반자는 필수적이다. 중국에선 특히 사업의 성패가 사업의 동반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갈라진다. 그만큼 복잡하고 의외의 변수가 많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바로 13억 인구의 중국이다.
법에 의해 도저히 허가가 나올 수 없는 경우-중국에선 의외로 이 같은 사업을 하자는 제안이 적지 않다-외에 아주 정상적인 사업을 하려다 낭패를 당한 사례를 우선 살펴보자.
사업성이 좋은 업종이고 그 사업을 도와줄 적절한 위치의 중국인- 공무원-도 연결돼 있다.
사실 중국에서 사업을 해본 사람은 관계 요로에 연결되는 인간관계 구축이 사업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중국에서는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는 말이 오랫동안 유행(?)하게 된 원인이리라.
시장 조사에서 사업성 검토까지 끝난 상태.
이 상황이라면 남은 문제는 같이 사업을 추진해 온 한국인-중국인과 직접 연결돼 중간에 한국인이 끼지 않은 사업을 벌이는 사람도 적지는 않다-사이의 신뢰 문제와 자금 문제.
자금 문제가 대두되면 대부분의 중국인 동반자는 입을 다문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돈을 벌겠다고 중국에 온 것이니 중국인의 투자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중국인이 투자를 하면 금상첨화겠지만 말이다.
사업을 망하게 하는 한국인 사이의 신뢰 문제와 자금 문제.
중국인 앞에서 서로 온갖 험담을 해대며 등을 돌리게 된다. 결과적으론 떠난 한국인이나 남은 한국인 모두 패자인 셈.
그들이 중국인 앞에서 벌이는 작태란? 중국인들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가 있을까? 이 일을 어찌하나!
97년 4월 북경.
평소 가까이 지내던 후배 K씨가 찾아와 그 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이유를 털어놨다.
K씨는 한국에서의 사업이 여의치 않자 있는 자금을 긁어 모아 소규모로 무역 관련 일을 해 보겠다고 북경에 온 경우.
북경에 온지 며칠 후 고교 후배를 통해 북경에 고교 동문 모임이 결성돼 있고 선배 중에 한 분이 중국에 진출한 식음료 회사 중국 총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한국에서 얼굴 한번 본적 없지만 학연을 특별히 따지는 우리 정서(?)에 맡게 시간만 나면 찾아가 만나다 보니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됐다.
어느 날 그 분 사무실에 찾아 갔다가 그야 말로 기가 막힌(?) 정보를 입수하게 됐다.
'한국 관광객과 사업인들이 중국에 벌떼처럼 몰려들면서 이 회사 음료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현재 홍콩을 통해 이 음료를 수입, 중국에 판매하는 중국인은 대리점 허가도 없을 뿐 더러 사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적당한 자금이 있고 사업을 열심히 할 한국 사람이 있다면 중국 영업 대리권을 줘야한다. 한국 본사에서도 사람을 물색하라고 한다.'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도 이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는 소문을 귀동냥으로 또는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는 바로 그 사업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자가 다름아닌 고교 선배 아닌가? 이미 선배 부인과도 여러차례 만나 허물없는 사이였다.
한 달여에 걸쳐 사전 조사를 했다. 그 음료를 파는 업소를 수십 곳 방문했고 수입 경로도 확인했다. 확신이 섰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에 선배를 찾아가 구두로 허락을 받았다.
'적당한 규모의 자본만 준비할 수 있으면 사업을 해 보라.' 그 선배는 회사 실무 책임자까지 소개해줬고 그 실무자로부터 사업 타당성과 회사에서 지원해 줄 내용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었다.
한국으로 날아왔다. 절친한 친구 소개로 모자라는 자금을 대고 동업할 분을 만났다. 그리곤 그 분의 어머니에게도 찾아 가 큰 절하고 재가(?)를 얻었다. 그 분과 그 분의 어머니께서 북경을 다녀갔다. 고향이 이북이신 그 분의 어머니께서는 북경 상황을 알아 본 후 그 식음료 회사 총책임자인 선배도 만났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동업 의사가 확인된 이상 그 분이 다시 북경에 오면 투자 조건을 합의하면 된다. 최대한 양보해서 사업을 성공시켜야지.
이왕 다른 사람이 허가 없이 해오던 사업 아닌가? 그 분이 오면 법인을 설립한 후 영업망을 구축, 업무를 추진하면 된다. 뛸 듯이 기뻤다.
약속한 날짜가 지났다. 그 분을 소개해 준 절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실수할 사람이 아니니 기다려라.'
그리고 며칠 뒤.
뒷 모습이 눈에 익은 사람이 앞에서 걸어 가고 있었다. 유난히 키가 커 금방 눈에 띄는 예비 동업자 바로 그 분이었다. 반가운 김에 한 걸음에 달려가 만났다. 아뿔싸!
'그 식음료 회사 총책임자로부터 현재 사업을 하고 있는 중국인을 소개받아 그 중국인과 함께 이 사업을 하기로 했다. 사무실도 이미 얻었다. 그 회사 총책임자에게 이미 이같은 내용을 보고했는데 소식을 못 들었느냐?'
오히려 반문했다.
다음날 고교 선배를 찾아갔다.
'네가 소개해 준 사람이 혼자 찾아 와 이 사업을 혼자 하기로 합의했다고 해 네가 이 사업에서 빠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 사업을 하고 있는 중국인과 만나 구체적인 문제를 협의해 보라고 중국인을 소개해줬다. 음료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니 다른 사업을 찾아 봐라.'
화를 내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잊어야 할 것은 잊어야지.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 단숨에 설명한 K씨는 한숨을 깊게 내 쉬고 자리를 떴다.
"얼마 뒤 알아 보니 그 분도 일이 잘 안됐는지 사무실을 정리하고 귀국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말을 남기고. 문제의 식음료 회사 총책임자는 북경에선 중국통으로 알려진 사람. 필자도 잘 아는 사이였다.
얼마 뒤 K씨는 귀국했고 그 식음료 회사가 중국 진출 초창기에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던 그 중국인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속사정을 알게됐다.
K씨의 경제적 피해도 문제지만 심하게 속앓이 했을 마음 고생이 종내 안쓰러웠다.
그 분이 버럭 화를 내고 사라진 후 20여일이 지났다.
한 밤에 그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짜고짜 나오라는 것.
"내가 열을 낼 일이 아니었는데...". 20여일 전의 일을 미안해 하던 참이었다.
차림은 상거지(?)였지만 그 분의 눈은 그야말로 반짝거렸다.
주섬 주섬 하더니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달러 뭉치를 꺼내는 것 아닌가?
1930년에 발행된 100달러 짜리 달러 뭉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손이 베일 정도로 빳빳한 신권 100달러 짜리 100장이 일련 번호대로 띠지에 묶여 있었다.
세어 볼 것도 없이 1만 달러.
그 분은 "내 말이 사실이지 않느냐? 기념으로 가지고 있어라." 며 달러 뭉치를 필자에게 건넸다. 그리곤 그간의 일을 아주 소상하게 설명했다.
달러를 본 다음이니 필자로선 할 말이 없었다.
다음 날 위조 달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 분에게 달러 뭉치를 돌려줬다.
"이제 중국에서 일을 크게 벌일 수 있게 됐다. 조금만 더 지켜 보라."며 떠난 그 분은 그 후 연락이 끊겼다.
일이 제대로 됐다면 연락을 하지 않을 분이 절대 아닌데 말이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첫 번째 가능성은 달러 사 올 자금을 모을 수가 없었을 경우다.
그 분의 달러 거래 방식은 달러를 액면 보다 싼 값에 사 오는 게 아니였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달러와 크기가 다르거나 군자금으로 특별히 발행한 돈이어서 희귀한 달러이기 때문에 미국 은행에 가지고 가기만 하면 액면가의 2배 이상 받을 수 있는 달러다.
그러니 100달러 짜리를 100달러에 사가라. 우리는 이 곳을 떠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에 달러를 파는 것이다.'
그 분의 말 대로라면 이를 믿고 선뜻 돈을 투자할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액면가의 2배 이상이라는 함정(?)을 설득할 방법이 없을 수 밖에. 몇 장이라면 몰라도.
두 번째는 자금이 마련돼 현장에 갔으나 계획대로 달러를 사 오지 못했을 가능성.
거의 모든 얘기가 보통 사람(?)으로선 믿을 수 없는 일들 아닌가? 그 중에 어느 하나만 어긋나도 계획은 수포로 돌아 가는 일 아닌가? 거미줄 같은 중국 공안 당국의 눈에 적발된다면?
필자는 지금도 그분의 자금 동원 능력(?) 등으로 미루어 두 번째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가 달러 문제를 이렇게 몇 회에 걸쳐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비단 이 경우 말고도 일확천금을 쫓는 한국인이 의외로 많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다. 더욱이 일확천금을 쫓는 분들의 경우 대부분 자신의 돈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자금으로 그 같이 무모한(?) 계획을 실천하려 한다. 이 때문에 피해가 급속히 확산될 수 밖에 없다.
그 피해자는 고스란히 한국인들.
1994년 4월 필자가 중국에 첫 발을 디딘 후 지금까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필자의 귀에 들어온 유사한 경우만 대충 정리해도 다음과 같다.
1. 북한 관련-이성계가 사용했다는 활과 전통, 고려시대 금사경 등 골동품과 미술품.
그리고 몇백년 묵었다는 산삼등 희귀 한약재 등이 대종을 이룬다.
2. 중국 관련
1)사금 및 유전 개발권
2)카지노 허가권과 인력 송출권
3)쏘련제 무기, 비행기, 헬리콮터
4)부동산 개발권 및 양식 허가권
5)중국 황실 골동품
6)세계 각국의 최초 발행 우표 등 진귀 우표
3. 기타
1)미얀마 등지에서 밀반입된 희귀 보석
2)베트남, 인도 등지에서 밀반입된 희귀 한약재
3)사실이기만 하면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메가톤급 정보-당연히 수수료 요구
어느 것하나 개인이나 기업이 손을 대기에는 위험천만하고 불가능한 것들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하니 유혹은 더욱 거셀 수 밖에.
모험심(?) 많은 불나비 뒤엔 불나비의 꿈을 지펴 준 한국인들이 빌려주거나 투자(?)한
돈이 돌아올 때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꿈은 꿈일뿐".
聖人이 아닌 한 눈 앞에 일확천금의 기회가 왔다면 누구라고 그 기회를 마다할까?
그렇다고는 해도 깊은 산 속 '보물 동굴(?)'에서 달러를 마구 캐 올 수 있다고 확신, 실행에 옮긴 한국인들이 너무 많다. 위의 두 분 외에도 필자는 3명이나 더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2명은 필자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포기했다. 다른 한분은 필자가 소매를 잡아 끌며 반대했는데도 헤어나오지 못했다. 연락이 안되면 그 현장엘 가곤 했다.
필자의 눈엔 과장이 심한 것 외에는 정말 반듯한 분으로 보였었는데 말이다.
97년 겨울 북경.
현장에 갔다 왔다는 한국 기업인으로부터 달러 얘기를 듣기 7-8개월 전. 낚시터에서 청바지 아가씨와 함께 만난 분으로부터 피눈물 나는 얘기를 전해 듣기 1년 전.
1930년에 발행된 미국 달러 사건 전모(?)를 전해 듣게 된 것은 우연한 술자리에서였다.
"전모"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 내용을 전해준 사람이 필자가 중국에 온 후 가깝게 지낸 분이어서 그 분의 표현대로 '전모'라고 했을 뿐이다.
'보물 동굴' 소설 이야기를 풀어 가는 그 분의 눈에서는 빛이 날 정도로 확신(?)에 차 있었다. 중국의 현대사를 아우르는 그 분의 말 중에 달러와 관계되는 부분만 기억하기에도 필자로선 벅찼다.
돈이 무섭기는 무섭다.
죽을 위험-상당 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이 된 것 같아 제대로 옮기지 않기로 한다-을 무릅쓰고 그 분이 다녀온 곳도 바로 지방 N시와 첩첩 산중. 한달 이상 목욕도 하지 못하고 현지 안내인이 안내하는 대로 산 속을 헤매 다닌 얘기를 들을 때는 필자의 등골이 오싹했다.
사건의 발단은 1948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일본의 남경대학살 이후 항일민족투쟁을 벌이던 1945년 8월 국민당 蔣介石 주석과 중국공농혁명위원회 주석 및 군사위원회 상임위원인 毛澤東과의 重慶 회담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처절한 국공내전을 3년여간 벌인다.
모택동주석(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1949년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된다.
48년 봄 농지 무상 분배 구호 등의 영향으로 농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공산당이 우세한 상황에서 국공내전이 종국으로 치닫던 무렵, 국민당 군대는 남은 힘을 집중해 공산당과 마지막 한판을 벌여야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때 장개석 주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충분히 싸워 볼만하다는 군의 의견(?)을 무시한 채 대만으로 피난하게 된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 그리고 국민당의 대만 피난 등 역사 사실에 대한 공과에 대해서는 후대의 평을 기다려 보자."
상황이 이처럼 급변하자 공산당과 마지막 결전을 준비 중이던 국민당 지방 군벌들은 이른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밖에. 군 수뇌들은 긴급 회의를 개최했다.
'국민당의 대만 피난은 수뇌부의 판단 잘못 때문', '따라서 군자금이 될 수 있는 것들을 깊은 산 속에 감추어 놓고 공격의 시기를 기다려야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 결론에 따라 군벌들은 산 속으로 은신했다. 그 때부터 그들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산 속 동굴에 숨겨 놓은 '보물'을 지키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것.
무려 50년.
이처럼 귀한 '보물' 중에 하나가 1930년에 발행됐다는 미국 달러.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국민당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국민당 정부는 미국 측에 군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 측은 1917년 러시아 공산 혁명 이후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공산주의 혁명 열풍을 크게(?) 우려한 결과 중국 측의 요구에 따라 대규모의 군자금을 지원했다.
바로 그 자금 중 일부가 문제의 달러라는 것.
여기까지 오자 듣는 필자도 말하는 그 분 만큼이나 숨이 찼다.
이 정도 되면 사실이냐 아니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공 내전, 국민당 대만 피난, 군자금, 달러, 산맥 속 깊은 동굴, 보물을 지키는 백발의 노인들, 그 곳까지 안내하는 사람들, 깊은 산 능선마다 매복해 있다는 감시인들.
그리고 말대로라면 목숨을 걸고 그 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불나비들.
그 중에 상당수 아니 대부분을 차지하는 의젓한(?) 한국인들.
산 속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그 분은 필자의 질문에 "사람 말을 그렇게 못 믿느냐?"고 버럭 화를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분은 그 후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지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수없이 벌어지는 중국이니 전부 사실이라고 하자. 동굴 속에 널려있다는 옥 침대나 귀금속이라면 그래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진짜 달러를 싼 값에 팔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냥 그 달러를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니까 싸게 파는 것 아닌가? '
필자의 질문은 밤 하늘 허공에 덩그러니 남을 수 밖에.
50대 한국 분의 이야기는 끊어질 듯 하면서도 실타래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구체적인 신상 부분과 상대의 신상 등에 대해선 가급적 말을 삼갔다.
젊은 회장님에 대해 믿음이 생기자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달러가 눈 앞에 어른 거렸다.
마침내 때는 왔다. 얼마나 기다리던 기횐가? 자금만 마련하면 중국 깊은 산 속 달러 광산(?)에서 원하는 만큼 아니 능력 만큼 달러를 긁어 모을 수 있다!
달러가 이제야 제 주인을 만나게 된 것 아닌가?
최고급 호텔에서 자금을 기다리고 있는 구세주(?)를 생각하며 돈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연줄이란 연줄은 모두 동원했다.
'꿈꾸지 말아라. 꿈 깨라', '중국 가서 망했다는 사람 천진데 무슨 재주로 중국 가서 돈을 벌겠다는 얘기냐', '분명히 사기꾼에게 홀린 것', '이제 갈 때까지 갔구나 정신차려라'. 있는 말 없는 말 다 들었다. 돈이고 뭐고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오기도 했다.
급기야 절친한 친구 동생 돈까지 동원됐다.
좋은 직장에 잘 다니던 친구 동생도 젊은 회장님을 몇 번 뵙고(?)는 요새 말로 "뿅" 갔다.
모금된 액수를 보고 나서 젊은 회장님이 크게 만족해 하는 눈치는 아니였다. 시간도 촉박했고 중국측과의 약속도 있으니 우선 한번 갔다 오자고 하셔셔(?) 자금을 환전, 젊은 회장님을 모시고(?) 친구 동생과 함께 북경에 왔다.
"호랑이 굴에 가야 호랑이를 잡지".
북경에 온지 젊은 회장님이 떠난지 3개월.
달러를 가지러 간 구세주는 소식이 뚝 끊겨 버렸다.
젊은 회장님 아니 '그 놈'-호칭이 바뀌는 것은 일순간-을 북경과 서울에서 봤다는 소문이 나 돌았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기력도 없었다.
기가 콱 막혔다. 억장만 무너져 내렸다.
그 분은 그래도 젊고 예쁜 아가씨-임신했어도 아가씬가?-와 오순 도순 대화라도 나눌 수 있는 처지였으니 그나마 천만 다행이었다.
절친한 친구의 동생은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 버렸다.
서울에 갈 수도, 갈 돈도 없었다. 중국 말을 한마디도 못하니 나 다니지도 못했다.
호텔에서 민박으로 민박에서 다시 북경에서 새로 사귄 다른 한국인 호텔 방으로 전전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숯불에 양고기 꼬치를 파는 노점-최근 서울 대림동, 가리봉동 등지에 생기고 있는 양꼬치 집에 가 본 사람은 그 곳서 파는 양고기, 소고기 꼬치를 탁자도 없이 길 한 구텅이에서 술과 함께 판매한다고 상상하면 된다-에서 쭈구리고 앉아 그 분의 눈물어린(?) 달러 얘기를 듣는 필자는 너무 어이가 없어 그 분이 따라 주는 대로 술 잔만 계속 비웠다.
바로 그 때 건장한 체구에 핼쓱한 얼굴의 한국인이 나타났다.
'양반 되기는 애시당초 틀린 분'.
바로 그 분 친구의 동생이었다. 그 분의 신혼 살림집(?)으로 그 분을 찾아 갔다가 그 분이 없자 나오던 길이란다.
간단히 통성명을 했다. 서로 엉거주춤 하다 합석한 그 분 친구의 동생은 술 한잔을 낼름 비우더니 필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육두문자를 내뱉기 시작했다.
'형님 때문에 인생 금이 갔다. 어떻게 해서든 그 XXX를 빨리 찾아 내야한다. 돈을 돌려 받기는 이미 틀린 일로 보이지만 그 XXX 목을 끌고라도 가야 한다. 그래야 한국에서 사기꾼 처지를 면할 수 있다. 서울에 나타났다고 하니 누구라도 여비를 만들어 하루 빨리 서울에 가야한다. 그래서 그 X을 잡아 패대기 쳐야한다.'
저녁을 굶었다는 사람이 육두문자를 쓸 때는 어찌나 힘을 들이는지 귀가 멍했다.
젊은이의 빈 배를 채우기 위해 꼬치를 계속 시킬 수 밖에.
중국의 밤. 양꼬치, 술 그리고 훨훨 날아가 버린 달러의 꿈.
한국인을 기피하는 한국인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이 말은 한마디로 한국인 때문에 당하고 망했다는 한국인이 적지 않다 즉 많다는 것. 외국 그것도 중국에서 한국인끼리 어울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이같이 비열한 이전투구를 지켜보는 중국인들에게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비쳐질까?
답답할 뿐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도 그러한가?
청바지 차림의 조선족 아가씨와 낚시터에 나타난 50대 한국 분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가씨와 동거하게 된 경위는 술자리 대화를 정리하면 대충 이렇다.
5개월 전 중국에 오게됐다. 숙소에서 가까운 허름한 조선족 식당에서 자주 식사를 했다.
식당 주인인 조선족 부부와 가까워졌다.
저녁 바쁠때면 조카라고 하는 어여쁜 아가씨가 나타나 식사하고 가는 손님으로부터 식사비도 받고 식탁도 치워 주고 했다.
볼수록 귀여웠지. 서울에 와도 빠지지 않는 미모임에 틀림없다.
2년제 대학을 졸업한데다 컴퓨터도 능숙했고 관광지 안내도 매끄럽게 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취직, 어떻게 해서라도 한국에 가 세상 물정도 배우고 돈도 벌겠다는 것이 그녀의 소박한(?) 꿈.
그러던 어느 날 그 식당에서 아가씨, 식당 주인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됐다.
반주로 한잔씩 주고받고 하다 술이 취했다.
한국 얘기 끝에 그 분은 한 두 사람 정도 한국에 보내주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말을 하게 됐고 이 말이 계기(?)가 됐는지 며칠 뒤부터 자연스레 동거하게 됐다.
시골에서 아가씨 부모라는 분도 올라 와 인사-맞선이라고 해야할지-까지 한 상태.
그리고 얼마 뒤 아가씨는 임신을 했다.
이날 낚시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후 필자와 그 분을 필자에게 소개해 준 한국인이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단, 낚시터에 동행했다는 것.
혀를 찰(?) 일이지만 그 분의 일이고 어찌됐던 그 분이 해결해야 할 일.
달러 얘기로 돌아가자.
그 분이 중국에 오게된 이유가 바로 문제의 달러 때문.
금융기관에서 퇴직(?)한 후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주로 일본, 홍콩의 자금을 국내 굵직굵직한 기업에 소개해 주는 이른바 국제 금융 관련 업무-공식적인 업무였는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했다-를 해 왔다.
일본과의 거래가 뒤엉키면서 엄청난 손해를 보게됐다. 관련된 분들 특히 뒷자금(?)을 댄 분들의 성화에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든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미국에서 온 젊은 한국 분 J씨.
몇 번 만났더니 말 그대로 구세주였다.
삐삐도 귀한 시절 호텔 커피숍에서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 유창한 미국어로 휴대전화기로 전화를 거는 최첨단을 걷는 젊은이였다. 미국에 전화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요새 말로 하면 휴대폰 로밍 서비스였으리라. 휴대폰으로 미국에 전화를 건다!
그 젊은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 대로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허튼 소리할 사람인가?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과 국내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거침없이 나온다.
최고급 호텔에서 최고급 식사에 최고급 양주, 몇시간 마다 미국에서 걸려오는 전화, 품위가 넘치는 귀공자 스타일. 같이 있는 시간이 즐겁기만 했다.
그 분은 그 젊은이가 한국에 체류하는 모든 경비-처음 한 두 번 식사비와 술값은 그 젊은이가 빳빳한(?) 달러로 지불했다-를 지출하면서도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2억원"만 가지고 중국에 가기만 하면 "4억원"이 된다.
"4억원"이면 "8억원", "8억원"이면 !!!!!
북경에 함께 가 관광을 하면서 기다리면 2-3일 사이 그 젊은 회장님-이 정도 되면 호칭은 나이에 관계없이 점점 상향된다-이 지방 깊은 산 속에 가서 달러를 뭉치로 가지고 온다. 한화로 넘겨준 액수의 두 배에 달하는 달러를 받아 한국에 오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 돈을 준비해 가면 계속 두 배씩 돈이 불어나게 된다.
꿈인가 생시인가?
한국인 기피증이 확산되는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쌍방이 비정상적(?)이거나 어느 한쪽이 비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래도 낫다. 위안이 된다나.
뿌리 깊은(?) 한국인 기피 증세는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발병한다. 물론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 세상 이치이니 어느 경우든 한쪽에만 문제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니라.
평소 아주 정상적(?)인 한국인이었는데-이 점이 부화뇌동하기 쉬운 원인이 된다-어느 날 갑자기 사기꾼(?)으로 전락, 슬슬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되거나 극구 피하고 잠적한 사람을 찾아다니게 된다. 중국 땅에 침 한번 뱉을 힘(?)마저 빠지고 나면 제풀에 껶여 슬그머니 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라진 입과 남아 있는 입, 옆에서 지켜본 입에서 "X같은 XX놈들"이 터져 나올 수밖에.
"일확천금을 쫓는 불나비"로 전락하게 된 일부 한국인들. 그 수가 결코 적지 않다는게 문제다.
98년 5월.
북경 한인교회 봄 야유회.
야유 예배 후 청년부에서 준비한 야유회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평소 가깝게 지내던 한국 기업인과 공원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한국에 다녀오셨느냐"고 묻자 그 분은 한참 머뭇거리다 지방에 다녀왔다며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북경에서 제법 자리를 잡은 것으로 알려진 분으로부터 희한한 정보를 들었다.그 분과 함께 비행기로 2시간30분 걸리는 지방 도시에 다녀왔다.
1930년대 발행한 미국 달러가 엄청나게 많은데 그 달러를 아주 싼 값에 판다는 것. '100달러 짜리를 60달러에' 살 수 있다니 그야말로 앉아서 '돈 놓고 돈 먹기' 아닌가?
시골 도시 한국의 장급 호텔에 묵었는데 호텔과 길거리에서 여러 명의 한국인-중국에선 한국인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을 만날 수 있었다.
시내 관광을 하며 이틀을 호텔에서 묵었다. 3일째 그 곳까지 안내한 사람이 인근 산 속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너무 외진 도시고 초행인데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자신은 가지 않았다. 북경서 동행한 한국인이 산 속엘 다녀왔다.
산에 다녀온 한국 분으로부터 약속한 값에 달러를 사 북경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희한한 일이어서 위조지폐가 아닌가 하여 은행에서 환전해 보니 이상이 없었다.
같이 갔던 한국 분이 다시 가자고 했다. 달러 외에도 독일 화폐며 페루 화폐, 귀금속, 옥침대 등 진귀한 것이 많다며 이번에 크게 "한 건"하자는 것. 여유 자금도 없었고 그 곳 분위기가 왠지 이상해 권유를 여러 차례 뿌리쳤다.
큰 손해(?) 보는 것 같아 오래 망설이긴 했지만.
여행 경비는 그 곳서 사 온 달러를 환전, 대충 충당됐다. 크게 마음 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시골 도시를 관광하고 희귀한(?) 경험도 했다고 치부(?), 그 일은 잊었다.
3개월 뒤 북경 시내 변두리 낚시터.
북경의 낚시터는 특이하다. 일정액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낚시를 한 후 잡은 물고기를 저울에 달아 입장료 보다 많이 잡은 물고기는 돈을 더 내고 가져가거나 주인에게 반환한다. 물고기 값은 어종에 따라 다르고 대부분의 태공들은 입장료 보다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
땅 덩어리가 크면 물고기도 큰지 잡히는 물고기도 팔뚝만한 것들이 많다.
북경에 온지 5개월 됐다는 50대 초반의 한국분과 함께 낚시터에 가기로했다.
낚시터에 가보니 그 분은 나이가 20여세 어린 청바지 차림의 어여쁜 조선족 아가씨와 함께 나타났다. 필자는 잠시 당황했다. 그것 참. 한국에서 한참 젊었을 때였다면 '재주 좋은' 사람 으로 부러워(?)했을 장면이었다.
그 분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낚시를 하다 헤어졌다.
필자와 그분을 소개해 준 다른 한국 분도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당연했다.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으니. 쯧쯧.
중국에 온지 5개월 된 분이 20세 연하의 아가씨와 아파트를 얻어 동거하고 있고 동거 중인 그 아가씨가 임신을 해 얼마 후 '손자'를 볼지도 모른다며 '싱글벙글', '조심조심'하는 그 분.
아파트에서 키우는지 온갖 몸치장을 한 강아지를 풀어 놓고 강아지를 쫓아 다니는 아가씨와 그들을 대견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한국 분. 얼굴이 그을린다고 양산을 애지중지하는 아가씨.
그 날 저녁 식사자리.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한국서 금융기관(?)에 근무했었다는 그 분이 중국에 오게된 이유가 바로 문제의 달러 때문!
97년 1월 말.
北京에서 沈陽가는 비행기 안.
심양시 교외에서 버섯을 재배(?), 가공해 한국에 수출한다는 분 옆자리에 앉게 돼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심양시에 있는 한국인 모임에 나가시느냐?”고 물었다.
그 분은 좀 망설이다가 “엽전(?)들하고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만나봐야 도움(?) 되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
2002년 2월 말.
북경 시내 한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 위치한 이름과 실내 장식이 너무 아름다운 카페.
현재 필자가 추진 중인 사업과 연결 되는 사업을 하는 한국인 두 분을 소개하는 자리였다.다음 날 귀국해야 하기 때문에 한 분과 만나 일찍 저녁을 먹고 다른 한 분이 합석하게 된것.
물론 그 분들 간에도 사무실 문제로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아 함께 자리를 했다.
대화 끝에 한 분이 한인 교회에서 뵙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한 분이 “한국 사람들과 만나기 싫어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교회를 빠져 나오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10여일 뒤 북경시내 카페에서 만난 한 분의 사무실.
“지난번 북경 방문 시 소개한 분을 만나 식사라도 했느냐?”고 필자가 묻자 그 분은 연락하지 않았다며 “한국인을 만나는 것을 기피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열을 냈다.
비행기로 1시간40분 거리의 서울과 북경.
수많은 한국인이 북경엘 갈 뿐만 아니라 북경을 근거지로 해 중국 전역에서 갖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싫든 좋든 욕하는 말든 말이다.
그런데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니 한국인과 한국을 욕하고 비하하는 것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한국인이 한국인을 기피(?)하는 이유를 살펴 보자.
첫째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중국에 체류할 수 밖에 없는 한국 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이민 간 나라에서 살 수 없는 극히 개인적인 상황(?)이 벌어 져 중국에 온 분들 말이다. 외국에 가기 위해 어학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외국에 투자할 만큼 충분한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무작정 또는 다른 대안이 없어서 서둘러 준비없이 “中國”에 온 분들.
고부 간의 갈등이 꼴 보기 싫어 여행 왔다가 눌러 앉은 분, 여성 편력 문제로 이혼 직전의 상황이 벌어지자 시간을 벌려고 온 분, 집안에 낯(?) 뜨거운 일이 벌어져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어 온 분 등등.
여기에 최근에는 갖가지 유형의 범법자 및 민,형사 사건 관련 용의자들까지 중국으로 중국으로 몰려 오고 있다. 가깝고 말이 통하는 곳(?)이니까.
이런 분들이 아주 정상적인 한국인(?)-기회의 땅이라는 중국에서 재기를 하거나 한 단계 도약을 하기 온 분들이나 공직자, 주재원등-들을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라면 동석할 수 없는 분들인데도 중국에선 가능하다.
한국인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로.
서로를 확인할 방법이 없느니까!
허우대 멀쩡하고 언변 좋고 세상 돌아 가는 사정에 밝으면-이런 분들일수록 이같은 필요 충분 조건을 대부분 갖추고 있다-술자리 몇차례 거친 후 거래(?)는 시작된다.
돈이 오간다.
그리곤 약속한 기일이 지난다.
어느 한쪽은 액수가 적으면 "당"했다, 액수가 크면 "망"했다고 상대를 비난할 수 밖에.
양쪽에서 이구 동성으로 “엽전은 별 수 없어!”라는 말이 터져 나온다.
엽전(?)이 다른 엽전(?)을 욕한다고 금덩어리(?)가 되나!
엽전은 욕인가?
한국인의 엽색 행각(?)이 결과적으로 살인등 강력사건으로 까지 비화되는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차적인 피해자는 한국인이고 종국에는 어쩔 수 없이 한 배를 타야 할-이 대목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할 수 밖에 없다- 중국과 한국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짚고 넘어 가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소개한 사례를 중심으로 당사자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물론 대부분의 사건이 미궁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여건이어서 당사자들의 처한 상황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를 분석해 본다.
중국에 온 상당수의 한국 남자
1.중국을, 특히 조선족 여성의 성 관념을 너무 모르는 상태에서 중국에 온다
2.중국의 깊은 밤에 할 일-독서, 컴퓨터, 취미 생활등등-을 찾지 못한다
3.업무와 술 자리-술 자리에서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믿는다-를 너무 쉽게 넘나든다
4.대부분 식사 자리에서 술 자리로 연결되는 야간 행군을 당연시 한다
5.여성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뿌리 깊은 여성관(?)을 버리지 못한다
6.중국어 구사 능력 부족으로 거의 모든 일에 통역이 필요하다
7.그물 망 같은 중국의 공식 또는 비공식 연락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 남자를 만나는 상당수의 중국 여인-주로 조선족 여인
1.경제적인 이유만(?)으로 한국 남자를 상대한다
2.고향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연인을 계속 만날 수 밖에 없다-가장 큰 문제로 판단됨
3.대도시에 나오는 과정에서 알게 된 연인(?)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4.대도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연인(?)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5.위의 세가지 부류의 연인들에게 가까이 지내는 한국 남자의 형편-특히 돈 문제-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6.자신이 당하는 아품-인권문제 포함-을 숨기고 지낸다
7.자신이 만나는 한국 남자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중국 정부의 입장-물론 공식 입장일 수 없고 입장을 밝힌 적도 없다
1.한국인의 비리(?)를 모르는 척한다
北京의 경우 무허가 업체나 접객 업소-실제 투자자는 한국인-가 전체의 30% 선인 800여 개에 달한다고 훤히 파악하고 있다. 또 그 흔한 가라오케에서 손님 옆 자리에 여 종업 원이 앉을 수 없고 노래도 부를 수 없는데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단속을 하지 않는다.
2.사건 사고가 났을 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수사에 극히 미온적이다
3.피해자인 한국인을 설득 또는 회유해 귀국하도록 한다
4.심지어 무허가 또는 위법 업소를 외화 유치라는 명분으로 권유하는 지방 정부도 있다
5. 외국인으로서는 관공서를 통해 업무를 확인하거나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도록 거의 대부분의 행정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한이 없다.
밤 생활을 어떻게 영위하느냐는 문제는 사업의 성패와 직결될뿐더러 목숨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경각심을 갖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필자를 포함, 중국에 가는 한국 남자들이여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자.
"죽지 않으려면!"
너무 흥분했었습니다.
한국인의 목숨이 연이어 사라지는 상황을 접하면서 4-5년 전 생각이 나더군요.
당시 "황야의 무법 천지(?)"를 방불케 하는 사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물론 한국인이 끼거나 배후에서 조종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폭행, 강도, 감금, 납치, 총기 난사 그리고 살인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이 곳곳에서 발생, 중국을 찾는 한국인은 물론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관등 유관기관 관계자들을 당혹케 하곤 했습니다.
필자가 흥분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이유는 좀 더 냉정을 찾은 후 자세히 소개할 예정입니다. 현재 당사자들이 중국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지요. 몇몇분은 귀국해서 다시한번 중국에 대한 정열(?)을 지피고 있다고도 하더군요.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니까요.
다시 풍산개 사건으로 돌아 갑니다.
해 보지 않은 일에 과감히 투자하라.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것은 없으나 기회의 땅(?)에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때 공직-北京 주재-에 있던 절친한 친구의 소개로 문제의 재 아르헨티나 교포(?)라는 K씨를 만나게 됐다.
1.북한에서 직접 골라 온 풍산개
2.한국에 가지고 가면 한 마리에 1천만원
3.동물 검역 문제는 K씨가 책임
어려서부터 무척 개를 좋아 했겠다.
재벌 총수까지 나서서 풍산개를 찾고 있겠다.
큰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의 절친한 친구라고 하니 원금 만 받고 준다고 한다!
급히 호텔로 돌아 와 서울에 있는 마당발 선배에게 국제 전화를 걸었다.
다음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北京 교외 농가에 가 암수 두 마리-암컷은 새끼를 밴 상태-를 찍어 놓고 계약금 절반을 건네줬다.
여기까지는 과감했다. 대한남아(?) 다웠다.
한달간 북경과 천진을 에어컨도 없는 노란색 택시- 봉고 같은 차, 지금 북경에선 없어졌슴-에 애꿎은 백두와 한라를 태우고 7차례 왕래 작전(?) 끝에 배 편으로 인천에 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끔찍하다.
백두와 한라는 호텔 베란다에서 택시로 다시 호텔 베란다, 나중에는 인근 중국인 집 마당 등지에서 혀를 있는 대로 빼고 더위를 이겨야 했다. 외국, 그것도 한국에 간다고.
보관-운송-검역-통관등 모든 문제가 계약 내용과는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개도 족보가 있어야 팔 수 있단다. 그 것도 3대 까지의 족보가 있어야 한다.
<사진2-중국의 무더위를 이겨내고 한국에 온 풍산개 부부-사진 왼쪽이 산후 조리 중인 '漢拏'>
특히 생후 3개월 정도부터 제대로 훈련을 받아야 족보 있는 개도 명견이 된단다.
경찰견을 훈련하는 곳에 입소 시킬 수 밖에. 애들 유치원 값을 훨씬 넘는 훈련비.
2개월 후. 버티다 못해 백두는 처가에 한라는 가까운 선배에게 강제로 분양하고 한라가 낳은 새끼 5마리는 누구에게 줬는지도 모르게 이리 저리 흩어졌다.
이 경우 남 탓할 것 하나도 없다. 판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오십보 백보.
모르는 일에 남의 말만 듣고 덤벼든 게 실수일 뿐이지.
그런데도 중국에 가면 성공이 확실(?)해 보이는 사업이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 거북이 양식,석재 개발, 상황 버섯, 동충하초, 심지어 우표에 골동품까지.
'해 보지 않은, 모르는 사업'을 자꾸 자꾸 할 수 밖에. 결과는?
2002년 3월15일.
이태백의 묘를 방문한 후 북경에 도착했다.
금년 7월에 개최할 전시회 전시물 운송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한국인이 경영하는 운송회사에 갔다. 사장실 책꽂이에 희한한 제목의 책이 꽂혀있다.
그 회사 한국인 사장님을 기다리는 사이 책을 뒤적였다.
식은 땀이 났다.
2001년 8월 30일 초판 발행, 100일 만인 그해 12월 10일 8판 발행.
15년간 유럽 유명 언론사 북경 북파원으로 근무한 후 현재는 모 언론사 북경지사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중견 언론인이 오늘의 중국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저술한 영문 책 국문 번역본.
그 책의 108, 109, 110 쪽을 읽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책이 나와 전세계 수많은 독자들이 현재 읽고 있다니!
호주 모대학 어느 교수의 연구 조사 내용을 인용해 중국의 열악한 노동 문제와 인권 문제를 거론한 대목.
109쪽 상단
'공장의 지배인들이 대부분 타이완과 "한국에서 온 군 장교 출신들"이거나 이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중국인들이기 때문에 기업 환경을 살벌한 군대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여성 지원자-공장에 취직하기를 원하는-들이 오면 체력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마치 군대에서 하는 것처럼 차렷 자세로 서게하고, 1km를 뛴 뒤에 1분 동안 최대한 많은 엎드려 팔굽혀 펴기를 하도록 명령 받는다'
'-위의 과정을 통과했다 하더라도-그마저도 3일 동안 소대 단위의 지옥 훈련을 통과해야 된다. 특히 타이완과 "한국인 소유의 공장"에서 이런 식의 구타 행위가 흔히 벌어지고 있다'
109쪽 정 중간
'1995년에 주하이 지역 노동국은 근로자들을 24시간 이상 연속적으로 일하게 한 한국의 전자공장 경영자에 대해 경고조치를 취했다. 10분간의 휴식 시간 동안에 피곤에 지친 근로자 몇몇이 잠이 들자, 한국인 경영자가 그들을 무릎 꿇게 하고 10분 동안 있도록 만들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국인 공장에서는 태만하다는 이유로 "여성 노동자 한 명이 큰 개와 함께 개집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110쪽 상단
'1995년에 노동자일보는 6백여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후베이성의 친황다오에 있는 한 한국인 회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중략- 1주일에 36시간을 초과하여 근무토록 강요하자 근로계약을 다시 체결하자고 요구했는데 회사가 주동자를 해임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처벌하자 여기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인 것이다. -중략-한국 공장이 노동 규정을 도입하지 않겠다, 노동자들을 잘 달래 달라는 등의 구실로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뇌물을 준 사건이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혹시 오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중요한 맞춤법 외에는 원문을 그대로 실었다.
영문판이 입수되는 대로 원문을 확인할 예정이다.
위에 거론된 한국 회사와 한국인 경영자-투자자-가 어떻게 됐겠는가?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인가?
억장이 무너진다.
한중 수교 첫 해인 1992년 北京에 와서 제법 성공했다고 소문이 났던 K씨(당시 51세).
성공이라는 환상 속에 보낸 2년 뒤인 94년 12월 김포국제 공항에 도착, 빈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서성일 수 밖에 없었다.
얼굴은 아직 퍼런데다 부기도 빠지지 않은 상태. 어디로 가야 하나.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입장이었지만 '한번 해보자'는 개척 정신(?)으로 무장, 당시 분위기로는 희망(?)의 땅 중국에 왔다.
이곳 저곳 관광하며 깊게 사귀어 의형제가 된 조선족 동생 Y씨(당시 42세)의 권유에 따라 당시로선 흔치 않던 한국 식당을 차렸다(?).
동생 명의로 장소를 임대, 한국에서는 라면 가게도 차릴 수 없는 자금(?)을 투자해 시작한 식당은 예상 외로 손님이 많았다. 北京에 상주하는 한국인, 소문 듣고 찾아 온 관광객도 있었지만 한국 음식을 맛 보기 위해 온 중국인도 적지 않아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식당 경영은 모두 동생이 맡아 정말 열심이었다. 24시간 영업하는데 필요한 인력을 고향 시골에서 모아 와 교육을 시키는 일에서부터 관련 중국 공무원들 접대하는 일까지 식당 경영에 필요한 거의 모든 일을 깔끔히 처리했다.
한 달이 지났는데 동생이 첫 달에 벌었다고 건네 주는 3만위엔(당시 한화 3백만원). 반년이면 투자액이 회수되는 액수이다. 임대 계약은 2년이지만 재계약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니 이게 웬 횡잰가. 국내에서 마땅한 일거리가 없던 터에 고사리, 버섯, 참깨등 일시적으로 품귀 현상을 빚는 농산물을 수입하면 재미가 짭잘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삼팔 광땡'을 잡은 셈 아닌가. 매달 3만위엔이 들어오는데 무슨 사업인들 못하겠나. 아침에 식사하러 가서 2-3 시간 있으면서 사장 노릇만 하면 돼는 것. 정직하고 인사성 밝은데다 말 수 적은 동생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식당 개업 3개월 째.
黑龍江省에서 갓 올라 온 조선족 아가씨 C양(당시 18세). 늘씬한 키에 길게 따 내린 검은 머리에 이름만 물어봐도 얼굴을 붉히는 시골 아가씨. 고향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친구 소개로 이 곳에 와 근무하게 됐다.
아무리 봐도 귀엽다. 착하고 손님들에게 인사성도 밝았다.
며칠 뒤 밤 11시. K씨는 전화를 걸어 조선족 동생이 식당에 없는 것을 확인한 후 C양에게 식당에 놓아 두고 온 옷을 숙소로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이틀 뒤 조선족 동생의 반대에도 불구, C양의 업무는 월급 많고 일도 훨씬 수월한 계산대에 앉아 근무를 하게 됐다.
K씨의 엽색 행각은 물꼬(?)가 트였다.
조선족 동생과의 싸움은 계속 이어졌고 그 때 마다 계산대에 앉아 근무하는 여 종업원의 얼굴이 바뀌었다. 심지어 지방 출장 까지 어여쁜 여종업원들을 골라 통역으로 대동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조선족 동생과의 갈등은 말 싸움에서 주먹 싸움으로 비화됐고 매달 받던 돈도 끊어졌다.
갈라서자고 결론을 낸 후 식당 임대료 문제로 거칠게 싸움을 벌인 후 K씨의 종적은 묘연해졌다. 임대계약 당사자가 조선족 동생인데다 뭐 하나 잘 한것이 있다고 임대료를 요구했는지 원 참.
그리고 며칠 뒤 김포국제공항 청사에 모습을 나타낸 것.
아 중국의 밤이여!
94년 8월 北京.
북경에 갈 때 마다 묵는 호텔 옆 건물에 있는 중국여행사 한국부 조선족 경리 C씨(당시 41세)-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하청(?) 여행사 사장-와 잉어 찜 요리를 시켜놓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당시 한화 5천원 이면 팔뚝 만한 잉어 요리를 즐길 수 있었다. 중국에 오기 전 경기도 퇴촌 등지에서 먹던 매콤하면서 비린 내가 전혀 나지 않는 감치는 맛은 전혀 아니다.
점심을 먹던 C씨가 황급히 찾아 온 직원의 귓속 말을 듣고는 바람처럼 나가 버렸다.
1시간여 만에 돌아 온 C씨. 이마 땀을 연신 닦는다.
10일 전 한국 여행사로부터 白頭山 단체 관광객 10명을 인계 받아 그 분들과 조선족 직원 H군(당시 26세)을 백두산에 보냈다. 다음 날 H군으로부터 비상 연락이 왔다.
“한국 관광객 1명 실종”
눈 앞이 노래졌다.
백두산에 가기 위해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延吉시에 도착,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후 가라오케를 들러 호텔로 돌아 왔다.
다른 분들은 피곤하다며 각자 방으로 갔는데 L씨(당시 33세)등 3명이 방으로 가지 않고 수군 수군 댄다.
‘술이 조금 모자라는데 조금 전에 들렀던 가라오케에 가서 한잔 더 하자’고 한다.
H군이 피곤하다고 하자 길만 가르켜 달라고 해 호텔 앞에 나가 가라오케에 가는 길을 안내해 주곤 “늦어도 밤 12시 까지는 돌아 오십시요”라고 말하고 잠을 청했다.
새벽 6시.
7시에 출발하려면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해야하니 1층 식당에 준비된 식사를 하시라고 알려주고 있는데 사단이 발생했다. 어제 밤에 3차를 간 3명 중 2명이 방으로 부르더니 L씨가 아직도 몰아 오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라오케에서 3차를 간단히 하고 밤 12시가 돼 호텔로 돌아 가자고 했는데도 L씨가 먼저 호텔로 가라고 했다. 조선족 아가씨와 얘기를 조금 더 하다 가겠다고 해 L씨를 남겨 놓고 돌아 왔는데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
백두산 관광이고 뭐고 난리가 났다.
8일 만에 현장에 남아 있던 직원 H씨로부터 L씨를 찾았다는 연락이 와 황급히 사무실에 가 긴급 조치를 취해 놓고 왔다는 것. 저녁 비행기로 현장에 갈 계획.
延吉시 변두리 대로변.
신발도 신지 않은 행색이 정말 비참한 거지가 차가 다니는 길 옆에 쓰러져 있었다.
마침 백두산 단체 관광객 가이드를 위해 온 여행사 직원인 한국인이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이 쓰러져 있지만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판단 그냥 지나치려는데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양말에 시선이 꽂혔다.
"BYC." 이상히 여겨 달려가 주머니를 뒤져보니 한국 여권이 나왔다.
얼마 전 실종됐다고 국내 신문에 보도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 한국 여행업계에 찬물을 끼얹은 실종 사건이어서 가이드로서 모를 수가 없는 인물 아닌가.
요즘 같으면 여권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0%.
온 몸에 피멍이 들었고 머리 뒷 부분에 둔기로 맞은 듯 상처가 깊었다. 기억을 전혀 못하고 말을 하지도 못하는 상태.
아들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L씨의 어머니-한국의 오늘이 있도록 가슴 졸이며 자녀를 키워 온 자랑스런 한국의 어머니 중의 한 분-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단 숨에 달려왔다.
어머니 얼굴도 알아 보지 못하고 허공만 바라보는 아들을 가까스로 태워 공항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한국의 어머니는 울고 또 울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눔아 白頭山엔 뭐 하러 왔노!"
그 사건 이후 여행사를 때려치고 전업했다고 알려진 C씨.
“이 글을 보게 되면 꼭 연락 주시기 바람. 이번에는 잉어찜 필자가 사겠음.”
96년 11월
김포 공항에 도착한 K씨(당시 32세). 한숨이 절로 나왔다.
3년 간의 유학 생활과 1년 간의 의류 상점 주인 생활이 꿈만 같았다.
'잘할 수 있었는데 정말 잘할 수 있었는데.......'
한중수교-1992년 8월- 이후 불어닥친 중국 열풍(?)에 몸을 던져 3번의 관광 여행 끝에 다니전 직장을 때려치고 北京에 왔다. 대학 졸업 후 내키지 않는 직장에서 2년간 근무했으나 시체 말로 비젼이 보이지 않았다. 직장에서 사귄 여자 친구와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약혼자?-였지만 평생 직장이 구해 지면 결혼하자고 미루고 각각 직장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2년 간 언어 연수를 마친 후 학교 생활 하면서 봐 두었던 상점을 임대해 한국 의류 상점을 열었다. 제법 재미가 짭짤했다. 청바지에 브라우스, 스타킹등 한국 상품을 위주로 중국 상품 보다 값이 비싼 외제 의류를 취급했다. 한국과 홍콩을 왕래하며 철 따라 품목을 다양하게 했고 고가 정책도 예상대로 맞아 떨어졌다.
96년 봄 어느 날 언어 연수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 모임을 갖고 2차로 간 가라로케에서 조선족 종업원 L양(당시 24세)을 만났다.
눈이 번쩍 띄었다. 눈이 웬수지 웬수.
탈랜트 저리가라 미모에 훤칠한 키, 경상도 사투리가 약간 섞인 말투에 세련(?)된 매너.
吉林省 내 4년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일어에 능통했다.
홍콩 손님과 北京 현지 법인 한국인 직원등 단골 손님이 많아 찾아 가도 함께 술을 먹을 수 없을 때가 많아 K씨의 애간장을 태웠었다. 고향 집에 한 달 평균 5,000위엔(당시 한화 500,000만원) 정도를 생활비로 보내주고 있는 인기 절정(?)의 아가씨였다.
그해 8월.
여름 휴가를 얻은 여자 친구-약혼녀-가 北京에 왔다.
만리장성에 이화원, 천단 공원, 北京 원인 유적지등을 관광하며 3일 째 즐거운 휴가를 보내던 날 밤 11시.
K씨의 중국인 아파트-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는 섭외지구로 지정된 곳으로 제한돼 있어 임대료가 어마어마 해 장기 체류자는 위법이지만 값이 싼 중국인 아파트에 주로 산다-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2명의 건장한 청년들과 함께 서 있는 L양.
"철썩 같이 약속한 결혼은 언제 하고 한국엔 언제 대려 갈 것이냐? 한방에 자고 있는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냐?"
20여분간 집안이 떠내려 가도록 소리를 지르더니 한밤의 침입자들은 유유히 사라졌다.
다음날 한국에서 온 여자 친구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귀국했다.
하루가 멀다고 상점에 찾아와 온갖 소리를 다하는 한밤의 방문자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L양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L양에게 두손 모아 용서(?)를 빌어 다시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0여일 뒤 다시 나타난 청년들-L양은 보이지 않고-에게 뭘 잘못했는지 왜 줘야하는지 따질 겨를도 없이 두툼한 봉투를 뜯겼다.
잊어 먹을 만하면 또 나타나고 또 뜯기고.
상점도 아파트도 그냥 놔 둔 채 도망쳤다.
눈을 떠 보니 김포국제공항 청사.
중국아, 북경아, 미인아.
96년 11월 말. 바람 센 北京에 회색 겨울이 오고 있었다.
한국 유명 대학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개업, 주위의 평판(?)이 좋고 수입도 좋았던 한의사.
한의사 K씨(당시 35세)는 한중 수교-1992년8월-가 체결되자 한의학 원조의 나라에 와서 한의학 공부를 더 해 보겠다고 잘 나가던 의원을 때려치고 중국에 왔다. 언어 연수 과정을 거쳐 北京의 한의학 대학에 입학, 3학기째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3살 난 딸 얼굴이 생각 날 때도, 성조가 어려워 강의를 따라가기가 어려울 때도, 10여세 연하의 한국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도 원조 나라 한의학을 제대로 배운 훌륭한 한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공부에 몰두했다. 속 사정 까지야 어찌 알겠는가.
북경 현지 법인 대표가 북경 유학생을 위해 마련한 저녁 자리에 이은 가라오케 자리가 맺어 준 인연(?)이 그의 운명을 박살 내고 말았다.
당시 제법 어여쁜 조선족 아가씨들이 많이 있다고 소문난 北京시내 B 가라오케.
2개월 전 한국 현지 법인 대표가 마련해 준 자리에서 만난 조선족 아가씨(당시 23세).
옆자리에 앉기는 앉았지만 말도 없고 노래도 못하고 이것 저것 물어봐도 도무지 답변을 못하는 촌뜨기 아가씨였다. 그 후 시간나는 대로 찾아가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고 못 마시는 술도 한잔씩 하고 흘러간 노래도 간간히 함께 불렀다.
일요일-당시 토요일은 휴일이 아니었다-만 되면 이곳 저곳 싸 돌아 다녔다.
귀엽다. 착하다. 뭔가 도와주고 싶다. 하루만 안 보면 좀이 쑤셨다.
술집 주인-관계를 아는지 조선족 주인 아주머니(?)도 정말 반가워 했다-도 없고 아가씨도 없었다. 기본을 시켜 놓고 짝(?)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보니 주인을 찾은 조선족 젊은이 3명이 술병을 깨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주인을 찾아 오라며 울상이 된 여종업원을 마구 다그쳤다.
K씨는 참다 못해 다른 손님도 있으니 조용히 하자 조금 있으면 주인이 올 것 아니냐고 제안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격앙돼 있었다.
그리곤 시비가 붙었고 그날 밤 K씨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처음엔 집단 구타를 당했다고 알려졌으나 나중에는 공기 총에 숨졌다는 소문도 들렸다.
2002년 2월 天津.
*62세의 한국 현지 법인 공장 탈의실에서 한국인 법인 대표가 숨진 채 발견됐다.
*잠옷 차림이었고 온 몸에 둔기에 의한 듯 피멍이 들었고 마대에 덮여있었다.
*공장 내 철제 금고는 깨져 있었고 금고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공장 경비원은 설 연휴 전날인 지난 2월11일 사장님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숨진 이는 95년에 중국에 와 각종 공작기계를 제조, 주로 天津에 있는 한국 기업에 납품해 왔다.
*직원들은 조선족과 한족등 대부분이 중국인.
*현지 공안 당국은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현재 근무중인 직원들과 최근 퇴직자를 상대로 수사 중.
수사 결과를 기다리고 말 것도 없다. 현장에서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면.
가장 최근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 보자.
중국 공안 당국이 어떻게 수사할지는 미지수(?).
보도된 내용만 가지고 뜯어 보자.
1. 피살자 신원
중국 생활 11개월 째인 40대 초반의 건장한 한국인.
한국 직원을 포함해 직원수 1,000명이 넘는 건실한 회사 중견 간부.
가족들은 한국에 있고 지난해 3월 중국에 옴.
2. 피해 상황
유명 호텔 객실에서 3명의 괴한들에게 둔기와 손, 발등을 집단 구타를 당해 의식 불명.
호텔 종업원과 동료들에 의해 새벽 3시경 인근 군부대 병원으로 후송돼 응급 치료 받음.
새벽 6시경 그 병원에서 뇌출혈로 사망.
3. 사건 발생 장소
피살자의 직장과 직책, 그리고 최소한 12층 이상의 호텔이라면 최소한 별 3개 이상-중국의 호텔은 무궁화가 아니라 별1개에서 별5개로 등급이 나뉘고 외국인은 별3개 이상에만 묵을 수 있다-일테니 주변 환경과 호텔 자체 경비 등이 비교적 양호한 곳.
호텔에 동료들과 함께 투숙했었던 것으로 보아 그 회사에서 자주 이용하던 호텔.
이제 일반적인 살인 사건의 범행 동기를 유추해 보자.
1. 금품 탈취
2. 원한 관계-치정관계 포함
3. 우발적인 사건
우선 세 번째 동기인 우발적이었을 개연성은 극히 희박해 보인다.
호텔의 위치와 등급으로 미루어 볼 때 경비 상태가 만만치 않은 곳이다. 게다가 3명이 둔기를 이용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우발적인 범행으로 보기는 어렵다. 말 다툼 끝에 어쩌다 밀쳐서 또는 주먹질 몇 번 한 것이 잘못된 것으로 보기 힘들다.
금품 문제를 생각해 보자.
함께 술자리를 한 동료들이 한국에서 일시 방문한 사람들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술자리에서 달러 뭉치를 술집 아가씨들에게 보였거나 범인들이 피살자가 달러 뭉치를 소지하고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면 범행 동기가 될 수는 있다. 이 경우 사건 발생 장소가 호텔 객실이라는 점이 풀리지 않는다.
"원한 관계"
필자가 집필 순서를 바꾸게 된 동기다. 이번 사건의 경우 이 가능성이 대단히 높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원한 관계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아주 적은(?) 일에서 싹이 트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만명 정도의 조선족이 한국에 머물고(?) 있고 20만명 정도의 한국인이 갖가지 목적으로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현 상황-정확한 통계는 아님-에서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유형이라고 확신한다.
알콜 도수 56도나 38도 짜리 중국 술에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한국에서 동료들이 위문 공연(?) 와 회사에서 외박 허가-십중팔구 기숙사 생활을 했을 터-를 받고 이미 호텔 방을 예약해 놓은 상태.
식사 후 2차로 가끔 들르던 단골 가라오케-최근엔 룸 싸롱이라고 간판을 내 건 곳도 많지만 오십보 백보-에 갔다.
그 가라오케엔 흑룡강성 외진 곳에서 와 6개월 정도 복무원-술집 아가씨-으로 근무하고 있는 조선족 아가씨가 있다. 귀여운 얼굴에 키도 크고 늘씬하다. 최근엔 많이 세련(?)됐지만 지난해 여름만해도 수줍음 잘타고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아가씨.
중국어도 배우고 중국의 이모저모를 귀동냥할 겸 해서 갈 때 마다 옆자리에 앉히게 됐다. 2년제 전문대를 나와 일본어에 컴퓨터도 제법한다. 한국에선 쉽게 만날 수 있는 술집 아가씨가 절대(?) 아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관광도 함께 하고 한국에 다녀 오면서 부담없는 선물도 건네는 등 친동생처럼 스스럼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양주에 노래 몇 곡 부르는 사이 술이 제법 올랐다.
용기(?)를 내어 한국식 3차를 가게 됐고 변을 당했다.
사실 이 정도면 어느 나라에서나 남자 세계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뺨 맞을 소리'라고 해도 할 수 없다. 현실은 현실이니까.
70년대 중반 외국 여행 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시절 "태극기 운운"하던 낭만적인 상황은 중국에선 구석기 얘기다. 인천국제공항에 가보라. 중국행 비행기에 자리가 있는지.
술자리가 겸해진 저녁 식사-1차 2차로 이어지는 가라오케 또는 룸사롱-호텔로 이어지는 야간 정숙 보행 행군(?) 속에 정말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알더라도 중국의 밤 술 한 잔에 간과하는지도 모르겠다.
술 자리에서 서비스하는 아가씨가 한국 술집에서 만날 수 있는 아가씨가 아니라는 함정 말이다.
억장아! 억장아!
다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겠습니다만 중국에서의 '여자문제'는 특히 다루기 힘든 부분이지요. 여름이 지나고 단풍이 들 때 쯤 아주 가볍게(?) 다루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중국 사업 실패의 가장 큰 원인 중하나가 여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전보다 상황이 많이 달러졌겠다고 위안하지만 사고가 계속 터지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과거 일본인도 대만인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지금도 옛 정(?)을 못잊어 철 따라 중국 집(?)을 찾아 오는 일본인과 대만인이 적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업 실패는 이제 문제가 아닙니다.
재기해 보겠다고 인생의 도약 발판을 만들겠다고 맨 땅에 머리를 박아서라도 성공해 보겠다고 오신 분들의 귀중한 목숨이 스러지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목숨이 또 끊어졌습니다. 천신 만고 끝에 사업하려고 중국에 간 분이겠지요.
금년에 만도 벌써 세 번째, 4명이 숨졌습니다. 보도되지 않은 경우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사실 제 주변에만도 행방불명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중국 공안 당국이 한국인이라고 확인, 주중 한국 대사관이나 한국 언론 기관에 통보해 주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또한 우리 대사관이나 영사관은 얼마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할 수 있을까요.
도시 변두리 후미진 곳에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숨이 끊어져 옮겨져 있습니다. 혹 119 구조대라도 동원되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경우라고 가정합시다. 이미 숨져 있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요. 생명의 불씨가 남아 있는 이도 결국 돌보는 이 없어 숨질 수 밖에요. 자기하고 관련이 없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니까요. 어쨌든 뒤늦게 발견됐습니다.
여권등 신분증이 전혀 없습니다. 의도적인 경우라면 신분증을 남겨 놓을리가 더더욱 없겠지요. 여권 값이 현재 한국 3만위엔(한화 5,000,000원), 일본 5만위엔(한화 8,000,000원) 미국 10만위엔(16,000,000원) 선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여권은 남겨 놓을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정말 큰 일입니다. 억장이 무너집니다.
중국의 밤. 정말 외롭습니다.
혼자서 택시를 타고 다닐 정도의 중국어를 하는데다 돈(?) 좀 있고 건강(?)하다면 사나이의 외로움은 더 욱 깊어질 수 밖에요.
사업이 어려우면 괴로워서, 사업이 잘되면 잘 되는 대로, 귀국할 형편이 못되는데 꼭 참석해야 할 집안의 경조사, 남의 속도 모르고 뻔질나게 찾아 오는 고향 손님들과 친구들. 향우회, 동창회등 이름도 희한한 갖가지 명목의 모임들.
식사 자리에 당연히 술이 곁들여 지고 한 사람이라도 '2차'를 제안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본격적인 술자리.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중국 술과 양주-대부분 가짜라는 데도 술맛은 제 맛이 난다나 어쩐다나-, 기발한 재료로 보기 좋게 요리된 기름진 안주. 거기에 한국과 비교-중국 사정으로는 엄청난-할 때 그야 말로 값 싼 술집. 한국에선 꿈도 꾸지 못 할 술집 분위기.
훤칠한 키에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고 영화 "타이타닉" 주제가를 원어로 불러대는 한족 아가씨들. 이들의 서비스(?) 정신은 기가 탁 막히지요.
기차로 17시간 걸리는 깡 시골에서 올라와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순진 무구한 우리 조선족 아가씨들. 적당히 섞어 쓰는 사투리에 웬만한 농담(?)만 해도 까무러 칠 듯 수줍어 하는 모습을 보면 술이 저절로 넘어갈 수밖에. 기본으로 나오는 안주는 또 얼마나 푸짐한지요.
6개월만 지나면 세련된 도시 아가씨가 됩니다. 농담도 받아 넘기고 公,私 문제에 대해 충고(?)도 해주고 외로움과 특히 건강 문제등 걱정이 태산이지요. 그 때마다 술과 노래가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도시에 온지 1년 정도 지나면 옷 차림부터 확 달라지지요. 옷에 머리에 구두까지 핸드백 속엔 휴대 전화와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국인들의 명함. 중요한 사업 얘기가 오가거나 고급 정보-특히 대기업의 투자 관계 정보-가 교환 되는 장소에 버젓이 앉아 유유히 서비스(?)하는 단계에 진입합니다.
그들의 처지를 들어보면 어떻게 해서든 도와(?) 주고 싶고 도와 주다 보면 때때로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도 절로 생기지요.
밤의 유혹을 뿌리칠 장사가 있을까요? 가족 떠나 이국 땅에 온 평범한 남자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 문제에 자신이 없는 분은 중국에 사업하러 가시면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못숨 걸고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혹시 모르겠습니다."
중국에 갈 때 마다 다짐 다짐 또 다짐하지만 자신 없기는 필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선 조선족 동생(?)의 눈물 젖은 사연을 들어 보자.
국내 굴지의 모재벌 L회장이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북한의 풍산개가 명견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막강한(?) 비서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입하라고 명령 했다. 그 중 한 비서관으로부터 풍산개를 구입해 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는 당시로서는 중국통 S씨(당시 47세)가 北京시와 延吉시에 나타나면서 풍산개 사연이 시작된다.
S씨는 수소문 끝에 북한을 손바닥처럼 잘 안다는 재 아르헨티나 교포 K씨를 만나게 됐다.그 때 K씨는 북한과의 사업(?)이 진척이 없었는지 주로 北京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족 동생은 북한 그림-주로 월북 작가의 유작- 관계로 몇 번 만난 K씨의 제안과 함께 풍산개 사진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K씨가 기를 쓰고 구입하려는 풍산개는 白頭山 기슭 고향 동네에서 마주 보이는 북한에 가면 그야말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개 아닌가! 이런 개를 북한에서 두만강만 건너 중국 땅까지 운반해 오면 새끼라도 마리당 1만위엔(당시 한화 100만원)을 주겠다는 것. 강만 얼어 붙으면 이웃 마을 다니 듯 다니는 곳이 북한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北京시내 최고급 호텔에서 1년 가까이 투숙하고 있는 그 분의 간곡한 부탁이자 사업 제안이란 말이다. 왔구나 왔어!
고향 떠나 北京에 와 북한 미술품, 골동품 판매등 닥치는 대로 사업(?)을 하며 때때로 한국 사람들 일을 도와 주던 동생은 꿈에 부풀었다. 그날 밤 한국말을 하는 한족 부인과 상의한 결과 "횡재 중 횡재". 못할 것이 개장사라지만 사업에 뛰어 들기로 굳게 마음 먹었다.
동생은 K씨에게 한달만 기다려 달라고 하곤 외아들을 친지 집에 맡겨 놓고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달려 갔다. 도착 하자마자 북한에 넘어 가 풍산개를 모집할 모집책 4명, 운반책 4명을 선정해 북한 땅에 잠입(?)했다. 한족 부인은 고향 산 속 외진 곳에 풍산개를 임시 보호할 집을 마련해 놓고 남편과 대원(?)들을 기다렸다. 행동 개시 20여일 만에 28마리의 풍산개가 감시(?)의 눈을 피해 중국 땅으로 반입돼 임시 보호소(?)에 성공리에 옮겨졌다. 동생은 北京에 긴급히 전화를 했다.
K씨가 드디어 도착했다. 누추한 시골 산 속 마을에 말이다.
풍산개가 있는 보호소에 가서 숫자를 확인하고는 北京까지 풍산개를 운반할 차량을 준비하라고 해 차량을 준비했다. 출발 준비가 끝나자 K씨는 "황급히 오느라 5000달러(당시 인민폐 40,000위엔) 밖에 갖고 오지 못했다. 北京에 도착하자마자 나머지 3만달러(당시 인민폐240.000위엔)를 송금해 주겠다."고 했다. 난감했다. 지금까지 들어간 돈도 여기 저기서 가까스로 빌린 돈인데 이를 어쩌나. 그래도 틀림없는 분이니 믿어보자. 다른 길도 없잖은가!
우선 급한 불은 5000달러로 해결하면 되는 것 아닌가. 동생은 운반책 2명을 K씨와 함께 北京으로 가 돈을 받아 돌아 오라고 조치했다.
5일 만에 운반책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北京까지 풍산개를 무사히 운반, 北京과 天津 사이의 시골 마을에 개들을 모셔(?) 놓고 K씨가 정해 놓은 호텔에 묵고 있는데 호텔비는 물론 식비 및 생활비등 돈을 한푼도 주지 않아 반 거지 생활(?)을 하고 있다. 풍산개가 도착하면 당장 사겠다던 사람이 급한 일이 생겼다며 한국으로 돌아가버려 그 사람이 올 때까지 풍산개 값은 물론 생활비도 줄 수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K씨가 차일피일 한다는 것.
울화가 있는대로 치밀었다. 모든 경비를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리고 10여일 뒤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우리가 K씨에게 넘겨준 것으로 보이는 풍산개 중 몇 마리가 이미 한국으로 넘어가 한 마리당 1천만원에 거래가 됐을 뿐 아니라 한국의 각종 매스컴에서도 풍산개 관련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는 것.
3만달러를 못 받아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황이지만 풍산개 한 마리에 1000만원이라니. 1백만원 짜리가 1000만원.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절대로 도망 갈 K씨는 아니지 않은가? 어디를 봐도 그럴 분은 아니지.
받을 돈은 다음에 한꺼번에 받기로 하고 우선 풍산개를 더 확보해야지. 당연하고 말고.
동생은 北京에 있는 모집책들에게 전화해 하루 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그들이 도착하자 모집책, 운반책등을 추가로 구성해 풍산개를 긁어 모았다. 한달이 안돼 산속 비밀 보호소에 50여 마리의 풍산개가 모아졌다.
한국 매스컴에 풍산개 보도가 잇따르고 이 사실이 북한 정부 당국에 알려지자 북한 정부는 풍산개 밀 반출자 색출에 혈안이 됐다. 덩달아 중국 정부에서도 풍산개 밀 반입자 검거에 나섰다. 만나기만 하면 풍산개 풍산개 하던 사람들이 모두 잠적해 버렸다.
동생도 그동안 갚지 못한 빚과 나중에 돈을 주기로 하고 같이 일한 사람들 등살 그리고 숨겨 놓은 풍산개 때문에 불안, 초조속에 날을 지새다 北京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2년 뒤 北京.
K씨를 찾아 나머지 240,000위엔(당시 한화 2400만원)을 받아 낸 후 박살 내버리고 말겠다는 복수심이 어렴풋 할 즈음 동생은 北京시 변두리 방값이 싼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K씨를 만났다. 위세 당당하던 분이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고선 사정 조로 말을 이었다.
풍산개를 사겠다던 한국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이해해 달라. 다른 사업도 제대로 안돼 장기 투숙하던 호텔에서도 쫓겨나 이 곳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정말 미안하다. 조선동포 가운데 외국에 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고 해 지금은 인력 송출 사업을 벌이고 있다. 갚아야 될 240,000위엔 대신 남미로 갈 수 있는 여권을 만들어 줄테니 의향이 있으면 동의만 해라. 절대로 손해는 아니다. 남미에 가지 않겠다면 1개월만 기다려 달라. 한달 내에 돈을 갚겠다나 어쨌다나(?).
그날 밤 동생은 부랴부랴 필자에게 달려와 자초지종은 말하지 않고 "남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가보지도 않은 나라에 대해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영어 한마디 못하고 확실한 취직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권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필자의 말을 들었는지 동생은 계속 北京에서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97년 말 필자에게 전모를 털어 놓을 때 까지 풍산개에 대해선 서로 별 말 없이 지냈다. 필자가 풍산개와 연관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테니까.
K씨와 연락 두절은 당연지사였다.
네 이놈 백두야! 한라야!
97년 12월 말 北京시 朝陽구 변두리 허름한 식당.
듬직한 덩치의 조선족 동생(?)과 닭도리탕에 술 한잔 곁들이며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중국 사람들의 동물 사랑 이야기로 이어졌다. 동물 가운데도 중국인들의 새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겨울이 지난 새벽 공원에 나가면 손에 손에 새가 들어있는 새집을 들고 나와 새소리 경연 대회-새집을 통째로 보자기로 싸서 가지고 와 보자기를 풀고 새집을 나무에 메달아 놓으면 그 때까지 잠잠하던 새들이 시합을 한다-를 펼치는 노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한 여름엔 낮에도 공원에 가면 볼 수 있다. 새 얘기 끝에 무지 영리하긴 한데 코가 너무 납작해 무던히 못 생겼다는 평을 듣는 중국 개가 대화 안주로 등장하게 됐다.
필자도 개 얘기라면 빠질 수 없는 처지. 어릴 때 시골에서 키운 개-얼룩이와 누렁이-가 얼마나 반기며 따르는지. 동생이 없는 필자는 그 놈들을 동생처럼 데리고 산정호수(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주변 강과 산으로 마구 놀러 다녔었다. 중국에 오기 전에도 두 아들이 아파트에서 키우던 개-샘-를 너무 좋아해 사철탕을 먹지 않는 비사파(?) 처지였다.
중국에 와선 너무나 우연한 기회에 그 유명한 풍산개를 구입하게 돼 천신만고 끝에 서울까지 반입하는데 성공한 전력(?)도 쌓은 터. 첫 번째 중국 여행인 백두산 관광까지 포함 3번째 중국 방문 길에 살아 있는 풍산개 1쌍- 백두와 한라, 당시 한라는 새끼를 밴 상태-을 무사히 서울로 운송했다는 자부심(?)도 없지 않았다. 물론 놈들을 배편으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양면성을 최일선 현장에서 처절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었다.
그 기회가 중국과의 인연을 깊게 맺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인천 동물검역소 통관 과정에서 한라가 귀여운 새끼 5마리를 낳아 '길조 중에 길조' 라는 돌팔이 친구의 예언이 크게 작용한 탓도 있었으리라.
필자의 풍산개 타령-이 대목에선 필자의 울대가 치밀곤한다-을 듣던 동생은 풍산개를 판 사람이 누구냐 언제쯤 샀느냐를 물어 보더니 "그 새끼 잡아야 하는데!" 고함을 치면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영국 찰스 황태자와 대학을 같이 다녀 절친한 동창관계라는 재아르헨티나 교포(???) K씨(당시 42세)가 北京에 나타난 것은 한중수교 직후인 93년 말. 당시 北京에서 제일 비싸다는 호텔-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단골로 이용-에 장기 투숙하면서 그야말로 비까 번쩍했다. 웬만한 주재원들도 그의 풍체와 외모, 조금 어눌한 말투, 손 큰 씀씀이에 기가 죽곤했다.
호텔비와 식비, 술 값 만도 가히 천문학적(?) 숫자에 달할 수 밖에.
1.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대학 동문이다.
2.북한의 최고위 인사와도 일년에 몇 번씩 만나는 재미 여성 언론인의 양아들이다.
3.YS의 사위가 될 뻔 했으나 야당 총재의 딸과 결혼하면 사업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하지 않았다.
4.유태인과 합작으로 스위스에 보석상을 차려 홍콩을 포함한 전세계에 1백여개 보석상을 운영하고 있다.
5.북한에 돈이 되는 희귀 보석 광산이 있다는 말을 러시아 고위층 인사로부터 전해 듣고 보석 광산 개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北京에 와 북한측 고위 인사들을 만나고 평양도 자주 왕래한다.
6.1년 가까이 체류하느라 돈이 많이 들었지만 보석 문제만 해결되면 별 문제 아니다.
동생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귀로 들었다는 얘기를 전했다.
필자가 K씨로부터 수차례 들은 내용과 거의 마찬가지 내용. 확인하고 말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직접 평양에 가서 골라 왔다는 풍산개라고 해서 구입했던 것인데.
찰스황태자와 재아르헨티나 교포(?) 그리고 동생, 백두와 한라와 필자. 억장이 무너진다.
세상 참 좁고도 좁다. -계 속-
조선족을 철저히 무시하라 5…부끄러운 얼굴 4
-한국피를 바꾼 재미교포-
부끄러워도, 눈물이 날 정도로 부끄러워도 이젠 알아야 한다.
무엇이 잘못 됐는지를 아는 데서부터 살 길이 보일테니까.
93년 10월. 北京 天安門 광장 바로 옆 그 유명한 별 5개-우리는 무궁화로 표시하는 호텔
등급- 北京호텔 최고급 객실.
"20년 전 미국에 이민 가 처음엔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이민 5년 째 한국 식당을 개업, 돈을 모을 만큼 모았다. 미국에서는 제법 자리를 잡았다." -중략-
"재미교포 사기꾼을 만나 4차례나 당하고 말았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찾아 와 살길을 열어 달라고 해 자금을 투자했으나 번번이 돈만 날렸다."-중략-
"이제 한국인이라면 이가 갈린다. 내 몸에 있는 한국 피를 모두 바꿨다 생각하고 살고 있다. 이번에 중국에 온 것도 재미교포에게 날리고 남은 자금을 투자해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들과 사업을 벌이기 위해 왔다."-중략-
"현재 여러분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아직도 순수하고 착하기 때문에 시키는 데로 사업을 열심히 하면 돈도 벌고 미국에 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
박수를 치고 싶었지만 회장님과 수행원들의 태도가 너무 엄숙해 마음속으로 고마움만 새겼다. K, P, L씨 등 5명의 조선족 동포들은 정신이 멍했다.
그리곤 열심, 열심을 다짐하고 다짐했었다.
재미교포 L씨(당시 51세)는 처음부터 다른 한국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회장님은 통역으로 일할 조선족 동포를 고르는 데서부터 까다로웠다.
식사며 술자리도 최고급으로 했고 술집에서 팁도 줬다하면 100달러, 수행하는 재미교포(?)가 항상 3~4명이나 됐다.
한국인과 만나는 것보다 중국의 고위 관리나 북한측 고위층을 만나러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중국 고위층을 만날 때도 영어로 상담한다고 해 통역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었다.
회장님이 보여주는 사진첩에는 식당인 듯한 장소에서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 등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수두룩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분이 중국에 오신 것.
회장님은 북한의 생수를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과 백두산 개발, 디즈니랜드 같은 대규모 놀이 시설 건설 등의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표시하고 추진하는 듯 했다.
체류 15일쯤 됐을까?
회장님이 갑자기 전직원 회의를 소집하셨다.
"10일 뒤 한국을 들러 미국에 다녀 오겠다. 좋은 곳에 사무실을 차릴 준비를 해라."
"한국과 미국의 높은 분들에게 선물을 해야 하니 각자의 고향이나 친지들에게 연락해 최고급 한약재를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하라."
중국에서 큰 사업을 하실 돈 많은 회장님이시니 당연히 한약재 값을 주고 가실테고 이럴 때 능력을 인정받아 앞으로 회장님 밑에서 제대로 사업을 해 봐야지. 가슴이 벅찼다.
한약재의 천국(?)인 중국이라지만 진짜 한약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나 가족, 친지의 이름으로 한약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웅담 중에서도 황담에 녹용, 사향, 코뿔소 뿔, 호랑이 뼈, 곰 오른쪽 발바닥 등 그야말로 진귀한 한약재들을 모았다.
출국 예정 2일 전.
회장님께서 다시 회의를 소집한 후, "그 동안 귀한 분들에게 선물할 한약재를 모으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이번에 경비를 너무 많이 썼기 때문에 한약재 값은 한달 뒤 다시 와서 줄테니 구입한 한약재 값을 써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회장님이 누구신가? 이왕 보증을 서고 모은 것이니 한달 만 기다리면 된다. 이번에 엄청나게 경비를 쓰신 것을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제출한 한약재 값은 무려 10만 위안 (당시 한화 1100만원). 한국에선 구하기도 힘들지만 사려면 족히 1억원을 받을 수 있는 귀한 한약재였다.
회장님은 수행원들과 예정대로 출국하셨다.
그리곤 주고 간 명함 전화번호에선 회장님을 모른다고 했고 사무실 준비도 백두산 개발도 모두 물 건너갔다.
남은 것은 빚. 그리고 원한.
회장님 사진첩에서 꺼내 주고 간 사진을 필자에게 보이며 미국에 연락할 수 있으면 회장-님이라는 말이 놈으로 바뀐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말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히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의 모습이었다.
회장님을 찾으면 그 다음 수순은?
"회장님 몸 보신 한번 제대로 했소이다 그려."
조선족을 철저히 무시하라 4…부끄러운 얼굴 3
96년 8월 말.
백두산-중국에선 長白山이라 함-천지를 관광할 수 있는 철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북경의 제법 큰 여행사 한국부에 취직, 백두산 관광하러 온 한국인을 전문적으로 안내하던 Y씨(당시 23세). 고향이 吉林省 延邊조선족자치주 延吉시 인근 마을이어서 안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번 여름 벌써 2차례 단체 관광객을 모시고 관광을 다녀와 재미도 있었고 수입(?)도 짭짤했다.
그런데 막차에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평생 회복하기 어려운 낭패를.
혼자 백두산 관광을 와 천지 관광을 마친 한국인 L씨(당시 52세 모 연구소 연구원)와 저녁을 먹으면서 Y씨는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수많은 한국인을 안내하고 술을 곁들인 식사-날씨가 혹독한 동북 3성의 식사 상에는 손님이 거절하지 않는 한 술이 기본적으로 나온다-를 함께 했지만 이 분처럼 해박하고 자상한 학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 중국과 한국의 관계, 나아가 동아시아, 미국과의 관계 등을 설명하는 구절 구절이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명 연설(?)이었다.
우리 민족이 왜 우수한가를 역사적으로 풀어 낸 후 중국 내에서의 조선족 위상을 제고해야 한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한민족이 서로 돕고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는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延吉로 오는 길에 和龍시를 막 지나는데 L씨가 갑자기 어지럽다며 머리를 감싸 안고 안절부절 난리가 났다. 부랴부랴 延吉시로 모시고 와 병원으로 안내했다.
치사율이 아주 높은 패혈증이란다.
아뿔싸 일이 벌어져도 아주 큰 일이 벌어졌다.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우리 민족이 다시 뭉쳐 국제 사회에서 힘을 키워야 한다.
*한국인과 조선족, 나아가 남과 북이 뭉치기만 하면 중국도 일본도 태평양 건너 미국도 우리를 무시할 수 없는 시대가 온다.
*그 옛날 말 타고 호령했던 만주 땅을 다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은 여러 면에서 어렵지만 한국인과 조선족이 두 손을 꼭 잡아야 한다.
*이 같은 역사적인 사명감을 안고 백두산을 찾은 것이니 당장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꾹 참고 특히 시간을 쪼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엊저녁 식사 자리에서 들었던 그 분의 확신에 찬 웅변이 귀에 쟁쟁했다.
조건 없이 살려야 한다. 지상 과제였다.
입원 20여일 간 부모 친지들을 설득 거금 1만여 위안(당시 한화 100만원)의 치료비를 썼고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는 고향집으로 모시고 가 그야말로 극진히 병간호를 했다. 가까스로 원기를 회복한 그 분은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꼭 갚겠다"며 "한국에 가서 취업해 돈을 벌겠다니 귀국하는 대로 한국 입국 절차와 취직할 회사를 알아 본 후 연락하겠다"고 한 후 무사히 귀국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한국.
가신지 일 주일도 안되어서 그 분에게서 낭보가 날아왔다.
모든 절차와 월급도 많이 주는 회사를 알아두었다.
고국이라 해도 초행길에 한국에 혼자 오면 적적할테니 고향 동네 사람 가운데 한국에 오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몇 사람 같이 올 준비를 해라.
필요한 서류와 돈을 준비해서 瀋陽으로 나오라.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몇 사람이 아니라 수십 명이라도 희망자를 구할 수 있는 형편 아닌가? 퇴원 후 집에서 가료 받을때 얼굴을 익힌 동네 사람들도 그 분과의 인연과 인품을 다 아는 터.
동네 친구, 학교 선후배 17명으로부터 필요한 서류와 평생 처음 만져 본
30만 위안(당시 한화 3000만원)을 받아 약속한 瀋陽에 달려가 그 분에게 건넸다.
그 분은 "여권과 비자 만드는 수속을 끝낸 후 한국에 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연락할테니 한국에 올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 " 며 마치 친동생처럼 다정히 어깨를 감싸 안아 주고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가서 그 분이 준비해 놓은 회사에서 한 2년만 열심히 근무하고 오면 번듯한 식당을 하나 차릴 수 있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같이 한국에 갈 동지들끼리 모이면 머리를 맞대고 인생 설계를 뜯어고치곤 했다.
그 같은 하루하루가 어언 6개월이 지나버렸다.
기대와 희망이 실망과 분노로 바뀌고 말았다.
빚쟁이에 쫓겨 고향을 등진 사람, 부부 싸움 끝에 이혼을 할 수밖에 없어 가정이 파탄난 사람, 도박에 술주정뱅이, 폐인이 된 사람 등등. 瀋陽에 혼자 가 그 분에게 돈을 건네 준 Y씨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기꾼 하수인으로 몰렸다. 그 사람들이 허구 헌 날 Y씨 집으로 찾아와 부모들에게 돈을 물어내라고 행패를 부리기 일쑤여서 가족 전체가 더 이상 고향에 살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사건 발생 1년 반이 지난 98년 초 피해자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피해자 가족들이 모여 모임을 결성해 `한국 초청장 사기 피해자 협회`에 진정, 유관단체가 나서 정확한 피해조사 및 L씨와 한국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다.
아! 모진 백두산의 인연이여.
조선족을 철저히 무시하라 3…부끄러운 얼굴-1,2
부끄러운 얼굴 1
2001년 12월 초.
다시 가지 않을 것 같았던 베이징에 갔다. 체류할 당시 교회도 가깝고 교통이 아주 편해 자주 가던 식당에 앉았다. 유난히 억센 사투리를 쓰는 초로의 한국인 주인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주인 얼굴이 떠오른다.
98년 3월.
중국 국무원-우리의 행정부-과 국영 언론사 고위직과 가깝다고 자랑하는 그분은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점(?)잖았던 분이었다.
그런데 산 넘고 물 건너 베이징까지 와 그 식당에서 근무하는 조선족 종업원들에게는 그야말로 저승사자-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야`, `자`는 기본이고 그만한 어른 입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쌍소리가 난무했다. 주문을 조금 늦게 받거나 식사가 끝난 상을 늦게 치우고 걸려온 전화를 조금 오래 받았다하면 경치기 일쑤. 다음 달에는 다른 일 자리를 알아 봐야 했다.
일자리가 아무리 싫어도 자리 바꾸기가 쉽지 않다. 마땅한 일자리 찾기도 쉽지 않지만 이미 소개인 에게 소개비로 건네준 몇 달간의 월급은 어디서 보충할 것인가? 참고 견뎌야지.
3월 어느 날 바로 그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까지 10여명의 종업원이 그 호랑이 사장님이 없는 틈을 타 역적 모의(?)하는 방 바로 옆방에서 그들의 모의 내용을 귀동냥하고 말았다. 그리곤 도망치다 시피 식당을 빠져 나왔다.
얼굴이, 필자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가 돼진가? 더 이상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모두 식당을 옮기고 사장을 공안에 고발하자."
매일 매끼 그렇게 하기야 했겠는가? 늦게 본 아들을 중국에 데려와 공부시키고 있는
`자식 있는` 어른이 자식 같은 나이의 사람들에게 말이다. 종업원들 입장에서 그 무서운 공안(?)에 고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 아닌가?
그 날 밤 필자는 종내 잠을 설쳐야 했다.
부끄러운 얼굴-2
"금년부터는 제가 주인을 분별 선택하지 과거처럼 한국이란 두 글자에 목이 메여 모시면서 쫓아다니지 않겠습니다." -중략- "저는 천진에서의 약속을 복음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뿐인 여직원도 봉급 문제로 다른 회사에 빼앗겼고 현재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생존 자체가 문제입니다."
95년 12월. 우리 회사 조선족 직원이 불쑥 내민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조선족 직원의 외삼촌이 필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 편지를 편지 봉투에 적힌 한국인에게 전해달라는 것. 전화, 팩스 모두 끊겼는지 도무지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94년 3월. 한국 굴지의 철강회사 회장이라는 분을 통역인 신분으로 만났다. 통역을 하면서 그분의 인품과 사업열의, 한국에서의 영향력 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제안대로 베이징 지사장을 맡기로 했다. 거액의 월급과 기사가 있는 승용차, 4-5명의 직원. 생각만 해도 꿈만 같았다.
그 분이 건네주고 간 돈으로 사무실을 꾸리고 직원들을 뽑았다. 그리고 가까운 친지 돈을 끌어들여 山東省으로 가 회장님이 명령한 업무를 깨끗이 마무리 짓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회장님의 하회(?)를 기다렸다.
급한 일이 있으니 천진으로 오라고 해서 천진으로 달려가 회장님을 잠깐 만났다. 통역에 사람 소개에 최선을 다했다. 서울에 가야한다고 하면서 하는 말.
주려고 가져 온 돈을 다른 곳에 모두 써 버려 약속한 돈을 이번에 주지 못한다. 한국에 가는 대로 약속한 돈과 출장 다닌 경비 등을 충분히 보내 줄테니 다시 한번 출장 가서 물건을 확인하고 필요한 직원도 더 채용하라. 그러면 그렇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신 게지.
어렵사리 다시 한족 친구들로부터 빚을 내 명령을 수행한 후 돈 올 때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다.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으나 걸때마다 다른 사람이 받아 회장님께 전해 줄테니 걱정 말고 일만 열심히 하란다. 얼마 지나서는 전화 받는 사람조차 없다.
그러기를 이미 반년. 조선족 친지 돈은 사정사정 채근을 무마했다. 그러나 당장 돈이 오면 주겠다고 한족 친구들로부터 빌린 돈 때문에 사무실은 물론 집에도 못 들어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사정이니 이번에 한국 가시면 그 분에게 편지와 함께 이 곳 사정을 전해 달라는 것.
서울에 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했으나 불통. 그 철강회사에 전화를 걸어 회장님을 찾으니 그런 분은 애당초 없었단다.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그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아! 억장아.
조선족을 철저히 무시하라 2
이제 각론으로 들어가자.
1차 계획을 52회 연재하는 것으로 잡았으니 이 글을 쓰고 나면 앞으로 48회가 남아 있습니다. 48회를 강조하는 이유는 아시겠지요.
세 번째 칼럼에서 표현한대로 총명한데다 갖가지 이유로 친북 성향이고
한족이 아닌 조선족.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생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을 아래와 같이 다루어 보라.
돈 좀(?) 있고 멋쟁이(?) 한국 사람이 "한국 놈"으로 자리 매김 되는 순간이다.
당연한 결과로 사업은 망하고 또 다른 한국인들도 망하게 되는 것.
업무 외적으로 다루는 방법
1.잠자리 복장 차림으로 출근하는 조선족 직원을 맞으라.
2.가급적 영어를 많이 쓰고 "야""자"에 "그것도 못하느냐?", "이런 것도 모르느냐?"는 식으 로 기회 있을 때마다 체면을 구겨라.
3.용모나 신체적인 단점들-키, 치아 색깔, 두발 상태, 목욕하지 않음, 복장, 신발등-을 반농 담하는 척하면서 자주 지적하라.
4.한국인끼리 모여 "중국놈들", "중국 아직 멀었어" 하면서 중국과 중국인을 낮추는 표현 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사용하라.
5.다른 한국 회사에 다니는 조선족 친구를 채용하고 싶으니 대려 오라고 계속 윽박 질러라.
6.조선족 직원이 보건 말건 시도 때도 없이 고스톱을 치고 잔심부름을 위해 정시에 퇴근 시키지 말고 돈이 떨어지면 조선족 직원에게 돈을 빌려 갚지 말아라.
7.한국인끼리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찍은 사진 현상을 조선족 직원에 게 시켜라.
8.식사, 술자리를 가급적 피하고 어쩔 수 없이 동석하게 되면 값싼 것으로 시켜라.
9.조선족 직원들과 함께 가라오케를 자주 가라. 2년만에 베이징에 가보니 가라오케 간판 일색이던 술집이 이제 본격적으로 룸살롱과 비즈니스클럽이라는 간판까지 걸려 있는데 예약하지 않으면 가기 힘든 집도 적지 않단다. 그곳에서 조선족 술집 여 종업원을 한국 룸살롱에서 하는 것처럼 다루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라.
예로부터 가무를 즐긴다는 민족답게 야밤에 술집을 전전하는 한국인들은 생각을 다잡아야 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에 따른 폐해는 설명할 수가 없다. 한국인이 있는 곳에 사우나와 룸살롱이 있고 바가지에 무뢰배들이 필수적이라는 비방을 언제까지 들어야 할지 난감하다.
10.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유명 인사를 자주 비방하고 마치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한국인은 엽전이라고 스스로 비하하라. 한편으론 한국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유명인사와 친분이 깊다는 것을 과시하라.
업무적으로 다루는 방법
1.중국 관공서와의 관계를 전적으로 조선족에게 맡긴 후 과정을 확인하지 말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라.
2.한족의 업무 처리 능력과 비교하면서 그들의 아픈 심장을 긁고 긁어라 .
3.출근이 늦었다고 얼차려에 이어 엎드려 뻗쳐를 시키는 등 욕설과 구타를 일삼아라.
4.채용할 때 맡긴 업무 외에 아무 일이나 시키고 돈 되는 사업을 찾으라고 다그쳐라.
5.중국에선 안 되는 일이 없다는데 그만한 일도 처리하지 못하느냐 며 수시로 호통을 치라.
6.얼마 후 월급도 올려 주고 한국에 보내 주겠다는 등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자주해라.
7.업무 처리를 하다 다쳤을 때 치료비를 월급에서 공제하고 그 이상은 알아서 하라고 하라.
8. 호구(戶口)-한국의 주민등록 같은 것인데 2-3년 전의 경우 베이징 호구를 갖으려면 한화 500만원 이상 드는 것으로 알려 짐-가 없어 긴급 단속을 피하느라 출근을 못하면 가차없이 해고하라.
9.금고 열쇠, 중요 서류 및 장부와 사무실, 사업장 열쇠 등을 전직원이 공유하라. 그리고 우리 직원들은 모두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라.
10.경비를 지출하기 전에 일일이 그 지출 이유와 액수를 확인하지 말고-제법 대범한 척 하 며-지출 후 필요치 않은 비용이었고 너무 많이 썼다고 욕설을 퍼부어라.
11.비서직 조선족 여직원을 가급적 용모를 보고 뽑은 후 다른 직원보다 늦게 퇴근시키고 둘만 남으면 피로하다며 안마를 시켜라.
그리고 중국에서 뿐 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조선족을 무시하라.
고향 떠나 이른바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오는 조선족들을 공항 입국 심사 과정에서부터 무시하고 떠날 때까지 한국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도록 하라.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고향의 친인척들이나 한국에 나와 있는 친지들과 전화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이다. 전화를 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입장에서 당한 일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으로 남고 만다. 사실보다 부풀려 질대로 부풀려진 상태로.
억장이 무너진다.
조선족을 철저히 무시하라 :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사업을 위해 중국에 간 한국 사람은 어떤 지방, 어떤 업종이거나 간에 조선족을 만나게 된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중국어를 제대로 터득하고 간 사람도 상당 기간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최근 유학 생활을 마친 젊은이들-중국인 아니 한족과 통역없이 심각한 사업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젊은이들-이 사업 현장에서 정신없이 뛰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대견하다. 이제야 한국과 중국 사이에 무엇인가 결실이 맺어 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족 말도 말아라. 순 도둑놈에 거짓말쟁이들이다."
"직원이라 하더라도 군대 졸병처럼 엄하게 다뤄야 한다."
-상당수 한국인들-
"한국 놈들은 모두 사기꾼이다. 모두 쓸어 버려야해."
"한국 놈 돈은 먼저 보는 놈이 임자다. 단물 빼 먹고 깡통 채워 보내면 된다."
"한국이 우리에게 해 준 것이 뭐 있냐? 없어도 북조선이 낫다."
-상당수 조선족들-
등만 돌리면 이같이 헐뜯는다. 말뿐이 아니다. 도둑질은 말 할 것도 없고 강도에 사기, 폭행, 살인 등 실제로 엄청난 피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도 조선족은 한국으로 한국인은 중국으로 물밀 듯이 몰려가고 또 몰려오고 있다.
조선족 그들은 그들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베이징의 중앙민족대학 황유복 교수는 월간 중국민족지 2001년 6월호에서 "조선족이란 호칭을 조선민족의 약칭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에 대한 전문 호칭, 즉 국적과 민족 출신을 동시에 표시한 호칭"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어 " 1928년7월9일 중국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채택된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문에서 최초로 조선민족을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후 고려인, 한국인, 조선인등으로 사용되다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면서 조선족이란 호칭이 확정됐다고 볼 수 있다"며 "조선민족의 중국 이주 시점을 1870년쯤으로 본다면 무려 80년만에 조선족이 중국인이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수 11번째인 조선족은 현재 2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이른바 동북 3성이라는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에 밀집해 살고 있다. 최근에는 베이징, 티엔진, 상하이등 한국인들이 몰려드는 대도시와 한국으로 젊은이들과 가정주부들이 대거 빠져나가 대부분의 조선족 마을이 노인과 어린이만 남아 있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들은 일제시대 이전에 주로 농사 지을 땅을 찾아 이주해 온 농부, 항일 독립 운동에 직 간접적으로 투신했던 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이주 당한 농민들의 후손들. 그밖에 어떤 이유로든 한반도에 있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태어난 나라에서 가족, 친지와 오순도순 살수가 없어 국경을 넘은 이들의 후손임에는 틀림이 없다. 당시 만주라고 불리웠던 곳을 지금 가보라. 쌀 농사를 중시했던 사람들이 살기에는 정말 적합한 곳이 아니지 않은가? 그 추운 날씨하며 산은 왜 그리 높고 험한지.
한국전쟁 결과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고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여에 따른 사상적, 외교적 중조동맹(중국과 북한사이의).. 특히 전쟁의 폐허에서 허둥대던 한국과 비교할 때 형편이 좋았던 50-60년대 북한의 경제 사정 때문에 음으로 양으로 북한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조선족의 입장 등을 감안하면 조선족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조선족은 중국인
-조선족은 친북 중국인
-조선족은 총명한 친북 중국인
-조선족은 총명한 친북 소수민족 중국인
-조선족은 총명한 친북 소수민족 돈이 급한 중국인
중국 마약(?) 그 허와 실-2
중국 가서 성공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망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중국의 가능성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1992년 한중 수교 후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족과 소수민족 사이의 갈등, 나날이 극심해 지고 있는 지역간 빈부의 격차, 개방 정책에 따른 서구 자본주의 영향 등의 이유로 소련에 이어 중국도 곧 분열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분열까지는 아니더라도 분열을 희망하는 세력 및 집권 공산당 내부의 갈등 또는 공산당과 군부의 갈등 등의 이유로 상당 기간 정치가 불안할 것이고 그에 따라 초기 산업사회에 진입하려는 중국 경제는 그야말로 종이 호랑이(?)일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에 정치, 외교, 군사적으로 미치는 중국의 영향이 절대 중요한 정부 입장이 아니고서야 사업하러 중국에 갈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결론은 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 상황은 당시와 비교, 상전벽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형국이다.
시뻘건 글씨로 여권에 好色漢(?)이라고 찍히면 큰일이라며 남자들끼리만 수군수군 대며 다니던 수교 이전의 개척자들(?)과 수교 후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중국의 중심부와 동북3성-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을 누비던 분들. IMF 이후 중국의 가능성을 감지하거나 국내에서의 상황이 여의치 못해 중국 땅을 선택한 분들.
중국으로 가게된 동기와 시기, 목적, 안내인등 사람마다 제각각 일 수 밖에 없겠지만 공통된 부분을 추려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중국에 대해 너무 몰랐고 그렇기에 준비를 거의 하지 않고 한마디로 중국을 만만히 보고 너무 깊숙한 곳까지 가곤 했다. 크거나 작거나 간에 사업을 하러 중국에 간 분들은 중국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스스로의 문제점-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절제한 생활태도, 우리 특유의 성급함, 안하무인격인 협상태도, 안되면 돈으로 되게 하려는 비정상적인 업무태도 등등- 에다 중국 아니 중국인을 가볍게 볼 수밖에 없었던 갖가지 이유로 인해 적지 않은 사람이 실패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 사업을 하려 해도 수업료는 당연히 내야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수업료를 누가 더 적게 내고 강의 기간이 얼마나 짧으냐는게 문제다. 문제는 중국에서의 수업료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수업료뿐인가?
문은 열렸다지만 엄연히 사회주의 국가이고 200만이 넘는 우리 동포가 살고 있으며 한국보다는 북한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는 국가라는 사실-이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이 문제를 더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어떤 이유보다도 중요한 원인은 중국에서 조선족이라고 불리 우는 우리(?) 조선 동포-정확한 명칭과 개념이 정립돼야 한다. 조선족이란 호칭은 한국인과의 관계에서만은 조선족 스스로가 기피하는 말- 와의 관계 때문에 사업이 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패가망신, 나아가 목숨까지 빼앗기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중국 사회에서 사업에 필요한 중국인을 만나기 위해선 중국말을 하는 한국인 즉 2백만 명에 달하는 조선 동포가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 꼭 필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한민족 특유의 끈끈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필자는 지금도 대기업이 아닌 한-사실 대기업도 사정은 거의 마찬가지-능력 있고 믿을 만한 조선 동포를 만나는 행운이 없는 한 중국에서의 사업 성공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망하는 법의 첫 번째 원인을 "조선족을 철저히 무시하라"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망하는 법을 소개키로 한다.
조선족 문제도 조선족 남자, 여자 문제로 나누어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한 후 조선족도 포함하는 중국인과의 문제, 한국인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중국의 법과 제도 및 관행, 풍습 등의 순으로 칼럼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물론 망하지 않기 위한 골육지책이라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하고서 말이다.
중국 마약(?) 그 허와 실
제대로 한번 망해 보려면 중국에서 망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빈털터리가 되거나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감옥에 갖힌 다음에도 도무지 망한 이유를 알 수 없어 한숨만 내쉬어 본 경험을 해본 한국인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분을 삭이고 삭인 후 다시 한번 없는 돈을 박박 긁어 모아 중국으로 날아 가고 마는 "중국 마약"의 강도는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키 어렵다.
다시 또 망하고 도망치듯 나오는 베이징의 수도공항과 상하이의 홍교공항 그리고 눈 깜짝할 순간에 도착한 김포공항-이제는 인천국제공항-의 청사 건물들은 왜 그리 날렵해지고 멋있는지. 그 때마다 하늘은 유난히 흐리고 덥거나 찬 바람이 쌩쌩이는지 알 수가 없다.
중국에 5년 살다가 왔다고 하면 백이면 백 "중국서 성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하면서 필자의 스산한 마음을 달래주면서 격려한다. 듣는 이의 쓰라린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이다. 그리곤 얼마 동안 연락이 끊기는가 하면 뒤늦게 나타나 중국 다녀 왔다고 하면서 "그래도 중국밖에 없다"며 침을 튀긴다.3년 전 여름 무던히 덥던 날 김포공항에 도착한 필자와 집사람 그리고 두 아들에게 남아 있는 전재산은 통털어 3950달러였다. 그것도 한국의 선배와 친구들이 철수하는데 쓰라고 황급히 마련해 준 돈이었다. 한마디로 빚만 남산만큼 지고 귀국한 것. 큰 아들은 선배 집에, 작은 아들은 손아래 동서집에 우리 부부는 손위 동서집에서 한동안 재기의 칼날을 갈아야했다. 서울의 집은 물론 가까운 친인척의 군자금(?), 결혼 후 5년만에 결혼 당시는 전셋집이어서 사주지 못했다며 뒤늦게 장모님께서 결혼 선물로 사주신 피아노까지 중국으로 가지고 가 날리고 말았다. 지금 누가 모차르트를 치고 있을지..... 귀국 2년 후 지난 해 6월 다시는 가지 않을 것 같던 베이징에 갔다. 이번에는 굴뚝산업이 아닌 국내에서 "묻지마 투자" 붐을 일으키고 있던 이른바 IT(정보통신) 사업 관계로 베이징의 테헤란로라는 중관촌이 주 무대였다.
3번의 방문 끝에 내린 결론은 3년이 지난 것과 굴뚝사업가가 정보통신 사업가로 바뀌었을 뿐 한국인이 망하는 상황은 마찬가지라는 것.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이동통신 사업과 관련, S성(省)에 1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계약한 대로 사업이 성공하면 50대50으로 한국 측의 지분을 인정해 주고 실패하면 그 액수를 전액 투자, 그 사업과 관련된 연구소를 설립, 그 성에 희사키로 했다는 것이다. 귀국해서 확인해 보니 이미 자금이 투자됐고 연 말경에는 그 사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웃기는 짱꿜라에게 당하고 또 당하는 멋쟁이 한국인들 아닌가?
지난 여름 베이징에 상주하는 대학 후배가 서울에 왔다. 2병의 소주가 비워질 때 그 후배는 "선배님 옛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요새도 당하기는 마찬가집니다."라며 그 잘 나간다는 테헤란로의 젊은이들이 당한 사례를 털어놨다. 당하고 망한 이의 나이가 10세 이상 젊어졌고 분야도 IT 관련 사업으로 세련(?)된 것이었지만 어처구니 없기는 마찬가지 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인의 친인척으로 알려진 젊은 이들이 중국 공산당 최고위급 간부와 선을 대려고 투자한 돈은 무려 60여억원이 넘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사업을 위해 다시 굵은 선을 대 보려고 안달이란다.
돈의 액수나 당한 과정 보다 더 큰 문제는 중국 정부가 현재까지는 외국인에게 그 사업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방침이고 나아가 중국의 광활한 영토, 인터넷 인프라등을 고려할 때 개방을 해도 수익성을 장담하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한사람이 한병만 하자는 약속은 결국 어처구니 없어 한병, 울화가 치밀어 1병, 그래도 중국밖에 없으니 비싼 수강료라고 치부하자고 한병등 두꺼비 5마리를 합장하고 말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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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