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11
유대 랍비가 좋은 일 한 번 해 보고자 큰맘을 먹고 조폭 한 사람을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정성을 다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조폭을 불러다 대접을 하니까 조폭이 으아 해 여기면서 아주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랍비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도 주시고 날마다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 모두는 받고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조폭이 음식을 먹다 말고 우락부락한 얼굴로 랍비를 쳐다보며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총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랍비는 ‘아닙니다. 당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니까 ‘글세요 나같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뭔지도 모른다고요’라고 하며 음식을 먹다 말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랍비가 화가 낫습니다. ‘너 같은 놈은 대접할 필요가 없다. 얻어먹는 주제가 조용히 먹을 것이지. 너 같은 놈은 음식도 아깝다. 나가라!’고 하니까 ‘알았다’고 하며 조폭은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모처럼 한번 좋은 일 하려다가 오히려 화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나는 그 사람을 50년이나 먹을 것을 주었는데 너는 그 사람에게 밥 한 그릇도 먹일 수가 없더냐’라고 책망을 하시더랍니다.
오늘 본문에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사랑이 어디까지입니까? 절망도 없고 낙심도 없는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위대한 참사랑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결혼하고 서약하고 맹세도 합니다만 얼마 못가서 깨어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조금만 뒤틀리면 언제 그랬더냐는 식으로 근방 돌아서 버립니다. 옛날 어른들은 한번 맺은 사랑은 변치않고 지켰습니다. 결혼하고 몇 달도 안되어 남편은 군 입대하여 돌아오지 않고 전사해도 유복자 아들 하나를 위해 끝까지 사랑을 지키며 일생을 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몇 시간 후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었습니다. 날이 새기 전에 잡혀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 도망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인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룟 유다는 이미 대제사장과 짜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사랑이 여기서 깨어지면 앞서 랍비와 같이 그동안 수고한 모든 것은 다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패합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되면 사랑은 거짓일 뿐이고 그동안 사랑했던 모든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제자들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이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없는 세상에 제자들에게 닥쳐질 어려움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시간에 할 말이 많습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도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이 잡혀 가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다 도망치게 될 것을 아셨다면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왜 없겠습니까? 제자들을 나무라시고 ‘도망치지 말라’고 당부하시고, 베드로에게는 특별히 부인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는 ‘나쁜 녀석 같으니, 내가 너를 믿고 3년간이나 재정을 맡겼는데’라고 무섭게 눈을 치켜들고 책망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녁 먹는 중에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 주었습니다(3-5).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중심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사랑을 많이 노래하고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왜 사랑이 오래 가지를 못하고 깨어집니까? 사랑이 깨어지면 사랑하지 않았던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이 어떤 것 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이 말씀에서 사랑은 주는 것인지, 받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되 ...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을 받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받으려고 하는 사랑을 받지 못하니까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는 사랑일 때 문제는 없습니다.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때 사랑의 중심은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사랑이였다면 제자들에게 ‘이제 몇 시간 후면 나는 잡혀 끌려가 십자가를 질 것이다’고 하시며 ‘너희들은 흩어지지 말고 똘똘 뭉쳐 힘을 합쳐야 한다’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든지, ‘그동안 가르쳐 준 말씀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죽도록 복음을 전하라’는 등의 말씀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제자 중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끌려가실 때 예루살렘에 여자들이 울며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여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는 예수님이 애처로워 울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생각지 않으시고 울며 따라오는 여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정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사람’이란 세상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불러 세운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이 죽는 것보다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컷습니다.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어 주시면서도 왜 할 말이 없겠습니까? 시기 질투 많은 제자들에게 한 마디씩 책망을 하실 수 있을 법도 하지만 한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발을 씻지도 않고 만찬상에 앉았더냐’는 가벼운 책망이라도 하실 수가 있지만 그런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부친이 세상을 떠나시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모친과 함께 그 밤을 지낼 때 몇 마디 말씀을 하시고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시더니만 그 눈에 눈물이 주루루 흐르는 것을 제가 화장지로 닦아 드렸습니다. 그 이후 시력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흘린 그 눈물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타내 보여준 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눈물은 마지막 아버지의 사랑의 눈물이였으며 그 눈물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였습니다.
누구의 발을 먼저 씻어 주셨을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어떤 주석가는 가룟 유다의 발부터 씻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가룟 유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이미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의논하고 와서 성만찬을 먹었습니다. 이런 가룟 유다의 발을 씻어 주실 때도 전혀 나무라시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참으로 궁금합니다. 무슨 맘으로 예수님 앞에 발을 내어 밀었을까? 이처럼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은 자신을 팔아넘기려고 하는 가룟 유다의 발도 씻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죽음으로 팔아버리는 반역자의 발도 씻어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팔아넘길 배신자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이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어 주시는 것에 대해 한 마디 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6)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미천함을 알고 있었고 또 주님께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제자들이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라고 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발을 씻어주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를 지금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 때가 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교육 방법입니다. 지금은 알지 못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모가 철없는 자녀들에게 ‘너도 부모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부모님의 수고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됩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낮아지신 것입니다. 낮아지지 않고는 끝까지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주가 되시면서 종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낮아져야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버려야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끝까지 사랑하지를 못합니까?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낮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마음을 비워야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가 자리 잡고, 욕심이 있다면 가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단점을 보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점만 보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장단점이 다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안좋은 점이 보이면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단점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도망갈 것들로 보지 않았습니다. 부인하는 베드로를 본 것이 아니라 장차 죽도록 복음전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보신 것입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이 후에 알게 될 것을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코흘리개지만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받으면 이후에는 그 아이는 큰 일을 해 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먼 미래를 믿고 사랑을 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여자 축구가 세계 3위를 했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그 주역이 지소연 선수인데 그의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하고 청바지 공장에서 일하면서 남매를 키웠다고 합니다. 이제 43세의 젊은 나이지만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오직 남매를 위해 자기 몸에 병이 들 정도로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병든 몸이지만 그의 딸을 위해 노력하여 큰 선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대문 구청장이 전직원들이 모금한 돈을 전달하고 또 건강이 회복되면 구청에서 일할 수 있도록 약속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어머니로서 병들어가면서 자녀들을 위하는 그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는 언젠가는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실패하고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빈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받은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두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다가 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으로부터의 끝까지의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도 흩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제자들은 흩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위하는 제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으로 도움을 받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으로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을 받아 구원함에 이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사랑해서 많은 사람들을 축복받게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