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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1-10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같이 하시길 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참 많다. 21일은 무슨 날인 줄 아는가?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부부의 날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한 달 내내 가정의 날들을 강조하는가? 우리 사회가 별로 가정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들에게 위기가 왔다는 신호다. 가정을 더욱 든든히 돌보고, 위기에 대처하라는 사인일 것이다. 오늘 저녁에 우리 교회에서 여는 ‘색동가족 추억나누기’라는 음악회도 가정을 귀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강화하려는 행사이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어서, 곰곰이 내게 스승인 분들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이름도 잊었고, 곧 바로 카나다로 이민을 가신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기억난다. 그분은 웅변반 선생님이었다. 나는 작은 시골학교의 유일한 웅변반 학생이었다. 그래서 홀로 군 웅변대회 나갈 준비를 하고, 한 사람뿐인 학교 방송실 아나운서도 하였다.
나는 그 분에게 ‘제스처’란 영어단어를 처음 배웠다. 제스처는 웅변할 때 손짓, 몸짓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 배운 첫 제스처는 ‘여러분’이었다. 대개 연사는 말을 시작할 때 으레 ‘여러분’으로 문을 연다. 이때 오른손으로 앞에 앉은 사람을 향해 가로 긋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웅변선생님은 아주 특별한 제스처를 가르쳐 주셨다. 두 손으로 가슴에서 밖을 향해 살짝 꽃을 피우듯이 펼치는 것이었다.
새벽마다 그 분의 자취방에 가서 수 없이 ‘여러분’을 배웠다. 방법은 아주 쉬웠다. 그냥 선생님이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되었다. 나는 그 선생님을 통해 ‘공식적으로 말하기’에 입문(入門)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내게 ‘여러분’을 가르쳐준 그 선생님은 내게 세상을 향해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셈이다.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목자비유이다. 앞부분은 양의 문으로서 목자, 뒷부분은 선한 목자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목자 되신 자기 자신을 “나는 양의 문이라”(7)고 하신다. 문은 드나드는 입구이며, 출구이다. 마치 양들이 자기 목자의 문으로 드나들어야 안전하게 보호를 받듯이,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라는 분에게 ‘입문’한 이들이요, 늘 그 문으로 함께 다녀야 할 ‘동문’(同門)이다.
1) 문으로 들어가라
예로부터 문은 중요한 상징이다. 문은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정문을 보면 이 집이 무엇을 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어떤 문은 문턱이 높기도 하고, 어떤 문은 사람을 유혹하기도 한다. 어떤 문은 항상 굳게 닫혀 있고, 어떤 문은 있으나 마나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있다.
성경에서 문은 안과 밖, 어제와 오늘, 성과 속,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나 지옥에도 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래전부터 유럽의 성당들은 교회의 입구를 온갖 천국의 상징물로 장식하였다. 그 문에 최후의 심판을 조각하기도 하고, 에덴의 정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대개 베드로는 열쇠를 지닌 천국문의 문지기였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 어느 문을 드나드느냐는 문제는 인생에서 중요하다. 나는 지금 어디를 드나들고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것이 인생을 판단 짓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 자신이 문의 역할을 한다. 자녀들은 부모라는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세상과 소통한다. 내 자녀들은 부모라는 문을 통해 세상에 나왔고, 엄마라는 문을 통해 처음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은 커서 자기를 이 세상에 등장시킨 부모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가 부모를 원망했듯이, 스승을 탓 했듯이 그 문이 등용문인지, 개선문인지, 황금문인지 아니면 그 정반대의 문들인지 따져 볼 것이다.
세상의 문들과 달리, 우리는 내 자녀들을 구원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가 먼저 그 문을 사랑함으로써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사실 인생의 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누구에게는 항상 행운처럼 열려있는 듯하나, 누구에게는 언제나 운명처럼 닫혀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탈무드). 당장 내 앞의 문이 닫혀 있어도 절망하지 마라. 예수님은 닫힌 문에 좌절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2) 양은 참 목자를 따른다
짐승마다 몰고 가는 방법이 다르다. 소는 뒤에서 ‘이랴 이랴’ 하면서 몬다. 말은 옆에서 몰고 가야한다. 뒷발질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은 앞에서 이끌고 가야 한다.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낱 짐승이어도 억지로 몰고 갈 수는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목소리만으로 인도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채찍을 휘두른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마을과 들에서 양을 치는 방식이 달랐다. 마을에는 공동 관리하는 양우리가 있다. 그래서 낮에는 목자들이 각자 돌보며 방목하다가, 밤에는 한 군데에 불러들여 공동우리에 함께 모아 둔다. 당번 목자가 밤새 지켜 주다가, 아침에는 모든 목자들이 와서 각자 자기 양을 추려내서 데려간다.
이 때 목자는 저 마다 자기 방식으로 양을 이끌어 간다.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고, 특이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셨다. 성경은 양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즉 게으름, 어리석음, 불순종에 대한 이미지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그럼에도 목자는 자기 양을 안다. 비록 자기 양이 미련하여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그 목자는 사지를 헤매며 그 양을 찾는다. 길 잃은 양을 구하려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눅 15:4)닌다.
목자가 양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또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 양에 대해 완벽하게 아는 이는 자기 목자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신다. 우리의 게으름, 어리석음, 불순종을 아신다. 목자가 양을 아는 것은 깊은 관계성에 의한다.
양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가 있는데 긍정적이다. 즉 순결, 희생, 순종의 이미지이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 오죽하면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어린 양의 피로 설명하셨는가?
그러나 세상에는 악한 목자도 있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
에스겔 34장은 이러한 도둑과 강도와 같은 악한 목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악한 목자는 살진 양을 잡아서 그 기름을 먹고, 그 털을 입으면서도 자기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않는다. 그 악한 목자는 연약한 양을 배불리 먹이지 않고, 병든 양을 고치지 않고, 상처 받은 양을 싸매어 주지 않고, 쫓긴 양을 돌아오게 하지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않는다. 그는 채찍과 폭력으로 양을 다스린다.(겔 34:3-4).
예수님은 세상에는 목자를 가장한 도둑과 강도도 있음을 주의하라고 하신다. 목자가 아닌 그들은 울타리의 문을 이용하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온다. 양의 생명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운다. 진리를 따르지 않고 술수를 부린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 하나님만이 나의 참 목자가 되신다. 양은 목자의 문을 기억하고, 그 문으로 다녀야 한다. 명심하라! 그 문을 통해서만 참 안전과 영원한 구원이 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는 양은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3) 예수는 양의 문이다
예수는 이 땅에서 선한 목자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나는 주님의 어린 양임을 고백하는가? 그 목자의 보호 속에 살기를 원하는가?
마을에서 사는 양과 달리 들이나 산간에서 살아가는 양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들이나 산간에는 양을 공동 관리하는 양우리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목자는 단 한사람뿐이다. 그는 자기가 머무는 곳에 임시로 돌이나 나뭇가지로 울타리를 만들어 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한 군데를 터서 문을 만든다. 그 문에 출입을 막는 문이 따로 없다. 목자 자신이 바로 문이 되는 것이다. 목자는 문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누워서 잠을 자면서, 밤새 그 문으로 양들의 출입을 막는다. 울타리 안의 자기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방패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는 양의 문이라”는 비유는 이런 의미이다. 나를 문으로 삼으라는 말씀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궁극적으로 예수는 목자의 자리, 그 문의 위치에서 내려와 죽임당할 어린 양이 되셨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평생 많은 문들을 통과한다. 단순한 출입문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의 문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지나온 문들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기도 하였고, 불행으로 몰아가기도 하였다. 자랑스러운 문이 있는가 하면, 수치스러운 문도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명문(名門)과 동문(同門)을 자랑하는가? 그러나 이 문은 잠시 나를 이롭게 할 수도 있고, 어렵게 만들 수는 있지만 결코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는 대단히 역설적이다. 예수님이란 문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선택하는데 별로 매력적이지 않고, 또 드나들기에도 불편한 매우 비좁은 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사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일은 선택과 결단의 문제요, 지극히 고백적인 사건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큰문, 넓은 길을 찾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고 하신다. 오히려 아주 적은 사람이 좁은 문, 좁은 길을 찾지만 구원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누구나 이 말씀을 알아듣는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좁은 문은 예수의 문, 예수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의 길이 우리 시대의 주류를 형성하는 출세의 길이요, 성공을 보장하는 탄탄대로라고 여겨지는 순간 그 진리는 왜곡된 것이다. 사람 많은 데 가지 마라. 함부로 기웃거리지 마라.
베드로는 결국 내 목자는 참 스승이셨음을 고백한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처음에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는 스승을 어리석게 여겼다. 실패와 절망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부활 이후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들의 스승이야 말로 참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 이후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강조한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예수님은 우리의 문이시다. 우리는 스스로 양의 문이 되시고, 마침내 어린 양이 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 23:4) 죽음까지 동행하시는 그 사랑을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산다.
예수님은 우리를 언제나 부르신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언제나 양의 문이 되신 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