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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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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방 하나 들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땐 앞으로 놓인 날들이 정말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4년 동안 몰두했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과목들을 하나씩 맞닥뜨릴 때 느끼는 갑갑함은 지금도 꿈에서 한 번씩 마주하곤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저와 같은 분들께 해드리고 싶은 말은 ‘절대로 갈 수 없는 길이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힘든 순간은 합격증을 받는 기쁨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작년 12월 16일 서울 모 의·치의학전문대학원(이하 ‘의전원’) 전문학원 게시판에 올라온 합격자 수기 중 일부다. 지난 1월 12일 1차 등록이 마감되면서 2009학년도 의전원 입시 일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번 입시는 특히 수험생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전년도에 비해 신입생 선발 인원이 2배 가까이 증가했고 입학시험에 해당하는 의·치의학교육입문검사(MEET·DEET) 문항 수와 시험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원 방식도 바뀌어 수시·정시 각 한 곳씩 지원할 수 있었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수시와 정시 가·나군 등 응시 기회가 3회로 늘었다.
폐해 1 의전원 준비 코스로 전락한 이공계열
생물·생명공학 전공 인기 왜 치솟나 했더니…
의전원 시험서 생물 비중 높아… 관련학과 쏠림 지원 극심
전공 공부는 뒷전, 2학년만 되면 대부분 시험준비 올인
서울 소재 사립대인 A대학 자연과학계열은 생명과학·물리학·수학·화학 등의 세부 전공으로 나뉜다. 신입생 모집단계에서 200명을 한꺼번에 뽑아 2학년 올라갈 때 각자의 전공을 정하도록 하는 구조다. 이 대학은 1학년생 전원을 대상으로 세미나 과목을 개설하고 있다. 15명 내외가 한 반이 돼 학기 내내 각각의 세부 전공에 대한 정보를 습득, 자신에게 맞는 전공을 결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2~3년 전부터 극심한 ‘전공 쏠림 현상’이 나타났다. 다른 분야를 제치고 생명과학 전공의 인기가 치솟고 있는 것. 2007~2008년 4학기 동안 전공결정 세미나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한 교수는 “매 학기 수강생의 70% 정도가 생명과학 전공을 택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트렌드에 따라 특정 전공의 인기가 부침을 겪는 현상이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최근 생명과학 전공의 인기는 원인이 다른 데 있어 씁쓸하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다른 원인’이 바로 의·치의학전문대학원(이하 ‘의전원’)이다.
의전원 수시합격 절반이 생물학과 출신
이공계 출신 합격자 매년 늘어 90% 육박
학부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의전원 전형요소는 크게 학부성적(GPA)과 공인영어시험 성적, 의·치의학교육입문검사(MEET·DEET)로 나뉜다. 이 중 가장 변별력이 높은 건 의·치의학교육입문검사다. 시험 과목은 언어추론(40문항)과 자연과학추론Ⅰ(생물, 40문항), 자연과학추론Ⅱ(화학·물리·유기화학·통계, 45문항). 언뜻 봐도 생물 과목의 비중이 높다. 의전원 체제로 인해 상당수 의대가 사라진 상황에서 의사를 꿈꾸는 수험생들이 생물학이나 생명과학 쪽으로 몰리는 이유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일부 대학에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2009학년도 고려대 생명공학부 수시2 전형 경쟁률은 29.7 대 1을 기록했다. 건국대도 화학생물 전공과 특성화학부 수시2-2 전형에서 전년도에 비해 3배 이상 많은 학생이 몰렸다. 지난해 12월 의전원 입시전문학원 PMS가 전국 19개 의전원 수시모집 합격생 269명을 분석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전체 응답자 중 48.6%가 생물학과 출신이었다.
당초 의전원은 ‘의대를 졸업하지 않아도 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의사와 거리가 먼 듯한 인문사회계열 전공자도 얼마든지 의사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가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밋빛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과학기술부)가 당시 국회 교육위원회 이경숙 의원에게 제출한 ‘의·치의학전문대학원 재학생의 출신 전공별 현황’에 따르면 이공계 전공자 비중은 2005년 86.5%에서 2006년 88.4%, 2007년 89%로 매년 증가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선 카이스트(KAIST)의 졸업생 수 대비 의전원 입학 비율(7.73%)이 국내 대학 중 1위라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김영진 민주당 의원). 2005년 이후 4년간 카이스트 학부 졸업생은 2150명. 이 중 166명이 국내 의전원에 입학한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입학생 수의 추이다. 2005년 31명이었던 의전원 입학생은 2006년 35명, 2007년 49명, 2008년 50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세계 최고의 이공계 인재 배출’을 위해 막대한 국가예산을 들여 운영되는 카이스트도 ‘의전원’의 마력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의전원과 무관한 강의는 학생 없어 폐강 사태
4학년은 아예 휴학하고 입시학원 다니기도
더 큰 문제는 대학 학사운영의 파행이다. B대학 생명공학 전공의 경우 3~4년 전부터 커트라인이 높아지며 우수 인재들이 대거 몰려왔지만 정작 해당 학과 교수들은 시큰둥하다. 이들 대부분이 의전원 진학의 예비단계로 전공을 인식, 학과 공부에 매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2학년만 되면 본격적으로 의전원 시험 준비에 돌입하는 학생들이 속출한다. 이들은 3학년쯤 되면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고, 4학년 땐 아예 휴학한 후 학원 수업에 올인한다. 그러다 보니 3~4학년이 주로 듣는 전공심화과목은 학생이 안 모여 폐강되기 일쑤다. 식물관련 과목 등 의전원 시험과 별 상관이 없는 강좌는 아예 개설조차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C대학 이모 교수는 지난해 황당한 일을 겪었다. 2학기 때 개설한 면역학 수업 종강을 불과 한 달여 남겨놓고 수강생 일부가 우르르 해당 과목을 철회해버린 것이다. “11월에 의전원 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었어요. 시험에 떨어진 애들이 바로 휴학을 결정하고 학원으로 가버린 거죠. 공교롭게도 의전원 진학을 노리는 학생이 성적도 우수하거든요. 상대평가를 원칙으로 하다 보니 남아 있는 학생들이 엉겁결에 좋은 평가를 받게 됐어요. 교수 입장에선 제대로 된 평가를 못하게 된 셈이에요.”
성적순으로 전공 선택권이 주어지다 보니 정작 기초과학 분야에 관심 있는 학생이 성적에서 밀려 해당 전공을 공부하지 못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공계열 학과는 일반대학원의 수준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학부 졸업 후 계속 공부할 생각이 있는 학생들이 일반대학원에 남고, 이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연구에 임하느냐에 따라 해당 학과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성적 상위권 학생은 대부분 의전원 진학
전공 고수해 대학원 가면 ‘2군’ 취급하며 무시
그러나 최근 각 대학의 일반대학원 운영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 교수는 “작년에 데리고 있던 대학원생 4명 중 3명이 의전원 진학 준비를 이유로 학교를 떠났다”고 말했다. “일반대학원 공부와 의전원 준비를 동시에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막연히 생각했다가 그게 힘들다는 걸 알고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그의 귀띔이다.
국내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세포생물학이나 분자생물학과 같이 의전원 진학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과목은 자연대·공대·문과대 할 것 없이 수강신청기간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이에 학교 측은 해당 강좌를 복수로 개설하고 반별 정원을 최대로 늘리는 등 학생들 편의를 돕고 있다.
이현숙 서울대 분자생물학과 교수는 “생명공학이나 화학전공 학생의 70% 가량은 되든 안 되든 의전원 진학을 염두에 두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의전원만 고집하는 학생을 억지로 막을 순 없는 것 아니냐”면서도 “대부분 성적 우수자인 의전원 지망생들이 학교에 남으려는 동기들을 ‘2군’ 취급하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정말 잘못된 현상”이라고 비판했다. ‘순수한 학문탐구 열정’이 ‘무능력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으로 몰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이공계 기피현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작용 많지만 인재 유치할 기회” 일부는 아예 의전원 준비과정 개설
대학 입장에서 의전원의 인기는 이를테면 ‘양날의 검’이다. 자연과학계열 등 기존 일부 학과의 학사운영 측면에선 부작용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의 의전원 진학을 말릴 수도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실적이 중시되는 대학 사회에서 ‘○○대학 졸업생 중 의전원 진학 ○○명’처럼 매력적인 구호는 없다. 이 때문에 대학들은 한편으론 의전원 진학 열기를 우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이를 교묘하게 학교 홍보에 활용하는 등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희대 국제캠퍼스는 지난해 초 ‘동서의과학부’를 신설해 의전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프리메디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숙명여대는 ‘의학전문대학원예비과정’이란 연계전공을 만들어 복수전공을 선택하면 관련 학위를 수여한다. 이화여대는 지난해부터 스크린튼대학 내에 ‘프리메드’란 이름의 의전원 준비과정을 마련했다. 인하대는 2007학년도부터 ‘기초의과학부’란 독립학부과정을 운영 중이다. 덕성여대도 2009학년도부터 ‘프리팜메드’ 전공을 신설했다. 동아대 생명자원과학대학은 의전원 진학을 목표로 하는 재학생을 대상으로 스터디 그룹을 운영하기도 한다.
대학들의 이런 움직임을 바라보는 시각은 양 극단으로 나뉜다. 박제남 인하대 입학처장(수학과 교수)은 “의전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의 수요가 있는 한 학교가 적극적으로 이를 지원해줄 책임이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신희영 서울대 교무부학장(의대 교수)은 “프리메드(Pre-Med) 과정이 안정적으로 정착된 미국과 달리 우리 대학들은 지나치게 입시 위주로 해당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