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비행처럼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일도 드물 것이다. 밴쿠버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걸리는 시간은 이륙 후 11 시간 4 분이다. 밴쿠버로 돌아올 때 걸리는 시간은 약 두 시간이 짧다. 그러나 밤 비행기이기 때문에 피곤한 건 더하다.
항로는 태평양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가는 게 아니라 대부분 해안선을 따라 이동한다. 밴쿠버를 출발한 비행기는 캐나다 서부 해안선을 따라 알래스카 내륙까지 올라간 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육지(비상 착륙할 수 있는 공항)간 최단거리 코스를 찾아 북극해의 베링 해협을 건너간다. 러시아 영내로 들어간 비행기는 사이베리아 상공을 한참 비행하다가 캄챠카 반도 부근에서 방향을 틀어 남진하기 시작한다. 사할린을 거쳐 일본 열도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울릉도 강릉 원주 상공을 지나 인천에 도착하게 된다.
나는 이날 졸지에 밴쿠버 국제공항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느닷없이 나를 페이지하는 구내방송이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진 것이다. "대한항공 072 편으로 인천으로 출발하시는 강현 손님께서는 지금 곧 64 번 탑승구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좀 황당한 기분으로 탑승구로 가 보니 누군가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셀을 꺼놓고 다시 켜는 걸 깜빡한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고국을 방문하는 북미교포들이라면 이 지겨운 장거리 비행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모면하기 위해 상위클래스를 이용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위 클래스 티켓을 확보해 보려고 여러모로 해골을 굴리기 시작하지만 돈 들이지 않고 그 티켓을 확보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석 할인요금보다 무려 세 배에서 여덟 배가 비싼 요금을 자기 돈으로 지불하고 상위클래스를 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 공무출장 같은 것으로 누가 대신 항공권을 사 준 경우 아니면, 마일리지로 승급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북미노선의 경우 6 만 마일을 공제하면 일반석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승급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따라붙는다. 우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일반석 티켓이 어떤 등급인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일반석이라고 다 같은 일반석이 아니다. 일반석 티켓에는 Y, B, H, L, N, Q, V, X, G, S-SEE3M 등 열 가지 등급이 있다. 마일리지를 공제하고 차상위 클래스로 올라갈 수 있는 일반석 등급은 Y 클래스뿐이다.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에서 내려서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데 이런 것이 눈에 띠었다. 홍콩에서 캐나다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 탑승구 안내문이다. 직항으로 약 16 시간 정도를 날아가야 하는 머나먼 거리다. 마음이 짠 해진다. 불쌍한 승객들......
만일 당신이 사용기간이나 출발일 변경 등에 제약 조건이 따라붙어 있는 할인 티켓을 가지고 있다면 마일리지 공제 외에도 수 백 불 이상의 차액을 별도로 지불해야 차상위 클래스로의 승급이 가능하다. 그것도 우선순위인 Y 클래스의 승급희망자가 모두 승급하고 좌석이 남아 있어야 당신 차례가 돌아온다. 게다가 승급희망자가 줄을 서 있고 쟁쟁한 마일리지 고수 역시 많기로 유명한 북미노선에서 할인티켓을 가지고 승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교통수단에서는 별로 부각되지 않는 일반석과 상위 클래스의 차이가 왜 유독 비행기에서는 크게 드러나고 승객들은 좀 무리를 해서라도 상위 클래스를 타고 가려고 애를 쓰는 걸까?
비즈니스 클라스 Cocoon Seat. 캐나다 교포들 이런 좌석에 앉아 한국가고 싶다고? 5 천 불 내!
내가 보기에 비행기처럼 중세기적 신분제도가 철저하게 유지되고 있는 곳도 드물다. 우선 비즈니스 클래스와 퍼스트 클래스 승객들은 수속과 탑승과정에서 줄을 설 일이 별로 없다. 그들은 수속도 별도로 하고 탑승진행순서에도 구애 받지 않는다. 그들은 열외다. 아무 때나 탑승했다가 내릴 때는 가장 먼저 내린다. 그들만의 전용 카운터와 전용 보딩브리지가 따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위 클래스의 탑승객들은 대개 출발 직전까지 항공사별로 공항에 따로 마련된 전용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출발 시간이 임박해서야 하나 둘 씩 탑승구에 모습을 나타난다. 라운지에는 인터넷, 마사지, 샤워시설은 물론이고 뷔페와 수면실까지 마련돼 있다.
대한항공의 일등석 코즈모 슬리퍼. 이 사진은 내가 찍은 게 아니라 대한항공에서 가져왔다. 이 좌석의 북미노선 왕복은 만 불이 넘는다. 뭐셔? 비행기 표가 만 불? 지금 장난하냐.
역시 상위 클래스의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는 드넓은 좌석이다. 현재 밴쿠버 인천구간은 대한항공 에어캐나다 모두 신기재 장착 항공기를 운용한다. Cocoon Seat 란 모든 좌석이 번데기 안에 들어있는 애벌레처럼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Cocoon Seat 의 장점은 앞 좌석과 뒷좌석의 구애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옆 사람이 보기 싫다면 스크린을 꺼내 가리면 된다. 좌석은 170 도까지 펼쳐진다. 이 정도라면 침대나 다름없다. 침대에 누워서 이불(담요가 아니다)을 뒤집어 쓰고 22 인치 모니터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가던지 한 숨 푹 자던지 하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타이항공 인천 방콕 노선 비즈니스석의 전채요리는 참깨를 둘러 싼 알래스카 산 스모크 새먼. 네 가지 중 하나를 고르는 메인요리 중 내가 선택한 것은 양고기 스테이크.
두 번째 매력 포인트는 기내식이다. 일반석의 기내식은 보통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도록 되어 있지만 상위 클래스에서는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메뉴판이 제공되고 승무원들이 주문을 받기 시작한다. 식사시간이 되면 에이프런이 제공됨과 동시에 식탁보가 깔리고 전채요리 메인요리 디저트 순으로 서브가 진행된다. 도자기나 크리스탈 잔 등 제대로 구색을 갖춘 식기가 사용된다.
일반석의 경우 아침식사 시간이 되면 일제히 기내의 불이 켜지며 승객들의 기상을 유도한다. 그러나 비즈니스 클래스에서는 소등상태에서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일일이 승객들에게 아침식사 여부를 타진한다. 방콕에서 인천으로 가는 타이항공 656 편에서는 불과 20 명 정도가 탑승하고 있는 비즈니스 클래스에 무려 네 명의 전용 승무원이 쉴새 없이 돌아다니며 승객들을 살피고 있었다.
태국 치앙마이 국제공항의 국제선 출발 대합실. 공항이라기 보다는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조심하기 바란다. 한 번 상위클래스를 이용해 본 다음부터는 일반석으로 여행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해외여행의 소중한 기쁨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매번 태평양을 건너 갈 때마다 비행기 티켓 값으로 5 천 불 가량을 지불할 요량이 아니라면 이 마약과 같은 승급 기회를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식사시간. 우리 비행기는 지금 제주도 상공을 날고 있단다. 끝없이 펼쳐진 운평선 위로 아침해가 떠 오르고 있다.
차라리 상위클래스 부럽지 않은 일반석 좌석 찾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www.seatguru.com 에 들어가 직접 좌석을 분석하고 고르는 방법도 있고, 만석이 아니라면 옆자리가 비어있는 좌석을 확보하는 노력을 해 보는 것도 좋다. 옆자리가 비게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좌석은 중간열의 복도 쪽 좌석이다. 나의 경우 이런 노력이 실패한 경험이 별로 없다.
아니면 좀 일찍 공항에 도착해 카운터에서 이렇게 이야기 해보자. “나는 영어와 한국어 2 개 국어에 능통하고 CPR과 First Aid 도 할 줄 알며 비상시에는 승객뿐 아니라 기장님을 제외한 승무원 전원을 먼저 대피시킨 후 내가 탈출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비상구 복도 쪽 좌석을 부탁합니다” 그러면 카운터 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비상구 복도 쪽 좌석을 줄지도 모른다. 비상구 복도 쪽 좌석은 일반석 중 유일하게 두 다리를 쭉 뻗고 지낼 수 있는 자리다.
이민살이를 하면 장거리 비행기타기는 싫어도 숙명이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자.